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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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빅토르 페트로비치 두비닌

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Дубынин

아프간 손실을 절반으로 줄인 40군 사령관, 러시아군 첫 참모총장

파벨 그라초프 국방장관이 직접 병원으로 찾아와 육군대장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두비닌은 이미 말기 암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소련과 러시아 연방의 군인. 1986~87년 아프가니스탄 주둔 제40군 사령관으로서 대규모 헬리콥터 강습과 컴퓨터 지휘체계를 도입하는 전술 개혁으로 전년 대비 전사자를 절반으로 줄였고, 실전손실의 은폐 관행에 처음으로 맞섰다. 1989~92년 북부군집단 사령관으로 폴란드 주둔 소련군의 조직적 철수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1992년 6월 러시아 연방군 초대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옐친 대통령의 성급한 핵전력 개혁 구상을 저지하고 토폴-M, 보레이급 잠수함, 이스칸데르 등 장기무기 프로그램을 승인받아내 탈소비에트 러시아 방위의 기술적 토대를 남겼다. 임종 직전 병상에서 육군대장 계급장을 받았으며, 사후 러시아연방영웅 칭호가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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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1964극동전차학교(블라고베셴스크) 졸업, 소련군 입대
  • 1964–1978전차소대장·중대장·대대장, 연대 참모장 겸 부연대장, 전차연대장. 비스트렐 과정(1973), 기갑아카데미(1978) 졸업
  • 1979–1984제8근위전차사단장(벨라루스). 참모아카데미 졸업(1984) 후 제32군 제1부사령관(중앙아시아)
  • 1984–1986제40군(아프가니스탄) 제1부사령관
  • 1986–1987제40군 사령관. 전술 개혁으로 전사자 절반 감소. 소련군 부분철수 개시
  • 1987–1989제7전차군 사령관(벨라루스), 키예프군관구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 1989–1992북부군집단(폴란드) 사령관. 소련군 철수 완수
  • 1992러시아 연방군 초대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육군대장 진급(10.5), 11.22 병사

알렉산드르 미트로파노비치 오볼렌스키

Александр Митрофанович Оболенский

소련사 최초로 현직 서기장에게 선거 대안을 제시한 엔지니어

1989년 5월 인민대표대회에서 그가 마이크 앞에 섰다. '선례를 남기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고르바초프의 유일 후보에 맞섰고, 대의원 1,415 대 689로 그의 이름은 투표용지에서 제외되었다.

1943년 오룔 출생의 지구물리학 엔지니어로, 콜라반도 극지연구소에서 20년간 근무하며 1987년 최초의 비공식 개혁단체인 페레스트로이카 자발적 지원회를 아파티티에 결성했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으로 당선된 직후 제1차 대회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맞서 최고회의 의장 후보로 자진 출마, 소련사 최초의 현직 서기장 대안 입후보라는 정치적 파열을 일으켰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의회 조사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진상 규명을 주도했으며, 벨로베시 협정을 헌법 위반으로 간주해 끝까지 소련 해체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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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65오룔 공장 선반공, 동독 주둔 소련군 복무
  • 1971레닌그라드 광산대학 지구물리학 전공 졸업
  • 1971–1992콜라 과학센터 극지지구물리연구소 기술자·설계기사
  • 1987–1989페레스트로이카 자발적 지원회(DOSP) 아파티티 결성·의장
  • 1989–1992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 (레닌그라드 농촌 제20선거구)
  • 1990–1994러시아 사회민주당(SDPR) 공동의장·의장
  • 19918월 쿠데타 진상조사 의회위원회 위원장
  • 1993–1996TV·라디오 공사 '보스토크' 사장 겸 편집장, 오룔

겐나디 니콜라예비치 오시포비치

Геннадий Николаевич Осипович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44–2015 ○ 사망

KAL 007을 격추한 소련 방공군 요격 조종사

「민간기인 줄 알았지만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1991년 이즈베스티아 인터뷰에서.

소련 방공군의 수호이 Su-15 요격 조종사로, 1983년 9월 1일 사할린 상공에서 대한항공 007편 보잉 747을 격추한 인물이다. 경고 사격은 했지만 기체에 예광탄이 아닌 철갑탄이 장전되어 기장이 이를 보지 못했고, 두 줄의 창문을 보고 민간기임을 알았으면서도 목표를 확인하지 못한 채 미사일을 발사해 탑승자 269명 전원의 죽음을 초래했다. 1991년 이즈베스티아 인터뷰에서 예광탄을 쐈다는 당국 주장이 거짓이었음을 인정했고, 이후 비행에서 물러나 마이코프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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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아르마비르 고등군사항공학교 입교
  • 1967졸업, 중위 임관 후 극동 제530전투항공연대 배속
  • 1976사할린 제777전투항공연대 편대 지휘관
  • 1983.09.01KAL 007 보잉 747 격추
  • 1983.09제761훈련항공연대 선임 항법사 전임
  • 1984.08적성훈장 수훈
  • 1986MiG-21 탈출 중 척추 부상으로 비행 중단
  • 1989.11예비역 전역

엔아르노 아우구스토비치 실라리

Enn-Arno Augustovich Sillari

분열하는 당을 이끈 마지막 소비에트 에스토니아 공산당 지도자

1990년 당이 갈라졌을 때 실라리는 소련 공산당과의 연계를 유지하는 세력의 제1서기가 되었다.

엔아르노 실라리는 공장 기술자에서 출발해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중앙·도시 조직을 거친 당 관료였다. 1990년 당이 에스토니아의 주권 노선을 택한 다수파와 소련 공산당에 남은 세력으로 갈라지자, 그는 후자를 이끌며 소비에트 연방의 제도와 에스토니아 공산주의 운동의 존속을 함께 지키려 했다. 그는 1990~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이자 에스토니아 공산당 제1서기였으며, 1991년 소련 해체 과정에서 그 정치적 기반을 잃었다. 이후에도 당을 이끌었지만 1992년 선거 패배 뒤 제1서기직에서 물러나 사업가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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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카우나스 폴리테크닉 연구소 졸업, 섬유 기계가공 전공
  • 1967–1972탈린 케일라 공장에서 기술자로 근무
  • 1972–1976탈린 레닌구 당위원회 산업·교통부장
  • 1984–1986타르투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86–1989탈린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89–1990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 1990–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 1990–1992소련 공산당계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2–2024에스토니아 사업가, 발테코 공동 소유주

기비 그리고리예비치 굼바리제

Гиви Григорьевич Гумбаридзе

위기의 공산당을 이끈 그루지야 관료

“법은 집행되어야 하지만, 희생자 없이 집행되어야 한다.”

기비 굼바리제는 기록관과 당 조직가를 거쳐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 지도부에 오른 공산당 관료였다. 국가보안기관 출신으로서 그는 민족운동이 고조된 시기에 당의 통치와 대중의 신뢰가 충돌하는 현장을 맡았다. 1989년 트빌리시 유혈 진압 뒤 책임 규명과 질서 유지를 함께 주장했지만, 소비에트 체제의 위기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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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67소비에트군 복무
  • 1968–1972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중앙국가기록원 연구원·최고회의 간부 보좌
  • 1977–1983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행정기관 부문 간부
  • 1983–1985제스타포니 지구당 제1서기
  • 1988트빌리시 시당 제1서기
  • 1988–1989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보안위원회 위원장
  • 1989–1990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89–1990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상무회 의장

미하일 세묘노비치 수르코프

Михаил Семёнович Сурков

군 당조직에서 말기 정치국으로 이동한 간부

1991년 4월, 전군 당위원회 책임서기였던 그는 소련 말기 정치국의 일원이 되었다.

미하일 세묘노비치 수르코프는 소련군 정치기구에서 경력을 쌓은 당 조직가이자 정치가였다. 군 내부의 당 통제 업무를 맡던 그는 소련 해체 직전 정치국에 들어가 말기 체제의 긴장을 드러냈다. 이후 러시아 공산당과 국가두마, 회계원에서 활동하며 소비에트 당 간부의 경력을 러시아의 공산주의 정치와 국가감사 제도로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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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금속공 견습공으로 노동 시작
  • 1965–1977소련군 복무, 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졸업
  • 1988–1990제병연합군 정치부장
  • 1990–1991전군 당위원회 서기, 중앙정치총국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정치국원
  • 1995–1999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공산당 의원단 국방위 부위원장
  • 2000–2007러시아 회계원 감사관

블라디슬라프 알렉세예비치 아찰로프

Владислав Алексеевич Ачал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타타르인 1945–2011 ○ 자연사

소련 공수군 사령관, 8월 쿠데타에 가담한 국방차관

1991년 8월 19일,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쿠데타 당시 아찰로프는 공수부대의 모스크바 진입을 조율하고 오스탄키노 TV 센터 봉쇄 임무를 맡았다.

1945년 11월 13일 타타르 자치공화국 아트닌스키 구의 아타마시 마을에서 태어나 2011년 6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66년 카잔 전차학교, 1973년 장갑병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제7근위공수사단장(1978), 제8근위군 사령관(1985~1987), 레닌그라드군관구 참모장(1987~1989)을 지냈으며 1980년 소장이 되었다. 1989년부터 1990년까지 소련 공수군을 지휘하고 1990년 12월부터 1991년 9월까지 소련 국방차관을 지냈으며, 1989년 상장으로 진급했다. 1991년 8월 17일 KGB 시설 회의에서 권력 장악에 합의한 국방차관 중 한 명으로 기소되었고, 1993년에는 루츠코이의 국방장관이 되었다가 체포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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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73제8근위군 전차소대장·중대장 (주독소련군집단)
  • 1973–1975제44공수훈련사단 제243자주포훈련연대 부지휘관
  • 1975–1977제137근위공수연대장
  • 1977–1978제98근위공수사단 부사단장
  • 1978–1982제7근위공수사단장
  • 1984–1985제2근위전차군 부사령관 (주독소련군집단)
  • 1985–1987제8근위군 사령관 (주독소련군집단)
  • 1987–1989레닌그라드군관구 참모장·제1부사령관
  • 1989–1990소련 공수군 사령관
  • 1990–1991소련 국방차관
  • 1993루츠코이 대안정부 국방장관
  • 2003–2011러시아공수군재향군인연합 의장

자한기르 뫼브숨 오글르 무슬림자데

Cahangir Mövsüm oğlu Müslümzadə

깃발을 들고 군중 선두에 선 숨가이트 마지막 당 책임자

깃발을 손에 쥔 채 흥분한 군중의 선두에 선 그의 모습이 촬영되어 모스크바 당 중앙으로 보내졌다.

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를 거쳐 숨가이트 시당위 제1서기가 된 인물로, 1988년 2월 숨가이트 포그롬 당시 군중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아제르바이잔 SSR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서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무슬림자데는 나중에 군중을 아르메니아인 거주 구역에서 바다 쪽으로 유도하려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행렬의 후미가 흩어져 아르메니아인 주택가로 번져갔다. 사건 직후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당에서 제명되어, 포그롬의 희생양이자 실패한 당 간부의 상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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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1974아제르바이잔 SSR 통신부 출판부 지도원, 콤소몰 26바쿠 코미사르 구위원회 비서
  • 1974–1978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 조직부장, 청년단체위원회 의장,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조직-당무부 지도원
  • 1978–1985아제르바이잔 레닌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5–1988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숨가이트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89–1991아제르바이잔 합작기업 및 국제연합 협회 부회장
  • 1991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최고회의 인민대표

줌갈베크 벡술탄 울루 아만바예프

Жумгалбек Бексултан уулу Аманбае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키르기스인 1946–2005 ○ 자연사

소련 말기의 키르기스 공화당 지도자

1991년 4월, 소련의 마지막 정치국에 키르기스 공화국 대표로 합류했다.

아만바예프는 농업 전문가 출신의 키르기스 공산당 간부로, 당 조직과 지역 행정을 거치며 성장했다. 소련이 해체로 향하던 1991년 키르기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지만, 두 직책은 연방 붕괴와 함께 몇 달 만에 끝났다. 그는 이후 독립 키르기스스탄에서도 정부 업무를 맡아 소비에트 당 관료와 새 국가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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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키르기스 농업대학 졸업
  • 1971–1973오시주 국립 종축장장, 알라이 지구당 제1서기
  • 1981–1985키르기스 공산당 오시주위원회 서기
  • 1985–1988키르기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8–1991이식쿨주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이식쿨주 소비에트 의장, 소련 인민대의원
  • 1991키르기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3–1995키르기스 공화국 부총리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루츠코이

Александр Владимирович Руцкой

옐친과 함께 쿠데타에 맞섰다가 옐친의 탱크에 무너진 러시아 유일의 부통령

1993년 10월 4일 백악관 포격 중 라디오 생방송에서: "비행사들이여, 전투기를 띄워라! 이 갱단은 크렘린에 자리 잡고 있다.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구하라!"

소련의 마지막 영웅 중 한 명이자 러시아의 유일한 부통령. 아프가니스탄에서 Su-25 공격기로 485회 출격하고 두 차례 격추·포로가 된 전투 조종사였으며, 1988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옐친의 러닝메이트로 RSFSR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8월 쿠데타 당일 루키야노프에게 고르바초프 건강검진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으며, 총대주교 알렉시 2세를 설득해 교회의 옐친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반대하며 의회파에 섰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의회에 의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되었다가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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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바르나울 고등군사항공학교 졸업
  • 1980가가린 공군사관학교 졸업
  • 1985–88아프가니스탄: 제378독립공격항공연대장, 제40군 공군 부사령관
  • 1988소련영웅 칭호 수여
  • 1990RSFSR 인민대의원, 최고소비에트 위원
  • 1990소련군 참모본부 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91.7–1993.10RSFSR/러시아연방 부통령
  • 1993.9–10의회에 의해 러시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 체포
  • 1996–2000쿠르스크 주지사

파벨 세르게예비치 그라초프

Павел Сергеевич Грачё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48–2012 ○ 뇌수막염

공수부대 사령관에서 옐친의 국방장관으로, 쿠데타의 열쇠를 쥔 인물

'공수부대 단 하나의 연대로 2시간이면 질서를 되찾을 수 있다'고 체첸 전쟁 직전 장담했으나, 그 말은 재앙의 서막이었다.

파벨 그라초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최소 희생'으로 헤로이 칭호를 받은 공수부대 장군으로, 1990년 12월 소련 공수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일 야조프의 명령에 따라 106공수사단을 모스크바에 진주시켰으나, 이튿날 백악관 강습 계획을 반대하고 옐친 측에 합류해 수비 병력을 보냄으로써 쿠데타 실패의 결정적 고리가 되었다. 쿠데타 후 러시아 초대 국방장관이 되어 1993년 체제 위기에서 옐친을 지지했고, 제1차 체첸 전쟁을 지휘했으나 참담한 패배와 부패 스캔들로 '파샤-메르세데스'라는 조롱을 받으며 1996년 경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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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69랴잔 고등공수지휘학교 졸업 (금메달)
  • 1981–1983, 1985–1988아프가니스탄: 345공수연대장 → 103공수사단장
  • 1988소비에트연방 영웅 칭호 수여
  • 1990.12–1991.08소련 공수군 총사령관
  • 1991.08–1992소련 국방부 제1차관
  • 1992.05–1996.06러시아 연방 국방장관
  • 1997–2007로스보루제니예·로소보론엑스포르트 군사 고문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셰르바코프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Щербаков

소련 중앙계획을 폐기한 마지막 고스플란 의장

그는 소련 계획경제의 종말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시장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공공재에 다가가게 할 메커니즘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소련 계획경제의 마지막 책임자로, 파블로프 내각에서 고스플란을 경제예측부로 개편하면서 초대 장관 겸 제1부총리가 되어 중앙계획에서 시장으로의 이행을 관리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자동차 조립기업 '압토토르'를 설립해 성공한 포스트소비에트 기업가로 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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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1974VAZ 건설 현장 엔지니어 → 톨리아티 콤소몰 간부
  • 1976–1982VAZ 계획경제국 차장·국장
  • 1982–1985KAMAZ 경제·계획 담당 부총책임자
  • 1985–1988국가노동위원회 국장 → 각료회의 기구 근무
  • 1989–1991국가노동위원회 의장
  • 1991.3–1991.5소련 부총리
  • 1991.5–1991.11제1부총리 겸 경제예측부 장관 (고스플란 후신)
  • 1991 이후국제투자기금 설립 → 압토토르 홀딩 회장

빅토르 바실리예비치 바클라노프

Виктор Васильевич Бакланов

노동영예훈장 완전 수훈자, 전 콜호스 기계화공

시베리아 튜멘주 출신의 빅토르 바클라노프는 1967년 열여덟 살에 우크라이나 콜호스 '기간트'의 기계화공이 되었고, 37년간 한 농장에서 일하며 노동영예훈장 3개 등급을 모두 받아 완전 수훈자가 되었다.

소련의 농업 노동자이자 국가·정치 인물로, 드네프로페트롭스크주 콜호스 '기간트'에서 기계화공으로 평생 일하며 전연방·공화국 차원의 수확 경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노동영예훈장 3급(1975), 2급(1982), 1급(1987)을 차례로 받아 완전 수훈자가 되었고,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콜호스 조합 대표로 소련 인민대의원(1989~1991)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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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2004콜호스 '기간트' 기계화공 (드네프로페트롭스크주)
  • 1987–1989소련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제11기)
  • 1989–1991소련 인민대의원 (콜호스 조합 대표)
  • 2004연금 은퇴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레베디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Лебедь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50–2002 ○ 추락사

공수군 부사령관으로 옐친의 백악관에 투입된 뒤 편을 바꾸어 쿠데타를 무너뜨린 장군

1991년 8월 20일 밤, 그라초프의 동의를 얻은 레베디는 백악관 수비대를 찾아가 '새벽 2시에 공격이 시작된다'고 은밀히 알렸다.

노보체르카스크의 가난한 목수 가정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노보체르카스크 시위대 학살을 목격한 소련 공수군 장군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했고 1991년 2월 공수군 전투훈련 담당 부사령관이 되었다. 8월 쿠데타 당일 파벨 그라초프의 명령으로 툴라 공수대대를 이끌고 백악관을 포위했으나, 다음 날 옐친 진영으로 넘어가 수비대에 새벽 공격 계획을 은밀히 전달하며 쿠데타 붕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역 후 1996년 대선에서 3위에 오르고 안전보장회의 서기로서 제1차 체첸 전쟁 종식을 협상했으며,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사로 재직 중 헬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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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1981리ャ잔 공수사관학교 생도 → 교관 (훈련소대장·중대장)
  • 1981–1982제345독립공수연대 제1대대장 (아프가니스탄)
  • 1985–1988제331근위공수연대장 → 제76근위공수사단 부사단장
  • 1988–1991.02제106근위공수사단장 (툴라)
  • 1991.02–1992.06소련 공수군 부사령관 (전투훈련·군사학교 담당)
  • 1992.06–1995제14근위군 사령관 (트란스니스트리아)
  • 1996러시아 안전보장회의 서기
  • 1998–2002크라스노야르스크 지사

아르툠 미하일로비치 타라소프

Артём Михайлович Тарасов
경제·재정·계획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르메니아 1950–2017 ○ 심장질환

당비 9만 루블로 협동조합법을 두 번 바꾸게 한 소련 최초의 합법 백만장자

당조직자가 돈다발을 두 팔로 끌어안고 떨리는 손으로 당원증에 적었다: '1989년 1월 급여, 300만 루블.' 평균 월급이 200루블이던 시절이었다.

소련 최초의 합법적 백만장자로, 협동조합 '테흐니카'의 창업자이다. 1989년 1월 자신에게 300만 루블의 월급을 지급하고 부하의 당비 9만 루블 납부가 「브즐랴트」에 방영되면서 전국적 스캔들을 일으켰고, 이는 협동조합법이 두 차례 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인민대표와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으며, 러시아 초기 자본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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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모스크바 광산대학 졸업
  • 1984–1986모스카프스트로이프로옉트 수석 엔지니어
  • 1987협동조합 '테흐니카' 설립
  • 1989소련 최초의 합법적 백만장자; 소련 통합협동조합연합 부회장
  • 1990–1991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대표
  • 1994–1996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제1소집)
  • 2003–2017혁신연구소(Институт Инноваций) 이사회 의장

발레리 일리치 호뎀추크

Валерий Ильич Ходемчук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인 1951–1986 ✕ 폭발사

폭발 순간 펌프실에 있었고, 시신도 수습되지 못한 체르노빌의 첫 번째 희생자

폭발 직전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22번 펌프 하부 급수를 재충전해야 해… 좋아, 잠깐만…"이라고 말했다. 그게 그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키이우주 크라피브냐에서 태어나 1978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 입사해 주순환펌프(GCN) 운전원으로 일했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안전시험 중 폭발이 일어났을 때 그는 북쪽 GCN 펌프실에 있었고, 건물 잔해에 매몰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시신은 지금도 석관 내부 잔해 속에 남아 있으며, 3호기와 4호기 사이 격벽에는 그의 기념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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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입사, 보일러 기사·선임 기사(열·지하통신 작업장)
  • 19784호기 주순환펌프(GCN) 운전원, 이후 제7그룹 수석 운전원
  • 1984노동영예훈장 3등급 수훈
  • 1986.04.264호기 안전시험 중 폭발, 북쪽 GCN 펌프실에서 순직
  • 1986.12명예휘장훈장 추서
  • 2008우크라이나 용기훈장 3등급 추서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샤셰노크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Шашенок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51–1986 ✕ 사고사

원전 시운전과 사고 대응을 맡은 기술자

동료들이 무너진 계측실에서 그를 끌어냈지만, 그는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오전 6시 프리피야티 병원에서 숨졌다.

블라디미르 샤셰노크는 원자력발전소의 계측·자동화 설비를 조정하고 시험하던 기술자였다. 체르노빌 4호기 시험에 참여하던 중 폭발로 척추와 갈비뼈가 부러지고 중화상과 방사선 화상을 입었으며, 동료들에게 구조되어 프리피야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는 사고 당일 숨진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발전소의 기술 노동이 재난의 최전선에 놓였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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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코노토프 산업기술학교 졸업
  • 1970–1980산업·원자력 설비 분야 기술 업무
  • 1980–1984체르노빌 원전 계측·자동화 조정 및 시험 기술자
  • 1984–1986스몰렌스크아톰에네르고날라드카 소속 조정·시험 기술자
  • 1986체르노빌 4호기 시험 지원 중 사고로 사망

발렌틴 보듈

Valentin Bodiul
경제·재정·계획 소련 국가기관 몰도바 몰도바인 1951–2020 ○ 코로나19

반알코올 캠페인 당시 포도밭 파괴를 증언한 크리코바 와인 공장장

'주말마다 도끼를 들고 나가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

몰도바의 와인 기술자이자 기업인으로, 1987년부터 2016년까지 29년간 크리코바 와인 콤비나트의 총책임자를 지냈다. 반알코올 캠페인 당시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하면서 노동자들이 주말에 도끼로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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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슨제레이 와인 공장 기술자
  • 1974–1975드러게네슈티 와인 공장장
  • 1975–1978슨제레이(라조프스키) 구 콤소몰 지구위원회
  • 1978–1983몰도바 콤소몰 중앙위원회 총무과장
  • 1983–1985몰도바 공산당 중앙위원회 지도검열원
  • 1985–1987크리코바 와인 공장 수석 엔지니어
  • 1987–2016크리코바 와인 콤비나트 총책임자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아키모프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Аким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53–1986 ○ 방사선 피폭

4호기 교대 감독관, 사고 당일 수습을 지휘하고 방사선 피폭으로 사망한 소련 원자력 기술자

「나는 모든 것을 옳게 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노보시비르스크 출신의 소련 원자력 기술자로, 1976년 모스크바 전력공학연구소를 졸업하고 1979년 9월 체르노빌 원전에 입사해 1984년 7월 10일 4호기 교대 감독관이 되었다. 1986년 4월 26일 야간 안전시험에서 그가 원자로 정지를 지시했고 01시 23분 39초에 AZ-5 버튼이 눌렸으나 실제로 누른 사람은 증언이 엇갈려 분명하지 않다. 폭발 후 약 8시까지 4호기에 남아 소방대와 구급대를 부르고 급수 계통 밸브를 수동으로 열게 했으며, 15Gy를 넘는 치명적 피폭을 받았다.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1986년 5월 11일 모스크바 제6병원에서 33세로 사망했고, 일부 영어권 출처는 5월 10일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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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모스크바 전력공학연구소 졸업 (열·전력 공정 자동화 전공)
  • 1979–1984체르노빌 원전: 선임 터빈 관리 기술자, 터빈 공장 교대 감독
  • 1984–1986체르노빌 원전 4호기 교대 감독관
  • 1986.04.264호기 안전시험 중 AZ-5 비상정지 지시, 폭발 후 8시간 현장 수습 지휘
  • 2008우크라이나 대통령령으로 3급 용기훈장 사후 수여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예브도키모프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Евдокимов

8월 쿠데타 당시 전차 10대를 백악관 방어선으로 돌린 타만 사단 대대 참모장

나는 어떤 명령을 받든 아무도 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타만 근위차량화소총사단 전차대대 참모장이던 소련군 소령.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모스크바 백악관 앞에 배치된 10대의 전차를 이끌고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를 만난 뒤 전차 방향을 돌려 옐친 측을 방어했다. 그의 대대 소속 110호 전차 위에서 옐친이 역사적 연설을 했으며, 이 장면은 쿠데타 진압의 상징이 되었다. 쿠데타 후 사단 내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떠났고, 1990년대 내내 경비직과 장례업 등으로 생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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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타만 근위차량화소총사단 전차대대 참모장 (소령)
  • 1991.08.1910대 전차와 함께 옐친 측으로 전향, 백악관 방어
  • 1991–1992타만 사단 잔류 (1992년 샤포시니코프에 의해 중령 진급)
  • 1992–2000티미랴젭스키 구 군사위원회 근무
  • 2000중령으로 전역
  • 2000년대 이후보안회사·장례업 전전, 모스크바 인근 공장 보안부 근무

레오니트 표도로비치 톱투노프

Леонид Фёдорович Топту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60–1986 ✕ 방사선 피폭

25세에 체르노빌 4호기 AZ-5 버튼을 누른 원자로 운전 선임기사

제어봉 문서를 공부하던 톱투노프는 친구 사샤 코롤에게 '특정 조건에서는 제어봉이 반응을 늦추기는커녕 가속할 수 있다'고 말했고, 석 달 뒤 그 예감은 그가 직접 누른 AZ-5 버튼에서 현실이 되었다.

레오니트 톱투노프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4호기의 원자로 운전 선임기사(SIUR)로, 1986년 4월 26일 참사 당시 야간 교대조 제어반을 맡고 있던 불과 25세의 기술자였다. 독립 근무 석 달째 처음 맞은 정지 작업에서 AZ-5 비상정지 버튼을 눌렀으나 RBMK 제어봉의 설계 결함이 반응도를 급증시켜 폭발을 촉발했고, 사고 직후 통제실로 돌아와 물 공급 밸브를 수동 개방하다 1,300렘의 치명적 방사선을 흡수해 5월 14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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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우크라이나 수미주 니콜라예프카에서 출생
  • 1983오브닌스크 원자력공학연구소 졸업
  • 1983–1986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근무: 블록 제어 기술자, 이후 4호기 원자로 운전 선임기사(SIUR)
  • 1986.04.264호기 안전시험 야간 교대조에서 AZ-5 비상정지 작동, 치명적 방사선 피폭
  • 1986.05.14모스크바 제6병원에서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사망, 미티노 묘지에 안장

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프라비크

Володимир Павлович Правик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인 1962–1986 ✕ 급성 방사선 증후군

방사능 위험을 통보받지 못한 채 체르노빌 3호기 지붕에 오른 첫 소방대장

'모든 게 괜찮아졌어. 우리 백 살까지 살 거야'... 방사능이 몸을 파괴하는 중에도 모스크바 병상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

블라디미르 프라비크는 체르노빌 원전 소방대(VПЧ-2) 제3교대를 지휘한 소련 내무부 소방 중위였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폭발 2분 만에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고, 이윽고 대원 넷과 함께 3호기 지붕에 올라 가동 중인 원자로로의 연소 확대를 저지했다. 방사능 위험을 통보받지 못한 채 시간당 6,000뢴트겐 이상의 방사선장에서 작업했으며, 체르노빌 희생자 중 가장 높은 1,520REM(치사량의 약 3배)에 피폭되어 1986년 5월 11일 모스크바에서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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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1982체르카시 소방기술학교 졸업
  • 1982소련 내무부 소방 중위 임관
  • 1982–1986체르노빌 원전 제2군사화소방대(VПЧ-2) 제3교대장
  • 1986.4.26체르노빌 참사 첫 대응, 3호기 지붕 화재 진압
  • 1986.5.11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모스크바에서 사망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코마리

Дмитрий Алексеевич Комарь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러시아인 1968–1991 ✕ 압사

아프간전 참전용사, 쿠데타 장갑차에 맞선 마지막 소련영웅

BMP 장갑차의 관측창에 방수포를 씌우려고 뛰어올랐다. 사수가 포탑을 돌려 떨어뜨렸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 달려가 장갑차에 올라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 공수부대 하사로 제대 후 모스크바에서 지게차 기사로 일했다. 1991년 8월 21일 새벽, 루츠코이의 '아프간 동지들' 호소를 듣고 백악관 방어선에 합류했으며 차이콥스키 터널에서 BMP 장갑차의 관측창을 막으려다 깔려 사망, 쿠데타 유일의 세 희생자 중 한 명이 되었고 사후 소비에트연방영웅과 '자유 러시아 수호자' 메달 1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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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1989공수부대 복무,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근위하사)
  • 1989–1991모스크바 '인테리어' 생산조합 지게차 기사
  • 1991.08.218월 쿠데타 당시 차이콥스키 터널에서 백악관 방어 중 사망

레오니트 페트로비치 세레브랴코프

Леонид Петрович Серебряков

레닌이 '뛰어난 노동자'라 부른 좌익 반대파 서기

그의 딸 조랴의 회고에 따르면 레닌은 그를 '뛰어난 노동자'라 불렀다.

사마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9세부터 일했고, 14세 때 루간스크의 하르트만 기관차 공장에서 금속 세공·선반공으로 일했다.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루간스크 위원회에서 활동했고, 1912년 프라하 당 대회 대표로 레닌을 만난 뒤 체포되어 나림으로 유형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때 코스트로마에서 연대를 이끌고 봉기에 나섰으며, 이후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와 중앙위원(1919–1921), 중앙위 서기(1920–1921)를 지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좌익 반대파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 1927년 제명되어 세미팔라틴스크로 유배되었다가 1930년 복당했고,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쇼재판의 주요 피고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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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5세에 볼셰비키 입당, 루간스크에서 선동 활동
  • 1908–1916반복된 체포와 유형 (볼로그다·나림), 탈출과 재체포
  • 1912프라하 당 대회 대표
  • 1917코스트로마에서 2월 봉기 주도,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
  • 1919–1921중앙위 서기, 조직국 위원,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2–1924혁명군사평의회 정치총국장, 교통부 인민위원 대리
  • 1923–1927'46인 선언' 서명, 좌익 반대파 지도부 — 제명
  • 1928–1937세미팔라틴스크 유형, 복당, 도로·자동차운수 중앙관리국장, 제2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로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