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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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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재정·계획 인물 124명

그리고리 페트로비치 코샤첸코

Григорий Петрович Косяченко

스탈린 말기와 전환기의 고스플란 계획가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3년 3월 고스플란 의장에 올랐으나 넉 달 만에 사부로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워낙 짧아 많은 연구서가 이 임기를 아예 기록하지 않는다.

열여섯 살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소련의 경제 계획가로,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에서 적군 정치장교를 거쳐 중앙계획의 핵심 간부로 올라섰다. 전시에는 산업 대피와 군수 물자 생산을 조정하는 군사경제 계획 수립에 참여했고, 전후 고스플란 기관지 《플라노보예 호자이스트보》의 편집장(1944–1949)을 지냈다. 1953년 3월부터 6월까지 말렌코프 제1차 정부 아래에서 사부로프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임기 사이에 잠시 고스플란 의장을 맡았으며, 이후 1957년까지 다시 제1부의장으로 복귀했다. 말년에는 재무차관과 재무부 산하 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소비에트 재정 50년》(1967) 편찬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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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2적위대 · 파르티잔 · 제42소총사단 정치일꾼
  • 1922–1929톨마초프 군사정치아카데미 수료 후 군사정치학교 교원
  • 1929–1937적색교수경제연구소 수료, 프룬제·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정치경제학 주임
  • 1940–1949고스플란 부의장 · 《플라노보예 호자이스트보》 편집장(1944–1949)
  • 1949–1953고스플란 제1부의장 · 초대 코메콘 소련 상임대표(1949)
  • 1953 (3–6월)고스플란 의장
  • 1953–1957고스플란 제1부의장
  • 1957–1970재무차관(1957–1960) · 재무연구소 소장(1960–1970)

이반 블라디미로비치 코발료프

Ив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Ковалёв

대군을 비밀리에 움직인 철도 장군, 귀걸이 하나로 실각하다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준 일이 스탈린에게 밀고되자, 아무 설명도 없이 당과 장관직에서 쫓겨났다.

이반 코발료프는 위대한 조국전쟁 중 붉은 군대 군사수송을 총괄하고 인민교통위원(1944–1948)을 지낸 소비에트 군수송 지도자였다. 농민 출신으로 철도부대에서 경력을 시작해,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반격에서 대규모 병력의 비밀 재배치를 성공시켜 스탈린으로부터 전략작전 지휘에 비견된다는 평가와 함께 수보로프 훈장과 쿠투조프 훈장 1급을 받았다. 전후 철도 복구와 포츠담 회담 수행 후 1948년 스탈린의 개인 대표로 마오쩌둥에게 파견되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기 양국 지도부 사이의 비밀 메신저 역할을 했다. 아내 생일에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선물한 일이 밀고되어 장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참모대학교 교수와 IMEMO 연구원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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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붉은 군대 정찰병, 보로네시 체카 대대 적군 병사
  • 1935군사수송대학 우등 졸업
  • 1937–1939서부철도 관리국장
  • 1939–1941교통인민위원부 중앙군사부장 · 위원회 위원
  • 1941–1944붉은 군대 군사수송국장 · 중앙군사수송국장
  • 1944–1948소비에트 연방 교통인민위원 · 교통장관
  • 1948–1950스탈린의 중공 대표 · 주중 소비에트 군사고문단장
  • 1951–1957소비에트 연방 석탄공업 차관
  • 1960–1969참모대학교 전략학과 선임강사
  • 1969–1985IMEMO 선임연구원 · 연구실장 · 수석연구원

빅토르 게오르기예비치 바카예프

Виктор Георгиевич Бакаев

소련 상선대를 세계적 해운 강국으로 키운 16년 장관

1962년 가을, 바카예프는 '아나디리' 작전의 해상 수송을 진두지휘했다. 쿠바로 향하는 소련 상선들은 미사일과 부대를 은닉한 채 대서양을 횡단했고, 그는 이를 '소련 해운 역사상 가장 복잡한 수송 임무'라고 불렀다.

브랸스크의 노동자 가문에서 태어나 12세에 항만 공장 견습공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1919년 16세로 적군에 입대해 내전에 참가했다. 모스크바 교통기술자대학을 졸업한 뒤 항만 건설과 해상 운송 조직화에 평생을 바쳤으며, 대조국전쟁 중에는 무르만스크 항에서 연합국 군수물자 하역을 총괄하는 국방위원회 전권대표로 활약했다. 1954년 해운부 장관에 오른 뒤 16년간 소련 상선대를 이끌며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이 세계 최대 상선단 중 하나를 보유한 해운 강국으로 부상하는 토대를 닦았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작전명 '아나디리'의 해상 수송을 조직한 핵심 실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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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5베르댠스크 항만 공장 견습공
  • 1919–1920적군 복무, 러시아 내전 참전
  • 1922–1929모스크바 교통기술자대학 수운학부 수학
  • 1929–1937중앙해운관리국 기사 → 항만중앙관리국장
  • 1937–1942군사수송아카데미·레닌그라드 수운대학 교원
  • 1943–1945국방위원회 전권대표, 무르만스크 항 연합군 화물 하역 총괄
  • 1945–1952해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해운부 차관
  • 1952–1953해운부 제1차관
  • 1953–1954해운·하운부 제1차관 → 각료회의 운수·통신국 부의장
  • 1954–1970소련 해운부 장관
  • 1970–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자연과학·기술사 연구소 연구원

겐나디 이바노비치 스미르노프

Геннадий Иванович Смирнов

8개월 만에 숙청으로 사라진 계획 수장

1937년 2월 26일, 『이즈베스티야』 1면에 33세의 신임 고스플란 의장 스미르노프의 사진이 실렸다. 8개월 뒤 그는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

소련의 경제 관료이자 계획 이론가로, 고스플란 자본건설 부문과 종합계획국을 거쳐 1937년 2월 고스플란 의장에 올랐다. 메즐라우크의 최측근으로서 그를 대신해 임명되었으나, 대숙청이 절정에 달한 8개월 동안 계획기구를 이끌다 1937년 10월 체포되었다.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938년 7월 총살되었으며, 1차 5개년계획을 설계한 계획 관료들마저 숙청의 대상이 된 순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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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0철도 공장 제도 보조, 농업 코뮌 활동, 콤소몰 지도원
  • 1921–1924심비르스크 콤소몰 정치교육부장·서기, 시당 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4–1929크룹스카야 공산주의교육 아카데미·경제연구소 대학원 수학, 최고경제회의 자본건설부장
  • 1930–1934소유즈콜호즈방크 부총재, 고스플란 자본건설부문장·간부회 구성원
  • 1934–1937고스플란 부의장 겸 종합계획국장 — 메즐라우크의 최측근
  • 1937.02–10고스플란 의장, 공업화 계획 총괄
  • 1937.10–1938체포·기소·사형 — 대숙청이 계획기구마저 집어삼키다
  • 1956사후 복권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보즈네센스키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Вознесенский

전시계획의 천재, 레닌그라드 사건에 죽다

국방위원회 회의에서 보즈네센스키는 스탈린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산업이 감당할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곤 했다. 바실렙스키 원수는 "그의 말이 결정적이었고, 거의 틀리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소련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국원. 35세에 고스플란 의장이 되어 대조국전쟁 시기 소련 전시 경제 계획을 총괄했으며, 국가방위위원회 위원으로 산업 대피와 군수 생산 전환을 지휘했다. 1947년 『전시 소련경제』로 스탈린상을 수상하고 전후 경제 부흥 계획을 주도하며 스탈린의 총애를 받는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했다. 즈다노프 사후 말렌코프·베리야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몰락, 1950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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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레닌그라드 당·계획기관에서 빠르게 성장한 젊은 경제관료
  • 1938–1941, 1942–1949고스플란 및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전시 생산계획 조정
  • 1941–1945국가방위위원회와 전시 경제관리의 핵심 실무자
  • 1946–1949전후 유력 경제 지도자로 부상, 『전시 소련경제』 저술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처형

바실리 표도로비치 포포프

Василий Фёдорович Попов

전후 화폐개혁을 집행한 10년의 국가은행 총재

1964년 부고에서 코시긴과 미코얀은 그가 소련의 "재정·신용 체계를 조직하고 강화하는 데 중대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로스토프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920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하고 1923년 당에 들어갔다. 돈 강과 북캅카스 지역 재정기관에서 11년간 실무를 쌓은 뒤 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를 마치고 타타르 자치공화국, 러시아공화국, 연방 차원의 재정 요직을 거쳐 1948년 소련 국가은행 총재가 되었다. 10년간 고스방크를 이끌며 1947년 화폐개혁의 후속 집행, 전후 복구 자금 배분, 1950년대 소비재·주택 건설 확대 국면의 신용 공급을 관리했고, 1958년 흐루쇼프 체제 아래 강등되어 1960년 병으로 퇴직했다. 노동자 출신 재정 관료가 스탈린 후기에서 탈스탈린화 초입까지 소련 통화·신용 시스템의 일상적 작동을 책임진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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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3붉은 군대 자원입대, 돈 군소함대 복무 후 철도 형사 및 식량인민위원부 열차 사령관
  • 1923–1934돈·북캅카스 지역 재정기관에서 금융 대리인·감독관·구·시 재정과장으로 승진
  • 1934–1937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 수료
  • 1937–1938타타르 자치공화국 재무부인민위원,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 1938–1940러시아공화국 재무인민위원 → 소련 재무부인민위원 → 제1부인민위원
  • 1940–1948소련 국가통제부인민위원(후에 장관), 협동조합 총국장, 각료회의 무역·경공업국 부의장
  • 1948–1958소련 국가은행 총재 (1954년까지 재무차관 겸임)
  • 1958–1960국가은행 제1부총재로 강등, 1960년 6월 병으로 연금 퇴직

보리스 파블로비치 베셰프

Борис Павлович Бещев

29년간 소련 철도를 이끈 최장수 장관

1930년대 후반, 젊은 엔지니어의 열차 편성 시간 단축 제안을 검토한 라자르 카가노비치는 이렇게 적었다: '베셰프 동지의 재능과 연구 자질을 키워줘야겠다.'

철도 전문 엔지니어 출신 최초의 소련 철도장관으로, 1948년부터 1977년까지 28년 7개월간 재임하며 소련 장관 중 최장 기간 재임 기록을 세웠다. 전후 복구를 진두지휘하여 1950년까지 철도 화물 회전율을 전쟁 전보다 45% 끌어올렸고, 이후 증기기관차에서 디젤·전기 견인으로의 역사적 전환을 주도해 철도 수송 비용을 약 3분의 1 절감했다. 재임 기간 소련 철도 화물 회전율은 8배 증가했고 2만 3,500km의 신규 간선이 건설되었으며, 56개로 분산된 철도국을 26개 대간선으로 통합했다. 바이칼-아무르 간선(BAM)의 설계·측량 작업을 재개시키고 철도 전산화와 고속 운행 실험의 선구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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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레닌그라드 철도운수기사 연구소 졸업, 모스크바 호브리노 역 선임기사
  • 1937–1940오르조니키제 철도국장
  • 1940–1941옥탸브리스카야 철도국장
  • 1941–1942교통인민위원부 특별전권대표, 레닌그라드 전선 군수수송 및 대피 총괄
  • 1942–1944쿠이비셰프 철도국장
  • 1944–1946교통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운수관리국장
  • 1946–1948교통부 제1차관
  • 1948–1977소련 교통부 장관 (28년 7개월)

레오니트 가톱스키

Лев Маркович Гатовский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학문으로 정초한 편집자

1949년 여름, 보즈네센스키의 『소련 전시경제』를 '중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작'이라 평했다는 이유로 당 중앙위 결정에 따라 《볼셰비키》 잡지에서 해임되었다.

소련의 경제학자,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보프로시 예코노미키》 주필(1957–1965)로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학문으로 정초했다. 1929년 곡물 시장 연구로 집단화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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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민스크에서 의사의 아들로 출생 (유대계)
  • 1924플레하노프 국민경제연구소 졸업
  • 1927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8–1931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가격 부문 책임자, 제1·2차 5개년 계획 작성 참여
  • 1931–1936공산주의 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비에트 무역 부문 주임
  • 1933–1937중앙국민경제회계국(TSUNKHU) 무역회전·국민경제균형 부서장
  • 1939–1949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볼셰비키》 잡지 편집위원
  • 1949보즈네센스키 저서 호평으로 《볼셰비키》·고등당학교에서 해임
  • 1957–1965《보프로시 예코노미키》 주필
  • 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정치경제학)
  • 1965–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 1971–1997경제연구소 주임연구원
  • 1997모스크바에서 사망, 바간코보 묘지에 안장

알렉세이 안드레예비치 포스코노프

Алексей Андреевич Посконов

코시긴 개혁기 고스방크를 이끈 바시키르 출신 재정 엘리트

한 번은 '인민의 적'과 사냥을 갔다는 이유만으로 당적을 박탈당하고 형사입건되었다.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가 직접 나서 그의 무죄를 입증했다.

우파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열한 살부터 일하며 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세무사로 공직에 들어간 후 평생 금융계에 몸담았다.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졸업 후 우파 시·주 재정과장을 거쳐 1940년 러시아공화국 재정차관, 이듬해 재정인민위원이 되었고, 전후 소련 재무차관·제1차관으로 즈베레프와 가르부조프를 보좌했다. 1963년 8월 고스방크 총재로 취임하여 코시긴의 1965년 경제개혁(이윤 지표, 국영농장 독립채산제, 콜호스 보장임금제(1966))의 신용·결제 측면을 집행했고 러시아공화국 고스방크를 신설했다. 1937년 사냥 동행을 이유로 '인민의 적' 연루 혐의를 받았으나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 개입으로 복권된 이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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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제본소 견습공, 약국 창고 노동자
  • 1919–1923붉은군대 복무, 제재소 노동자, 공장위원회 지도원
  • 1923–1931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세무사·과장·차장·재정감독국장, 콜레기움 위원
  • 1931–1934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수학, 경제·재정 전공
  • 1934–1939우파 시 재정과장 → 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선임감사관
  • 1939–1940칼리닌주 재정과장
  • 1940–1941러시아공화국 재정부인민위원
  • 1941–1945러시아공화국 재정인민위원
  • 1945–1960소련 재무차관 · 콜레기움 위원
  • 1960–1963소련 재무제1차관
  • 1963–1969국가은행 총재 — 1965년 개혁 신용·결제 집행, 국영농장 독립채산제, 콜호스 보장임금제, 러시아공화국 고스방크 신설
  • 1966–1969CPSU 중앙감사위원회 위원

야코프 예르몰라예비치 차다예프

Яков Ермолаевич Чадаев

전시 정부 법령에 스탈린과 함께 서명한 고스플란 경제학자

1941년 6월 21일 저녁, 포스크료비셰프가 속삭였다. '주인께서 방금 티모셴코와 흥분해서 통화하셨소... 독일군 공격이 임박한 것 같소.' 차다예프가 물었다. '우리 말이오?' '그럼 누구겠소?'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고스플란 부의장(1938–1949)으로서 전시 계획경제의 실무를 떠받쳤으며, 1940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을 겸임하며 정부 문서 체계 전체를 관장했다. 그의 서명은 수천 건의 전시 법령에서 스탈린의 서명과 나란히 실렸으며, 대피 산업 조정과 원자력 프로젝트의 초기 자원 배분에도 관여했다. 전후에는 고스플란 RSFSR 의장과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1962–1975)을 지내며 계획 기구에 평생 몸담았고, 《위대한 조국전쟁 시기 소련의 경제》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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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2우드무르트 자치공화국 고스플란 부의장
  • 1933–1937소련 고스플란 선임경제학자·생산경제 부문 부책임자
  • 1937–1939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인민위원회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 1939–1940소련 인민위원회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부위원장
  • 1940–1949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 1949–1962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 고스플란 RSFSR 제1부의장
  • 1962–1975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표트르 파데예비치 로마코

Пётр Фаддеевич Ломако

소련 비철금속공업의 창설자이자 고스플란 의장

1988년 기네스북이 46년 장관직을 기록할 때, 로마코는 이미 2년 전 은퇴한 상태로 모스크바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소련 비철금속공업의 창설자로 46년간 장관직을 수행한 금속공학자다. 알루미늄·타이타늄 산업의 기초를 닦고 전시 우라늄 공급으로 핵개발을 뒷받침했으며, 고스플란 의장으로 계획경제 재중앙화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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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콜추기노 비철금속가공공장장
  • 1939–1940비철금속공업 부인민위원, 알루미늄·마그네슘 총국장
  • 1940–1948비철금속공업 인민위원·장관, 전시 공장 이전과 우라늄 공급 총괄
  • 1948–1950금속공업부 제1차관으로 통합 부처에서 실무 지휘
  • 1950–1953, 1954–1957비철금속공업 장관, 알루미늄·희귀금속 생산 확대 주도
  • 1957–1961크라스노야르스크 소브나르호스 의장, 지역경제 개혁 실무
  • 1962–196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플란 의장, 계획체계 재중앙화 주도
  • 1965–1986비철금속공업 장관, 브레즈네프기 산업 확장과 다이아몬드·타이타늄 생산 개시

가오강

高岗

만주에서 사실상 독자적 권력을 휘둘렀다가 마오의 함정에 걸려 죽음으로 몰락한 당내 2인자

'이 훈장은 후방의 곰보딱지 가오강에게 가야 합니다': 1953년 7월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훈장을 받으며 펑더화이가 한 말

산시성 유격 근거지에서 출발해 만주(둥베이)의 당·정·군을 총괄한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자로, 1949년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 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둥베이 군구 사령원으로서 중국인민지원군의 후방 기지와 보급망 전반을 책임졌으며, 펑더화이조차 '이 훈장은 곰보딱지 가오강에게 가야 한다'고 인정했을 정도로 참전의 물질적 토대를 조직했다. 1952년 국가계획위원회 주석으로 발탁되었으나, 류샤오치를 대체하려 한 권력 투쟁이 '가오-라오 반당 연맹'으로 규정되며 실각, 1954년 가택연금 중 수면제로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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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중국공산당 입당
  • 1932–1935산시-간쑤 소비에트 지역 창설, 대장정 종착 기지 제공
  • 1941정풍운동 지도소조 위원
  • 1945–1952둥베이국 부서기(1945), 서기(1946), 둥베이 인민정부 주석(1949), 둥베이 군구 사령원 겸 정치위원
  • 1949중앙인민정부 부주석
  • 1950–1953둥베이 변경 방위군 사령원, 중국인민지원군 후방·보급 총책
  • 1952–1954국가계획위원회 주석, 제1차 5개년 계획 주도
  • 1954'가오-라오 반당 연맹'으로 실각, 8월 자살

블라디미르 니코노비치 스타롭스키

Владимир Никонович Старовский

소련 통계를 35년간 관장한 인물

«우리에겐 다른 숫자가 없습니다. 스타롭스키 동무는 아주 신중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숫자를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방 회계부서입니다. 나는 그를 신뢰합니다.» — 흐루쇼프, 중앙위원회 상임간부회, 1964년 8월 19일.

1940년부터 1975년까지 소련 중앙통계국(ЦСУ)을 이끌며 35년간 국가 통계를 총괄했다. 1939년 인구총조사를 시작으로 소련의 모든 공식 인구·경제 통계를 관장했으며, 고스플란이 국가계획을 세우는 기초 데이터를 생산하는 기관의 수장으로서 명령경제의 정보 기반을 구축했다. 경제학 박사이자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서 수리통계 방법론의 기초를 닦았고, 흐루쇼프가 공개적으로 신뢰를 선언한 유일한 통계 책임자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글루시코프의 국가전산망(OGAS) 구상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여 소련 정보기술의 경로에 논란의 여지가 큰 전환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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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3우스티시솔스크 현 통계국 사무원·통계사
  • 1924–1926최고경제회의(VSNKh) 통계사, 모스크바국립대 법학부 졸업
  • 1926–1930소련 중앙통계국(ЦСУ) 통계사·연구원; RANION 경제연구소 대학원 수료
  • 1931–1937고스플란 ЦУНХУ 연구원, 인사부 차장
  • 1937–1939ЦУНХУ 전연방인구총조사국 차장
  • 1940–1941고스플란 ЦУНХУ 국장
  • 1941–1948고스플란 ЦСУ 국장 겸 고스플란 부의장
  • 1948–1975소련 각료회의 직속 ЦСУ 국장 (1957년부터 각료 급)

알렉산드르 아키모비치 이시코프

Александр Акимович Ишков

소련 원양어선단의 설계자, '어류 마피아'로 퇴장하다

1978년 '어류 마피아' 사건으로 부하 리토프가 총살형을 선고받았지만, 브레즈네프가 직접 개입했다. 이시코프는 그저 연금으로 보내졌다.

소련 수산업을 거의 40년간 이끈 정치인으로, 1940–1950년과 1954–1979년 수산장관을 지내며 소련 수산업 역사상 최장수 수장을 기록했다. 그의 지도 아래 소련은 북극에서 남극까지 전 해역을 누비는 원양 어선단을 구축했고 연간 어획량을 130만 톤에서 930만 톤으로 끌어올려 세계 최대 수산국이 되었다. 대형 냉동 트롤 어선(BMRT) 도입, 오케안(Okean) 전문 판매망, 수산업자의 날 제정도 그의 작품이다. 말년에 부하 블라디미르 리토프가 '어류 마피아' 스캔들로 처형됐지만 브레즈네프의 비호로 무사히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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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9아조프-흑해·볼가-카스피 국영어업트러스트 관리직
  • 1939–1940소련 수산공업 부인민위원
  • 1940–1946소련 수산공업 인민위원 → 수산공업장관
  • 1946–1948소련 서부지역 수산공업장관
  • 1948–1950소련 수산공업장관
  • 1950–1954수산공업 차관·유역관리국장
  • 1954–1957소련 수산공업장관
  • 1957–1965국가계획위원회 수산부문 책임자 (장관급)
  • 1965–1979소련 수산장관

천윈

陈云

'새장 경제' 개념으로 중국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설계한 공산당 원로

'새장은 계획이고, 그 안에서 새[경제]는 마음껏 날 수 있다.' — 1982년, 시장과 계획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핵심 구상을 정식화하며

중국 공산당 제1·2세대 지도부의 핵심 인물로, 중국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설계자 역할을 수행했다. 상하이 상무인서관 식자공 출신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대장정과 옌안 정풍운동을 거치며 당 조직부장으로서 마오쩌둥의 측근이 되었다. 1949년 이후 중앙재경위원회 주임으로서 제1차 5개년 계획을 입안하고 물가 안정과 통일 재정을 확립했으며, 대약진 붕괴 이후 저우언라이·덩샤오핑과 함께 경제 재건을 주도했다. 1980년대에는 '새장 경제' 개념(시장은 계획이라는 새장 안에서 자유롭게 날아야 한다)을 정식화하며 덩샤오핑에 이은 중국 제2의 실력자로 개혁의 속도를 조절하는 보수파의 구심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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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상하이 상무인서관 노동쟁의 지도, 5·30운동 참여 후 중국 공산당 입당
  • 1931–1934중앙위원·정치국원, 대장정 참가 — 쭌이 회의 참석
  • 1937–1944중앙조직부장, 옌안 정풍운동에서 핵심 역할
  • 1949–1954중앙재경위원회 주임 겸 정무원 부총리, 제1차 5개년 계획 입안
  • 1956–1962중공 중앙위원회 부주석; 대약진 이후 경제 재건 주도
  • 1978–1987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제1서기, 중앙고문위원회 주임 — 개혁개방 초기 설계와 보수적 견제
  • 1987–1992중앙고문위원회 주임, 당내 보수파 구심점

예브게니 표도로비치 코제브니코프

Евгений Фёдорович Кожевников

소련 운송건설부를 창설해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이끈 초대 장관

동료들의 회고에 따르면, 코제브니코프는 “국가 자금은 아껴야 한다”며 관리 기구를 팽창시키는 대신 기존 간부들의 적재적소 배치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열 개 건설부처 중 분기 계획까지 유일하게 완수하는 부처를 만들었다.

철도기사 출신으로 소련 운송건설부(민트란스스트로이)의 초대 장관을 1954년부터 1975년까지 20년 넘게 역임하며, 철도·항만·고속도로·지하철·공항 등 소련 산업팽창의 물적 기반을 총괄 건설한 행정가다. 그가 이끈 운송건설부는 카자흐스탄 처녀지 개간 철도망, 볼가-발트 수로, 바니노-홀름스크 해상철도 연락선 등 굵직한 국가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바이칼-아무르 철도(BAM) 착공을 주도했다. 몽골·시리아·이라크·베트남 등 해외 운송 인프라 건설에서도 소련의 기술적 진출을 진두지휘했다. 예하 트러스트로 직결되는 2단계 관리 체계를 도입해 열 개 연방 건설부처 중 가장 안정적인 계획 달성률을 기록했으며, 1975년 퇴임과 함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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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중앙아시아철도 관리국 궤도부 기사 (아시가바트)
  • 1928–1930투르크시브 철도 구간장·공사구역 부책임자 (알마아타)
  • 1930–1936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 신선건설 기술지도자 → 젬젤도르스트로이 책임자 → 쿠즈네츠크 기관차·차량 공장 건설 총책임자
  • 1936–1940니켈스트로이·오르메디스트로이·유주랄탸시스트로이 주임기사 (남우랄)
  • 1941–1943유주랄탸시스트로이 트러스트 주임기사 → 관리자 — 방산공장 건설
  • 1943–1944주미 소련 정부구매위원회 전문위원
  • 1944–1945소련 건설인민위원부 특수건설총국장
  • 1945–1949국가계획위원회 건설산업 계획국장 → 국가계획위 부의장
  • 1949–1953소련 각료회의 연료·운수 담당 부의장 보좌관 → 각료회의 건설부장
  • 1954소련 건설부 제1차관
  • 1954–1963소련 운송건설부 장관 (초대)
  • 1963–1965소련 국가운송건설생산위원회 의장 – 소련 장관
  • 1965–1975소련 운송건설부 장관 (재임)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그리슈마노프

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Гришманов

소련 건축자재 산업을 14년간 이끈 공사판 출신 장관

1924년, 열여덟 살의 이반 그리슈마노프는 레닌그라드 보로프스키 시멘트 공장에서 목수로 일을 시작했다. 반세기 뒤, 그가 장관으로 이끄는 소련의 시멘트 산업은 연간 1억 2,700만 톤을 생산하며 세계 1위에 올랐다.

트베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열여덟에 망치를 잡은 그리슈마노프는, 레닌그라드 건설현장의 목수·십장·기사장을 거쳐 전후 도시재건을 지휘한 실무형 관료였다. 흐루쇼프의 대규모 주택 프로그램이 본격화되던 1956년부터 당 중앙위 건설부장으로 소련 전역의 건설정책을 조율했고, 이어 고스스트로이 의장으로 국가 건설 기준을 총괄했다. 브레즈네프 시기 내내 건설자재공업 장관(1965–1979)으로 재임하며 시멘트 생산량을 5,440만 톤 끌어올려 소련을 세계 1위 시멘트 생산국으로 만들었다. 그가 구축한 대규모 시멘트 공장망은 흐루쇼프카에서 브레즈네프카까지 소련의 도시 풍경을 물리적으로 떠받친 산업 토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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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49레닌그라드 건설현장의 공사감독·기사장·트러스트 관리자
  • 1944–1949프스코프스트로이 등 전후 복구 트러스트 책임자
  • 1949–1955레닌그라드 키로프 구집행위원장 → 시집행위 제1부위원장
  • 1956–1961CPSU 중앙위원회 건설부장
  • 1961–1962고스스트로이 소련 의장
  • 1963–1965고스플란 산하 건설자재공업 국가위원회 의장
  • 1965–1979소련 건설자재공업 장관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스트루예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Струев

18년간 소비에트 상업을 총괄한 무역장관

“일은 사람보다 높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고,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기술과 경험이 생겨난다.”

소련의 국내 상업 유통 체계를 18년간 총괄한 무역장관이다. 도네츠크(스탈리노) 지역당 제1서기와 페름 지역당 제1서기를 지내며 전후 재건과 공업화를 진두지휘했고,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소련 무역부 장관으로서 브레즈네프 시기 소비재 유통 정책 전반을 관장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남부전선·북캅카스전선·제4우크라이나전선 군무역국장으로 복무하며 전시 보급 체계를 책임졌다. 1976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56~1961년과 1966~1986년 두 차례에 걸쳐 CPSU 중앙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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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도네츠크주 소비자협동조합연합 회장
  • 1941스탈리노(도네츠크)주 집행위 부위원장
  • 1942–1943남부·북캅카스·제4우크라이나전선 군무역국장
  • 1944–1947스탈리노주 집행위원장
  • 1947–1953스탈리노주 당위원회 제1서기 (우크라이나 공산당)
  • 1954–1958페름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58–1962러시아SFSR 각료회의 부의장 (무역 담당)
  • 1962–1965소련 국가무역위원회 의장
  • 1965–1983소련 무역장관

드미트리 게오르기예비치 지메린

Дмитрий Георгиевич Жимерин

35세에 전시 전력장관이 된 소비에트 전기화의 기수

베리야가 모스크바 대정전 책임자를 향해 권총을 겨누자, 지메린은 그 앞을 몸으로 막으며 말했다. «쏘시오, 그는 잘못이 없습니다!»

소비에트 전력화의 핵심 인물로, 1942년 35세의 나이로 전력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 발전소 대피와 복구를 지휘했다. 1948년 모스크바 대정전 당시 베리야의 권총 위협에도 부하를 몸으로 감싸며 맞섰고, 흐루쇼프의 1955년 고스플란 분할 개혁기에는 제1부의장으로서 장기계획 체계 전환에 참여했다. 은퇴 후 국립 에너지연구소장과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을 지내며 소련 에너지 과학의 제도화에 기여했고, 소련 전기화 역사에 관한 표준적 저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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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0남부지역 발전소·전력망 총관리국 수석기사·국장
  • 1940–1941전력인민위원부 제1부인민위원
  • 1942–1953전력인민위원 · 전력장관
  • 1954–1955각료회의 화학·에너지 담당 뷰로 제1부의장
  • 1955–1957고스플란 제1부의장 (장기계획·현행계획 분할기)
  • 1964–1971국립 크르지자놉스키 에너지연구소장
  • 1971–1983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랴비코프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Рябиков

레닌 훈장 9회: 전시 무기생산에서 스푸트니크까지, 소련 군산복합체를 35년간 떠받친 조직자

R-7 발사가 성공하자 누군가 연회를 넌지시 꺼냈다. 랴비코프는 국가 예산이 아닌 각출로 자리를 마련하게 한 뒤, 손풍금을 집어 들고 러시아 왈츠와 「카튜샤」를 신나게 연주했다. 코롤료프가 코냑을 따르며 건배를 청하자, 그는 활짝 웃으며 외쳤다. "노래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군!"

이바노보 직물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행정가로 올라선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무장인민위원부 제1부위원으로서 공장 동부 이전과 무기 증산을 지휘했고, 1945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대공미사일 방어체계 S-25 건설을 이끌었고, 1957년 R-7 미사일 및 스푸트니크 1호 발사를 승인한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소련 우주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후 13년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 군수-민수 자원 배분을 조율하며 브레즈네프기 계획경제의 핵심 축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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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9이바노보주 직물공장 노동자, 이후 콤소몰·당 지역 간부
  • 1929–1937레닌그라드 기술원·군사기계연구소·해군사관학교에서 공학 수학
  • 1937–1939볼셰비크 공장 설계기사, 당위원회 서기,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당조직자
  • 1939–1950무장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이후 제1부위원 — 전시 공장 이전·무기 증산 지휘
  • 1950–1953소련 각료회의 제3총국장 — 모스크바 대공미사일 방어체계 S-25 건설 주도
  • 1955–1957각료회의 특별위원회 의장 — R-7 및 스푸트니크 1호 국가위원회 주재
  • 1961–1962, 1965–1974고스플란 제1부의장 — 군수-민수 자원 배분과 경제 계획 조율

파벨 바실리예비치 코바노프

Павел Васильевич Кованов

인민통제 초대 의장, 셸레핀의 대리인에서 브레즈네프 체제의 감사관으로

1965년 브레즈네프가 당-국가통제위원회를 분할했을 때, 셸레핀은 의장직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부하였던 코바노프가 신설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 경쟁자의 부하를 승진시키며 우두머리를 무력화하는 브레즈네프식 관료정치의 전형이었다.

아지트프롭 부서에서 출발하여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를 거친 당 기구의 산물이었다. 이후 알렉산드르 셸레핀 휘하에서 당-국가통제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1965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통제 기구를 분할했을 때 신설된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재임기는 수백만 명의 자원봉사 감독관이 정부와 기업의 실적을 감사하는 대중 참여형 통제 기구로 전환되던 초기 브레즈네프 시기와 맞물린다. 이전에는 시골 교사, 집단농장 위원장, 3개 전선의 종군기자로도 활동했으며, 퇴임 후에는 석유·가스 건설 연구소의 과학 고문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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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1교사, 집단농장 위원장, 인민교육위원회 산하 교육학 실험실·연구소 소장
  • 1941–1942러시아 인민교육위원회 초등·중등학교 관리국장
  • 1942–1944칼리닌 전선·북카프카스 전선·제2우크라이나 전선 종군기자
  • 1944–1956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지도원, 부문장, 부부장으로 승진
  • 1956–1962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62–1965당-국가통제위원회 부의장 (셸레핀의 보좌)
  • 1965–1971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 1971–1986연금 생활, 석유·가스 산업 건설부 산하 연구소 과학 고문

세묜 안드레예비치 스카치코프

Семён Андреевич Скачков

25년간 소련 대외경제원조를 총괄한 공업 관료

스카치코프가 이끈 GKES는 25년 동안 단 다섯 명의 수장만을 두었고, 같은 기간 미국은 12명의 원조기관장을 교체했다.

하리코프 기계제작연구소를 졸업한 공장 기술자 출신으로, 독소전쟁 시기 우랄바곤자보드의 당 조직자(파르토르크)로서 3만 5천 대의 전차 생산을 뒷받침했다. 전후 주요 중공업 공장장을 거쳐 1958년 국가대외경제관계위원회(GKES) 의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25년간 소련의 대외 경제·기술 원조 전체를 관장하며 75개국에 걸친 산업 플랜트 수출과 군사기술 공여를 지휘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소련 대외원조 체제가 제도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규모가 컸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1977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1983년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의 조직도 개편 속에서도 자리를 지킨, 소련 관료제의 지속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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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1하리코프 증기기관차 공장(제183호) 기술자·주임야금기사
  • 1941–1945우랄바곤자보드 당 조직자(파르토르크), 전차 생산 총괄 지원
  • 1945–1949레닌그라드 디젤 공장장 → 우랄바곤자보드 공장장
  • 1949–1954첼랴빈스크 트랙터 공장(ChTZ) 공장장
  • 1954–1957운수기계제조부 제1차관
  • 1957–1958하리코프 국민경제회의 의장
  • 1958–1983국가대외경제관계위원회(GKES) 의장 (1978년부터 장관급)

이반 바실리예비치 아르히포프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Архипов

중소 경제협력의 얼굴, 4대 서기장을 보좌한 소련 경제 최고 실무자

1984년 12월 베이징, 15년 만의 최고위 소련 방문에 중국은 그를 '라오펑유'(옛 친구)라 불렀다. 9일간의 방문은 3건의 경제협정과 중소관계 정상화의 첫걸음으로 이어졌다.

14세 선반공에서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까지 오른 경제 관료로, 1950년 스탈린의 지시로 중국에 파견되어 156개 중공업 프로젝트의 소련 기술 지원을 총괄하며 중소 경제협력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80년부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고르바초프 4대 서기장을 보좌하며 소련 경제를 실무에서 지휘했고, 1984년 15년 만의 최고위 소련 대표로 베이징을 방문해 관계 정상화의 물꼬를 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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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9칼루가 철도 공장 선반공
  • 1938–1939크리보이로크 시당위 제1서기
  • 1939–1943전연방당 중앙위 간부국 비철금속부장
  • 1943–1950비철금속·금속공업 부인민위원·부장관
  • 1950–1958중국 주재 수석경제고문
  • 1958–1974대외경제관계 국가위 제1부의장
  • 1974–1980각료회의 부의장
  • 1980–1986각료회의 제1부의장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노비코프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Новиков

군수공장 기술자에서 국가계획 수장이 된 방위산업 테크노크라트

1942년 6월 3일, 최고회의 상임간부회 포고령: '생산 조직과 신형 포병·소화기 무기의 숙달, 공장의 능숙한 지휘에서 탁월한 공로.' 34세의 노비코프는 반니코프, 우스티노프와 함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제프스크 군수공장 기술자로 출발해 1942년 34세의 나이로 사회주의노동영웅이 된 방위산업 테크노크라트. 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과 러시아공화국 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1960년 흐루쇼프에 의해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소브나르호스 개혁으로 분권화된 경제 속에서 2년 만에 물러났고, 이후 브레즈네프 아래서 15년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남아 군수·경제 분야에서 조용히 영향력을 행사한 내구력 있는 실무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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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9이제프스크 방위공장: 기술자·설계사·주임기술자·기사장
  • 1939–1941제74공장(무장인민위원부) 소장, 이제프스크
  • 1941–1948소련 무장인민부위원·무장차관; 공병포병소장 (1944)
  • 1948–1957레이더위원회·방위공업부·일반기계제조부 지도부
  • 1957–1960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고스플란 의장
  • 1960–1962소련 각료회의 부의장·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의장
  • 1962–1965소련 코메콘 대표; 소련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
  • 1965–198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