1917년 10월, 스몰니에서 물러난 레닌을 자기 아파트에 재웠다. 현관문에 사슬과 자물쇠를 모두 채우고 장전한 리볼버 두 정을 곁에 둔 채, 그는 레닌이 잠들었는지 확인하려고 밤새 소파에서 졸았다. 그러나 레닌은 자는 척하던 그를 피해 살며시 일어나 책상에 앉았고, 날이 샐 무렵 유명한 토지에 관한 포고령 초고를 주머니에서 꺼내 낭독했다. 본치-브루예비치는 "사회주의 혁명의 첫날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로 아침을 열었다.
레닌의 사실상 개인비서이자 초대 인민위원회 사무국장(1917~20)으로서 소비에트 행정기구의 기초를 닦았다. 러시아 종파운동의 민족지학자로서 1919년 양심적 병역거부를 합법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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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1892콘스탄티노프 측량학교 입학, 학생운동으로 제적 후 쿠르스크 측량학교 졸업
1895–1903RSDLP 입당, 모스크바 노동자동맹 활동, 1896년 스위스 망명, 「이스크라」 협력, 두호보르 교도 캐나다 이주 조직
1903–1905RSDLP 중앙위원회 원정대 책임자(제네바), 당 중앙기록보관소 설립 참여
1905–1912러시아 귀환, 「노바야 지즌」·「나샤 미슬」 편집, 1908년부터 출판사 「지즌 이 즈나니예」 경영, 1912년 「프라우다」 편집위원
1917.3–10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스몰니-타브리다 구역 사령관
1917–1920인민위원회의 사무국장(우프라블랴유쉬치 델라미) — 소비에트 행정기구 구축, 수도를 모스크바로 이전 집행
1919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 면제에 관한 법령 초안 주도
1920–1929과학·저술 활동 전념, 모스크바 근교 실험 국영농장 「레스니예 폴랴니」 운영
1922년 12월 30일, 제1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의 개회를 선언했다 — 소련이라는 국가의 탄생을 공식화한 순간이었다.
1898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모스크바대학에서 제적된 후 파리에서 전기공학을 배우고 벨기에 노동당에서 활동했다. 이스크라 요원으로 세 혁명을 관통했고, 10월 혁명기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이자 모소베트 의장을 지냈다. KOMZET 위원장으로 유대인 자치주 비로비잔 실험을, 북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북방 소수민족 정책을 설계했다.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바쿠 코뮌 붕괴 직전, 동료의 아내가 먼저 피하라 권하자 샤우먄은 답했다. "노동자들이 나에게 뭐라 하겠는가? 맨 먼저 도망치는 건 나에게 수치다."
아르메니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이자 캅카스 볼셰비키의 지도자. 티플리스 상인 집안 출신으로 리가 공대와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했고, 1899년 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했다. 「공산당 선언」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고 문학비평을 개척했으며, 1912년 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18년 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바쿠 코뮌'을 이끌었고, 민족문제를 두고 레닌과 편지 논쟁을 벌인 대표적 이론가였다. 1918년 9월 26인의 바쿠 인민위원들과 함께 총살당해 소비에트 순교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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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티플리스 실과학교 졸업, 리가 공과대학 입학
1899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1900–1902RSDLP 입당, 리가 공대 퇴학,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창립
1902–1905베를린 대학 철학부, 「공산당 선언」 아르메니아어 번역, 제네바에서 레닌과 첫 만남
1906–1914RSDLP 4차·5차 대회 대의원, 바쿠 지하신문 편집, 카프카스 연합위원회 지도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 승인
1917.03–1917.05바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초대 의장
1917.11–1918.04바쿠 소비에트 집행위 의장, 레닌이 캅카스 특별 전권위원으로 임명
1917년 11월, 리코프는 정권이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를 세우지 않는다는 데 반발해 카메네프·지노비예프 등과 함께 인민위원회의와 중앙위원회에서 사퇴했다. 사퇴 날짜는 11월 16일설과 17일설이 갈리고, 며칠 뒤 철회했다.
레닌 사후 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6년간 정부를 이끌며 네프 체제의 행정적 연속성을 대표한 볼셰비키 지도자이다. 내전기에는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으로 전시 경제를 총괄하고 붉은 군대의 병참을 지휘했으며, 총리로서는 부하린·톰스키와 함께 당내 '우파'의 핵심으로서 농민과의 동맹, 시장을 통한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 균형 잡힌 공업화를 주장했다. 1928-29년 곡물 조달 위기 속에서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와 급속 공업화 노선에 맞섰으나 '우파 반대파'로 낙인찍혀 1930년 총리직에서 해임되고,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처형되었으며 1988년 복권되었다.
파벨 바실리예프는 러시아 내전 말기의 크론시타트 소비에트를 이끈 볼셰비키 지방 간부였다. 그는 전쟁공산주의와 당의 통치에 반발한 수병·노동자들의 요구가 공개 충돌로 번지는 현장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대표했다. 1921년 3월 반란 세력은 그를 니콜라이 쿠즈민과 함께 체포했고, 이 사건은 혁명적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당 독점 권력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1917년 10월 혁명 소식이 민스크에 닿자 먀스니코프는 즉시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이끌었고, 소비에트 권력은 민스크에서 유혈 없이 수립되었다.
나히체반-나-도누의 아르메니아계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6년 RSDLP에 입당해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샤우먄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민스크에서 서부전선 볼셰비키를 이끌어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주도했다. 1919년 2월 벨라루스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거쳐 1921년 5월부터 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아르메니아의 국가 제도와 경제를 세웠다. 1922년부터 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과 자카프카스 당 제1서기를 지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아르메니아 문학에 관한 저작을 남겼다. 1925년 3월 22일 트빌리시 근처에서 비행기가 불타 추락해 아타르베코프, 모길렙스키와 함께 사망했으며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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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RSDLP 가입,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로 유배 — 샤우먄과 교류
1911–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졸업(1911), 군 복무 후 변호사 조수로 볼셰비키 언론에 기고
1937년 6월 27일, 자신을 축출한 바로 그 중앙위원회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직무 수행 중 체포되었다.
14세에 공장 노동자로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인 술리모프는 우랄 당 기구에서 성장하여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1930~1937)으로서 첫 두 차례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화국의 산업화를 총괄했다. 중앙위원회 위원(1923~1937)이자 조직국 위원(1927~1930)으로서,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중 가장 높은 정부 자리까지 오른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정치적 불충성 비판 직후 체포되었고, 파괴활동·간첩·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1월 27일 처형되었다. 1956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1934~1937년에는 체르케스크 시가 그의 이름을 따 술리모프로 불렸다.
1932년 6월 추바리는 "모든 마을에서 수만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갔다"며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그를 두고 "추바리는 착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받을 몫보다 더 받았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 페도리우카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난 경제행정가로, 190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23년부터 11년간 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내며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1932년 6월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기근 실태를 보고하고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와 1932~33년 기근의 집행 책임도 함께 지며, 2010년 키예프 항소법원은 그를 홀로도모르 조직자 중 한 명으로 판시했다. 1935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으나 1938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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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 1907페도리우카(예카테리노슬라프주) 빈농 가정에서 출생, 제정 노동자구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16세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911–1917크라마토르스크·마리우폴·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 공장 노동자, 지하운동
1917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위원, 10월 혁명기 포병총국 정치위원
1918–1923국가기계제작공장연합(ГОМЗа) 이사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우크라이나 산업복구 조직국 의장
1921–1923우크라이나 SSR 최고경제회의 의장 겸 중앙석탄공업관리국 의장 (일부 사료는 최고경제회의 의장 재임을 1920~21년으로 기록하며, 이 연대는 출처 간에 엇갈린다)
국유은행 총재 시포프가 스몰니에 체포되어 있던 밤, 고르부노프는 "특별한 예의로서, 대단히 성가셨지만" 자신의 침대를 시포프에게 양보하고 의자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니콜라이 고르부노프는 1917년 11월부터 인민위원회의 서기 겸 레닌의 개인비서로 소비에트 정부의 초기 행정 기반을 구축한 볼셰비키 기술관료였다. 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총장(1923-1929)과 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서기(1935-1937)를 지내며 과학기술 행정의 핵심 연결고리로 활동했고,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식물탐사와 전연방 농업과학아카데미(바스흐닐) 설립을 적극 뒷받침했다. 타지키스탄 파미르 원정대(1932-1935)를 이끌어 1933년 소련 최고봉 스탈린봉(현 이스모일 소모니봉) 첫 등정을 조직했으며, 등반가 예브게니 아발라코프와 함께 정상 공격에 직접 참여했다. 대숙청기인 1938년 체포되어 '등반가 사건'으로 처형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10년간 벨라루스 공업화를 진두지휘한 정부수반, 아카데미 숙청에 서명하고 같은 심판대에 서다
1937년 6월 21일 민스크 NKVD 5층 심문실에서 '폴란드 간첩' 혐의를 받던 골로데트는 심문 도중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 공식 발표는 자살, 비공식 증언은 구타 살해 후 위장.
일곱 살부터 목동으로 일한 농민 혁명가로, 1927년부터 벨라루스 공화국 정부수반을 10년간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주도하며 공화국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바꾸어 놓고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과학아카데미 학자 추방 결의에 직접 서명한 그 자신도 1937년 '폴란드 간첩'으로 체포되어 민스크 NKVD 심문 중 투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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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15크리보이로크 광산에서 선로 수리공, 자물쇠공, 전기기사로 노동
1917남서부전선 병사위원회에서 볼셰비키 혁명 선전 활동
1918–1921RCP(b) 입당, 적위대 조직 및 독일군·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과 교전; 노보집코프현 소비에트 활동
1921–1924고르키현 집행위원회 의장, 도적 진압 트로이카 의장
1925–192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1927–1937벨라루스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공업화·집단화 주도
1930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학자 6인 추방 결의 서명
1923년 6월, 스탈린이 '범튀르크주의'라고 비난하자 리스쿨로프는 연단에서 반박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동지 스탈린이 술탄갈리예프를 혁명적 공산주의자라고 칭송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것은 정치적 편의입니다."
카자흐인 볼셰비키 혁명가로 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의 핵심 지도자였다. 중앙아시아 투르크어권 민족들이 하나의 역사적 공동체라고 주장하며 스탈린의 민족 획정에 맞섰고, 1923년 제4차 민족공화국 간부회의에서 '범튀르크주의'라는 비난을 공개 반박했다. RSFSR 인민위원회의 부의장(1926~1937)으로 투르크시브 철도와 카라간다 중공업 단지를 추진했으며, 1932~1933년 카자흐 대기근 때 스탈린에게 직서해 골로쇼킨의 강제집산화가 낳은 참상을 알리고 식량 원조를 이끌어냈다.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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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14메르케 러시아-카자흐 기숙학교 → 피슈페크 농업학교 졸업
1916–1917중앙아시아 민족해방봉기 참가, 체포; 타슈켄트 사범학교 수학; 메르케에서 카자흐 청년 혁명조직 '부하라' 창설
'침묵이 그의 비장의 카드였다. 흐루쇼프가 무언가 제안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 네, 물론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 윌리엄 토브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정부 수반을 두 차례(1938~1939, 1947~1954) 역임하고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1954~1969)으로 15년간 재임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적색 파르티잔을 조직했다. 1930년대 모스크바 바우만 구역에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인연을 맺어 측근으로 성장했고, 대숙청기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발탁되었다. 전시 파르티잔 투쟁을 조직하고 종전 후 공화국 재건을 주도했다. 흐루쇼프의 충실한 집행자로, '침묵이 그의 가장 큰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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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0적색 파르티잔 조직 · 붉은 군대 정치일꾼
1921–1928쇼스트카·체르니고프·페르보마이스크 당위원회 서기
1931–1937모스크바 바우만 구소비에트 의장 → 모스크바 주당 제2서기 → 서부 주당 제1서기
1941년 10월 10일, 스탈린은 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호흘로프를 지명했다. 「툴라와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가능한 한 오래 막아야 한다」 — 주코프, 불가닌, 호흘로프 세 사람의 이름이 모스크바 방어전의 모든 명령에 함께 새겨졌다.
모스크바 근교 구비노 마을에서 농민 아들로 태어나 열 살부터 직조공으로 일했고, 1918년 동네 청년 125명을 모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에서 싸우다 중상을 입었다. 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를 마친 뒤 모스크바 주 소비에트와 중앙소비자조합(첸트로소유스)을 거쳐 1940년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에 올랐다. 대조국전쟁이 터지자 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모스크바 방어전의 병력·군수 수송을 총괄했고, 스몰렌스크 해방과 동프로이센 공세까지 종군해 중장 계급을 받은 유일한 러시아 공화국 총리였다. 전후 다시 첸트로소유스를 이끌며 전쟁으로 파괴된 농촌 소비자 협동조합망을 복구했고, 1955년부터는 국가무역감독국장으로 물자 유통을 감독하다 1965년 퇴임했다.
1941년 서부전선. 독일 폭격기들이 모스크바로 날아가자 불가닌은 "왜 격추하지 않는 거요?"라고 소리쳤다. 지도에서 눈을 든 주코프는 "진정하시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여기서 쏘면 아군 진지가 폭격당하니 후방 부대에 맡기시오"라고 답했다.
체카에서 출발한 행정가로 모스크바 시 행정과 MELZ 공장장, 러시아연방 총리를 거쳐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1938년부터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국가은행을 맡았고, 전쟁 중에는 서부전선 등 여러 전선의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일했다. 1947년 11월 원수 계급을 받았으나 이는 열병식 사열관의 지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고, 군사 전략가가 아니라 실무형 집행자로 평가되었다. 스탈린 사후 국방장관을 거쳐 1955년 총리가 되어 흐루쇼프와 'B&K'로 불리며 유고·인도·영국을 방문했다.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어느 편에도 확실히 서지 못한 채 패배했고, 1958년 총리직과 원수 계급을 잃었다. 197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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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37체카에서 일하다 모스크바 전기신탁과 MELZ 공장장을 거쳐 모스크바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44–1947국가방위위원회와 군 행정에서 전시 관리자로 활동
1947–1949국방부 장관, 전후 군 조직 재편에 관여
1953–1955국방장관, 스탈린 사후 집단지도부의 군사 담당 축
1955–1958각료회의 의장, 흐루쇼프와 함께 말렌코프 이후 정부 운영
1957–1958반당 그룹 사태에서 어느 편에도 확실히 서지 못했고, 패배 뒤 총리직을 잃었다
부하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디드 개혁운동에서 소비에트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총리가 된 중앙아시아 혁명가
러시아 외교관 알렉산드르 바르민의 회고: 「'우즈베크의 레닌'이라 불린 호자예프는 왜소하고 마른 체구였으나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했다. 말라리아로 얼굴이 푸르스름해질 때도 있었지만, 엄청난 업무 속에서도 즐겁게 웃을 줄 알았다. 그는 자기 민족을 알았고 뛰어난 연설가였으며 깊이 사랑받았다.」
부하라의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으로, 11세에 모스크바로 유학하여 전통사회와 근대 유럽의 간극을 체험했다. 1916년 범튀르크주의 자디드 운동에 합류, 청년 부하라당을 창당했고 1918년 토후 전복 시도 실패 후 사형 선고를 받고 타슈켄트로 도피했다. 1920년 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인민나지르회의 의장이 되었고, 1924년 우즈베크 SSR 수립과 함께 초대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중앙아시아의 국가 획정과 소비에트 연방 편입을 이끌었다. 1930년대 스탈린의 목화 단작 정책에 반대하다 몰락, 1937년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총살되었다.
1939년 1월 14일, 옛 상관이 자신을 음모에 끌어들였다는 자백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다. 예조프 사건의 첫 진술은 그의 오랜 비서에게서 나왔다.
1898년 보리소글렙스크에서 태어났다. 1925년 여름 키슬로봇스크의 휴양지에서 예조프를 처음 만났고, 1926년부터 당 중앙위 기구의 기술서기로 일했다. 1930년 예조프가 중앙위 부서장이 되자 그의 비서가 되어 1936년까지 곁을 지켰으며,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부로 옮긴 뒤에는 잠시 NKVD 비서국에서 일하다 중앙위로 돌아갔다. 남편은 예조프 밑에서 내무부인민위원까지 오른 미하일 리조프였다. 예조프 몰락 뒤인 1938년 12월 17일 체포되어 베리야가 직접 심문했고, 1939년 1월 14일 심문에서는 1931년부터 반혁명 음모 조직의 일원이었으며 옛 상관이 자신을 끌어들였다고 자백하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다. 이 진술이 예조프에 대한 정치적 혐의를 쌓아 올리는 출발점이 되었다. 1940년 1월 26일 군사법정에서 반혁명 활동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아 이튿날 총살되었고, 1956년 9월 복권되었다.
1942년 5월, 독일군이 소련 깊숙이 진격한 전시의 절정에서 팜필로프는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이 되었다. 1년도 채 안 되어 심부전으로 숨질 때까지, 그는 전선 너머의 민간 행정 전체를 홀로 떠맡았다.
회계사 아들로 태어나 10대에 당에 입당한 콘스탄틴 팜필로프는 남북전쟁과 크론시타트 진압을 거쳐 소비에트 행정가로 성장했다. 모스크바 주택 관리와 러시아 공화국 공공주택 인민위원을 거쳐, 독소전 발발 직후에는 소련 대피위원회 부의장으로서 민간인 소개를 지휘했으나 당·정부 간부 가족 우선 대피로 모스크바 대혼란(1941)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 1942년 5월부터 이반 호흘로프의 후임으로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을 맡아 전시 행정을 총괄했으며, 재임 중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고, 모스크바 공공주택 아카데미는 그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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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19볼로스트 혁명위원회 의장, 두홉시나 현 소비에트 집행위 서기, 볼로스트 당위 서기, 현 법원 서기
1949년 8월 13일, 라주틴은 동료 레닌그라드 지도부와 함께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호출되어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오늘날 카자흐스탄 페트로파블롭스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을 시작했다. 콤소몰 간부를 거쳐 1937년 레닌그라드로 옮겼고, 포위전 당시 무역·공업 담당 시당 서기로 도시 보급을 책임졌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으로 재임하며 전후 도시 재건 계획, 텔레비전 방송 재개, 아브로라 순양함 기념화를 진두지휘했다. 1949년 8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동료 지도부와 함께 체포되어,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요 피고인 6인 중 하나로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10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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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5페트로파블롭스크에서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
1925–1931콤소몰 서기·노동부장 등 카자흐 자치공화국 콤소몰·교육인민위원부 간부
1931–1937레닌그라드 냉동공업대학 수학; 프룬제 구당 위원회 지도원
1937–1941레닌그라드 시당 무역부장, 식품·무역부 부장
1941–1944레닌그라드 시당 무역·공업 담당 서기, 포위전 중 도시 보급 책임
1944–1946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제1부의장
1946–1949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위원장 (사실상 시장)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8월 13일 체포, 1950년 9월 30일 사형 선고, 10월 1일 처형; 1954년 복권
사망 직전 옐친에게 '저축이 없으니 국비로 장례를 치러 달라'고 썼다. 5년간 소련 경제를 이끈 총리는 평생 방 세 칸 아파트에서 살며 월급으로 버스를 사서 학교에 기증했다.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출신의 실무형 경제 관료로, 75세에 코시긴의 뒤를 이어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다. 정치적 야심과는 거리가 먼 정직한 기술자였으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3대에 걸쳐 총리로 재임했다. 정체기 말기의 관료적 연속성을 상징했지만, 1984년에는 기업 자율과 '사회주의 시장'을 검토한 개혁위원회를 주재해 페레스트로이카 구상의 단초를 마련했다.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 직후 체르노우소프는 중앙위 조직국원과 러시아 공화국 총리직에서 동시에 해임되었다. 그의 다음 직장은 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이었다.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볼가 강변의 시즈란에서 태어나, 콤소몰 활동가로 출발해 모스크바 동력공학원을 졸업한 기술관료형 당료였다. 1939년부터 1948년까지 모스크바 주당위 제2서기로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를 보좌했고, 1949년 미하일 로디오노프가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숙청된 직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되어 스탈린 말년의 러시아 정부를 이끌었다. 1952년 19차 당대회 직후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어 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장으로 좌천되었고, 스탈린 사후에야 자동차공업부 차관으로 복귀해 고스플란과 코메콘에서 조용히 경력을 마감했다.
1979년, 70세의 그에게 관례대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가 올라갔지만 브레즈네프는 '정부와 당 중앙위 대립의 주요 인물'이라며 질질 끌었다. 코시긴이 폴리트뷰로에 직접 상정했고 티호노프와 셰르비츠키의 지지로 통과되었다.
1930년 스물한 살로 인민위원회의 기구에 들어가 1990년까지 60년간 크렘린에 몸담은, 소비에트 정부기구의 살아 있는 화신이었다. 미코얀의 보좌관으로서 전시 국가방위위원회(GKO)의 적군 보급을 담당했고, 1964년부터 25년간 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으로 코시긴·티호노프·리시코프를 보좌했다. 폴리트뷰로 위원이 아니면서도 유일하게 가장 비밀스러운 당 지도부 결정문을 받아보았고, 중앙위 부서장들도 주요 안건을 그와 조율하라는 지시를 받을 정도로 막후 실세였다. 그의 경험과 기억은 지도자가 바뀌어도 국가가 작동하게 만든 제도적 축이었다.
브레즈네프가 솔로멘체프를 러시아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하며: "러시아에는 별도 공산당이 없으니, 내가 러시아 당 조직을 직접 이끌고 자네는 러시아 연방 담당 내 대리 역할을 해주게."
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출신 기계기사로 방위공업 현장에서 시작해 1971년부터 12년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을 지내며 소련 최대 공화국의 경제를 관장했고, 브레즈네프로부터 '러시아 연방 담당 부사령탑'이라는 비공식 위임을 받은 인물이다. 1983년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이 되어 1930~50년대 탄압 희생자 재활 위원회를 이끌었으나, 1988년 9월 고르바초프의 정치국 숙청으로 전격 해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