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에 브레즈네프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들어봐, 심판이 왜 '니스트루'를 편파 판정한 거야? 조치를 취해." 또 다른 고위 인사가 전화해 말했다: "프라하에 연결돼 있나? 당장 전화해서 하키 선수들에게 골대를 향해 슛을 날리라고 해."
셸레핀의 후원 아래 30세에 콤소몰 제1서기가 되어 9년간 청년동맹을 이끌었다.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맞서 ≪프라우다≫를 통해 솔제니친·에렌부르크를 공개 공격하고, 1930년대를 어두운 색으로만 그리는 풍조를 비판한 강경파였다. 1968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숙청할 때 체육위원회 의장으로 밀려났으나, 오히려 15년간 소련 스포츠의 황금기를 진두지휘하며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72년 슈퍼시리즈를 성사시켰다. 안드로포프 집권 후 몽골·버마 대사로 전출되어 사실상 은퇴했다.
파업 3일째 바웬사가 종료를 선언하자, 그는 피엔코프스카와 함께 문을 막고 떠나던 노동자들을 돌려세워 임금 투쟁을 연대 파업으로 바꾸었다.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의 크레인 기사로, 1980년 8월 해고가 연대(Solidarity) 탄생의 불씨가 된 폴란드 노동운동가이다. 16년간 용접공으로 일하며 작업량 기준의 270%를 채운 '노동 영웅'이었지만, 상사의 비자금 횡령을 고발하며 당국과 맞서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파업 3일째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하자 알리나 피엔코프스카와 함께 문을 막고 노동자들을 돌려세워 임금 투쟁을 연대 파업으로 바꾸었다. 이후 바웬사의 독주와 노조의 변질을 비판하며 거리를 두었고, 2010년 스몰렌스크 항공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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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입사, 용접공으로 16년 근무 후 크레인 기사로 전직
1968상사의 비자금 횡령을 고발, 해고 위기를 부서 노동자 전체의 지지로 막아냄
1978자유노조 해안지부(WZZ) 공동 창립, 지하 신문 『해안의 노동자』 편집
1980-08-07불법 노조 활동으로 해고, 정년 5개월을 앞둔 시점
1980-08-14해고가 그단스크 파업을 촉발, 공장간파업위원회(MKS) 간부회 일원으로 8월 협정 서명
1990년 6월, 흐리스토라드노프는 러시아 정교회 지방공의회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해 연단에 섰다. 그가 인사말을 전한 바로 그 공의회는 알렉시 2세를 새 총대주교로 선출했다.
유리 흐리스토라드노프는 브레즈네프 시대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 주 당위원회 제1서기로 14년간 재임하며 도시의 대규모 주택 건설과 지하철 착공을 주도한 소련의 지역 당 간부였다. 고리키 자동차 공장의 주물 공장에서 노동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를 따라 승진했고, 1976년부터 1990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1988~1989)을 거쳐 소련 각료회의 산하 종무위원회의 마지막 의장(1989~1991)으로서 고르바초프 치하의 종교 자유화 국면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관장했다. 1990년 러시아 정교회 지방공의회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하여 인사말을 전했으며, 이 공의회는 알렉시 2세 총대주교를 선출했다.
1983년 1월 안드로포프가 급서한 키셀료프의 후임으로 그를 긴급 소환했을 때, 슬륀코프는 당 경험 부족을 들어 사양했다. 안드로포프의 답은 짧았다: '오늘날 가장 큰 정치는 경제요. 가서 그 정치를 하시오.'
민스크 트랙터 공장에서 노동자로 시작해 공장장·총감독을 거쳐 벨로루시 공산당 제1서기(1983~1987)와 고르바초프 치하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1987~1990)를 지낸 소비에트 경제 관료 출신 정치인. 벨로루시 당 책임자 시절 농업 생산량을 30% 끌어올리고 적자 농장을 완전 해소해 '당 중앙위 디렉터'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실무형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1987년 중앙위 경제부장으로 발탁되어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계획경제에서 시장 지향 개혁으로의 이행을 주도했으나, 정부 수반 니콜라이 리시코프와의 마찰과 건강 악화로 1990년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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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60민스크 트랙터 공장 보조기사·기사·상급기사·부책임자·책임자·노조위원장
1960–1965민스크 트랙터 예비부품공장 책임자
1965–1972민스크 트랙터 공장장·민스크 트랙터제조 생산연합 총감독
1972–1974민스크 시당위 제1서기
1974–1983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1983–1987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87–1990CPSU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원; 1987~1988 경제부장, 1988~1990 사회경제정책위원회 위원장
빅토르 마카렌코는 공장 노동자에서 출발해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지역 당 지도자로 올라선 당 관료였다. 세바스토폴과 크림에서 산업·농업·관광을 조정하며, 중앙의 지시와 지역의 생산·문화 유산 사이의 긴장을 다뤘다. 1980년대 반알코올 운동 때 그는 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와 함께 마산드라 와이너리와 그 에노테카를 보존하는 쪽에 섰다. 그의 회고는 후기 소비에트 지역 통치가 중앙 정책을 그대로 집행하는 일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1991년 8월 21일 아침, 쿠데타가 무너지는 것이 확실해지자 이바시코는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야나예프에게 전화해 "고르바초프를 만나러 갈 비행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거절당한 그는 결국 자신이 지지하지 않은 쿠데타 주역들—야조프, 루키야노프 등—과 같은 비행기에 올라 포로스로 향해야 했다.
하르키우 광산대학 출신의 경제학자로, 우크라이나 당 기구에서 20년간 경력을 쌓은 뒤 1989년 셰르비츠키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신설된 부서기장직에 선출되어 모스크바로 옮겼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고르바초프가 총서기직을 사임하자 당 역사상 마지막 지도자가 되었으나, 불과 닷새 만에 당 활동이 정지되면서 소비에트 공산당은 그와 함께 막을 내렸다.
1967년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예고리체프가 브레즈네프의 국방 정책을 공개 비판한 다음 날, 파스투호프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예고리체프가 답했다. "보랴, 왜 그랬나? 네 인생을 망쳤어."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4천만 대원의 청년 조직을 이끈 소비에트 당-국가 간부이다. 재임 중 바이칼-아무르 간선철도(BAM) 건설과 북극점 스키 횡단 등 대규모 청년 동원 사업을 총괄했고, 1978년 CPSU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출판·인쇄·서적거래위원회(고스코미즈다트) 의장으로서 검열 체계와 출판 산업을 관장했으며, 이후 덴마크(1986–1989)와 아프가니스탄(1989–1992) 주재 대사를 지냈다. 소련 해체 후에도 러시아 외무차관, CIS 담당 장관, 국가두마 의원을 역임하며 후기 소비에트 엘리트의 연속성을 대표했다.
1980년 파업이 시작되자 그는 노동자 조직과 자유로운 정보의 족쇄가 마침내 끊겼다고 선언했다.
야체크 쿠론은 폴란드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당 관료제의 지배와 분리해 다시 사유한 역사가이자 조직가였다. 카롤 모드젤레프스키와 함께 쓴 「당에 보내는 공개서한」은 관료제가 노동계급을 지배한다고 비판하면서 노동자 평의회와 민주적 다원주의를 제안했다. 그는 1976년 노동자 방어위원회(KOR)를 공동 창립해 노동자와 지식인을 연결했고, 1980년에는 연대의 핵심 자문역으로 노동자 자주관리 노선을 밀었다. 1981년 12월 13일 계엄령 첫날 밤 구금된 뒤에도 지하 연대를 지지했으며, 1989년 이후에는 노동·사회정책 장관으로 전환기의 사회적 권리를 다뤘다.
1991년 8월 18일, 볼딘은 10년간 보좌했던 고르바초프에게 최후통첩을 전하기 위해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로 날아갔다.
티미랴제프 농업대학과 중앙위 사회과학원을 졸업한 경제학자 출신으로, 1961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일했으며 1969년부터 《프라우다》에서 농업부장과 경제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81년 고르바초프의 보좌관이 되었고, 1987년부터 중앙위 총무부장으로서 정치국과 서기국의 전체 문서 흐름을 통제하는 자리에 올랐으며, 1990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겸임했다. 그러나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가담하여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간 4인방 중 한 명이 되었고, 쿠데타 실패 후 체포·구금되었다가 1994년 사면되었다.
마리안 유르치크는 슈체친 조선소 출신의 노동운동가로, 1980년 파업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국가와 협상한 지도자였다. 그는 8월 30일 슈체친 협정에 서명했지만, 단결권 보장을 얻지 못한 채 경제적 양보를 받아들였고, 하루 뒤 그단스크에서 더 폭넓은 합의가 성립하면서 두 지역의 차이가 선명해졌다. 계엄 뒤에는 수감과 재판을 겪었으며, 훗날 레흐 바웬사 진영과 거리를 두고 독자적 노동조합 노선을 이어 갔다.
1980년 8월 16일, 엘모르 파업을 시작한 그는 그단스크 조선소로 향해 기업간파업위원회에 합류했다.
안제이 그비아즈다는 전자공학자이자 노동조합 활동가로, 1970년대 후반 그단스크의 독립 노동운동을 조직한 인물이다. 그는 해안 자유노조를 공동 창립하고 지하 출판을 이끌며 국가 통제 밖의 노동자 조직을 준비했다. 1980년 8월 16일 엘모르 파업에서 그단스크 조선소로 온 그는 기업간파업위원회 지도부에 합류해 21개 요구안을 공동 작성하고 연대의 초기 지도자가 되었다. 계엄령 뒤 투옥과 탄압을 겪은 그는 레흐 바웬사의 협상 노선과 결별하고 원탁회의 타협에 반대한 경쟁적 야당 흐름을 대표했다.
고르바초프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폴로스코프를 아주 오래전부터 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내지만, 멍청하고 무식하다. 누군가 써주면 그대로 읊을 뿐이다."
러시아 SFSR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 수준 공산당인 КП РСФСР의 창립 제1서기(1990–1991)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맞서는 당내 보수 반대파의 얼굴이었다. 1990년 5월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과 맞붙어 초기 집계에서 앞섰으나 정치국의 명령으로 후보에서 물러났고, 한 달 뒤 창립대회에서 러시아 공산당을 이끌게 되었다. 크라스노다르 당 조직을 5년간 이끈 지방 당료 출신으로, 정치국 위원까지 올랐으나 당내 개혁파와 강경파 양쪽의 압박 속에 1991년 8월 심장마비로 사임했다. 쿠데타 실패와 당 해산 후에도 КПРФ 자문기구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공산당 운동의 상징적 원로로 남았다.
1989년 1월, 빌뉴스 시당은 보고선거 비판에 대한 답변을 두 번째로 요구했으나 라주몹스키의 답변은 없었고, 그해 12월 리투아니아 공산당은 독자노선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1985~1988)과 당건설간부정책위원회 위원장(1988~1990)을 맡아 페레스트로이카 최대 규모의 간부 교체를 주도한 당 조직·인사 책임자였다. 농학자 출신으로 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제1서기(1983~1985)를 거쳐 1986년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에 발탁되었다. 당내 민주화를 내세운 고르바초프 아래에서, 라주몹스키가 중앙에서 내려보낸 엄격한 대의원 할당은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반발과 분리 독립을 촉발한 연쇄 요인이 되었다. 상하이 총영사(1990~1992)를 지냈고, 2025년 현재 1986년 정치국원 중 유일한 생존자다.
1990년 고르바초프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날, 레벤코를 불러 "소비에트 백만장자를 보고 싶나?"라고 한 뒤 상금 전액을 아동 종양센터와 체르노빌 지역에 배분했다. 다 쓴 뒤 고르바초프가 말했다: "이제 백만장자는 없네."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 당·국가 관료로, 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에서 소련 해체기 고르바초프 대통령 비서실장(대통령장)으로 옮겨가며 당권에서 대통령제로 넘어가는 행정 전환을 실무적으로 떠받쳤다. 콤소몰과 당 기구를 거쳐 1985년 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 1986년 CPSU 중앙위 위원이 되었다. 1990년 대통령자문위원회 위원을 거쳐 1991년 8월 대통령장으로서 고르바초프의 최측근 비서실장 역할을 했다. 소련 해체 후 고르바초프 재단 부총재로 일하다 키예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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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1961오데사 냉동기계공장 기술자
1961–1972오데사 콤소몰 지도부, 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 서기
1972–198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감사원, 키예프 주당위 서기·제2서기
1980–1984우크라이나 SSR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 우크라이나 공산당 감사위원회 의장
고르바초프는 우리가 세 시간 늦었다고 말하지만, 전혀 아니다. 우리는 하루 늦었다! 하루 종일 군대 파견 결정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소련 철도 기술자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장(1987~1988)을 지냈다. 1988년 2월 28일 밤 KGB 부의장 필리프 봅코프와 함께 숨가이트에 도착, 사흘간의 포그롬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중앙의 대응이 '세 시간이 아니라 하루 늦었다'고 증언했다. 이후 자포리자 주당 제1서기(1988~1990)와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정치국원(1990~1991)을 지냈으며, 소련 해체 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상품생산자연합 부회장을 역임했다.
패배 직후 셰닌에게 돌려진 말로, 언론 보도에 따르면 GKChP 위원들은 가장 큰 실수를 했다. 'A'라고 말하고서 'B'와 나머지 알파벳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1937년 스탈린그라드주에서 태어나 1958년 자기 공사현장에서 노동자 두 명이 숨진 안전규정 위반으로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9개월 반을 복역한 뒤 조기 석방되었다. 1962년 당에 입당해 아친스크 시당 제1서기(1974–1977), 아프가니스탄 당 고문(1977–1983),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당 제1서기(1987–1990)를 지냈다. 1990년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원으로 당 조직·인사 업무를 총괄해 고르바초프와 이바시코에 이은 당내 3인자로 불렸고, 1991년 8월 18일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 GKChP를 지지했다가 8월 23일 체포되었다. 1992년 10월 건강을 이유로 석방되고 1994년 2월 사면되었으며, 2009년 5월 28일 71세로 사망했다.
“나는 그저 한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단 1분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 정치국 입성 후 ‘여성 담당’이라는 낙인에 맞서
갈리나 세묘노바는 소련 역사상 정치국 정위원에 오른 네 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고르바초프 시기 말기 가족·여성·인구정책을 총괄한 당 중앙위 서기였다. 1981년부터 10년간 잡지 《크레스티얀카》(농촌 여성)의 편집장으로 재임하며 발행부수를 600만 부에서 2,200만 부로 끌어올렸고, 패션·가족·문화 기사로 편집 방향을 전환해 수백만 소비에트 여성의 일상 담론에 접속했다. 1990년 제28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원 겸 서기국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여성위원회 신설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중앙위 결정을 주도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에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당 지도부 인사였다.
1991년 10월 25일, 당 활동 정지 일주일 후 쿱초프는 크렘린에서 옐친을 만나 러시아 공산당 금지령을 철회해 달라고 설득했다. 옐친은 듣지 않았고, 쿱초프는 이후 1년 반 동안 '지하 제1서기'로서 당을 복원대회까지 이끌었다.
볼로그다주 집단농장과 제철소를 거쳐 올라온 금속공학자 출신 당 간부로, 1985년부터 5년간 볼로그다주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90년 CPSU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어 사회정치조직 담당 부서를 이끌었고, 러시아 공화국 공산당(КП РСФСР) 창립 작업에 참여했다. 1991년 8월 이반 폴로스코프의 후임으로 КП РСФСР 제1서기에 선출되었으나, GKChP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음에도 사건 직후 '쿠데타 공모'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옐친의 당 활동 금지령 이후에도 지하에서 조직을 유지하며 1993년 КПРФ 복원대회를 주도했고, 이후 11년간 쥬가노프의 제1부의장으로서 신생 러시아 공산당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1981년 12월 13일 그의 체포 소식이 우제크 광산에 전해지자 광부들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일하지 않기로 했다.
얀 루드비차크는 광부이자 폴란드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의 우제크 광산 사업장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그의 체포는 광부들이 계엄령에 맞서 파업하고 체포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게 만든 직접적 계기였다. 석방 뒤에도 그는 강등과 감시를 견디며 광산 안에서 지하 출판물을 배포했고, 1989년 연대 재건을 준비했다.
“나는 이것이 포그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정착지들에서 도시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은 실행됐다. 버스들은 숨가이트로 향했다.”
소련 및 아제르바이잔의 당·국가 관료로, 건설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1983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1988년 2월 아르메니아에서 쫓겨난 아제르바이잔인 난민들이 버스로 바쿠에 몰려들자 시내 진입로를 봉쇄했고, 이 조치는 바쿠의 폭력적 충돌을 막았으나 버스 행렬이 숨가이트로 방향을 돌리게 만들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첫 축구협회 회장(1992~2003)을 지내며 아제르바이잔 축구의 UEFA·FIFA 가입을 이끌었다.
1989년 4월 9일, 그는 트빌리시 독립 시위의 조직자로 체포되었지만 45일 뒤 대중의 압력으로 풀려났다.
메라브 코스타바는 음악가·시인이자 그루지야의 독립과 인권을 위해 싸운 반체제 운동가였다. 그는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와 함께 지하 출판과 헬싱키 인권운동을 조직하며 소비에트 체제의 민족·종교 억압에 맞섰다. 장기간의 수감과 시베리아 유배 뒤 1987년 귀환한 그는 1988년 이후 대중적 독립운동과 트빌리시 시위를 이끌었다. 1989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그루지야는 그를 민족영웅으로 기렸다.
1988년 10월 라흐바린네 창립대회에서 사회학자 라우리스틴은 사비사르와 함께 연단에 서서 독립운동의 지적 초석을 놓았다.
마리우 라우리스틴은 에스토니아 공산당 고위 간부의 딸로 탈린에서 태어나 타르투 대학에서 언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1980년 「40인 서한」에 서명하여 에스토니아의 언어와 문화를 질식시키는 러시아화 정책에 공개 저항했고, 이 경험은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 진로를 결정지었다. 1988년 에드가 사비사르와 함께 라흐바린네를 공동 창립하고 그 창립대회를 조직했으며, 라흐바린네의 지적 리더십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독립 회복 후에는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냈고, 타르투 대학 교수로서 탈사회주의 전환의 사회학을 연구했다.
얀 룰레프스키는 폴란드의 노동조합 지도자이자 민주화 운동가로, 비드고시치 지역 자유노조를 이끌었다. 그는 1981년 농민들의 독자적 노동조합 등록 요구를 연대의 의제로 받아들였고, 3월 19일 지방 국민평의회 회의장에서 민병대에게 폭행당했다. 이 사건은 자유노조가 전국 경고파업을 조직하고 계엄 선포 전의 긴장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계엄기에 internment를 겪었으며, 민주화 뒤에는 국회의원과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낙원이 아니라 헌법을 위한 혁명. 반(反)유토피아적 혁명. 유토피아는 단두대와 굴라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가정에서 자랐으나 1968년 위기로 투옥되며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노동자방어위원회(KOR)와 연대노조의 전략가로 활동하고 1989년 원탁회의에 참여했으며, 《가제타 비보르차》 초대 편집장으로서 '당신들의 대통령, 우리의 총리' 구상을 제안해 평화적 권력 이양을 설계했다.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언론인으로 남아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