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희곡 『이레네가 무슨 뜻일까?』에서 평화의 이름을 내세우며 싸움을 벌이는 인물들을 그렸다. 외교 경험은 전쟁과 방관을 다루는 연극의 소재가 되었다.
스페인의 연극 연출가·극작가이자 공화국 외교관. 마누엘 아사냐의 처남으로, 현대적 연극 교육과 무대 실험을 추진했으며 내전 중 제네바 총영사로 활동했다. 외교 활동에서는 대통령과 정부 사이의 갈등에 얽혔다. 프랑스 망명 중 체포되어 스페인에서 수감 생활을 했고, 이후 멕시코에서 연극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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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바야돌리드 대학과 마드리드 대학에서 수학하고 법학 학위를 받았으며, 볼로냐 스페인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1917마드리드 아테네움에서 우나무노의 『페드라』를 연출하며 연출가로 데뷔했다.
1928–1929마드리드의 렉스 극장에서 실험 극단 '엘 카라콜'을 이끌었다.
1930–1935마르가리타 시르구의 극단에서 연출과 문학 자문을 맡아 마드리드 에스파뇰 극장을 함께 운영했다.
1932에스파뇰 극장 안에 연극 학교인 에스파뇰 실험극장을 세웠다.
1934마리아 게레로 극장을 배정받아 연극학교 '연극예술학교'(TEA)를 세웠다.
내전기제네바 총영사로 재직했고, 아사냐의 일기가 도난당한 사건에 휘말렸다.
1940년대프랑스에서 체포되어 스페인으로 이송되었고, 프랑코 정권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3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여러 형무소를 거쳤다.
1947석방된 뒤 멕시코로 망명해 연극 연출과 강연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1953–1967멕시코와 과테말라에서 연출과 강연을 이어갔으며 1967년 멕시코에서 사망했다.
오데사 유대인 지구의 이야기꾼으로, 부됸니 기병대를 따라 폴란드 전선을 달리며 『기병대』를 썼다. 혁명의 잔혹을 너무 정직하게 그려 부됸니가 격노했다. 예조프의 아내와의 인연까지 겹쳐 1939년 체포되었고, 원고를 돌려달라는 말을 남긴 채 1940년 총살당했다. 압수된 원고들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장례식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장례식은 내 모든 시나리오와 내 모든 영화를 관통한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어린 시절부터 내 상상력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소비에트 무성영화의 서정적 몽타주 미학을 개척한 영화감독. '우크라이나 3부작'(특히 세계 영화사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히는 〈대지〉(1930))으로 우크라이나의 대지와 민중을 시적으로 형상화했으며, 스탈린의 후원과 통제 사이에서 활동하며 키이우 도브젠코 영화 스튜디오의 기초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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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데뷔작 〈바샤 개혁가〉·〈사랑의 열매〉 연출
1928–1930'우크라이나 3부작' 〈즈베니고라〉·〈무기고〉·〈대지〉 발표 — 서정적 몽타주 미학 확립
1932첫 유성영화 〈이반〉 발표 —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건설을 다룬 산업 서사시
1935〈아에로그라드〉 발표, 레닌훈장 수훈
1939–1941〈쇼르스〉 발표, 스탈린상 1급 수상
1943–1945종군기자 겸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우리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를 위한 전투〉 등 제작
「나는 어떤 운명이든 지금 내가 가진 이 운명보다는 받아들이겠다」 — 1954년 작가동맹 회의에서, 복권되었으나 다시 공격받던 자리에서.
미하일 조셴코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가장 널리 읽힌 풍자 작가로, 혁명 이후 평범한 시민의 어눌한 목소리로 서술되는 스카즈 기법을 통해 공동 아파트, 관료주의, 혁명적 이상과 일상의 괴리를 포착했다. 세라피온 형제단의 핵심 멤버였던 그는 1920~1930년대에 약 1억 부의 책을 판매하며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1946년 안나 아흐마토바와 함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공개 비난을 받고 작가동맹에서 제명되어 빈곤에 내몰렸으며, 이는 전후 스탈린주의 문화 탄압의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었으나 자신의 작품을 철회하기를 거부했고, 1958년 무명 속에 사망했다.
세르게이 예세닌은 농민 가정에서 자라 러시아 농촌의 기억과 구전적 이미지에 현대적 서정성을 부여한 시인이었다. 그는 10월혁명을 농민의 관점에서 지지했지만, 산업화와 국가 권력이 자신이 꿈꾼 사회주의와 어긋난다고 느끼며 점차 환멸을 드러냈다. 이미지니즘을 이끈 대표적 시인으로서 그의 작품은 혁명기의 해방감과 도시화가 낳은 상실을 함께 기록했다. 1925년 12월 레닌그라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죽음은 신경제정책기 문화의 어두운 긴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카잔 함락 후 농민 여인으로 변장하고 백군 점령지에 잠입했다가 일본 정보장교에게 체포되었다. 심문 도중 방심한 문틈으로 빠져나와 사라졌다. — 트로츠키, 『나의 생애』
페테르부르크 은세기 문단에서 출발한 볼셰비키 작가·외교관·정치위원. 아크메이즘의 미학에서 출발해 혁명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하는 독보적인 문학적 르포의 창시자가 되었다. 내전기에는 해군 참모부 최초의 여성 정치위원으로 복무했고, 1923년 함부르크 봉기에 코민테른 요원으로 참여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외교 사절단에서 활약했다. 1926년 30세에 장티푸스로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혁명의 파토스를 문학으로 옮기는 데 일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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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희곡 『아틀란티스』로 문단 데뷔 (알마나크 『시포브니크』)
1915–1916반전 문예지 『루딘』 편집, 구밀료프·만델슈탐 등과 교류
1918제5군 정찰분견대 정치위원, 백군 점령 카잔에 잠입 정찰
1918–1919해군 참모부 정치위원 — 트로츠키가 임명한 최초의 여성
1919–1920볼가-카스피 소함대 및 발트함대 정치국에서 복무
1921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 참여, 후일 『아프가니스탄』(1925) 출간
1923코민테른 요원으로 함부르크 봉기 참여, 『바리케이드 위의 함부르크』(1924) 집필
1920년 8월 7일 밤, 에이데만이 이끄는 우안집단은 드네프르 강을 도하해 카홉카 교두보를 점령했고, 페레코프에서 60km 떨어진 이 교두보는 브란겔군의 측면과 후방을 겨누는 창끝이 되었다.
라트비아 출신의 소비에트 군사 지휘관이자 작가로, 내전에서 제13군을 지휘하며 카홉카 교두보 방어와 브란겔군 격퇴에 결정적 역할을 한 내전 영웅이었다. 이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과 오소아비아힘 의장으로 적군 간부 양성과 민간 국방훈련 체계를 구축했으나,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 피고인으로 총살되고 1957년 복권됐다.
1952년 8월 12일, 그는 다른 이디시 문인들과 함께 처형되어 ‘살해된 시인들의 밤’의 상징이 되었다.
페레츠 마르키시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이디시 문학의 중심에 선 시인이자 작가, 극작가였다. 그의 시는 전쟁과 혁명, 유대인의 경험을 이디시어로 엮었고, 그는 소비에트 문화 건설에 참여하면서도 유대인 문화와 자치의 문제를 독자적으로 제기했다.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활동은 그를 전후 국가 탄압의 표적으로 만들었으며, 1952년 다른 이디시 문인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정치적 숙청이 문학과 언어의 제도까지 파괴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헤밍웨이는 프라우다 특파원을 이렇게 기억했다: "내가 만난 가장 지적인 인간...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두뇌와 내면의 위엄, 겉으로 드러나는 뻔뻔함과 유머를 지녔다."
오고뇨크·크로코딜 등 주요 소비에트 잡지를 이끌고 소비에트 작가동맹 외국부를 맡았던 기자 겸 공론가. 키예프에서 태어나 1917년 혁명과 내전에 참여했고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스페인 내전에 『프라우다』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일기』(1938)를 남겼다. 1938년 체포되어 1940년 레포르토보 교도소에서 총살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내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희곡들을 이해했다 — 마르크스야말로 내 희곡의 유일한 관객이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극작가이자 서사극의 창시자였다. 1920년대 후반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한 후, 감정적 몰입을 거부하고 관객의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낯설게 하기'와 변증법적 연극론을 정립했으며, 《서푼짜리 오페라》·《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사천의 선인》 같은 작품들로 자본주의와 전쟁을 무대 위에서 해부했다. 1933년 나치를 피해 스칸디나비아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1947년 HUAC 조사 후 유럽으로 돌아와 1949년 동베를린에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립해 전후 세계 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37년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올 맨 리버〉의 체념적 가사를 바꿔 불렀다: "하지만 나는 계속 웃는다 / 우는 대신에 / 나는 계속 싸워야 한다 / 죽는 그날까지." 웨일스에서 "예술가는 편을 들어야 한다. 나는 선택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고 선언했다.
세계적 베이스-바리톤이자 배우로 〈올 맨 리버〉와 《오셀로》로 정상의 예술가에 오르면서도, 그 예술을 흑인 해방운동과 국제 반식민주의 투쟁에 바친 사회주의자. 스페인 공화파와 1949년 파리 평화대회를 지지한 뒤 소련 지지를 철회하지 않아 매카시 시대 여권 박탈과 블랙리스트를 겪었지만, 1958년 대법원 판결로 여권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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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19러트거스대학, 미식축구 올아메리칸 2회, 졸업생 대표
1919–1923컬럼비아 로스쿨, NFL 선수 활동
1924–1928《황제 존스》 등 주연, 할렘 르네상스 스타로 부상
1928–1939런던 《쇼 보트》로 세계적 명성, 《오셀로》(1930)로 영국 첫 흑인 오셀로
1932년 10월, 고리키의 말라야 니키츠카야 집에서 스탈린은 소련 작가들을 향해 "인간 영혼의 엔지니어"라는 말을 남기고, 1년 전 자기 손에 파멸한 작가를 그 자리에서 찾았다.
기술자이자 토지개량 전문가였던 그는 소설가로 돌아서 소련 문학에 뚜렷한 목소리를 남긴 작가였다. 본명은 클리멘토프이며, 아버지의 이름 플라톤에서 따온 '플라토노프'는 필명이었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쓴 『체벤구르』와 『구덩이』는 집단화와 스탈린 정책을 회의적으로 그려 수십 년간 출판되지 못했다. 1951년 1월 5일 모스크바에서 결핵으로 사망했고, 마지막 출판물은 러시아 민담을 다시 쓴 이야기 모음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