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초기화

사회운동·조직 인물 181명

그라쿠스 바뵈프

Gracchus Babeuf

실질적 평등을 요구한 평등파 운동가

혁명이 약속한 법적 평등이 빈곤과 재산 격차 앞에서 무력하다고 본 언론인으로, 1796년 총재정부에 맞선 평등파 음모를 이끌었으나 적발되어 이듬해 처형됐다.

본명은 프랑수아노엘 바뵈프다. 프랑스 혁명기의 언론인이자 평등파 운동가로, 법 앞의 평등을 넘어 재산과 생활 조건의 불평등을 문제 삼았다. 1796년 총재정부에 맞선 평등파의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됐다. 「평등파 선언」의 집필자는 실뱅 마레샬이며, 그 글을 바뵈프 자신의 저작이나 이미 시행된 정책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평등파의 구상과 후대 마르크스주의 사이에는 수용과 변화의 역사가 있다.

상세 이력 보기
  • 1789로이 선거인단의 결의서 첫 조항을 작성해 봉건적 권리 폐지를 요구했다.
  • 1794《민중의 호민관》을 발행하며 테르미도르파를 옹호하고 혁명의 경제적 결과를 공격했다.
  • 1796평등파 음모에 참여했으나 5월 10일 체포됐다. 음모는 5월에 적발됐다.
  • 1797방돔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아 동료들과 함께 처형됐다.

장 프랑수아 바를레

Jean-François Varlet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프랑스 프랑스 1764–1837

구역 총회와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운 앙라제 활동가

생필품 폭동과 구역 총회 정치로 지롱드파 축출에 참여한 인물. 1792년에는 국민공회 의원이었다.

우편국 직원 출신의 파리 구역 활동가로 앙라제와 함께 생필품 문제와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했다. 1793년 5월 31일~6월 2일 지롱드파 축출 봉기에 참여했다. 이후 혁명정부가 민중의 주권을 억누른다고 비판해 여러 차례 체포됐다.

상세 이력 보기
  • 1789–1792혁명 초기 애국가요를 쓰고 국왕의 도피와 국왕 폐위를 요구하는 청원 운동에 나섰으며, 파리 구역의 민중 동원에 참여했다.
  • 1792입법의회가 국왕을 정지시키고 새 헌법 제정을 위해 국민공회 선거를 소집한 뒤 의원으로 선출되어, 직접 보통선거와 선출직 소환을 주장했다.
  • 17932월 22일 파리 빈민의 생필품 가격 상한 요구에 가담했고, 5월 24일 체포되었다가 사흘 만에 석방되었다. 5월 29일 구역 대표자들이 세운 9인 봉기위원회에 참여해 5월 31일~6월 2일 봉기를 이끌었다.
  • 1793–1795공포정치 초기에 다시 체포되어 1793년 10월 29일 석방되었고, 테르미도르 반동 뒤 재차 체포되어 약 1년을 수감 생활로 보냈다.
  • 1800 이후석방 후 욘주 파이이에 정착해 결혼하고 자녀를 두었으며, 1800년 이후 보나파르트를 지지하고 낭트에서 한동안 살았다.
  • 1830–18371830년 7월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몇 달 동안 파리에 머물렀고, 1836년 낭트를 떠나 코르베유에송으로 이주해 이듬해 그곳에서 익사했다.

샤를로트 코르데

Charlotte Corday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프랑스 프랑스 1768–1793 ✕ 혁명재판소 판결 후 처형

지롱드파를 지지한 귀족 출신으로 마라를 암살한 인물

1793년 7월 13일 ‘지롱드파 반란 음모를 안다’고 속여 마라의 면담을 얻어, 약용 목욕 중이던 그를 부엌칼로 찔러 죽였다.

프랑스 혁명기 인물로 지롱드파를 지지했다. 1793년 7월 13일 자코뱅 지도자 장폴 마라를 암살했다. 그녀는 마라를 1792년 9월 학살의 책임자로 보았고 급진화한 자코뱅파 때문에 혁명이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했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혁명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7월 17일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프랑스 프랑스 1805–1881 ○ 뇌졸중

37년을 감옥에서 보낸 봉기의 전략가, '블랑키즘'으로 레닌주의에 길을 열다

"나는 3천만 프랑스인, 나와 같은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그들이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한 죄로 고발되었습니다." — 1832년 '15인 재판' 최후진술

프랑스 혁명적 사회주의자. 소수 전위의 무장봉기와 혁명적 독재를 주장하는 블랑키즘을 체계화해 마르크스주의와 볼셰비키 전위당론에 영향을 미쳤다. 37년을 감옥에서 보내 '유폐된 자'로 불렸다.

상세 이력 보기
  • 1824카르보나리 가입 — 군주제 전복을 위한 비밀결사
  • 1827샤를 10세 반대 시위 참여 — 세 차례 부상, 목에 총상
  • 18307월 혁명 참전 — 루이 필리프 입헌군주제에 환멸, 공화주의로 전환
  • 1832'민중의 벗(Amis du peuple)' 결성, 체포 — 재판에서 직업을 '프롤레타리아'라 밝힘
  • 1837바르베스·베르나르와 함께 비밀결사 '계절의 모임(Société des Saisons)' 창설
  • 1839.5파리 봉기 주도 — 실패,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
  • 18482월 혁명으로 석방, '공화주의 중앙협회' 설립 — 적기 채택과 선거 연기 요구
  • 1849–18595월 봉기 실패로 10년형 — 여러 교도소에서 복역
  • 1865–1870브뤼셀 망명 — 『무장봉기 지침』 등 주요 저술 집필
  • 1870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라빌레트 봉기 지도, 신문 '조국의 위기' 창설
  • 1871.3.17파리 코뮌 직전 체포 — 부재중 코뮌 위원 선출, 베르사유는 대주교와의 맞교환 거부
  • 1872클레르보 감옥에서 『별을 통한 영원』 집필
  • 1879보르도에서 하원의원 당선(무효화), 사면 석방
  • 1880신문 'Ni Dieu ni maître' 창간, 프랑스 전역 순회 연설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акунин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 1814–1876 ○ 병사

마르크스의 가장 위대한 라이벌: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의 창시자이자 제1인터내셔널 분열의 중심

1869년 바젤 대회에서 "가장 열정적인 혁명가도 절대 권력을 쥐면 1년 안에 차르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 『국가와 무정부』

트베리 귀족 출신,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의 창시자. 제1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와 대립하다 1872년 헤이그 대회에서 축출되었고, 『국가와 무정부』(1873)로 무국가 연방주의를 체계화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29–1835페테르부르크 포병학교 — 소위 임관 후 상관 모독으로 면직, 모스크바 스탄케비치 서클 합류
  • 1840–1842베를린 대학 — 헤겔 좌파 합류, 가명 쥘 엘리자르로 「독일에서의 반동」 발표
  • 1843–1847파리·브뤼셀 — 프루동·마르크스와 교류, 폴란드 독립 연설로 프랑스 추방
  • 1848–1849프라하 범슬라브 대회, 프라하·드레스덴 봉기 지도 — 작센·오스트리아 사형 선고, 종신형 감형
  • 1851–1861러시아 송환 — 페트로파블롭스크·슐리셀부르크 6년, 시베리아 유형 후 일본·미국 경유 탈출
  • 1861–1864런던 망명 — 게르첸 『콜로콜』 편집 참여, 폴란드 봉기(1863) 지원 원정 실패
  • 1864–1868이탈리아 —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 결성, 『혁명적 카테키즘』(1865–66) 집필, 국제형제단 창설
  • 1868–1872제1인터내셔널 가입, 국제사회주의민주동맹 조직 — 마르크스와 투쟁, 1872년 헤이그 대회 축출
  • 1872–1876루가노·로카르노 — 『국가와 무정부』(1873), 미완성 『신과 국가』 집필, 베른에서 병사

예카테리나 콘스탄티노브나 브레시코-브레시콥스카야

Екатерина Константиновна Брешко-Брешковская
사회운동·조직 사회혁명당 러시아 러시아 1844–1934 ○ 자연사

44년간 감옥과 유형을 견딘 '러시아 혁명의 할머니', 사회주의혁명당 공동 창립자

케넌 씨, 우리가 유형지에서 죽을 수도 있고, 우리 아이들도, 손자들도 유형지에서 죽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무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 1885년 시베리아에서 조지 케넌에게.

귀족 출신으로 1861년 농노 해방에 참여한 뒤 1874년 '민중 속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 1878년 '193인 재판'에서 정치범 최초의 여성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아 22년간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견뎠으며, 조지 케넌의 르포를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896년 석방 후 그리고리 게르슈니와 사회주의혁명당(SR)을 결성하고 전투조직 창설을 주도했으며, 1904년 미국 순회 강연으로 혁명 자금을 모금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상징적 원로로 귀환하여 예비의회 최고령 의장을 맡았으나, 볼셰비키 집권에 반대해 내전 중 백군을 지지했다. 1918년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61농노 해방에 참여, 가문 영지의 농민들을 위한 학교·도서관·협동조합 설립
  • 1873–1874키예프에서 급진적 지식인 공동체 결성; '민중 속으로' 운동 참여, 가짜 여권으로 농촌 선전 활동
  • 1874–1878체포되어 페트로그라드 구치소 수감; '193인 재판'에서 유죄 판결, 카라 형무소 5년 카토르가형 — 여성 정치범 최초의 강제노역 선고
  • 1878–1896카라 카토르가 복역 후 바르구진·셀렌긴스크 유형; 1881년 탈주 실패로 4년 추가 카토르가형; 22년간 수감·유형 생활, 조지 케넌과의 인터뷰로 국제적 명성
  • 1896–1901니콜라이 2세 대관식 사면으로 석방; 그리고리 게르슈니와 함께 민스크에서 나로드니키 운동 재건, SR 결성 준비
  • 1901–1903사회주의혁명당(SR) 공동 창립; 게르슈니와 함께 전국 비밀 조직 활동, 전투조직 창설 주도
  • 1903–1905체포 위협으로 제네바 망명; 1904년 암스테르담 제2인터내셔널 대회 참석 후 미국 순회 강연 — 약 1만 달러 모금, '바부시카' 별명 획득
  • 1905–1910러시아 귀환, 1905년 혁명 참여; 1908년 예브노 아제프의 배신으로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 1910–1917시베리아 종신 유형 선고; 1913년 이르쿠츠크 탈주 시도 실패 후 야쿠츠크 독방 수감; 미국 여론 압력으로 이르쿠츠크 이감
  • 1917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 케렌스키의 환영; 예비의회 최고령 의장; 볼셰비키 집권 반대, 체코슬로바크 군단 개입 호소
  • 1918–1934블라디보스토크·일본 경유 미국 망명; 백군 지원 요청 활동; 파리 거쳐 체코슬로바키아 정착, 카르파티아 노동당 조직; 프라하 인근에서 사망

세르게이 겐나디예비치 네차예프

Сергей Геннадиевич Нечаев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 1847–1882 ○ 옥사

『혁명가의 교리문답』 저자,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허무주의 혁명가

「혁명가는 파멸된 인간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이익도, 사업도, 감정도, 애착도, 재산도, 이름조차도 없다. 그의 전 존재는 오직 하나의 목적, 하나의 사상, 하나의 열정 — 혁명에 삼켜졌다」 — 『혁명가의 교리문답』 서두

『혁명가의 교리문답』을 집필한 허무주의 혁명가. 비밀결사 '인민의 보복'을 조직했으나 동료 살해로 추방당했다. 목적을 위한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 그의 '네차예프시나'는 혁명 조직론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865–1866모스크바로 이주, 역사가 포고딘의 사무원으로 근무; 교사 시험 응시했으나 실패
  • 1867–1868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 교사 자격 취득 후 교구학교 교사로 근무; 대학 청강생으로 급진 학생운동 참여
  • 1869.4–8자작 체포극을 꾸민 후 스위스로 망명; 바쿠닌·오가료프와 교류, '바흐메테프 기금' 1만 프랑을 확보; 『혁명가의 교리문답』 집필
  • 1869.9–11모스크바 귀환 후 비밀결사 '인민의 보복' 조직, 5인조 체계와 철저한 규율 도입; 자신에게 불복종한 학생 이바노프를 직접 살해
  • 1870–1872재차 해외 도주; 제네바에서 잡지 『인민의 보복』·『공동체』 발행; 러시아 망명자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됨
  • 1872–1873취리히에서 체포되어 러시아 정부에 범죄인 인도; 모스크바 배심재판에서 20년 카토르가형 선고
  • 1873–1882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알렉세이옙스크 라벨린에 독방 수감; 수비병 40여 명을 포섭하고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와 비밀 연락망 구축
  • 1882.12.3수종과 괴혈병 합병증으로 옥사, 35세; 시신은 니콜라옙스카야 철도 프레오브라젠스카야 역 인근에 매장(정확한 위치 미상)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키발치치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Кибальчич

차르 암살 폭탄을 설계하고 감옥에서 최초의 유인 로켓을 구상한 인민의 의지당 기술자

「나는 내 구상의 실현 가능성을 믿으며, 이 믿음이 이 비참한 상황에서 나를 지탱한다… 내 생각이 나와 함께 죽지 않고 인류와 함께 남을 것을 알며 평온히 죽음을 맞으리라」 — 1881년 3월, 감옥에서 작성한 유언 편지.

러시아 혁명가이자 '인민의 의지'의 수석 폭발물 기술자로, 알렉산드르 2세 암살에 사용된 투척 폭탄을 설계·제조했다. 사형을 앞둔 감옥에서 분말 추진제, 짐벌식 추력 제어, 안정 날개를 갖춘 세계 최초의 유인 로켓 비행 장치를 설계했으며, 이 구상은 1918년 볼셰비키 연구자들에 의해 발굴·공개되어 콘스탄틴 치올콥스키가 자신의 가장 위대한 선배로 꼽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871페테르부르크 철도공병대학 입학
  • 1873페테르부르크 의과외과대학 편입, 로켓 추진 실험 착수
  • 1875–1878금서 유포 혐의로 키예프 루키야놉스카야 감옥 수감
  • 1879'인민의 의지' 가입, 수석 폭발물 기술자로 활동
  • 1881.2「정치혁명과 경제문제」를 『나로드나야 볼랴』지에 발표
  • 1881.3.1알렉산드르 2세 암살에 사용된 투척 폭탄 4기 제조
  • 1881.3.23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감옥에서 유인 로켓 비행 장치 설계 완성
  • 1881.4.3다른 페르보마르톱치들과 함께 세묘놉스키 연병장에서 교수형

소피야 리보브나 페롭스카야

Софья Львовна Перовская

흰 손수건으로 차르 암살을 지휘한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 러시아 첫 여성 정치범 사형수

「우리는 위대한 대의를 시작했다. 어쩌면 두 세대가 이 위에 누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해내야 한다」 — 동지들에게 남긴 말.

귀족 출신, 17세에 가문을 떠나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를 공동 창립했다. 1881년 젤랴보프 체포 후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지휘, 흰 손수건으로 폭탄 신호를 보냈다. 동지 밝히지 않고 27세 교수형.

상세 이력 보기
  • 1869–1870알라르친 여성 과정 입학, 자주학습 서클 참여; 17세에 아버지와 결별하고 자택 이탈
  • 1871–1873나로드니키 서클 결성, 나탄손 서클과 합류; 『자본론』 번역 참여; 차이콥스키 서클 가입, 노동자 계몽과 '민중 속으로' 운동
  • 1874–1878첫 체포·6개월 수감 후 석방; 펠처 자격 취득; '193인 재판' 무죄; 민스킨 탈옥 지원 실패; 올로네츠 유형 도중 볼호보역 탈주, 지하운동 전념
  • 1879.6리페츠크·보로네시 대회 참석, '토지와 자유' 분열 저지 노력;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 공동 창립
  • 1879.11모스크바 인근 황제 열차 폭파 기도 — '선로감시원 수호루코프의 아내'로 위장
  • 1880오데사 황제 암살 기도 참여; 젤랴보프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앙노동자서클 조직 (300여 명)
  • 1881.3.1젤랴보프 체포(2.27) 후 작전 지휘 인수; 예카테리나 운하에서 흰 손수건 신호로 투척수들에게 폭탄 투척 지시 —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성공
  • 1881.3.10–4.3넵스키 대로서 체포, 특별심판 사형 선고, 세묘놉스키 연병장에서 교수형 — 러시아 최초 여성 정치범 사형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모로조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орозов
사회운동·조직 인민의 의지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854–1946 ○ 자연사

25년 감옥에서 과학자가 된 나로드나야 볼랴의 테러 이론가

1930년대 중반, 요양소에서 "당원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노인이 답했다. "나는 당원이오. '나로드나야 볼랴' 당원이오."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이자 혁명적 테러 이론가로, 1880년 『테러 투쟁』을 집필하여 소규모 독립 테러 조직에 의한 전제정 타도를 주장했다. 이 구상은 동시대 동료들에게도 급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훗날 사회혁명당 테러 전략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25년간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와 슐리셀부르크 요새에 수감되었고, 출소 후 항공학 개척자·과학 대중화자로 변모하여 1932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명예회원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74차이콥스키 서클 가입, '민중 속으로' 운동 참여
  • 1878『지상과 자유』 공동 편집자
  • 1879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회 위원
  • 1880제네바에서 『테러 투쟁』 출간, 마르크스와 면담
  • 1882–1905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슐리셀부르크 요새 수감, 수감 중 자연과학 연구
  • 1907–1917레스가프트 연구소 교수, 러시아 물리화학회·천문학회 정회원
  • 1918–1946레스가프트 자연과학 연구소 소장
  • 1932소련 과학아카데미 명예회원

유진 V. 뎁스

Eugene V. Debs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미국 미국 1855–1926 ○ 심부전

5선 미국 사회당 대통령 후보이자 철도노동자 산업별조합의 선구자

1918년 법정 최후진술에서 "하층 계급이 존재하는 한 나는 그 안에 있고, 범죄자가 존재하는 한 나는 그 일부이며, 감옥에 갇힌 영혼이 있는 한 나는 자유롭지 않다"고 선언했다.

미국 사회주의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 산업별 노동조합주의의 선구자였다. 미국철도연합(ARU)을 이끌어 1894년 풀먼 파업을 조직하고 투옥 중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으며, 미국 사회당(1901)과 IWW(1905) 창립에 참여했다. 다섯 차례 대선에 출마해 1912년 90만 표(6.0%)를 얻었고, 1차 대전 반대 연설로 수감된 1920년에도 91만 표를 득표해 미국 사회주의 선거운동의 정점을 찍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75기관화부형제단(BLF) 가입
  • 1880–1893BLF 사무총장 겸 기관지 편집장
  • 1885인디애나 주의회 의원 (민주당)
  • 1893–1897미국철도연합(ARU) 창립·위원장
  • 1901미국 사회당 공동 창립
  • 1905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창립 멤버
  • 1900–1920사회당 대통령 후보 (5회 출마)
  • 1919–1921애틀랜타 연방교도소 수감

클라라 체트킨

Clara Zetkin
정치·당 지도 독일 공산당 독일 독일 1857–1933 ○ 자연사

국제 여성의 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심장에 놓다

히틀러 집권 반년 전, 최고령 의원으로서 제국의회 개원 연설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하다 (1932)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일부로 보고 1910년 국제 여성의 날을 제안했다. 반전 투쟁과 KPD 창립을 거쳐 75세에 제국의회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78–1917SPD 여성운동 지도, 『평등』 편집(1892–1917)
  • 1910코펜하겐 대회에서 국제 여성의 날 제안
  • 1915–1919반전 운동 — 스파르타쿠스단·KPD 창립 참여
  • 1920–1933제국의회 의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 1925회고문 《여성문제에 관한 레닌》 발표
  • 1932최고령 의원으로 개원연설 — 반나치 통일전선 호소
  • 1933소련 망명, 6월 사망 — 크렘린 벽 안장

티혼 총대주교

Тихон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인 1865–1925 ○ 자연사

혁명기의 교회를 이끈 총대주교

1922년 교회 귀중품 논쟁에서 그는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자발적 기부와 성물의 강제 압수를 구분했다.

티혼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자이자 1917년 복원된 총대주교직의 첫 보유자로, 혁명 뒤 교회와 새 국가의 충돌을 대표한 인물이다. 그는 1921~1922년 기근 구호를 호소했지만, 1922년 2월 법령 뒤 성물의 일괄 인도가 교회법을 침해한다고 보아 자발적 기부와 강제 압수를 구분했다. 이 입장은 교회의 자율성을 지키려는 방어였지만, 성직자 탄압과 교회 재산 압수로 이어지는 대립을 막지는 못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8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 교수
  • 1897류블린 주교
  • 1898–1907알류샨·북아메리카 주교, 대주교
  • 1907–1913야로슬라블·로스토프 대주교
  • 1917모스크바 대주교, 모스크바 총대주교
  • 1917–1925모스크바와 전 러시아의 총대주교

알렉산드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Александр Ильич Ульянов

레닌의 형, 벌레를 연구하던 금메달 동물학도에서 차르 암살을 기도한 혁명가

어머니의 사면 청원 권유에: "결투를 생각해보세요, 어머니. 한쪽은 이미 총을 쐈습니다. 아직 쏘지 않은 상대에게 총을 쓰지 말라고 부탁할 수는 없습니다."

레닌의 친형.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환형동물 연구로 금메달을 받은 촉망받는 동물학도였으나, 1886년 돌연 혁명에 투신하여 '인민의 의지당'의 '테러 분파'를 조직하고 알렉산드르 3세 암살 계획의 주모자가 되었다. 1887년 3월 1일('제2의 3월 1일') 암살 미수로 체포되어 5월 8일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죽음은 17세 동생 블라디미르(훗날 레닌)를 혁명의 길로 이끈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3심비르스크 고전 김나지움 금메달 졸업
  • 1883–1886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전공, 환형동물 연구로 금메달 수상
  • 1886인민의 의지당 가입, '테러 분파' 조직: 이념가이자 폭탄 제조자
  • 1887.02테러 분파 강령 작성, 알렉산드르 3세 암살용 폭탄 준비
  • 1887.03–053월 1일 체포, 4월 15–19일 재판, 5월 8일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

표트르 페트로비치 시미트

Пётр Петрович Шмидт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 1867–1906 ✕ 처형

흑해함대에 적기를 올리고 차르에게 헌법을 요구한 혁명적 해군 장교

시미트가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 「…각하께 제헌의회의 즉각 소집을 요구하며, 더 이상 각하의 대신들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함대 사령관 P. 시미트.」

러시아 제국 해군 장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05년 혁명의 물결 속에서 세바스토폴 해군 봉기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순양함 오차코프에 적기를 올리고 스스로 흑해함대 사령관을 선언했으며, 니콜라이 2세에게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봉기는 90분 만에 진압되었고, 그는 체포되어 베레잔 섬에서 총살당했지만, 그 이름은 소비에트 전역의 거리·함선·기념비와 파스테르나크의 시를 통해 '시미트 중위'로 불멸화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6해군사관학교 졸업, 미치만 임관
  • 1888–92사임, 파리에서 기구 비행 훈련 등 민간 생활
  • 1892해군 재입대
  • 1895중위 진급
  • 1904러일전쟁으로 현역 재소집
  • 1905.10세바스토폴 혁명 연설로 체포, 군중 압력으로 석방
  • 1905.11순양함 오차코프 봉기 지휘, 스스로 흑해함대 사령관 선언
  • 1906.3.19베레잔 섬에서 총살형

빅토르 콘스탄티노비치 쿠르나톱스키

Викто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урнатовский

나로드나야 볼랴에서 시작해 치타 공화국을 이끈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중 한 사람

옛 티플리스 노동자들은 이렇게 회고했다. 「논쟁이나 토론이 벌어질 때면 동지들은 모두 쿠르나톱스키에게 물었다. 그의 결론과 판단은 언제나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

나로드나야 볼랴 활동가로 출발해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한 쿠르나톱스키는 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의 '노동 해방' 그룹과 함께했으며, 미누신스크 유형지에서 레닌을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에 서명했다. 1900년 이스크라의 카프카스 대표로 티플리스에 파견되어 RSDLP 티플리스 위원회를 결성했고, 그곳에서 젊은 스탈린의 '당적 스승' 역할을 했다. 1905년 혁명기에는 치타에서 노동자·병사·코사크 대표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무장봉기를 이끌어 이른바 '치타 공화국'을 수립했다. 사형선고를 받고 종신 카토르가로 감형된 뒤 일본으로 탈출, 파리에서 망명 중 44세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7–1889나로드나야 볼랴 활동가, 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대학에서 제적·유형
  • 1892–1897취리히 공대 졸업(화학공학),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 그룹 참여
  • 1898–1900미누신스크 유형, 레닌과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 서명
  • 1900–1901이스크라 카프카스 대표, RSDLP 티플리스 위원회 결성
  • 1904야쿠츠크 정치유형자 무장항의 지도, 아카투이 카토르가 수감
  • 1905–1906치타 노동자·병사·코사크 소비에트 조직, '치타 공화국' 무장봉기 지도, 《자바이칼스키 라보치》 편집
  • 1906–1912사형 선고 후 종신 카토르가 감형, 일본 탈출, 파리 망명 중 사망

제임스 코놀리

James Connolly

노동자의 깃발과 공화국의 깃발을 한 깃대에 올린 사회주의자

총상으로 설 수 없어 의자에 묶인 채 총살당했다 — 킬마이넘 감옥(1916.5.12)

마르크스주의와 아일랜드 민족해방을 하나의 투쟁으로 통합한 사회주의 혁명가. 아일랜드시민군을 창설하고 1916년 부활절 봉기에서 더블린 사령관으로 싸웠으며, 봉기 진압 후 영국군에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6아일랜드사회주의공화당 창립
  • 1903–1910미국에서 IWW 조직가로 활동
  • 1910–1914ITGWU 지도 — 1913년 더블린 직장폐쇄 투쟁
  • 1910《아일랜드 역사 속의 노동》 출간
  • 1913아일랜드시민군(ICA) 창설
  • 1915《아일랜드의 재정복》 출간
  • 1916.4부활절 봉기 — 더블린 사령관, 공화국 선언 서명자
  • 1916.5킬마이넘 감옥에서 총살

이오시프 솔로모노비치 블레이흐만

Иосиф Соломонович Блейхман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제국·러시아 러시아 제국, 유대계 1868–1921 ○ 병사

1917년 위기의 무정부주의적 도화선

“거리가 우리를 조직할 것이다.”

이오시프 블레이흐만은 장인 출신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혁명가로, 노동자 조직과 병사 집회에 자신의 정치를 밀어 넣었다. 2월혁명 뒤 페트로그라드 무정부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이 되어 산업의 사회화와 지주 재산의 수탈, 코뮌 건설을 임시정부 밖에서 주장했다. 1917년 7월 3일에는 제1기관총연대에 무장하고 행진하라고 촉구해 위기를 무장한 7월 시위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 운동은 볼셰비키 지도부가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10월 뒤에는 구체제에 맞선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볼셰비키 국가를 비판했고, 그 결과 거듭된 체포와 강제노동, 병을 겪다가 1921년에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7혁명운동 참가
  • 1904미국에서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수용
  • 1906드빈스크 무정부주의 그룹 조직
  • 1913–1914페테르부르크 노동조합 선동가
  • 1917페트로그라드 무정부주의 공산주의자연맹 서기·《코뮌》 편집자
  • 19177월 시위 때 제1기관총연대 선동가
  • 1917–1919페트로그라드 무정부주의 그룹연맹 서기
  • 1920–1921모스크바 노동조합 평의회 활동가, 체포되어 강제노동

예브노 피셸레비치 아제프

Евно Фишелевич Азеф
사회운동·조직 사회혁명당 러시아 제국 러시아 (유대계) 1869–1918 ○ 신부전

오흐라나의 월급을 받으며 혁명 테러를 지휘한 이중간첩

1902년 6월 아제프는 오흐라나에 500루블을 테러 활동에 기부했다고 보고하며 '당 내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필요했다'고 적었다. 경찰과 혁명 양쪽에 동시에 장부를 올린 셈이었다.

사회주의혁명당(SR) 전투조직의 수장으로 플레베 내무장관(1904)과 세르게이 대공(1905) 암살을 지휘하며 혁명 테러의 정점을 찍었지만, 동시에 1893년부터 오흐라나의 유급 정보원으로 활동하며 동료들을 체포·처형으로 몰아넣은 이중간첩이었다. 게르슈니의 후계자이자 보리스 사빈코프의 상관으로서 전투조직을 중앙집권적 정예 부대로 재편했고, 암살 성공으로 쌓은 신임을 배신의 밑천으로 삼았다. 1908년 부르체프에게 정체가 폭로되어 SR당 전체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으며, 독일로 도주한 아제프는 혁명운동과 비밀경찰 사이 가장 어두운 접점으로 남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893–1899독일에서 전기공학 수학, 오흐라나 정보원 활동 시작
  • 1899러시아로 귀국, 사회주의혁명당 운동에 합류
  • 1901–1902통합 SR당 창립 참여, 게르슈니의 부관으로 전투조직 합류
  • 1903–1908SR 전투조직 수장
  • 1904플레베 내무장관 암살 조직
  • 1905세르게이 대공 암살 조직
  • 1906가폰 신부 암살 지시
  • 1908부르체프에게 정체 폭로, 독일로 도주
  • 1909–1918베를린에서 알렉산더 노이마이어 가명으로 은거

게오르기 아폴로노비치 가폰

Георгий Аполлонович Гапон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우크라이나 1870–1906 ✕ 살해

행진을 이끈 신부, 이중 첩자로 끝나다

피의 일요일 직후 가폰은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 더 이상 차르는 없다. 오늘 피의 강이 차르와 러시아 민중을 갈라놓았다. 이제 러시아 노동자는 차르 없이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1905년 1월 9일, 15만 노동자의 겨울궁전 청원 행진을 이끌었으나 군대가 발포했다. 살아남아 「우리에게 더 이상 차르는 없다」는 격문을 남겼지만, 경찰과의 이중 관계가 드러나 이듬해 SR 전투단에 처형당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2–04경찰 후원 합법 노동회(주바토프식) 「공장노동자회」 조직
  • 1905.1.9겨울궁전 청원 행진 인솔, 피의 일요일
  • 1905–06망명, 혁명 정당들과 접촉
  • 1906경찰 내통이 드러나 SR 전투단에 처형
등장 장면 피의 일요일

알렉산드르 오시포비치 베르크만

Александр Осипович Беркман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 1870–1936 ✕ 자살

프릭 암살 미수로 14년 복역하고 소비에트를 떠난 아나키스트 작가

시카고 환송연에서 헨리 클레이 프릭의 사망 소식을 듣고 베르크만은 이렇게 말했다: '프릭은 신에 의해 추방되었다.'

러시아 제국 빌나에서 태어나 1888년 미국으로 이주한 아나키스트 혁명가이자 작가. 1892년 홈스테드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에 분노하여 제철소 사장 헨리 클레이 프릭을 암살하려다 실패, 14년간 복역했으며 그 경험을 《한 아나키스트의 옥중기》(1912)에 담았다. 출소 후 에마 골드만의 잡지 《마더 어스》 편집자로 활동하며 미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1919년 반전 활동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처음에는 볼셰비키 혁명에 열광했으나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을 목격하고 환멸을 느껴 《볼셰비키 신화》(1925)에서 초기 소비에트 국가의 권위주의를 기록했으며, 이후 프랑스 망명 중 아나코-코뮤니즘 입문서 《지금 그리고 이후에》(1929)를 저술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8미국 이주, 요한 모스트의 『프라이하이트』 식자공으로 아나키스트 운동 합류
  • 1892홈스테드 파업 중 프릭 암살 미수 — 22년형 선고, 14년 복역
  • 1907–1915『마더 어스』 편집자, 미국 최대 아나키스트 잡지로 성장
  • 1916샌프란시스코에서 자체 잡지 『더 블래스트』 창간
  • 1917징병 반대 활동으로 2년 수감,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
  • 1921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목격 후 볼셰비키와 결별, 러시아 탈출
  • 1925『볼셰비키 신화』 출간 — 초기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일기체 비판서
  • 1929아나코-코뮤니즘 입문서 『지금 그리고 이후에』 출간

로자 룩셈부르크

Rosa Luxemburg

「자유는 언제나,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자유다」

1919년 1월 14일, 봉기 진압 다음 날, 룩셈부르크는 마지막 논설을 발표했다. '베를린엔 질서가 지배한다'는 승자들에게 그녀는 답했다: '나는 있었다, 나는 있다, 나는 있을 것이다!' 그날 밤 체포, 이튿날 살해.

폴란드 태생의 독일 혁명가이자 볼셰비키의 가장 날카로운 동지적 비판자. 옥중에서 러시아 혁명을 옹호하며 제헌의회 해산과 언론 통제를 경고했다. 1919년 1월 베를린 봉기 진압 때 의용군에게 살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3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 공동 창립
  • 1898–1914독일 사민당 좌파의 이론가, 수정주의 논쟁
  • 1899《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출간
  • 1906『대중파업론』
  • 1913《자본축적론》 출간
  • 1915–18반전 투옥, 옥중에서 러시아 혁명 논평 집필
  • 1918.12독일공산당 창립
  • 1919.1베를린 봉기 진압 중 의용군에게 살해
등장 장면 제헌의회의 하루

니콜라이 에르네스토비치 바우만

Николай Эрнестович Бауман

국경을 넘나들며 이스크라 조직망을 구축한 '그라치', 혁명의 첫 순교자

망명지에서도 기타를 치고 즉석에서 풍자시를 짓고 캐리커처를 그리던 청년 — 역사가 블라들렌 로기노프가 전하는 바우만의 초상이다.

볼가 독일계 수의사 출신 볼셰비키로, 레닌의 《이스크라》 러시아 국내 불법 배포망을 책임졌다. 1905년 10월 시위 중 군주주의자의 공격으로 사망, 10만 장례 행렬은 혁명 시위로 전환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5카잔 수의과대학 졸업, 사라토프 현에서 근무
  • 1896–97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 투쟁동맹」 활동
  • 1897–99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22개월 독방, 뱟카 유형
  • 1900스위스에서 레닌과 이스크라 창간 준비, 러시아 국내 불법 수송 책임
  • 1901–03모스크바 위원회, 키예프 체포·탈옥(「11인 탈주」), 제2차 당대회 대의원 — 볼셰비키
  • 1903–04모스크바 볼셰비키 조직 및 중앙위 북부국 지도, 체포 후 타간카 감옥 16개월
  • 1905.10석방 직후 시위 중 군주주의자의 공격으로 사망

이반 바실리예비치 바부시킨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Бабушкин

이스크라가 가장 신뢰한 노동자 조직가, 볼셰비키 노동자 전형의 원형

1902년, 알렉산드롭스크 감옥 창살을 톱으로 잘라 탈옥한 그는 외국어 하나 모르는 채 런던으로 향했다. '이스크라' 편집부와 당면 과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레닌의 노동자 서클에서 성장한 혁명가. 《이스크라》 특파원으로 오레호보-보고로츠크 조직을 건설했고 체포·유형·탈옥을 거듭했다. 1905년 치타 무장봉기를 지도했고 이듬해 무기 호송 중 체포·총살당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7–91크론슈타트 어뢰 작업장 견습공
  • 1891–96페테르부르크 세먀니코프 공장 기계공
  • 1894–95레닌의 노동자 마르크스주의 서클 참여, '투쟁동맹'에서 서클·도서관 조직
  • 1896–97체포, 예카테리노슬라프 유형 ― 현지 '투쟁동맹'·RSDDP 위원회·《유즈니 라보치》 창간
  • 1900–01《이스크라》 특파원·배포책 ― 오레호보-보고로츠크 RSDDP 조직 건설
  • 1902–03체포·탈옥·런던 망명·귀국. 재체포 후 베르호얀스크 유형
  • 1905사면, 이르쿠츠크·치타 위원 ― 《자바이칼스키 라보치》 편집, 치타 무장봉기 지도
  • 1906.1무기 호송 중 슬류뎬카 역 체포, 미소바야 역에서 즉결 총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