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5월, 스탈린 앞에서 어느 기관총을 채택할지 묻자 자신의 DS-39가 아닌 경쟁작 고류노프의 SG-43을 택했다: 'SG-43이 의심의 여지 없이 더 우수합니다.'
툴라의 대장장이 집안에서 교구학교 3년만 마친 데그탸료프는 차르 군대의 병사에서 소련 총기설계의 창시자가 되었다. 블라디미르 표도로프의 조수로 자동화기를 배워 1918년 코브로프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화기설계국을 이끌었고, 1927년 붉은군대 주력 경기관총 DP-27을 완성했다. DShK, PPD, PTRD-41, RPD 등 19종이 제식 채택되었고, 그의 설계국은 러시아 최대 군수기업 데그탸료프 공장(ZiD)으로 성장했다. 1940년 스탈린에 이어 두 번째 사회주의노동영웅, 스탈린상 4회, 기술과학 박사, 공병포병소장을 지낸 그는 전간기부터 종전까지 소련 보병화기의 계보를 홀로 그려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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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05오라니옌바움 사관학교 부설 총기작업장 사병 총기수리공
1906–1917V.G. 표도로프의 조수 — 최초의 러시아 자동소총 개발 참여
1918–1931코브로프 기관총공장 시험작업장장, 소련 최초 화기설계국 운영
1927DP-27 경기관총 붉은군대 제식 채택
1930–1939DK/DShK 대구경 중기관총, PPD 기관단총, DS-39 중기관총 개발
1924년 크라신의 위임을 받은 아즈네프티 대표로서의 미국 방문에서 장비 구입과 함께 직접 교섭에 나섰다. 90세의 존 D. 록펠러는 한참 생각하더니 뜻밖에도 보증서 발급을 승낙했고, 차를 마신 뒤 숲 공원을 반 시간가량 빠르게 산책했다.
혁명가 출신 기계공학자로서 내전으로 폐허가 된 바쿠 유전을 미국식 시추 기술로 재건해 소련 석유 산업의 토대를 놓았다. 1928년부터 국가 금 채굴 트러스트 글라브졸로토를 이끌며 알래스카 광산 기술을 도입하고 존 리틀페이지 같은 미국 기술자를 영입해 금 생산을 늘렸으며, 이 금은 공업화의 기계 수입 재원이었다.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서 소련 중공업을 총괄했고, 1937년 9월 23일 체포되어 소련 최고법원 군사재판부의 유죄 판결을 거쳐 1938년 2월 10일 처형되었으며 1956년 5월 19일 사후 복권되었다.
1936년 10월 50세 생일 무렵, 퍄티고르스크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 그는 형 파풀리아의 체포 소식에 충격을 받아 참석하지 않았고 아내 지나이다만 홀로 자리를 지켰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볼셰비키 원로로, 1912년 프라하 회의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1930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 캅카스 소비에트화와 트랜스캅카스 연방 수립을 이끌었으며, 1926~30년 중앙통제위원회와 노농검열인민위원회를 이끌고 1930~32년 국민경제최고회의를 거쳐 1932년부터 중공업인민위원으로 제1·2차 5개년계획을 지휘했다. 중공업인민위원으로서 자기 부문의 대량 탄압에 반대해 간부들을 감쌌고, 1937년 2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으며 공식 발표는 심장마비였다. 숙청된 측근과 가족, 죽음의 정황은 사망 원인을 둘러싼 이견과 함께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1918년 6월 노보로시스크에서 흑해함대 정치위원으로서 독일군에 넘기느니 자침하라 명령했다. "정부가 세바스토폴로 가라는 무전을 보내도 그건 명령이 아니다."
니콜라이 글레보프-아빌로프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905년 혁명기 칼루가, 모스크바, 우랄에서 지하인쇄소 활동을 벌인 직업혁명가였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 첫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에서 체신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전러시아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와 페트로그라드 노동조합평의회 의장을 지내며 볼셰비키 노동조합 운동의 핵심 인물로 자리잡았다. 1925년 제14차 당대회에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를 따르는 레닌그라드 반대파 지도자로 나섰다가 해임되었고, 이후 로스트셀마시(로스토프 농기계공장)의 초대 소장(1929-1936)으로서 소련 공업화의 상징적 기업을 건설했다. 1936년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1941년 7월 1일, 미코얀 사무실. 고문으로 짜인 거짓 자백과 대면한 후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에서 권총 한 발 — 체포되기 전에 스스로 끝냈다.
볼셰비키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오르조니키제의 측근 부인민위원을 거쳐 국방공업인민위원(1937–1939)과 항공공업인민위원(1939–1940)을 지내며 대숙청기 소련 군수산업의 조직적 틀을 세웠다.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친형으로, 소리치고 가르치는 거친 스타일과 유능한 부하들에 대한 의존으로 유명했으며, 1940년 해임되었다가 독소전 발발 직후 고문으로 짜낸 거짓 자백에 연루되어 미코얀 사무실 화장실에서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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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볼셰비키 입당, 노동자 운동
1917–1922우네차 역 적위대 참모, 아르자마스 혁명위원장, 수라시 소비에트 의장, 식량위원 등
디자이너가 모형을 보여주자 투폴레프가 말했다: "못생긴 비행기는 날지 못한다." 이 말은 그의 평생 신조가 되었다 — "잘 나는 비행기는 반드시 아름답다."
주콥스키의 제자로 출발해 세계 최초의 전금속 항공기 설계국을 이끈 공학자. TB-1, TB-3, SB, Tu-2 등 100여 기종을 설계했으며, 금속 외피와 캔틸레버 주익 구조로 소련 항공의 방향을 바꾸었다. 1937년 첩보 혐의로 체포되어 NKVD 샤라시카에서도 Tu-2를 개발했고, 전후 Tu-16, Tu-104, Tu-114, Tu-144로 제트기 시대를 열었다. 코롤료프, 수호이, 페틀랴코프, 라보치킨, 밀 등 항공우주의 한 세대를 키워낸 스승이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네 차례 스탈린상을 받고 1972년 사망했다.
1921년 10월 1일 레닌은 도네츠크 주집행위원장 겸 도누골·히무골 트러스트 책임자였던 루히모비치에게 돈바스의 중소 탄광을 임대하는 문제에 관한 편지를 보냈다.
러시아 제정 말 로스토프 지역에서 노동자 가정에 태어나 1904년부터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뛰어들었고 유대인 사회민주노동당(빈트)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망명 생활을 한 뒤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다 1913년 당에 입당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동원되었다. 1920년대에는 도네츠크 주집행위원장과 도누골 트러스트 책임자로서 파괴된 돈바스 석탄 산업 재건을 지휘했고, 쿠즈바스 석탄 개발에 이어 중공업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36년 12월 8일 신설 국방공업인민위원부의 초대 인민위원이 되었으나 1937년 10월 15일 해임되었고, 이듬해 총살된 뒤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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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17빈트 활동가, 볼셰비키 입당(1913), 하리코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1918–1920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공화국 군사인민위원, 제41소총사단 군사위원, 제14군 혁명군사위원
1940년 봄, 페틀랴코프는 자신이 설계한 Pe-2의 시험비행을 감옥 창고 지붕 위에서 지켜보았다. 아직 죄수 신분이었다.
안드레이 투폴레프의 오른팔로 TB-1·TB-3 중폭격기와 ANT-20 「막심 고리키」의 날개를 설계한 항공기술자. 1937년 '사보타주' 혐의로 투폴레프와 함께 체포되어 NKVD 샤라슈카에 수감된 상태에서도 설계를 계속했고, 고고도 전투기 VI-100을 급강하폭격기로 전환하라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지시에 45일 만에 Pe-2를 완성했다. 이 기종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소련 공군의 주력 전술폭격기로 활약하며 독소전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40년 석방, 1941년 스탈린상 1급과 두 번째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이듬해 Pe-2 생산 문제를 논의하러 모스크바로 향하던 중 탑승기가 아르자마스 인근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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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타간로크 기술전문학교 졸업, 모스크바로 이주
1911–22모스크바국립기술대학(МВТУ) 입학, 주콥스키 항공역학 연구실 근무
1921–36ЦАГИ 근무, 투폴레프의 중폭격기 개발 주임 — TB-1, TB-3, Пе-8
1939년 독일 출장에서 돌아온 폴리카르포프는 자신의 설계국이 사라졌음을 발견했다 — 기술진, I-200 계획, 공장 모두 새로 설립된 MiG 설계국으로 넘어간 후였다.
'전투기 왕'으로 불린 소련 항공기 설계자. I-15 복엽기와 혁신적 I-16 단엽기는 1934~1941년 소련 전투기 전력의 중추였으며 스페인, 중국, 할힌골, 독소전쟁 초기에 투입되었다. 1929년 조작된 사보타주 혐의로 체포·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OGPU 수용소 설계국 TsKB-39에서 I-5를 개발, 1931년 사면되었다. 1939년 독일 출장 중 설계국이 아르툠 미코얀과 미하일 구레비치의 MiG 설계국으로 이관되었으나, OKB-51을 재건해 I-185 개발을 지속했다. 3만 대 이상 생산된 U-2(Po-2)도 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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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8루스코-발티스키 공장 항공부문 엔지니어 · 시코르스키 휘하 S-16 생산 책임
1918–1923두크스(GAZ 제1공장) 기술부 근무 · 기술부장까지 승진
1923–1928GAZ 제1공장 수석 설계자 · R-1, I-1, U-2 설계
1929–1931체포 · OGPU TsKB-39에서 I-5 개발 · 1931년 사면
1933–1939TsKB-39 제2여단장 → 제84·156·1공장 수석 설계자 · I-15·I-16 개발
1940–1944OKB-51 소장 겸 수석 설계자 · I-185 개발 · 1943년부터 모스크바 항공대 교수
1931년 체포되어 벨로모르-발트 운하 건설장으로 보내진 지 1년 반 만에 '건설 현장에서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가석방되었다. 백군 포로 출신 죄수가 20년 후 사회주의노동영웅으로 크렘린 벽에 안장된 역설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소련의 수력기술자이자 공병 소장. 백군 장교 출신으로 1931년 체포되어 벨로모르-발트 운하 건설에 투입된 후 탁월한 공학 능력으로 두각을 나타내 1932년 조기 석방 및 전과 말소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운하, 볼가-돈 운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 등 소련의 대표적 수리 시설들의 설계와 건설을 총괄했으며, 194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기드로프로옉트 연구소 소장으로서 소련 수력공학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강제노동에 의존한 공사 방식은 솔제니친의 비판 대상이 되었으나, 그는 소련 내륙 수운 체계와 수력발전 인프라의 실질적 설계자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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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7알렉세옙스크 군사공병학교 졸업, 시베리아 공병대대 복무
1918–1919백군 콜차크 군대 공병 장교 (소위)
1921–1930적군 공병 교관, 키예프·수미·폴타바 군사학교에서 교편
1931–1932OGPU 체포(사건 '봄'), 벨로모르스트로이 부수석기사로 징역 중 1932년 가석방
1913년 툴루즈 항공학교, 구레비치의 동급생은 마르셀 블로크였다. 30년 후 한쪽은 MiG-15, 다른 쪽은 미라주를 설계하여 냉전 하늘에서 맞서게 될 두 유대인 전투기 설계자가 같은 교실에 앉아 있었다.
쿠르스크 지방 유대인 가정 출신. 차르 시절 혁명 활동으로 하리코프 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프랑스에서 항공공학을 수학했다. 1939년 아르툠 미코얀과 OKB-155(MiG)를 공동 창립, 부수석설계자(1939–1957)와 수석설계자(1957–1964)로 MiG-1부터 MiG-25까지 참여했다. MiG-3는 독소전 초기 주력기, MiG-15는 한국전쟁 제공권을 장악, MiG-25는 현역 최고속 요격기로 남았다. 사회주의노동영웅·6회 스탈린상·레닌상 수상. 평생 비당원이었던 유일한 최고위 군수설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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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1아흐티르카 김나지움 은메달 졸업, 하리코프 대학 입학 — 혁명 활동으로 퇴학·추방
1912–14몽펠리에 대학·툴루즈 SUPAERO 수학, 마르셀 다쏘와 동급생
1917–25하리코프 공과대학 항공공학 졸업, 글라이더 «부메랑»·«황새» 설계
1929–37모스크바 각 설계국 근무, 1936–37년 미국 더글러스사 공장 파견
1939–57OKB-155(MiG) 공동 창립, 부수석설계자 — MiG-1·MiG-3·MiG-9·MiG-15
1957–64OKB-155 수석설계자 — MiG-17·MiG-19·MiG-21·MiG-25; 무인·순항미사일 개발
1941년 말, Il-2 생산이 늦어지자 스탈린이 공장에 전보를 쳤다: "Il-2는 붉은 군대에 공기처럼, 빵처럼 필요하다."
볼로그다 빈농의 막내아들로, 열다섯 살에 집을 떠나 막노동으로 시작해 1910년 비행장 인부로 항공을 처음 접했다.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졸업 후 1933년 자신의 설계국을 세워 Il-2 스투르모빅(36,183대)을 내놓았고, 이 기체는 동부전선의 핵심 타격수단이 되었다. 전후에는 Il-12·Il-14·Il-18·Il-62 여객기로 소련 민간항공을 재건하고 제트 시대로 이끌었다. 7차례 스탈린상과 3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은 유일한 인물로, 37년간 설계국을 이끌며 소련 군용·민간 항공의 기초를 닦았다.
김나지움 시절 고멜 상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보고 소년 파벨은 숨이 멎는 듯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락방으로 올라가 모형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새가 아니라 사람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투폴레프의 제자로 항공에 입문한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 1939년 수호이 설계국(OKB-51)을 창립해 Su-2 경폭격기를 전력화했고, 스탈린의 총애를 잃어 1949년 설계국이 해체되는 시련을 겪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재건된 OKB에서 Su-7 전폭기(1960년대 소련 전술항공의 주력), Su-9·Su-15 요격기, 가변익 Su-17·Su-24 등 냉전기 소련 공군의 중추 기종들을 연이어 배출했다. 기술적 예측력으로 동시대 설계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착수한 Su-27은 세계 최상급 전투기로 완성되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스탈린상을 수상했고 1958년부터 1974년까지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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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20모스크바 공과대학 입학, 징집으로 중단 → 포병 장교, 제대
1921–1925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MVTU) 복학, 투폴레프 지도하에 졸업
1925–1938TsAGI·투폴레프 설계국 — I-4, ANT-25, ANT-37bis 설계 참여
1939–1949수호이 설계국(OKB) 창립 — Su-2, Su-6(스탈린상), Su-9 제트기
1930년 헨리 포드와의 오찬에서: "나는 공업자가 아니라 인민의 하인입니다. 디렉터 자리는 세습이 아닌 우리 당의 의지로 받은 것입니다."
툴라 농민의 아들로 푸틸로프 공장 견습공에서 출발해 소련 자동차 대량생산 체제를 세운 산업 조직자. 1926년 모스크바 자동차 공장(AMO, 후일 ZIS) 디렉터로 부임해 낙후된 소규모 공장을 유럽 최대 자동차 생산기지로 키웠고 소련 최초의 컨베이어 조립을 도입했다. 대조국전쟁 중 공장을 동부로 대피시켜 4개 도시에 새 공장을 세우면서도 전선에 트럭과 무기를 끊임없이 공급했으며, 1949년 생산 중단 없는 신모델 전환 공법으로 스탈린상을 받았다. 사후 그가 키운 공장은 ZIL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바쿠 유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유대인 기술자 출신으로, 툴라 병기공장 책임자를 거쳐 1939년 무기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쟁 직전 체포·고문당했으나 독일 침공 후 스탈린이 소환해 탄약인민위원으로 임명했고, 종전까지 포탄 생산을 4배로 끌어올렸다. 전후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1총국을 이끌며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행정·공업 기반을 총괄했고, 수소폭탄 개발까지 관장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1939년, 스탈린이 그를 초대 건설인민위원으로 지명하자 긴즈부르크는 당으로부터 받은 '엄중경고'를 솔직히 고백했다. 스탈린의 답변: «결핵 환자도 잘 살고 일하는데, 경고 하나쯤 안고 사시오.»
소련 건설을 최초로 단일 국가기구로 통합한 인물. 민스크 출신 유대인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MVTU 졸업 후 레닌 묘 구조물을 설계했으며 오르조니키제 휘하 중공업인민위원부 건설총국장을 지냈다. 1939년 초대 Наркомстрой 인민위원에 취임하여 전국 건설역량을 하나의 지휘체계로 묶었고, 전쟁 중에는 방위공장의 시베리아 긴급이전·체바르쿨 제강공장 75일 완공·라도가 호수 30km 수중 송유관 부설 등 전시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1970년까지 군사건설·건자재공업 장관과 스트로이방크 총재를 거치며 소련 건설행정의 중추로 남았다.
카추샤 로켓의 아버지, RS‑82·RS‑132를 완성하고 '우주비행학'이라는 말을 만든 기술자
1921년 크론시타트 반란 당시,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일부터 4월 18일까지 구금되었다. 붉은군대가 반란을 진압한 후에야 풀려났다. 그가 카추샤를 만들기 20년 전의 일이었다.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가스역학연구소(GDL)에서 무연화약 로켓 개발을 시작해 로켓연구소(RNII) 수석기술자(1934–1938)로서 RS-82와 RS-132 고체연료 로켓탄을 실전 배치 가능한 수준까지 완성했다. 이 로켓탄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BM-13 카추샤 다연장로켓의 핵심 탄약이 되었다. 러시아어에 '코스모나프티카(우주비행학)'라는 용어를 도입했으며 치올콥스키와 교신하며 로켓의 평화적 우주 응용을 구상했다. 1937년 대숙청 당시 허위 고발로 체포되어 1938년 1월 11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 1991년 사회주의노동영웅에 추서되었다.
1940년 3월, 완성되지 않은 T-34 시제차 두 대를 직접 운전해 눈길 750km를 달려 크렘린에 도착했다. 스탈린 앞에서 시동을 걸며 마지막 남은 힘을 쏟은 그는 귀환 후 폐렴으로 쓰러졌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제과공장 견습생을 거쳐 30세에 공학을 시작한 소련의 탱크 설계자. 하리코프 공장에서 경전차 BT 계열의 현대화를 이끌었고, 1938년부터는 순수 궤도식 중형전차 A-32 프로젝트를 추진해 T-34로 발전시켰다. 1940년 3월, 미완성 시제차 두 대를 직접 몰고 하리코프에서 모스크바까지 눈길 750km를 주파해 크렘린 앞에서 스탈린에게 선보였으나, 그 무리로 폐렴에 걸려 41세로 사망했다. 그가 만든 T-34는 독소전쟁 전체를 관통하는 소련 기갑 전력의 중추가 되었다.
톰스크-7 건설 현장에서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원자로가 아니라 빵 공장이었다. 그는 '내가 석공을 구해 오겠다'며 수용자 중 벽돌공을 직접 찾아 데려왔다.
체카 기병 출신의 소련 내무부 공병 소장이자 산업 건설자로, 원자폭탄 계획의 핵심 시설인 첼랴빈스크-40(마야크) 플루토늄 생산단지 건설을 지휘했다. 1947년 ITL 제859호 수용소와 공병 부대를 통합 지휘해 1948년까지 4만 5천 명의 인원으로 공업용 원자로와 방사화학 공장을 착공 3년 만에 가동시켜 1949년 최초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크라스노야르스크-26, 톰스크-7, 두브나, 프로트비노까지 소련 핵 지도의 주요 시설을 연이어 건설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1949)과 스탈린상(1951)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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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24제국군 기병 위생병 → 1917년 볼셰비키 입당 → 체카 기병대 내전 참전, 특별기병대대장
부하들이 그를 '위대한 예핌'이라 불렀고, 의료진은 생애 누적 피폭량을 치사량의 세 배에 해당하는 약 1,500뢴트겐으로 추산했다는 회고가 전한다.
도네츠크 마키이우카의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품팔이꾼과 목동으로 일했고 교구 학교 3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했다. 1918년 봄 볼셰비키 당에 입당해 남북전쟁에서 제1기병군 소속으로 싸웠고 1928년 제대한 뒤 1933년 비철금속·금 연구소를 졸업했다. 1946년 제1총국 부국장이 되어 원자폭탄 계획에 들어갔고 1947년 콤비나트 817호(마야크) 책임자로 임명되어 1949년 첫 소련 핵실험의 플루토늄을 생산했다. 1957년부터 1986년 11월까지 핵산업을 이끌며 폐쇄 원자력 도시들을 세웠고 1991년 1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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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928도네츠크 탄광 소년 광부, 적위대·제1기병군 복무 후 제대
1933–1941모스크바 비철금속연구소 졸업, 엘렉트로친크 공장장, 드네프르 알루미늄 공장장
1941–1945우랄 알루미늄 공장장, 전시 알루미늄 생산 총괄로 레닌 훈장 3회
1946–1953제1총국 부국장 겸 콤비나트 817호(마야크) 책임자, 첫 원자폭탄 플루토늄 생산
1953–1957중형기계공업 제1차관, 수소폭탄 개발 참여
1957–1986중형기계공업 장관(29년), 차르봄바·핵잠수함·원전·폐쇄 원자력 도시 건설 총괄
1938년 우랄마시 공장장 시절, 군사기술 2급 기술자 계급을 받았다. 전시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KV·IS 중전차와 SU 자주포의 동력계통을 책임졌고, 1945년 5월에는 쿠투조프 1급 훈장 — 대규모 부대 작전을 성공시킨 군사령관에게 주어지는 훈장을 산업 지휘관으로서 받았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산업 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전차·자주포·트랙터 생산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자동차·트랙터 공업을 연이어 관장했다. 우랄마시 공장장을 거쳐 중기계·중형기계 인민위원부에서 말리셰프, 반니코프 등과 함께 스탈린 시대 군수-산업 행정을 떠받친 실무형 관리자였다. 1955년 흐루쇼프에게 공개 비판받고 물러났으나, 이미 3개의 레닌 훈장과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급 산업 지휘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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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2그루지야 콤소몰 조직비서, 트빌리시 시위원회 책임비서
1922–1931바우만 모스크바 기계기계공학대학에서 수학하며 당 조직 업무 병행
1931–1937포돌스크 크레킹·전기기관차 공장 기술이사, 후에 공장장
1937–1939우랄마시 공장장, 군사기술 2급 계급 수여
1939–1941중기계공업 부인민위원, 제1부인민위원; 중형기계공업 제1부인민위원
1941–1946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 — 전차·자주포·트랙터 동력계통 생산 총괄
1946–1950자동차공업 장관, 자동차·트랙터공업 장관
1950–1955농업기계제조 차관·제1차관, 기계제조 장관, 자동차·트랙터·농업기계 장관; 1955년 퇴임
NKVD 수사를 받으며 갇혀 있던 연구실에서 그는 발전기를 설계했다. 13년 후, 그가 주도한 전자기 분리법으로 소련은 수소폭탄의 리튬-6을 얻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치과기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레닌그라드 공업대학을 졸업하고 '엘렉트로실라' 공장에서 평생 전기기계공학에 헌신했다. 1938년 NKVD 수사를 받았으나 수감 중에도 공장 내 특수연구실에서 발전기 설계를 계속했고, 전쟁 발발로 풀려나 주임기사로 전시 생산을 이끌었다. 1951년 전기공업장관에 올라 스탈린 말기 전기기계·케이블·무선·전력기기 부문을 총괄했으며, 특히 전자기 동위원소 분리법 개발과 리튬-6 생산 기술 확립을 주도해 소련 핵무기 계획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네 차례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수상한 과학자-행정가로서, 말년에는 원자력이용총국 부국장으로 핵에너지 평화적 이용으로 전환하는 과도기를 감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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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38'엘렉트로실라' 공장 설계기사 → 전기기계연구실장 → 기술부장
1938–1941NKVD 수사 중 '엘렉트로실라' 제40부서 특수연구실장으로 발전기 설계 지속
1941–1947'엘렉트로실라' 공장 주임기사 → 부공장장, 특수설계국장(1945–1946) 겸임
“내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나는 늘 비행기를 생각했다 — 이미 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비행기를.”
세묜 라보치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 공군 주력 전투기 La-5와 La-7을 설계한 항공기 설계자로, 22,000대 이상 생산되어 동부전선 제공권 장악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LaGG-3로 시작한 OKB-301은 전후 La-176으로 소련 최초 음속 돌파(1948년)를 달성했고, 1950년대 이후 S-25 베르쿠트 방공망과 SA-2 대공미사일, 순항미사일 부랴 개발로 방공·우주 분야로 전환했다. SA-2는 1960년 게리 파워스의 U-2기 격추로 냉전사에 기록되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스탈린상 4회, 과학아카데미 회원, 공병기술소장을 지냈으며 1960년 사리샤간 시험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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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0붉은군대 복무, 러시아 내전 참전
1920–1927모스크바 바우만 고등기술학교 수학, 항공역학 기사 자격 취득
1927–1939각 항공설계국에서 근무, 1939년 항공기 제작 수석설계사 직급
1939–1940고르부노프·구드코프와 함께 LaGG-3 전투기 공동 개발, OKB-301
1940–1945OKB-21 수석설계사(고리키), La-5·La-7 전투기 설계, 22,000대 이상 생산
1945–1960OKB-301 총책임자(힘키), La-15 제트 전투기, S-25·SA-2·부랴 미사일 개발 주도
쿨리크 원수는 '네 포는 필요 없다'고 말했고, 그라빈은 '어째서입니까?'라고만 답할 수 있었다. 그는 공장에서 비밀리에 ZiS-3를 양산했고, 1942년 2월 정식 채택될 때 이미 1천 문 이상이 전선에 있었다.
바실리 그라빈은 소련의 가장 중요한 포병 설계자로, 제2차 세계대전 최대 생산 화포인 ZiS-3 76.2mm 사단포(10만 3천 문 이상)를 비롯해 ZiS-2 57mm 대전차포, T-34의 주무장 F-34 전차포, BS-3 100mm 야포를 설계했다. 고리키 제92공장 수석설계자와 중앙포병설계국(TsAKB) 국장을 지내며 신형 화포 개발을 수년에서 수개월로 단축한 속도설계 방식을 확립했고, 인간공학이란 용어조차 없던 시절 포 설계에 생리학자를 참여시켰다. 설계와 생산기술을 통합한 그의 방식은 전시 화포의 컨베이어 조립과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전후 미사일 시대의 도래로 그의 영향력은 쇠퇴했고, 후기 설계 중 S-60 대공포만이 정식 채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