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초기화

보안·정보·치안 인물 210명

이반 이바노비치 마슬렌니코프

Иван Иванович Масленников

NKVD 부인민위원에서 육군대장까지: 두 세계를 오간 군사령관

1953년 보르쿠타 수용소 봉기. 마슬렌니코프가 협상장에 나타나자 수감자가 외쳤다 — 「장군! 41년에 우릴 무장도 없이 늪지에 버렸소! 우린 25년형인데 장군만 살아남으셨군요!」 마슬렌니코프는 묵묵히 끝까지 들었다.

철도원 아들로 내전에서 기병여단장까지 올랐고, 1928년 OGPU 국경군으로 이적해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토벌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1939년 베리야에 의해 NKVD 부인민위원 겸 국경·내무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독소전 발발 후 29군·39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반격 선봉, 캅카스 전투에서 북캅카스 전선군을 지휘해 바쿠 유전을 사수했으며, 1944년 제3발트 전선군 사령관으로 프스코프·타르투·리가를 탈환하고 육군대장에 올랐다. 대일전에서 바실렙스키 부사령관으로 관동군 격멸 작전을 입안해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MGB 부장관으로 복귀했으나 베리야 몰락 후 '부대로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추궁받다 1954년 4월 권총 자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1921적위대·붉은군대 복무, 내전 종결 시 기병여단장
  • 1928–1935OGPU·NKVD 국경군,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토벌, 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 1937–1939벨로루시 NKVD 국경군 사령관, 벨로루시 내무 제1부인민위원
  • 1939–1941NKVD 부인민위원 — 국경군·내무군 총괄
  • 1941–194229군·39군 사령관 — 모스크바 반격, 르제프 포위
  • 1942–1943북부집단군 사령관, 북캅카스 전선군 사령관 — 캅카스 방어
  • 1944제3발트 전선군 사령관 — 프스코프·타르투·리가 탈환, 육군대장
  • 1945극동 소련군 부사령관 — 관동군 격멸 작전, 소비에트 연방 영웅
  • 1948–1954MGB·MVD 부장관 — 소련 내무군 총괄

라브렌티 포미치 차나바

Лаврентий Фомич Цанава

‘두 번째 라브렌티’, 미호엘스 살해를 주관한 베리야의 사람

1948년 1월 12일 밤 솔로몬 미호엘스와 골루보프는 민스크 외곽 차나바의 다차로 유인되어 그곳에서 살해되었고, 사망은 교통사고로 위장되었다.

본명 라브렌티 잔즈가바로, 1900년 쿠타이시 현 나후나보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고 1920년 8월 당에 입당했다. 1938년부터 1951년까지 벨로루시 국가보안기관을 이끌며 서부 벨로루시의 대규모 총살과 추방을 조직했고, 이 시기 체포자에 대한 구타에 직접 가담했다는 사건 기록이 남아 있다. 스탈린의 지시로 미호엘스 암살이 결정되자 그의 다차가 작전 거점이 되었고, 1948년 1월 12일 밤 극장 배우 솔로몬 미호엘스와 골루보프가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1951년 말 소련 MGB 부장관이 되었다가 이듬해 실각했고, 1953년 4월 체포되어 1955년 10월 부티르카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8–1941벨로루시 내무인민위원
  • 1941벨로루시 국가보안인민위원
  • 1941–1943벨로루시 NKVD, 서부·중부전선 특별부장
  • 1942–1943파르티잔운동 중앙참모부 부장
  • 1943–1951벨로루시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51–1952소련 국가보안 부장관, 제2총국장(방첩)
  • 1953–1955체포, 재판 없이 옥중 사망

표트르 바실리예비치 페도토프

Пётр Васильевич Федотов

체카에서 KGB까지 38년, 방첩과 해외정보를 모두 지휘한 보안장교

1940년, 리투아니아 NKVD에 보낸 지령에서 용의자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국경을 넘으려 할 때 체포할 것이며, 심문 중 태도에 따라 포섭 여부를 결정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차 차장 아들로 태어나 1921년 체카에 입문한 이후 KGB까지 38년간 소련 보안기관에 몸담으며 방첩과 해외정보 양 영역에서 지휘관을 역임한 드문 경력의 소유자다. 1939년부터 1946년까지 NKVD·NKGB 방첩총국장으로서 전시 방첩작전과 카틴 학살에 관여했고, 전후 잠시 MGB 해외정보총국장과 정보위원회(KI) 부의장으로 소련의 대외첩보를 총괄했다. 1954년 KGB 출범과 함께 제2총국(방첩) 국장으로 복귀했으나 흐루쇼프 해빙기인 1956년 스탈린 시대 불법행위로 해임·강등되었고, 1959년 장군 계급을 박탈당하고 제명된 뒤 1963년 모스크바에서 자연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1937체카·GPU·OGPU·NKVD에서 북캅카스 지역 방첩·정보·비밀정치부서 요직 역임
  • 1937–1939NKVD 중앙기구(GUGB) 비밀정치부서(SPO) 과장, 제4부 부국장
  • 1939–1946NKVD·NKGB 제2국(방첩) 국장, 전시 방첩 총괄
  • 1946–1947MGB 제1총국(해외정보) 국장 겸 국가보안차관
  • 1947–1952정보위원회(KI) 부의장, 소련 해외정보 총괄
  • 1953–1954MVD 제1총국(방첩) 국장
  • 1954–1956KGB 제2총국(방첩) 국장
  • 1956–1959KGB 고등학교 편집출판부 차장으로 강등, 1959년 제명·계급 박탈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오골초프

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Огольцов

35년간 소련 보안기관의 모든 변천을 관통한 작전가

1945년 12월, 오골초프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정치국 회의에서 MGB 장관직을 제안받았다.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다'며 거절했으나, 6년 뒤 아바쿠모프가 체포되자 그는 바로 그 자리의 대행을 맡았다.

세르게이 오골초프는 체카에서 MVD까지 소련 국가보안 기관의 전 역사를 관통한 인물이다. 1918년 17세로 체카에 들어가 제르진스키의 눈에 띄어 우크라이나로 파견되었고, 마흐노 진압에서 인질 처형과 봉기 전멸 전술을 익혔다. MGB 차관 및 제1차관(1946–1953)으로서 아바쿠모프 휘하에서 작전 서부·봄·파도 등 대규모 강제이주를 조율했고, 1948년 솔로몬 미호엘스 살해를 민스크에서 직접 지휘했다. 1951년 아바쿠모프 해임 후 한 달간 MGB 장관 대행을 맡았으며, 스탈린 사후 베리야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1959년 계급과 훈장을 모두 박탈당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8–1920사포조크 현 체카 수사관 → 랴잔 현 체카 작전집행위원 → 모스크바 체카 압수수색위원
  • 1920–1925폴타바 현 체카 부서장 → 로흐비차 현 체카·GPU 정치국장
  • 1927–1935OGPU 특별부서장 (제1기병사단, 제95·44·99소총사단 등)
  • 1936–1939NKVD 국경부대 지휘관 (크림·아르한겔스크) → 레닌그라드시 NKVD 국장
  • 1942–1944쿠이비셰프 주 NKVD·NKGB 국장 → 카자흐 SSR 국가보안인민위원
  • 1945–1951NKGB·MGB 제1차관 → MGB 차관(일반 담당)
  • 1951–1952MGB 장관 대행(7–8월) → MGB 제1차관 → 우즈베크 SSR MGB 장관
  • 1952–1953MGB 제1차관 겸 MGB GRU 국장

카를 프리드리히 오토 볼프

Karl Friedrich Otto Wolff

나치 SS의 고위 조정자이자 전쟁 말기의 협상 대표

1945년 3월 8일, 볼프는 스위스에서 앨런 덜레스와 북이탈리아 항복 조건을 논의했다.

카를 볼프는 나치 독일의 고위 SS 장교로,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참모장을 지내며 정권의 핵심 의사결정과 범죄에 접근했다. 이탈리아 점령기에 최고 SS·경찰 지도자로서 유대인 검거와 강제노동, 저항운동 탄압을 관할했고, 그 책임을 전후 협상 참여로 지울 수는 없었다. 1945년 스위스에서 미국 OSS의 앨런 덜레스와 비밀 협상인 작전 선라이즈를 진행해 북이탈리아 독일군의 조기 항복을 이끌었지만, 그 영향력과 동기는 제한적으로 평가된다. 전후에는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1920독일 제국군 제115 보병연대 장교 후보생, 서부전선 복무
  • 1931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과 SS 가입
  • 1935–1943SS 국가 지도자 개인참모장
  • 1943–1944이탈리아 최고 SS·경찰 지도자
  • 1944–1945이탈리아 주둔 독일군 전권대장
  • 1945작전 선라이즈 독일 측 협상 대표, 북이탈리아 항복 관여
  • 1964–1969뮌헨 법원에서 유대인 30만 명 살해 방조죄로 15년형, 1969년 석방

드미트리 마트베예비치 드미트리예프

Дмитрий Матвеевич Дмитриев

'NKVD 내부 음모' 이야기를 처음 풀어놓은 스베르들롭스크 NKVD 국장

명령 제00447호가 스베르들롭스크주에 준 한도는 1범주 4천 명, 2범주 6천 명이었다. 그러나 1937년 12월 11일 자 그의 보고서는 작전 종료를 이렇게 명시했다. '반소비에트 분자에 대해 1만 5천 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중 1번째 범주로 7500명...'

체카와 OGPU 중앙 기구에서 경력을 쌓고 1936년 여름 스베르들롭스크주 NKVD 국장이 된 체키스트로, 나우모프는 그를 류시코프, 레덴스와 함께 '북캅카스 출신자' 집단으로 분류한다. 쿨라크 작전에서 정치국의 서면 승인 없이 한도 증액을 관철한 지도자 가운데 하나로, 명령 제00447호가 준 한도 1만 명을 훌쩍 넘겨 1만 5천 명 유죄 판결로 작전 종료를 보고했다. 1938년 도로건설총국장으로 소환되었다가 6월 체포되었고, 10월 22일 'NKVD 내부의 공모'에 대한 상세한 진술로 공모 사건의 실을 처음 풀었으며 1939년 총살됐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1936체카·OGPU 요원, 중앙 기구 근무
  • 1936–1938스베르들롭스크주 NKVD 국장
  • 1937한도 초과 집행, 1만 5천 명 유죄 판결 보고
  • 1938도로건설총국장으로 소환, 6월 체포
  • 193810월, 'NKVD 내부 공모' 진술
  • 1939총살

보리스 다비도비치 베르만

Борис Давыдович Берман

벨라루스 대숙청을 지휘한 정보장교 출신 내무인민위원

부하린 아파트 수색에 "검은 양복, 흰 셔츠, 고운 반지에 긴 새끼손톱" 차림으로 나타났다. 안나 라리나는 "마치 연회에 온 듯했다"고 남겼다.

1921년 체카에 입문해 경제·방첩 부서를 거쳐 이노(INO)로 옮겨 베를린과 로마에서 비밀 거점을 운영한 소련 정보장교였다. 1935년 이노 제1부책임자로 외국정보를 총괄했고, 1937년 벨라루스 내무인민위원으로서 공화국 전역의 대숙청을 진두지휘해 8개월 만에 6만 명을 체포하고 쿠라파티 집단처형을 감독했다. 1938년 9월 NKVD 3국장으로 전보된 직후 베리야의 숙청에 휘말려 체포됐고, 1939년 2월 총살됐으며 사후 복권되지 않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1923이르쿠츠크 구베르니야 체카 요원
  • 1923–1928OGPU 경제관리국 부서장
  • 1928–1931중앙아시아 OGPU 방첩·특별부서장
  • 1931–1933이노 OGPU 베를린·로마 거점장
  • 1935–1936GUGB NKVD 이노 제1부책임자
  • 1936–1937GUGB NKVD 비밀정치부 부책임자
  • 1937–1938벨라루스 SSR 내무인민위원
  • 1938NKVD 3국(수송·통신) 국장

오자키 호즈미

尾崎秀実
보안·정보·치안 소속 미확정 일본 일본 1901–1944 ✕ 처형

고노에 총리의 브레인이자 모스크바를 구한 일본인 간첩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훌륭하게 죽고 싶다.

호즈미 오자키는 아사히 신문 기자이자 공산주의자로, 리하르트 조르게의 도쿄 첩보망에서 가장 핵심적인 일본인 정보원이었다. 그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브레인으로서 내각의 최고위급 기밀에 접근할 수 있었고, 1941년 9월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고 남방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결정적 정보를 조르게에게 전달해 모스크바 전투의 향방을 바꾸었다. 1941년 10월 체포되어 전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국가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사형 집행 전 감옥에서 아내와 딸에게 보낸 편지는 『사랑은 별비처럼』으로 출간되어 전후 일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6–1927아사히 신문 기자
  • 1928–1932아사히 신문 상하이 특파원
  • 1930상하이에서 리하르트 조르게와 접촉
  • 1934–1941조르게 도쿄 첩보망의 핵심 정보원
  • 1937–1941쇼와연구회 연구원, 고노에 내각 자문
  • 1938–1941고노에 총리 '조찬회' 멤버
  • 1941.10조르게 사건으로 체포
  • 1944.11.7스가모 구치소에서 교수형

세르고 아르세니예비치 고글리제

Сергей Арсеньевич Гоглидзе

그루지야 대숙청의 실무 총괄에서 극동의 총독으로

동독에서 소콜롭스키 원수의 사무실로 소환된 고글리제는, 뒤따라 들어온 두 장교가 권총을 겨누자 1953년 7월 3일 체포되었다. '그의 눈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고 목격자가 기록했다. 베리야 측근들의 몰락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그루지야 출신 국경경비대 정치장교로, 캅카스에서 베리야의 눈에 띄어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이 되었고 NKVD 트로이카를 주재하며 대숙청을 실무 총괄했다. 베리야의 후원으로 레닌그라드 NKVD에서 예조프 잔당을 정리했고, 1941년 4월 몰다비아 전권대표로서 새로 병합된 베사라비아에서 3만 명 이상의 추방을 지휘했다. 1941년 7월부터 하바롭스크변경주 NKVD·MGB 책임자를 지냈다. 1953년 7월 3일 동독 출장 중 체포되어 그해 12월 23일 베리야 등과 함께 총살됐다. 2002년 러시아 연방 대법원 군사재판부는 그를 대규모 탄압의 조직자로 지목해 복권 대상이 아닌 자로 결정했고, 일부 2차 자료가 주장하는 2004년 복권은 확인되지 않는다.

상세 이력 보기
  • 1934–1938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그루지야 NKVD 트로이카 의장
  • 1938–1941레닌그라드주 NKVD 관리국장
  • 1941몰다비아 주재 NKVD 전권대표
  • 1941–1951하바롭스크변경주 NKVD·MGB 책임자, 극동 MGB 전권대표
  • 1951–1952국가보안 제1부장관
  • 1951–1952우즈베크 국가보안장관
  • 1952–1953MGB 제3총국장(군 방첩), 국가보안 제1부장관
  • 1953구금, 재판과 처형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셀리바놉스키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Селивановский

스탈린그라드 사령관 교체를 스탈린에게 직통으로 건의해 전세를 바꾼 방첩 간부

스탈린에게 직통 전보를 보낸 후 모스크바로 소환된 그는 부하에게 "내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처형 가능성에 대비했다.

스탈린 시대 군 방첩과 국가보안 기관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전선 특별부서장으로서 사령관 고르도프의 무능함을 직통 전보로 스탈린에게 보고해 교체를 이끌어냈다. 1943년부터 스메르시 부국장으로서 독일 후방 침투 공작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폴란드 공안부의 소련 측 수석고문으로서 공산주의 보안 기구 건설을 주도했다. 1946년 MGB 국가보안차관 겸 제3총국장에 올랐으나, 1951년 'MGB 내 시온주의 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투옥되었다가 스탈린 사후 석방되었다. 1953년 '직위 신뢰 상실'로 해임된 뒤 1997년 96세로 사망할 때까지 연금 생활을 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8–1941NKVD 특별부서 각 분과 차장·분과장을 역임하며 보안 간부로 성장
  • 1941–1943남서전선·스탈린그라드·돈·남부전선 NKVD 특별부서장
  • 1943–1946스메르시 방첩총국 부국장, 독일 후방 침투 및 사보타주 공작 지휘
  • 1945–1946폴란드 공안부 소련 측 수석고문, 공산주의 보안기구 건설 주도
  • 1946–1951MGB 국가보안차관 겸 제3총국장
  • 1951–1953'시온주의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투옥, 스탈린 사후 석방
  • 1953'직위 신뢰 상실'로 해임, 이후 연금 생활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겐딘

Семён Григорьевич Гендин

대숙청기 GRU를 이끌며 조르게 도쿄 거점을 구한 체카 출신 정보장교

1918년, 16세 겐딘은 이렇게 썼다: "나는 주변의 모든 일을 탐욕스럽게 지켜보았고, 물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끈질기게 물었다. 내 자리는 혁명 대열 속에 있다고 굳게 확신했다."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겐딘은 체카·OGPU·NKVD 방첩 장교로 경력을 쌓다 1937년 9월 노농적군 정보총국(GRU) 국장 대리가 된 소련 군사정보 지휘관이다. 1918년 16세에 붉은군대와 볼셰비키당에 합류했고, 내전 후 모스크바 체카 수사관으로 전환해 보리스 사빈코프 체포 작전 '신디카트-2'에 참여했으며, 이후 OGPU 방첩부와 NKVD 특별부·비밀정치부에서 요직을 거쳤다. GRU 국장 대리로서 대숙청이 정보기관을 초토화하는 와중에 리하르트 조르게의 도쿄 비합법 거점을 해체하라는 명령을 막아냈으며, 이는 훗날 소련이 독소전 직전 일본의 전략 방향을 확인하는 결정적 정보선을 보존한 조치였다. 1938년 10월 체포되어 이듬해 2월 처형되었고 1957년 사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8붉은군대 입대·RKP(b) 입당
  • 1918–1921남북전쟁: 페트로그라드·카프카스 전선에서 소대장·포대장·노보로시스크 요새지구 포병부사령관
  • 1921–1925모스크바 체카 수사관 → OGPU 방첩부 제6·제7과 부과장·과장
  • 1924보리스 사빈코프 체포 작전 '신디카트-2' 참여
  • 1926–1929OGPU 서부지역 전권대표부 방첩부 부장 (민스크)
  • 1929–1934OGPU 방첩부 과장들 → 특별부 과장
  • 1934–1936GUGB NKVD 특별부 과장 겸 부부장
  • 1936. 9 – 1937. 4NKVD 서부주(스몰렌스크) 국장
  • 1937. 4 – 1937. 9GUGB NKVD 제4(비밀정치)부 부부장
  • 1937. 9 – 1938. 10노농적군 정보국(GRU) 국장 대리 겸 부국장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우스펜스키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Успенский

자살을 위장하고 달아난 우크라이나 NKVD 수장

1938년 11월 14일, 우스펜스키는 사무실에 유서를 남기고 드네프르 강변에 외투와 모자를 벗어둔 채 종적을 감추었다. 류시코프의 망명, 리트빈의 자살에 이은 석 달 새 NKVD 고위간부의 세 번째 비상사태였다.

우크라이나 NKVD 수장으로서 대숙청의 가장 격렬한 말기 국면을 주재했다. 1938년 예조프가 몰락하자 드네프르 강가에 유서와 외투를 남겨 익사로 위장, 도주했다. 5개월 뒤 체포되어 1940년 총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6–1937서시베리아 NKVD 관리국 부국장
  • 1937–1938오렌부르크주 NKVD 관리국장
  • 1938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 1938–1939자살 위장 뒤 도주, 미아스에서 체포
  • 1940재판과 처형

빅토르 파블로비치 주라블료프

Виктор Павлович Журавлёв

예조프를 무너뜨린 밀고 편지의 작성자

미하일 시레이데르는 그를 '극악무도한 출세주의자'로 기억했다. '예조프 주변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것을 감지하고 적절한 시기에 스탈린 앞으로 편지를 써서' 예조프가 인민의 적을 감싸 왔다고 알렸다는 것이다.

1937년 9월 쿠이비셰프주 NKVD 국장이 되어 두 차례 상한 증액으로 한도를 4,800명 늘린 체키스트다. 1938년 2월 이바노보주로 옮겨 전임자 라드지빌롭스키가 '실수로' 풀어 준 사람들을 다시 잡아들였고, 그해 11월 예조프가 인민의 적을 감쌌다고 고발하는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냈다. 정치국에서 심의된 이 편지는 예조프 해임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고, 그 공으로 모스크바 및 모스크바주 NKVD 국장과 중앙위원 자리를 받았으나 곧 카라간다 수용소장으로 밀려나 1946년에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1937체카·OGPU·NKVD 복무
  • 1937–1938쿠이비셰프주 NKVD 국장, 한도 4,800명 증액
  • 1938이바노보주 NKVD 국장
  • 193811월, 예조프 고발 편지를 스탈린에게 제출
  • 1938–1939모스크바 및 모스크바주 NKVD 국장, 중앙위원
  • 1939카라간다 수용소장으로 전출
  • 1946사망

그리고리 테오필로비치 카라나제

Григорий Теофилович Каранадзе

숙청을 넘기고 살아남은 그루지야 내무장관

1952년 4월 베리야를 겨냥한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스탈린 사후 베리야의 손으로 풀려났다. 이듬해 베리야가 실각하자 측근들은 대부분 총살당했지만, 카라나제는 해임에 그치고 1970년 자연사했다.

베리야의 그루지야 출신 측근으로, 크림·다게스탄 내무인민위원을 거쳐 그루지야 내무장관(1943~1952)을 지냈다.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됐다가 스탈린 사후 복권되었고, 베리야 측근 중 유일하게 처형을 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5–1937트빌리시·시그나기 지구당 제1서기
  • 1938–1941크림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
  • 1942–1943다게스탄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
  • 1943–1952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52–1953‘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 이후 복권
  • 1953그루지야 내무 부장관
  • 1957–1970그루지야 각료회의 국가산림위원회 부의장

스테판 솔로모노비치 마물로프

Степан Соломонович Мамулов

NKVD 서기국을 쥔 문서의 관문

1938년 12월 베리야의 부름으로 트빌리시에서 모스크바로 올라왔다. 한 달 뒤 NKVD 서기국 제1부국장에 임명되어, 14년간 비밀경찰의 모든 문서가 그의 책상을 통과했다.

베리야 측근 당 관료. NKVD 서기국장으로 문서 흐름 전체를 통제했고, 내무 부장관으로 수용소 체계를 관장했다. 베리야 숙청 후 별도 재판으로 15년형을 살고 1968년 석방됐다.

상세 이력 보기
  • 1923–1938압하지야·그루지야·카자흐스탄 당 사업, 트빌리시 시당 서기
  • 1939–1946NKVD·MVD 서기국장
  • 1946–1953내무 부장관(수용소·보급 관장)
  • 1953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장
  • 1953–1968체포, 십오 년형 복역

미하일 파블로비치 시레이데르

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Шрейдер

대숙청기 NKVD의 내부 증언자

1938년 초 노보시비르스크에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형사 요원들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와 호송에 동원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와 한 달 내내 충돌한 끝에 그는 전출되었고, 넉 달 뒤에는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919년부터 체카에서 일한 고참 요원으로, 1935년부터 이바노보주 밀리치야(경찰) 국장을 지냈고 1938년 2월 카자흐 SSR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밀리치야 총국장이 되었다. 그 직전 노보시비르스크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밀리치야 인력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 업무에 동원하라는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의 요구를 거부해 한 달 만에 자리에서 밀려났다. 1938년 6월 알마아타에서 체포되어 여러 나라의 간첩이라는 자백을 강요당했으나 아홉 달 넘게 버텼고, 고문 끝에는 자신이 만주국 황제 푸이의 사생아라는 식의 일부러 터무니없는 진술서를 써서 수사의 조작성을 기록에 남겼다. 1940년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2년 풀려나 사병으로 참전했으며, 1950년대 중반 복권되었다. 만년에 쓴 회고록 「NKVD 내부에서: 체키스트의 수기」(1995년 사후 출간)는 지휘부급 생존자가 대숙청기 NKVD 내부를 증언한 보기 드문 기록으로, 역사가들이 널리 인용한다.

상세 이력 보기
  • 1919체카(전러시아 비상위원회) 입부, 서부전선 사단 특별부 정찰 요원
  • 1922모스크바 주 GPU 비밀정치부 근무, 불라노프의 보좌관
  • 1925–1927외무인민위원부 암호부와 소프키노에서 근무
  • 1930–1931중앙아시아·레닌그라드 군관구 OGPU 전권대표부 근무
  • 1931–1933히비노고르스크 GPU 국장, 이후 타타르 자치공화국 OGPU 근무·카잔 형사수사
  • 1935–1938.1이바노보주 밀리치야 수사부서 책임자, 밀리치야 관리국장(내무인민위원부 부국장 겸임)
  • 1938.2–6카자흐 SSR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밀리치야 총국장(알마아타); 6월 체포

존 알렉산더 매콘

John Alexander McCone

쿠바에 소련 미사일이 올 것이라 홀로 경고한 CIA 국장

기습 공격은 미국에 '진주만 오명'을 남길 것이라고 경고하며, 공습 전 카스트로와 흐루쇼프에게 24시간의 사전 경고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공화당원으로, 피그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CIA 국장에 임명되었다. 1962년 여름과 가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반입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으나 정보기관 내부에서 기각당했고, 9월 20일 신혼여행 중 보낸 전문에서 '상상력 있는 분석'을 촉구한 끝에 10월 14일 U-2 정찰기를 명령해 미사일 기지를 발견했다. 케네디 암살 후 존슨 행정부에서도 재임했으나 베트남 확전을 둘러싼 불화로 1965년 사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9Consolidated Steel Corporation 수석부사장
  • 1937Bechtel-McCone 공동 창업
  • 1941–1945California Shipbuilding Corporation 사장
  • 1950–1951미국 공군 차관
  • 1958–1961미국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 1961–1965제6대 CIA 국장

티모페이 암브로시예비치 스트로카치

Тимофей Амвросиевич Строкач

베리야가 '수용소 먼지'로 위협하고 흐루쇼프에게 쿠데타를 경고한 내무장관

베리야가 전화로 "우리는 당신을 기관에서 쫓아내고 체포해 수용소에서 썩게 할 것이며, 가루로 만들어 수용소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말했다.

대조국전쟁 시기 30만 빨치산을 지휘한 우크라이나 파르티잔 사령부 책임자로, 이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무장관을 지낸 소비에트 보안기관 간부다. 전후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반란군(UPA) 진압을 직접 지휘하며 대규모 체포를 주도했고, 스탈린 사후 라브렌티 베리야에 의해 르비우 주 경찰청장으로 좌천되었다. 1953년 6월 베리야가 당 기관을 우회해 MVD의 독자적 권력을 구축하려 한다고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경고했으며, 베리야로부터 '수용소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은 이 사건은 베리야 체포 결의의 결정적 방아쇠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6우크라이나 SSR 내무부인민위원
  • 1942–1945우크라이나 파르티잔 운동 참모장
  • 1946–1953우크라이나 SSR 내무장관
  • 1953.03–06르비우 주 내무국장
  • 1953–1956우크라이나 SSR 내무장관 (복귀)
  • 1956–1957소련 내무차관 겸 국경·내무군 총국장

사르디온 니콜라예비치 나다라야

Сардион Николаевич Надарая

베리야의 경호를 맡은 내부감옥 책임자

1937년, 나다라야는 전 그루지야 중앙위원회 서기 삼손 마물리야를 심문 탁자에 묶어 일주일 넘게 구타한 끝에 오르조니키제에 대한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1955년 재판에서 스스로 실토한 내용이다.

그루지야 서부 세피에티 마을 출신으로, 1937년 대숙청 정점에서 그루지야 NKVD 내부감옥을 운영하며 수감자 구타와 허위 사망진단서 작성에 관여했다. 1939년 베리야의 개인 경호 부책임자가 되어 모스크바로 올라갔고, 1953년 경호 책임자에 올랐다.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트빌리시 공개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여섯 고위 피고와 달리 처형을 면했다. 1965년 모르도바 수용소에서 석방되었고 198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7–1938그루지야 NKVD 내부감옥 부책임자, 이어 책임자
  • 1939–1946베리야 개인 경호 부책임자
  • 1946–1952MGB 경호총국 장교
  • 1952–1953MGB 제41 경호대 부책임자
  • 1953베리야 개인 경호 책임자
  • 1953–1965체포, 십 년형 복역

아나톨리 안토노비치 볼린

Анатолий Антонович Волин

판사 숙청을 지휘하고 재활 조치로 실각한 최고재판소장

1954년 1월, 볼린의 최고재판소 총회는 재활된 시민에게 주택을 반환할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당 지도부는 곧바로 이를 오류라고 규정했고, 그 해석은 3년 후 그를 실각시킨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쿠반의 가난한 어부 가정에서 아홉째 아이로 태어나 내전에 참전하고, 라브파크와 레닌그라드대학 법학부를 거쳐 프롤레타리아 법조인으로 성장했다. 1939년 RSFSR 검찰총장에 올라 대숙청 후반기와 전쟁기 검찰을 이끌었고, 1948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이 되어 1952년까지 사법기관 숙청을 직접 조직·감독했다. 그러나 1954년 1월 최고재판소 총회가 재활된 시민에게 주택 반환 가능성을 시사한 해석을 내놓자 당 지도부는 이를 오류로 규정했고, 결국 1957년 2월 해임되었다. 이후 국가중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12년간 재직하다 104세까지 생존해 소련 최고위 법조인 중 가장 오래 산 인물로 남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1921테므류크 어류가공공장 노동자
  • 1921붉은군대 부대 본부 비밀부서장, 내전 참전
  • 1923–1926크라스노다르 라브파크 학생
  • 1925RKP(b) 입당
  • 1930레닌그라드국립대학 법학부 졸업
  • 1930–1931공산주의아카데미 대학원생 (레닌그라드)
  • 1931–1932레닌그라드대학 교원·교수주임
  • 1932–1933카렐리야 자치SSR 문화·공교육 부문장
  • 1933–1935페트로자보츠크 검사
  • 1935–1937레닌그라드 볼로다르스키 구역 검사보, 소콜니키 구역 검사
  • 1937–1939RSFSR 부검찰총장
  • 1939–1948RSFSR 검찰총장
  • 1948–1957소련 최고재판소장
  • 1957–1969소련 각료회의 국가중재위원회 부위원장
  • 1969–2007연방급 개인연금자, 《인간과 법》 잡지 고문

보그단 자하로비치 코불로프

Богдан Захарович Кобулов

베리야의 가장 가까운 부관이자 카틴·민족이주의 집행자

메르쿨로프는 회고했다 — "베리야는 밤늦은 업무를 마친 뒤 언제나 코불로프만 데리고 집이나 다차로 향했다." 루뱐카의 그 누구보다 코불로프는 베리야의 사적인 영역에 속한 인물이었다.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1925년 1월 당에 들어갔고, 1922년 그루지야 체카에서 보안 기관 경력을 시작했다. 1931년 베리야의 눈에 들어 그루지야 GPU 비밀정치부로 옮겨간 뒤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차석(1937–1938)과 NKVD 수사부장(1938–1939)을 지냈다. 1940년 폴란드군 장교·경찰 등을 사형에 처한 카틴 학살 3인조의 일원이었고, NKVD·NKGB 차석으로 체첸·인구시와 크림 타타르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지휘했다. 1946년부터 해외 소련 재산 총국(GUSIMZ) 부국장, 1951년 10월부터 제1부국장이었고 1953년 3월 내무부 제1차관이 되었으나 6월 27일 베리야와 함께 체포되어 12월 23일 총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2–1931그루지야 체카·GPU에서 하급 보안 요원으로 근무
  • 1931–1937베리야에게 발탁되어 그루지야 GPU 비밀정치부에서 활동, NKVD로 승계
  • 1937–1938그루지야 NKVD 차석, 대숙청기 현장 숙청 책임
  • 1938–1939NKVD 수사국장 — 예조프 사건과 주요 정치사건 수사 총괄
  • 1939–1941NKVD 경제총국장, 카틴 학살 사형 판결 3인조(1940) 참여
  • 1941–1945NKVD·NKGB 부인민위원(차석) — 체첸·인구시·크림 타타르 등 민족 강제이주 작전 지휘
  • 1953.3–1953.6소련 내무부 제1차관, 베리야의 측근으로 복귀
  • 1953.6–1953.12베리야와 함께 체포, 사형 선고 후 총살

세르게이 로마노비치 사브첸코

Сергей Романович Савченко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4–1966 ○ 실각 1955

우크라이나 그리스가톨릭 교회를 강제 해체한 국가보안장관, 스탈린 말기 대외첩보 책임자

흐루쇼프와 사브첸코는 1947년 스탈린과 아바쿠모프에게 롬자 주교가 '바티칸의 비밀 사절' 및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하조직과 협력한다고 비난하며 그의 암살 허가를 요청했고, 이후 롬자는 독극물 주사로 살해되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17년간 국경부대를 거쳐 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1943–1946)과 국가보안장관(1946–1949)을 지냈다. 1946년 리보프에서 우크라이나 그리스가톨릭 교회를 강제로 러시아 정교회에 통합시키는 '통합 공의회'를 직접 지휘했고, 1947년에는 니키타 흐루쇼프와 함께 스탈린에게 무카체보 교구의 테오도르 롬자 주교 암살 허가를 요청해 관철시켰다. 1949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대외정보를 총괄하는 MGB 제1총국장 겸 국가보안차관에 올랐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과 함께 해임되고 1955년 '직무 부적합'을 이유로 강제 전역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니콜라예프 현 체카 특별부서 작전요원으로 보안기관 입문
  • 1922–1939국경부대에서 작전·참모·학교 교관으로 17년 복무, 1939년 우크라이나 국경군 제5과장 겸 부사령관
  • 1941우크라이나 국가보안부인민위원
  • 1941–1943우크라이나 내무부인민위원. 1941년 말 세르기옌코 인민위원의 이탈로 사실상 NKVD 지휘
  • 1943–1946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
  • 1946–1949우크라이나 국가보안장관. 1946년 리보프 공의회로 그리스가톨릭 교회 강제 통합 주도
  • 1949–1951소련 외무부 정보위원회 제1부의장, 사실상 소련 대외정보 총괄
  • 1951–1953MGB 제1총국장 겸 국가보안차관
  • 1953베리야 체포 후 MVD 제2총국 제1부국장으로 좌천, 곧 해임
  • 1955'직무 부적합'으로 강제 전역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사포노프

Григорий Николаевич Сафонов

뉘른베르크 재판에 참여하고 베리야 체포를 거부하며 물러난 소련 검찰총장

1953년 6월 30일, 사포노프는 베리야 체포 영장 서명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입니다. 대의원 면책특권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날로 그는 해임되었다.

야로슬라블현 로스토프의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1925년 레닌그라드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레닌그라드 공장들의 법률고문으로 일하며 민법 강의를 병행했다. 1935년 검찰로 전환하여 비신스키의 눈에 띄어 1939년 35세에 소련 검찰 부검사장이 되었고, 제1부검사장으로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소련 검찰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1948년 2월 소련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전후 스탈린기 검찰을 5년간 이끌었으나, 1953년 6월 30일 라브렌티 베리야 체포 영장에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면책특권을 이유로 서명을 거부하며 즉시 해임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지방검찰청의 말단 직위로 강등되어 조용히 복무하다 1968년 은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5–1935레닌그라드 기업 법률고문·법률국장, 소비에트법 연구소 민법 강사
  • 1935–1939레닌그라드주 오쿨롭카군·키롭스키구 검사
  • 1939소련 검찰청 민사소송부장
  • 1939–1948소련 부검사장·제1부검사장 (1946년부터 검찰총장)
  • 1945–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소련 검찰단 참여
  • 1948–1953소련 검찰총장
  • 1955–1957모스크바 지방교통검찰청 부검사
  • 1957–1968러시아 SFSR 검찰청 형사재판감독부 차장·수사관리국 검사

세묜 데니소비치 이그나티예프

Семён Денисович Игнатьев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04–1983 ↓ 실각 1953

스탈린 말기의 마지막 MGB 장관

스탈린이 이그나티예프를 불러 "의사들에게서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면 네 목을 짧게 해주겠다"고 위협했다. 흐루쇼프는 1956년 비밀연설에서 이 장면을 공개 증언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자란 당 조직 전문가. 부랴티야·바시키르·벨라루스 등 민족 공화국에서 당 제1서기를 지내다 스탈린 말기 MGB 장관에 기용되었다. 의사 음모와 밍그렐 사건을 지휘했고, 스탈린의 직접적 위협 아래 복종했으나 체카 출신이 아닌 온순한 당료였기에 처형을 면했다. 실각 후 타타르 공화국 당 서기로 복귀해 타타르어 보존에 힘썼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s–1940s당 조직·선전 라인에서 성장, 중앙위 관료로 승진
  • 1951–1953MGB 국가보안장관, 스탈린 말기 보안기관 수장
  • 1952–1953의사 음모 수사와 말기 반유대주의 공포 국면에 관여
  • 1953스탈린 사후 베리야에게 공격받고 MGB에서 축출
  • 1950s–1960s처형은 피하고 지방 당직으로 밀려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