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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지휘 · 소련 인물 217명

조건 모두 해제

안드레이 예브게니예비치 스네사레프

Андрей Евгеньевич Снесарев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 1865–1937 ○ 수용 후유증

차르 장군 출신 붉은 군대 이론가, 차리친에서 스탈린과 충돌하다

1918년 차리친에서 보로실로프에 대해 보고했다: "군대 지휘관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복무 의무에 충분히 스며들지 않았으며 부대 지휘의 기본 규칙조차 지키지 않는다." 며칠 후 그와 전 참모진은 체포되었다.

안드레이 스네사레프는 차르 군대 중장에서 붉은 군대 지휘관으로 전향한 군사 지식인이자 동양학자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단장까지 오르고 1918년 붉은 군대에 합류했으나, 차리친 방어전에서 군사 전문성을 무시하는 스탈린-보로실로프와 충돌하며 해임·체포되었다. 이후 참모총장 아카데미 원장으로 3년제 정규 교육체계를 정비하고 《전쟁철학》 등 독창적 군사이론을 개척했으며, 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 총장으로 소비에트 동양학의 토대를 닦았다. 1928년 소련 군 지도자 최초로 노동영웅이 되었으나, 1930년 '봄' 사건으로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 수용소에서 뇌졸중을 겪고 1934년 석방되어 193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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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1899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과 졸업, 모스크바 보병학교 수료,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1등 졸업
  • 1900–1913투르케스탄 군관구 참모, 파미르 분견대장, 인도·아프가니스탄 군사지리학 연구, 중앙아시아 첩보 담당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연대장·여단장·사단장·군단장, 중장 진급, 성 조지 훈장 3·4등급
  • 1918붉은 군대 입대, 북카프카스 군관구 군사지도자 — 차리친 방어전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와 충돌, 체포 후 석방
  • 1919–1921노농적군 참모총장 아카데미 원장: 3년제 정규과정 정비, 《전쟁철학》 강의 개설
  • 1921–1930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 총장·교수, 군사지리학 주임 지도관, 노동영웅 칭호(1928)
  • 1930–1937「봄」 사건으로 체포, 사형→10년형 감형, 수용소 뇌졸중, 1934년 석방, 1937년 사망, 1958년 복권

미하일 드미트리예비치 본치-브루예비치

Михаил Дмитриевич Бонч-Бруевич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 1870–1956 ○ 자연사

볼셰비키에 합류한 첫 제국군 장성으로 적군 창설을 지휘한 군사지도자

그는 훗날 회고했다. '나는 이성보다는 본능으로 볼셰비키에게 끌렸다. 러시아를 붕괴와 완전한 파멸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그들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제국 육군 소장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최초의 고위 장교로, 최고군사위원회 군사지도자(1918)와 혁명군사위원회 야전참모장(1919)을 맡아 적군의 초기 조직을 지휘했다. 독일군 총공세에 레닌의 긴급 소환을 받고 페트로그라드로 달려가 나르바-프스코프 방어선을 설정했으며, 구 제국 장교들을 군사전문가로 대거 기용하는 제도를 주도했다. 전간기에는 소련 최초의 측지국을 창설했고, 스탈린 시기 두 차례 체포되었으나 살아남아 1944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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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898콘스탄티노프 측량학교·모스크바 보병 사관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898–1913키예프 군관구 등 각 참모부 근무, 『전술교본』 개정과 응용전술 강의
  • 1914–1915제176 페레볼로첸스키 연대장으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3군·북서전선 군수참모부장, 소장 진급
  • 1915–1916북부전선 참모장 대리, 황후의 반대로 경질
  • 1917.3–9프스코프 수비대장, 코르닐로프 반란 당시 북부전선 사령관 대리로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
  • 1917.11–1918.8최고사령관 참모장 → 최고군사위원회 군사지도자, 독일군 차단 '차폐' 방어체계 구축
  • 1919.6–7혁명군사위원회 야전참모장
  • 1919–1944최고측지국 초대 국장(1919–23), 항공촬영국 조직(1925), 1931년 체포 후 석방, 사단지휘관(1937)·중장(1944) 진급

파벨 파블로비치 레베데프

Павел Павлович Лебедев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 1872–1933 ○ 자연사

차르의 소장에서 붉은 군대 첫 참모장으로, 내전 승리의 작전 설계자

1918년 3월, 전직 차르 소장이 예이스크에서 은퇴해 있을 때 레닌의 전보가 도착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모스크바로 가 붉은 군대에 입대했다.

차르 군대 소장 출신으로 1918년 레닌의 요청으로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 결정적 작전들을 설계했다. 공화국 야전참모장(1919–1921)으로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 브란겔을 상대한 모든 주요 공세를 기획했고, 1919년 10월 오룔-쿠르스크 작전으로 데니킨의 모스크바 진격을 저지했다. 1921년 붉은 군대 초대 참모장이 되어 참모 제도를 정비하고 군사아카데미 원장을 겸하며 장교 교육의 기초를 놓았다. 이후 이오나 야키르 휘하 우크라이나 군관구 참모장(1925–1928)을 지냈다. 제정 참모본부와 소비에트 군사 전문성을 이은 핵심 보옌스페츠로, 비당원이었으나 '극히 성실하고 유능한 일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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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남서부전선 작전국장, 제3군 참모장, 서부전선 병참참모장 (소장)
  • 1918–1919전러시아 총참모부 동원국장
  • 1919동부전선 참모장 겸 사령관 대행
  • 1919–1921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야전참모장
  • 1921–1924붉은 군대 참모장 (초대)
  • 1922–1924붉은 군대 군사아카데미 원장 (겸임)
  • 1925–1928우크라이나 군관구 참모장 겸 부사령관
  • 1928–1933우크라이나 군관구 부사령관

이오아킴 이오아키모비치 바체티스

Иоаким Иоакимович Вацетис
군사·지휘 소련 소련 라트비아 1873–1938 ✕ 처형

적군 최초의 총사령관, 제국군 대령에서 혁명의 군사 건설자로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반군이 모스크바 중심부를 장악했을 때, 바체티스의 라트비아 소총병들이 새벽 포격으로 그들을 제압했다. 볼셰비키 정부는 그날 아침 그에게 존속을 빚졌다.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차르의 장교가 되었고, 혁명 후에는 소비에트 공화국 최초의 전군 총사령관으로서 초대 붉은 군대의 틀을 만들었다. 1918년 7월 모스크바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을 지휘해 좌파 사회혁명당의 무장봉기를 진압함으로써 볼셰비키 정권을 위기에서 구했고, 그 직후 동부전선을 이끌며 백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비당원 군사 전문가로서 트로츠키·레닌과 긴밀히 협력했으나, 1919년 반역 혐의로 체포·해임된 이후에는 전선에서 물러나 군사학자와 교수로 활동했다. 대숙청 속에서 체포·처형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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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917차르 군대에서 복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연대장으로 종군하여 대령까지 진급
  • 1917–1810월 혁명 후 볼셰비키 편에 서서 12군 사령관,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장 역임
  • 1918.07모스크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 진압 지휘
  • 1918.07–09동부전선 사령관
  • 1918.09–1919.07RSFSR 전군 총사령관 — 붉은 군대 최초의 총사령관
  • 1919–37적군 군사 아카데미에서 교편, 1927년 교수, 1935년 2등급 군사령관
  • 1937/1957대숙청 속 체포·처형, 1957년 복권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구세프

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Гусев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 1874–1933 ○ 병사

적군 정치장치의 설계자, 트로츠키의 군사노선에 맞선 구볼셰비키

1905년 오데사, 전함 포툠킨의 반란 소식이 도시를 뒤흔들자 구세프는 레닌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 당장 권력을 장악하고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하자.

1896년 레닌의 '투쟁 동맹'에 가입하고 제2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 분파의 창립에 참여한 구볼셰비키. 1905년 혁명기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서기로 수도를 이끌었고, 내전기에는 프룬제와 함께 '군사야당'을 이론적으로 주도하며 트로츠키의 군사노선에 맞섰다. 정치총국장으로 적군의 정치위원 제도를 완성했으며, 이후 중앙통제위원회와 코민테른에서 스탈린 노선의 핵심적 제도 구축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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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가입
  • 1903제2차 당대회 대의원, 볼셰비키 분파에 합류
  • 1904–05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위원회 서기, 1905년 혁명 지도
  • 1917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사무국장
  • 1918–20동부·남부·캅카스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22적군 정치총국(PUR) 국장
  • 1925–26중앙위원회 출판부장
  • 1928–33코민테른 중앙유럽 사무국장, 집행위원회 간부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무랄로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Муралов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 1877–1937 ✕ 처형

레닌 묘역 1번 초소를 세운 혁명 군인

1928년 6월 6일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트로츠키에게 보낸 편지: "고백서를 쓰느니 차라리 사지를 찢기는 편을 택하겠다. 나 홀로 남는다 해도 쓰지 않을 것이다."

농장 그레체스키에 로티에서 태어나 17세에 농업학교로 떠났고, 1903년 포돌스크에서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에 참여한 뒤 초대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고, 내전기에는 동부전선과 제12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23년 46인 성명에 서명해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7년 제15차 당대회에서 옹호 연설을 한 뒤 제명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며, 1924년에는 레닌 묘역의 1번 초소를 창설했다. 1936년 4월 17일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체포되어 1937년 1월 30일 사형을 선고받고 2월 1일 처형되었으며, 1986년 4월 대법원이 판결을 취소하고 사후 복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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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7볼셰비키 입당, 1905년 모스크바 무장봉기 참여
  • 1917.10–1917.11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무장봉기 지도
  • 1917.11–1919.02초대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군사위원)
  • 1919동부전선 및 제12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4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재임, 1번 초소 창설
  • 1925–1927중앙통제위원회 위원,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총장
  • 1927제15차 당대회 연설 후 제명, 시베리아 유형
  • 1936–1937체포, 제2차 모스크바 재판과 처형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Лев Давидович Троцкий
군사·지휘 소련 1922년까지 러시아, 1922~1932년 소련, 1932년부터 무국적 러시아 제국(헤르손 주 야노프카, 현 우크라이나) 1879–1940 ✕ 암살 · 멕시코

적군(赤軍)을 만든 웅변가, 얼음도끼에 스러지다

1917년 10월 25일, 페트로그라드의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멘셰비키와 우파 사회혁명당 대의원들이 볼셰비키의 무장봉기에 항의해 퇴장하자, 트로츠키는 의장석에서 선언했다. 「이제 가야 할 곳으로 가시오,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1879년 11월 7일(구력 10월 26일) 러시아 제국 헤르손 주 야노프카의 유대인 농업가정에서 태어났다. 1917년 2월 혁명 후 볼셰비키에 합류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10월 봉기를 이끌었고, 외무인민위원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를 조인한 뒤 1918~1925년 군사·해군 인민위원으로 적군을 건설해 내전에서 승리했다. 1923년부터 좌익반대파를 이끌었으나 스탈린에게 밀려 1927년 출당, 1928년 알마아타 유형, 1929년 국외 추방, 1932년 시민권 박탈을 겪었다. 망명지에서 《배반당한 혁명》(1936)으로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규정하고 1938년 제4인터내셔널을 결성했다. 1940년 멕시코시티에서 NKVD 요원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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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26세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
  • 1906《결과와 전망》 출간 — 영구혁명론의 초기 정식화
  • 1907–14망명: 빈·파리에서 언론 활동, 《프라우다》 발행
  • 1914–171차대전 반대, 파리·뉴욕 망명, 《나셰 슬로보》·《노비 미르》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볼셰비키·멘셰비키 통합파
  •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에 합류
  • 1917.9–10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군사혁명위, 봉기 설계
  • 1918–25전쟁인민위원, 적군 창설, 내전 승리
  • 1923–27좌익반대파, 패배, 출당
  • 1929–40국외 추방, 제4인터내셔널(1938), 멕시코에서 암살
  • 1930자서전 《나의 생애》 출간
  • 1930–1932전3권 《러시아 혁명사》 출간
  • 1936《배반당한 혁명》 출간

드미트리 미하일로비치 카르비셰프

Дмитрий Михайлович Карбышев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 1880–1945 ✕ 고문사

나치의 회유를 거부하고 마우트하우젠에서 순교한 소련 최고의 축성공학자

나치의 회유에 대한 카르비셰프의 답변: "신념은 이빨과 함께 빠지지 않는다. 나는 군인이며 내 의무에 충실하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내전을 거친 군사공학자로, 100여 편의 논문을 통해 소련 축성학을 정립하고 프룬제 아카데미와 참모본부 아카데미에서 적군 지휘관 세대를 가르쳤다. 브레스트 요새, 스탈린 라인, 만네르하임 선 돌파 등 주요 방어·공세 작전의 공학적 기반을 설계했다. 1941년 포로가 된 후 나치는 그를 '러시아 해방군' 총사령관으로 세우려 했으나 3년 반 동안 모든 회유를 거부하고 수용소 저항운동을 이끌었으며, 1945년 2월 마우트하우젠에서 영하 12도 얼음물 고문 끝에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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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05제1동시베리아 공병대대 전신중대장, 러일전쟁 참전, 5개 훈장
  • 1908–1911니콜라옙스크 군사공학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11–1917브레스트 요새 건설, 1차대전 참전(브루실로프 공세), 중령
  • 1918–1920동부·남부전선 방어선 구축, 페레콥·촌가르 공세 공병지원
  • 1923–1934공병위원회 위원장, 프룬제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관, 스탈린 라인 설계
  • 1934–1941참모본부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수, 공병 중장(1940), 군사학 박사(1941)
  • 1941–1945포로, 나치 회유 거부, 마우트하우젠에서 순국

니콜라이 일리치 포드보이스키

Николай Ильич Подвойский
군사·지휘 소련 소련 우크라이나 1880–1948 ○ 심장마비

10월 무장봉기의 작전사령관, 혁명 뒤엔 뒷방으로

"자네, 내 고집이 얼마나 센지 알지? 내 말 잘 듣고, 나중에 안 하면 돼. 대신 전부 받아 적어." 1927년 영화 『10월』의 고증을 지도하며 예이젠시테인에게.

시골 사제의 아들로 신학교를 중퇴하고 볼셰비키에 합류한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는, 1917년 군사혁명위원회 작전트로이카를 이끌며 10월 무장봉기와 겨울궁전 습격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초대 군사인민위원이 되었으나 4개월 만에 트로츠키에게 밀려났고, 내전 시기에는 브세보부치(보편군사훈련)를 조직했다. 적성과 적기훈장의 창안자이며, 이후 스포르틴테른 의장으로 대중 체육에 헌신했다. 스탈린 시대에 철저히 주변화되었으나 숙청을 살아남아 회고록을 썼고, 61세에 모스크바 방어 참호를 자원하여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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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5RSDLP 입당·볼셰비키 합류;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물파업·소비에트 지도
  • 1906–1916망명·지하출판; 『즈베즈다』·『프라우다』 창간 참여; 중앙위 러시아국 뷰로 재무위원장
  • 1917.3–10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군사조직 책임자; 군인신문 편집; 적위대 조직
  • 1917.10VRK 작전트로이카 위원·부의장; 무장봉기·겨울궁전 습격 현장 지휘
  • 1917.11–1918.3초대 군사인민위원; 적군 편성 전러시아 콜레기야 의장
  • 1918–1919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우크라이나 군사인민위원
  • 1920–1927스포르틴테른 의장·최고체육평의회 의장 — 혁명가에서 체육행정가로
  • 1935–1948개인연금자; 회고록 집필·선전활동; 1941년 모스크바 방어 참호 자원

세묜 이바노비치 아랄로프

Семён Иванович Аралов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 1880–1969 ○ 자연사

소련 군사정보기관의 제도적 창시자

아타튀르크는 터키 독립전쟁 시기 소련의 원조에 감사하며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아랄로프의 청동상을 세우도록 직접 지시했다 — 소련 외교관으로서 이 기념비에 오른 것은 그가 유일하다.

소비에트 군사정보의 제도적 창시자로, 1918년 10월 적군 등록국(훗날 GRU)의 초대 국장에 임명되어 볼셰비키의 해외·전략정보 능력의 기초를 닦았다.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서 트로츠키와 함께 적군을 건설하는 한편 체카 창립에도 참여했다. 내전 후에는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리투아니아·터키·라트비아 주재 전권대표를 지냈고, 특히 터키 독립전쟁 시기 아타튀르크의 요청으로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소련 외교관으로는 유일하게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1937년 숙청으로 정보기관에서 축출되었으나, 60세에 제2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하여 33군 전리품부장으로 종전까지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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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RSDLP 입당, 러시아 제국군 입대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대위까지 진급
  • 1918.1모스크바 군관구 작전과장, 체카 창립 참여
  • 1918.9–1919.7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18.11–1919.6적군 등록국(GRU 전신) 초대 국장
  • 1919–1920제12군·제14군·남서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7리투아니아·터키·라트비아·중국 주재 전권대표
  • 1927–1937최고경제회의 간부, 국가보험총국장
  • 1938–1941국립문학박물관 부관장
  • 1941–194560세에 자원입대, 제33군 전리품부장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코톱스키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отовский
군사·지휘 소련 소련 몰도바 1881–1925 ✕ 살해

제정 무법자에서 소비에트 내전 영웅으로 전환한 베사라비아의 붉은 로빈 후드

1917년 5월 오데사 오페라 극장에서 '카르멘' 공연 중 사형수에서 풀려난 코톱스키가 등장하자 관객 전원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는 무대에 올라 혁명 연설을 했고, 경매에 부쳐진 그의 수갑과 족쇄는 1만 루블에 낙찰되었다.

베사라비아 출신 혁명 지휘관. 제정 시기 빈민 편의 약탈자로 명성을 쌓고, 내전에서 붉은 기병대를 이끌며 몰다비아 자치공화국 수립에 기여했다. 생전에 소비에트 민속의 전설이 되었으며 1925년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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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6베사라비아와 오데사에서 무장 강도단 지도자, 반복적 체포·탈옥; 1916년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
  • 19172월 혁명으로 사면; 루마니아 전선에서 복무,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좌익 사회혁명당 입당
  • 1918–1919티라스폴 분견대 기병대 지휘, 오데사 소비에트 공화국 방어; 오비디오폴 군사위원, 제45소총사단 제2여단장
  • 1920적기훈장 수훈, 러시아 공산당 입당; 소비에트-폴란드 전선에서 기병여단 지휘
  • 1921제17체르보노예카자크기병사단장; 마흐노·안토노프 봉기 진압 중 중상; 명예혁명무기·두 번째 적기훈장 수훈
  • 1922–1924제2기병군단장; 몰다비아 ASSR 수립 기여; 세 번째 적기훈장 수훈
  • 1924–1925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겸 우크라이나·몰다비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카메네프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Каменев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 1881–1936 ○ 심장마비

내전을 승리로 이끈 붉은 군대 총사령관

현대 전쟁에서 적의 패배는 전 전선에 걸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승리의 누적을 요구한다. 타격을 누적시킨 쪽이 승리했다.

러시아 내전 시기 붉은 군대 총사령관(1919–1924)을 지낸 세르게이 카메네프는 차르 군대의 참모 장교 출신으로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콜차크·데니킨·브란겔의 백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동부전선 사령관 시절 콜차크를 우랄 너머로 밀어낸 반격을 주도했고, 총사령관으로서 여러 전선을 연계한 공세로 소비에트 정권을 확립했으며 '지속적 타격의 누적' 교리를 내전 승리의 원리로 정식화했다. 종전 후 정치적 군사 엘리트에게 밀려나 1934년 방공국장으로 좌천되었고 1급 군사령관에 머물렀다. 1936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대숙청을 피했으나 스탈린에 의해 사후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다가 1960년대에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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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동부전선 사령관
  • 1919–1924공화국 군대 총사령관
  • 1924–1925붉은 군대 감찰관
  • 1925붉은 군대 참모총장
  • 1925–1926붉은 군대 총감찰관
  • 1926–1927붉은 군대 총국장
  • 1927–1934군사·해군 담당 부인민위원 겸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 1934–1936붉은 군대 방공국장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

Климент Ефремович Ворошилов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이견 있음) 1881–1969 ○ 자연사

스탈린의 원수, 군사적 무능을 정치적 충성으로 버티다

1937년 5월 28일, NKVD가 넘긴 붉은 군대 지휘관 26명 명단에 직접 펜으로 썼다: "예조프 동지에게. 모든 악당을 잡아들이시오. 1937년 5월 28일. K. 보로실로프." 142명 명단에는 더 짧게 "체포하라. K. V."라고 적었다.

예카테리노슬라프현의 철도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금속노동자다. 1918년 스탈린과 함께한 차리친 지휘로 스탈린 인맥의 군사적 상징이 되었고, 1925년부터 1940년까지 전쟁인민위원과 국방인민위원으로 붉은 군대를 이끌며 소련 시기 누구보다 오래 그 자리에 있었다. 대숙청의 책임을 함께 진다. 그의 서명은 185개 처형 명단에 남아 있고 그 명단으로 18,000명 이상이 총살당했으며, 1940년 3월 5일 폴란드 장교와 지식인 약 25,700명 처형 결정에도 서명했다. 겨울전쟁 후 해임되었으나 1941~1944년 국가방위위원회 위원과 빨치산 총사령관으로 일했고, 1960년까지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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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차리친 방어와 내전 지휘, 스탈린 인맥의 군사 상징으로 부상
  • 1925–1940전쟁·국방인민위원, 붉은 군대의 정치적 충성 노선 대표
  • 1937–1938군 대숙청 국면에서 최고 군사지도부로 숙청을 승인
  • 1939–1940겨울전쟁 실패 뒤 티모셴코에게 국방인민위원 자리를 넘김
  • 1941–1945전시 원로 지휘관이지만 실전 지휘능력 한계를 드러냄
  • 1953–1960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상징적 국가원수로 이동
  • 1940–1953인민위원회 부의장,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
  • 1945–1947헝가리 연합통제위원회 의장
  • 1941–1944국가방위위원회 위원, 북서방면군·레닌그라드 전선 지휘, 빨치산 총사령관

보리스 미하일로비치 샤포시니코프

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Шапошников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오렌부르크 카자크 출신 가문) 1882–1945 ○ 병사

스탈린이 이름과 부칭으로 부른 유일한 장성, 『군대의 두뇌』의 저자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흰 셔츠에 멜빵 차림으로 지도를 펼쳐 두고 일하던 샤포시니코프는 찾아온 젊은 대령을 다정하게 맞았다. 보고가 어긋나도 고함 대신 "자네, 이게 뭡니까, 귀여운 친구(голубчик)?"라고 되물었다.

제정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1918년 5월 붉은 군대에 지원한 군사 이론가. 3권의 『군대의 두뇌』(1927–1929)는 현대전에서 참모본부의 기능과 구조를 분석한 저작으로 지금도 러시아 참모 아카데미 교과 과정에 남아 있다. 1937년 6월에는 투하쳅스키 등을 사형에 처한 특별재판부에 참여했고, NKVD는 동시에 그에 대한 공작 진술을 수집하고 있었다. 1941년 겨울 반격 계획 수립에 관여했고, 1945년 3월 폐결핵으로 죽기까지 스탈린의 군사 고문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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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7제국군 복무, 1차대전 참전, 대령
  • 1918–21붉은 군대 입대, 내전 중 작전국장으로 주요 작전 기획
  • 1925–27레닌그라드 ·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28–31참모총장 (1차), 『군대의 두뇌』 출간
  • 1932–35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원장 겸 교수
  • 1937–40참모총장 (2차), 원수 진급, 겨울전쟁 기획
  • 1941–42참모총장 (3차), 모스크바 반격 설계
  • 1943–45보로실로프 고등군사아카데미 원장, 스탈린 군사 고문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쿠즈민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Кузьмин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인 1883–1938 ✕ 처형

크론슈타트의 '폭발'을 예고한 발트함대 정치위원

쿠론슈타트 수병들을 설득하러 갔다가 오히려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03년부터 볼셰비키였던 군사 정치위원으로, 내전 내내 여러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를 거쳐 1921년 발트함대 정치국장이 되었다. 1921년 2월 26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확대회의에서 수병들 사이에 반란 기운이 번지며, 파업을 막지 못하면 '폭발'이 일어나리라고 경고했다. 크론슈타트 반란 때 반군 설득에 나섰다가 체포되었고, 1937년 대숙청에서 끝내 혐의를 부인한 채 이듬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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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볼셰비키
  • 1917가치나 소비에트 의장, 볼셰비키 군사조직 활동
  • 1918–1919남서전선 정치위원, 북부전선·제6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0발트함대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12군 사령관
  • 1921발트함대 정치국장,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참가
  • 1924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부 차석 검사
  • 1925–1932중앙아시아·시베리아 군관구 정치국장 등 요직
  • 1932북방해로 옴스크 지부장으로 전직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안토노프-옵세옌코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нтонов-Овсеенко
군사·지휘 소련 소련 우크라이나 1883–1938 ✕ 처형

겨울궁전을 접수한 10월 봉기 지휘관, 21년 뒤 스탈린에게 총살되다

사형장으로 향하며 동료들에게 외투와 구두를 벗어 건넸다. 유리 톰스키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안토노프-옵세옌코는 볼셰비키였고 끝까지 볼셰비키로 남았다고 전해 달라」고 말했다. 21년 전 그는 겨울궁전에서 임시정부를 체포했던 사나이였다.

체르니고프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1년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1917년 10월 군사혁명위원회 비서로서 포드보이스키·추드노프스키와 함께 겨울궁전 접수 작전을 준비하고 임시정부 체포를 집행했다. 내전기 남부·우크라이나 전선을 지휘했고, 1921년 탐보프 농민봉기 진압 전권위원회 의장으로서 유독가스 사용 결정에 서명했다. 1922년 적군 정치총국장을 지내다 트로츠키를 옹호한 끝에 1924년 1월 해임되었고, 외교관으로 전환해 체코슬로바키아·리투아니아·폴란드 전권대표를 지냈다. 1937년 러시아 SFSR 사법인민위원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체포되어 1938년 2월 10일 총살되었다. 1956년 2월 25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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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비서; 겨울궁전 습격 지휘, 임시정부 체포
  • 1917.12–1918.05남러시아 소비에트군 총사령관
  • 1919.01–1919.06우크라이나 전선 사령관
  • 1921.02–1921.07탐보프 봉기 진압 전권위원회 의장
  • 1922.08–1924.01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 정치총국장(1924년 1월 해임)
  • 1924–1934소련 전권대표: 체코슬로바키아·리투아니아·폴란드 (1923년 중국 파견)
  • 1934–1937러시아 SFSR 검찰총장; 바르셀로나 총영사

알렉산드르 일리치 예고로프

Александр Ильич Егоров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 1883–1939 ✕ 처형

데니킨을 무너뜨린 남부전선 사령관, 초대 원수 5인 중 마지막으로 이름이 지워진 참모총장

「나는 인민과 당, 붉은 군대 앞에 깨끗하다」 1938년 3월,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짜르 군대의 부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금장 검과 여섯 개의 훈장을 받은 직업군인이었다. 내전에서는 남부전선을 지휘하여 데니킨의 백군을 패퇴시켰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는 남서전선을 맡았다. 1931년 붉은 군대 참모총장에 올라 기계화와 탱크전 교리로 군 현대화를 추진했으며, 1935년 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37년 말 스탈린의 신임을 잃고 1938년 체포되어, 공개재판도 없이 1939년 붉은 군대의 날에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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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7러시아 제국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중령·대령, 5회 부상, 게오르기 무기 수훈
  • 1918–19붉은 군대 입대, 제9군·제10군·제14군 사령관
  • 1919–20남부전선 사령관 — 데니킨 백군 격파, 오룔·보로네시·로스토프 탈환
  • 1920남서전선 사령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키예프 탈환 후 르부프 진격
  • 1925–26중국 군사고문: 장제스·펑위샹에게 파견
  • 1927–31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
  • 1931–37붉은 군대 참모총장 — 기계화군단·탱크전 교리 추진
  • 1935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
  • 1937국방부 제1부인민위원, 이후 자캅카스 군관구로 강등
  • 1939/1956군사재판 없이 처형, 1956년 흐루쇼프에 의해 복권

세묜 미하일로비치 부됸니

Семён Михайлович Будённый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 1883–1973 ○ 자연사

말 탄 내전의 전설, 기계화 시대까지 살아남은 원수

1941년 9월 남서방면군 총사령관으로서 키예프 돌출부에서의 철수를 스타브카에 전보로 건의했으나 스탈린에게 해임되었고, 뒤이어 남서방면군 주력이 포위되었다.

돈 지역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03년 징집되어 제정 러시아 기병으로 복무하며 성 게오르기 훈장 전 등급을 받았고, 내전에서는 제1기병군을 이끌어 백군을 격파했다. 1935년 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가 되었고, 대숙청에서는 부하린·리코프 처형을 요구하고 투하쳅스키 재판의 특별재판부에 참여했으나 자신도 수사 대상이었다. 1941년 남서방면군 총사령관으로 키예프 돌출부 철수를 건의했다가 스탈린에게 경질되어 다시는 야전군을 지휘하지 못했고, 전후에는 농업부 차관으로 군마 육종을 맡았다. 기병의 시대를 고집한 인물로 기억되지만 직접 낙하산 강하를 시험하고 기계화기병집단 편성을 주도했으며, 1973년 10월 26일 모스크바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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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7러시아 제국군 기병, 성 게오르기 훈장 전 등급 수훈
  • 1919–23제1기병군 사령관: 데니킨·브란겔 격파,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 1924–37적군 기병 감찰관; 군마 육종 사업 조직
  • 1935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
  • 1937–40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이어 국방부 제1부인민위원
  • 1941남서방면군 총사령관 — 키예프 철수 권고로 경질됨
  • 1943–53적군 기병 사령관, 전후 농업부 차관(마정 담당)
  • 1958/63/683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수훈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라셰비치

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Лашевич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 1884–1928 사망 경위 논란

1917년 봉기와 내전을 지휘한 볼셰비키 군사 지도자

1917년 10월 24일 저녁, 라셰비치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벨리셰프를 통해 순양함 아브로라 호에 명령을 내려 전날 사관생도들이 끊어 놓은 니콜라예프스키 다리를 복구하게 했고, 이 임무는 완수되었다.

1884년 러시아 제국 오데사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1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03년부터 볼셰비키였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에서 10월 봉기에 참여했고 내전기에는 제3군 사령관과 동부·남부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25년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전쟁·해군 제1부인민위원에 올랐으나 1926년 통합 반대파 가담 뒤 강등되어 1926~1928년 하얼빈 중동철도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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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5RSDLP 입당, 오데사·니콜라예프·예카테리노슬라프·페테르부르크에서 당 활동, 반복적 체포와 유배
  • 1915–17제1차 세계대전 징집, 두 번 부상, 공로로 상급 하사관 진급
  •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볼셰비키 분파 서기·의장,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봉기 지휘
  • 1918–20제3군 사령관, 동부·남부·서부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7군 사령관 대행
  • 1922–25시베리아 혁명위원회 의장, 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 1925–26소련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전쟁·해군 제1부인민위원
  • 1926–27통합 반대파 가담, 불법 집회 조직, 중앙위 후보위원 해임, 15차 당대회 출당
  • 1928반대파 철회 선언, 당적 회복, 하얼빈에서 사망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프룬제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Фрунзе
군사·지휘 소련 소련 출생: 키르기스스탄(피슈페크) 1885–1925 ○ 수술 중 사망, 사인 논쟁

내전의 전선 사령관, 붉은 군대 개혁자

1925년 수술을 앞둔 병상에서 아내 소피야 알렉세예브나에게 "토요일에 새 회진이 있을 예정이다. 수술을 거부당하지나 않을까 두렵다"고 썼다.

1885년 러시아령 투르키스탄 피슈페크(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태어나 192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군사 지도자다. 1904년 페테르부르크 폴리테크닉에 입학해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고, 1905년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물 총파업을 이끌고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에 참가했다. 1907년 체포되어 카토르가형을 선고받고 1909년과 1910년 두 차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모두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고, 1916년 탈출해 1917년 민스크에서 민병대를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동부전선에서 콜차크를, 남부전선에서 브란겔을 격파하고 크림을 점령했으며, 1924년부터 군사개혁을 추진하다 1925년 1월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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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혁명운동과 투옥·유형, 1917년 뒤 볼셰비키 군사조직으로 이동
  • 1919–1920동부전선과 투르케스탄 전선에서 백군 격파
  • 1920남부전선에서 브란겔군 격파와 크림 점령 지휘
  • 1924–1925군사개혁 구상, 통일군사교리와 정규군 재편 추진
  • 1925전쟁인민위원 취임 직후 수술 중 사망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크릴렌코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Крыленко
법률·사법 소련 소련 러시아 1885–1938 ✕ 처형

혁명적 법의식의 설계자, 대숙청에 삼켜진 검사

1918년 5월, 사형제가 폐지된 뒤 방청객이 술렁이자 크릴렌코는 "처형이 폐지된 겁니다. 샤스트니는 처형되는 게 아니라 총살되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스몰렌스크 현 베흐테예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역사와 문학을 공부하던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당명은 아브람이었다. 1917년 2월 혁명 뒤 연대와 사단, 11군 위원회 의장을 거쳐 11월 최초의 소비에트 최고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과의 정전 교섭을 열었다. 이듬해부터 혁명재판소와 검찰, 사법인민위원직을 거치며 혁명적 법의식을 내세워 법을 계급투쟁의 도구로 규정하고 1922년 사회혁명당 재판과 1928년 샤흐띠 재판, 1930년 산업당 재판, 1931년 멘셰비키 재판을 이끌었다. 1938년 1월 31일 부하린 우익 조직 연계와 사법기관 파괴 혐의로 체포되어 7월 29일 20분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그날 총살되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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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볼셰비키 비밀 활동, 체포와 망명 반복; 제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참전
  • 1917.11–1918.3소비에트 최초의 최고총사령관; 두호닌 해임, 휴전 교섭 개시
  • 1918–1922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혁명재판소 의장
  • 1922–1929러시아 공화국 법무부차관 겸 수석 검사보
  • 1929–1931러시아 공화국 검사; 샤흐띠·산업당·멘셰비키 재판의 국가검사
  • 1931–1936러시아 공화국 법무인민위원
  • 1936–1938.1소련 법무인민위원
  • 1938.7.2920분 재판 후 사형 선고, 당일 총살

예핌 아파나시예비치 샤덴코

Ефим Афанасьевич Щаденко
군사·지휘 소련 소비에트 우크라이나계 1885–1951 ○ 자연사

1기병군의 인민위원에서 대숙청의 인사 집행자로

「모터전, 기계화, 항공, 화학 같은 건 군사전문가들이 지어낸 것이다. 지금으로선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기병대일 것이다.」

1904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재단사에서 직업혁명가가 되었다. 부됸니, 보로실로프와 함께 제1기병군을 창건하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며 내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37년 국방부인민위원 대리 겸 지휘·지도인원관리국장에 오른 뒤, 키예프 군관구에서 지휘관들에 대한 '군부 파시스트 음모' 수사를 주도하며 대숙청의 핵심 집행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글라부쁘라포름(총군편성보충관리국) 국장으로서 붉은 군대의 병력 편성과 보충을 총괄했으나, 기병 만능론에 집착해 기계화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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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RSDLP(볼셰비키) 입당
  • 1917카멘스카야 볼셰비키 위원회 의장 · 적위대 지휘관
  • 1918–1919제10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우크라이나 전선 RVS 위원
  • 1919–1920제1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0제2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마흐노 토벌
  • 1930–1934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7–1940국방부인민위원 대리 · 지휘·지도인원관리국장
  • 1939–1941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41–1943국방부인민위원 대리 · 글라부쁘라포름 국장
  • 1943–1944남부전선 · 제4우크라이나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알렉산드르 야코블레비치 파르호멘코

Александр Яковлевич Пархоменко
군사·지휘 소련 소련 우크라이나 1886–1921 ✕ 전사

차리친 방어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화를 이끈 내전 지휘관

마흐노에게 체포된 그는 아나키스트 동생 아르툠이 '아직 늦지 않았다'고 쓴 편지를 꺼내 보였으나, 마흐노의 총에 쓰러졌다.

1886년 예카테리노슬라프현 우크라이나 농가에서 태어나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로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에서 무장 분견대를 이끌었고, 1917년 이후 보로실로프와 함께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고 백군 및 독일 점령군과 싸웠으며, 차리친 방어전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와 협력했다. 제1기병군 특별전권위원과 제14기병사단장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브란겔 토벌에 참전했고, 1921년 1월 3일 마흐노 부대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사후 두 차례 적기훈장을 받고 이바노프의 소설과 1942년 동명 영화로 소비에트 내전 영웅의 판테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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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루간스크 공장 노동자, 볼셰비키 입당(1904), 1905년 혁명 무장분견대 조직, 수차례 체포
  • 1917–1918루간스크 적위대 참모장,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 수립, 칼레딘·독일군과 전투
  • 1918보로실로프와 함께 차리친으로 후퇴, 제10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 1919하리코프 군사위원·수비대장, 그리고리예프 반란 진압, 예카테리노슬라프 탈환
  • 1919–1920제1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로스토프 함락 참여
  • 1920–1921제14기병사단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북타브리야 작전 참전, 마흐노군 토벌 중 전사

바실리 이바노비치 차파예프

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Чапаев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 1887–1919 ✕ 전사

소련 영화와 민담으로 되살아난 내전의 전설적 지휘관

내가 목수였을 땐 목숨이 전혀 아깝지 않았어. 용감했지. 그런데 지금은 좀 더 잘 살게 되면서 새로운 삶을 알게 됐다. 이제는 그때의 내가 아니야—이제는 목숨이 아까워.

가난한 농민 출신의 붉은 군대 지휘관. 정규 군사교육 없이 과감한 전술과 카리스마로 내전의 전설이 되었다. 1919년 우랄 전선에서 전사했으나 푸르마노프의 소설과 영화로 소비에트 영웅으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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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7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 326 벨고라이 연대에서 복무하며 펠트페벨까지 승진.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3개 수훈.
  • 1917–1918볼셰비키 입당. 니콜라옙스크에서 붉은위병대 조직, 니콜라옙스크 제1·제2연대 지휘.
  • 1918제2니콜라옙스크사단장으로 우랄 코사크 및 체코군단과 교전. 능선을 따라 사마라 방면으로 진격.
  • 1918–1919붉은 군대 참모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학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의로 이탈.
  • 1919제25소총병사단장으로 부활. 부구루슬란, 벨레베이, 우파 작전에서 두각. 적기훈장 수훈.
  • 1919.6–9우랄 전선으로 재배치. 특별집단 지휘관으로 우랄스크 포위 해제. 9월 5일 르비셴스크에서 코사크 기습으로 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