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취임 8일 뒤인 1991년 1월 22일 저녁, 파블로프는 50루블·100루블 지폐를 사흘 안에 새 지폐로 교환하라고 명령하고 1인당 1,000루블까지만 즉시 교환하게 했다. 그보다 앞서 화폐개혁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모스크바금융대학을 1958년에 졸업하고 러시아연방과 소련의 재무부에서 일했으며, 1962년 당에 입당해 1979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계획위원회의 재정·가격 부문을 이끌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소련 국가가격위원회 의장, 1989년부터 1991년 1월 14일까지 재무장관을 지냈고, 같은 날 각료회의가 내각으로 개편되며 고르바초프가 그를 총리로 임명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조직에 가담했고, 8월 22일 면직령과 8월 23일 체포로 수감되었으며, 8월 28일 최고회의가 사임을 확인했다. 1993년 1월 석방되고 1994년 2월 사면된 뒤 은행장과 자문으로 일했으며, 2003년 3월 30일 65세로 사망했다.
패배 직후 셰닌에게 돌려진 말로, 언론 보도에 따르면 GKChP 위원들은 가장 큰 실수를 했다. 'A'라고 말하고서 'B'와 나머지 알파벳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1937년 스탈린그라드주에서 태어나 1958년 자기 공사현장에서 노동자 두 명이 숨진 안전규정 위반으로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9개월 반을 복역한 뒤 조기 석방되었다. 1962년 당에 입당해 아친스크 시당 제1서기(1974–1977), 아프가니스탄 당 고문(1977–1983),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당 제1서기(1987–1990)를 지냈다. 1990년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원으로 당 조직·인사 업무를 총괄해 고르바초프와 이바시코에 이은 당내 3인자로 불렸고, 1991년 8월 18일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 GKChP를 지지했다가 8월 23일 체포되었다. 1992년 10월 건강을 이유로 석방되고 1994년 2월 사면되었으며, 2009년 5월 28일 71세로 사망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크류치코프에게: '내 성격을 이해하게. 단 한 명이라도 죽으면 나는 살 수 없네.'
고리키주 콤소몰 제1서기와 소련 청년단체위원회 의장(1968~1980)을 거친 후, 1990년 VTsSPS 의장·정치국원·중앙위 서기를 지내고 12월 고르바초프의 강행으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1년 8월 GKChP의 얼굴로서 고르바초프의 '병환'을 명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자처했으나 사흘 만에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1994년 사면 후에는 회고록 『소련을 위한 마지막 전투』를 출간하고 학계에서 여생을 보냈다.
「형성된 경제 메커니즘은 명령경제와 시장경제의 모든 최악의 측면을 결합했다」: 1965년 개혁에 대한 평결.
그는 1970년대부터 소련 공식 통계를 독자적 방법으로 재계산하여, 1928~1985년 국민소득 증가가 공식 84.4배가 아닌 6.6배에 불과하다는 충격적 결과를 도출한 경제학자다. 1987년 바실리 셀류닌과 함께 『노비 미르』에 발표한 「기만적 숫자」는 소련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러시아 현대 경제사』 전집을 집필하며 소련 계획경제의 성취와 실패를 냉철히 분석했고, 1965년 코시긴 개혁에 대해서는 '명령경제와 시장경제의 모든 최악의 측면을 결합한 개혁'이라는 평결을 내렸다.
그는 재판을 앞두고 안경을 깨뜨려 그 파편으로 손목을 그었다. 법정은 한 번 연기되어야 했다.
니콜라이 포민은 1972년 체르노빌 원전에 입사하여 1981년 주임기사로 승진한 소련의 원자력 기술자였다. 1986년 4월 26일 폭발 직후 현장에 도착한 그는 원자로가 파괴되었다는 보고를 끝내 믿지 않고, 파손된 4호기에 수시간 동안 냉각수를 계속 주입하도록 강행했으며 부하 직원을 치사량의 방사선에 노출되는 정찰 임무에 보냈다. 사고 후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재판 전 자살 시도와 정신병원 수용 끝에 조기 석방되었고 이후 칼리닌 원전에서 근무하다 은퇴했다.
1998년 금융위기 속에서 옐친이 그에게 총리직을 제안했지만, 마슬류코프는 거절했다. "나는 프리마코프의 제1부총리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소련 계획경제의 마지막 책임자였던 그는 권력 자체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택했다.
타지키스탄 레니나바드 출신의 엔지니어로, 이젭스크 방산 공장에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기술관료로 성장했다. 1988년 고스플란 의장과 정치국 위원(1989)을 지낸 마지막 계획경제 책임자였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프리마코프 내각 제1부총리(1998~1999)로 금융위기를 수습했다. 이후 공산당 두마 의원으로 2010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한, 소련 계획관료 세대와 탈소비에트 산업정치를 잇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500일 프로그램을 통해 가격 형성 연구를 소련 경제의 시장 전환 구상으로 밀어붙였다.
니콜라이 페트라코프는 가격 형성과 경제적 균형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며 계획경제의 작동 원리를 연구한 소련 경제학자였다. 그는 시장 메커니즘과 가격 개혁을 탐구했고, 1990년 스타니슬라프 샤탈린과 그리고리 야블린스키의 500일 프로그램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이 구상은 사유화와 가격 자유화, 공화국으로의 권한 이양을 통해 소련 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려 했으며, 페트라코프의 연구와 정책 활동은 학술적 모델과 급박한 정치적 선택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 준다. 그는 이후 시장문제연구소를 세워 시장 전환과 경제정책 연구를 이끌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59모스크바국립대학교 경제학부 졸업
1963경제학 후보학위 취득, 산업 생산의 수익성과 가격 형성 연구
1970–1989모스크바국립대학교 경제학 교수
1972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계획경제의 가격 형성 연구
1984–1990소련 과학아카데미 회원
1990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경제 담당 보좌관, 이후 소련 대통령 경제 담당 보좌관
“나는 그저 한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단 1분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 정치국 입성 후 ‘여성 담당’이라는 낙인에 맞서
갈리나 세묘노바는 소련 역사상 정치국 정위원에 오른 네 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고르바초프 시기 말기 가족·여성·인구정책을 총괄한 당 중앙위 서기였다. 1981년부터 10년간 잡지 《크레스티얀카》(농촌 여성)의 편집장으로 재임하며 발행부수를 600만 부에서 2,200만 부로 끌어올렸고, 패션·가족·문화 기사로 편집 방향을 전환해 수백만 소비에트 여성의 일상 담론에 접속했다. 1990년 제28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원 겸 서기국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여성위원회 신설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중앙위 결정을 주도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에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당 지도부 인사였다.
로널드 라도시는 미국의 역사가이자 저술가로, 공산주의 가정에서 성장해 미국 공산당과 신좌파를 거쳤다. 로젠버그 사건을 재검토하며 소련 간첩 활동에 관한 기존 신념을 바꾸었고, 이 과정은 그의 반공 보수주의적 전환을 굳혔다. 그는 메리 하벡, 그리고리 세바스티아노프와 함께 『스페인 배신』을 편집해 모스크바 архив 문서를 바탕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소련의 정책과 코민테른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해석했다.
「체키즘의 전통은 근절되어야 하며, 이데올로기로서 존재를 멈춰야 한다」 — 1992년 회고록 『KGB로부터의 해방』에서, 루뱐카를 해체한 마지막 의장이 남긴 선언.
건설기사 출신으로 고르바초프의 신임을 받아 소련 내무장관(1988–1990)과 마지막 KGB 의장(1991년 8월–11월)을 지냈다. 8월 쿠데타 실패 후 크류치코프의 후임으로 KGB를 맡아 외부정보·통신·국경수비대를 분리하고 기관을 해체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남은 조직을 대통령 직속의 소규모 정보기관으로 재편했다. 1991년 12월 미국 측에 모스크바 대사관 도청 장치의 설계도를 넘겨 보수 진영으로부터 '매국'이라는 맹비난을 받았다.
1991년 10월 25일, 당 활동 정지 일주일 후 쿱초프는 크렘린에서 옐친을 만나 러시아 공산당 금지령을 철회해 달라고 설득했다. 옐친은 듣지 않았고, 쿱초프는 이후 1년 반 동안 '지하 제1서기'로서 당을 복원대회까지 이끌었다.
볼로그다주 집단농장과 제철소를 거쳐 올라온 금속공학자 출신 당 간부로, 1985년부터 5년간 볼로그다주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90년 CPSU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어 사회정치조직 담당 부서를 이끌었고, 러시아 공화국 공산당(КП РСФСР) 창립 작업에 참여했다. 1991년 8월 이반 폴로스코프의 후임으로 КП РСФСР 제1서기에 선출되었으나, GKChP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음에도 사건 직후 '쿠데타 공모'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옐친의 당 활동 금지령 이후에도 지하에서 조직을 유지하며 1993년 КПРФ 복원대회를 주도했고, 이후 11년간 쥬가노프의 제1부의장으로서 신생 러시아 공산당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우스티노프가 박격포 생산을 지시하자 그의 장관 아파나시예프는 '하나라도 만들면 검찰에 넘기겠다'고 경고했다. 벨리치코는 '영웅적인 돌격 작업'으로 결국 납품하고 '신경질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조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레닌그라드 '볼셰비크' 공장 선반공에서 시작해 공장장까지 오른 기술관료로, 1975년부터 1991년까지 에너지·중공업·수송기계 부문 장관과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을 지냈다. 그가 이끈 부처들은 아톰마시 원자력 설비 단지, 12기 이상의 원전용 반응로·터빈 시스템, 대륙간탄도미사일 지상 장비, 우주왕복선 부란의 발사대 등 소련 후기 핵심 에너지·군수 인프라를 구축했다. 1980년대 후반 다른 공업 부처들이 흔들릴 때 그의 부처들은 안정적으로 계획을 완수해 정부가 두 차례나 문제 부처들을 그에게 통합시켰다. 소련 해체 후에도 '탸제네르고마시' 그룹을 이끌며 러시아 산업정책에 원로로 참여했다.
회의 전날 아침, 그는 레바논 공산당 지도자 조지 하위에게 "오늘 구체적 제안을 할 텐데, 알리 나세르가 거부하면 권총을 뽑아 내 머리를 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남예멘 민족해방전선 유격대 출신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인민민주공화국의 국방장관과 부통령을 지냈다. 소비에트 모델로 군대를 재편하고 1978년 살림 루바이 알리 축출과 1980년 이스마일 퇴진을 주도하며 권력 핵심에 섰다. 훗날 알리 나세르 무함마드의 경제 자유화에 반대해 반대파의 중심이 되었고, 1986년 1월 13일 정치국 회의장에서 대통령 경호원의 총격에 사살되자 장교단이 대통령에게서 이탈하며 남예멘 내전이 불붙었다.
흑색 1월 뒤 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조직위원회를 직접 이끌며 모스크바의 현장 대리인이 되었다.
빅토르 폴랴니치코는 소련 공산당의 조직가이자 국제 공산주의권의 정치 고문으로, 아프가니스탄과 남캅카스에서 모스크바의 정책을 현지 권력으로 옮긴 인물이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2서기로서 그는 흑색 1월 이후 바쿠의 통치력을 회복하려 했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조직위원회를 이끌며 군대와 당 기구를 결합한 강경한 질서를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분쟁을 억누른 중재자이자 강압을 동원한 중앙의 대리인으로 상반되게 기억된다. 소련 붕괴 뒤 러시아 부총리급 임시행정 책임자가 되었으나 1993년 북오세티야에서 피살되었다.
아나톨리 솝차크는 법학자이자 민주개혁가로서, 제헌회의 의장으로 1993년 러시아 연방 헌법 제정을 공동 주도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초대 민선 시장(1991–1996)을 지냈다. 레닌그라드 국립대 법학 교수 시절 블라디미르 푸틴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가르친 그는,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안드레이 사하로프·보리스 옐친과 함께 지역간의원그룹 공동의장을 맡았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군 지휘관을 설득해 병력 투입을 막고 궁전광장에 20만 시민을 결집시키며 저항을 조직했다. 부패 혐의로 1997년 파리로 망명했으나, 총리가 된 푸틴의 도움으로 1999년 귀국했다.
1994년 10월 11일 '검은 화요일', 루블화가 하루 만에 27% 폭락했다. 사흘 뒤 게라셴코의 중앙은행은 환율을 거의 원상 복구시키며 통화 투기세력을 응징했다. 동료 은행가는 "중앙은행도 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고 평했다.
소련 고스방크 총재와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를 각각 두 차례씩 지내며 네 번에 걸쳐 국가 주요 은행을 이끈 러시아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다. 1989년 고스방크 총재로 취임해 소련 해체기의 통화 체계를 관리했고, 1992년 러시아 중앙은행 초대 총재로서 1993년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98년 금융위기 때 다시 중앙은행 수장으로 복귀해 IMF 협상과 루블 안정화를 추진했으며, 푸틴 집권 초기까지 중앙은행을 이끌었다. 은퇴 후에는 블록 '로디나' 소속으로 국가두마 의원과 대통령 후보로도 나섰다.
1981년 12월 13일 그의 체포 소식이 우제크 광산에 전해지자 광부들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일하지 않기로 했다.
얀 루드비차크는 광부이자 폴란드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의 우제크 광산 사업장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그의 체포는 광부들이 계엄령에 맞서 파업하고 체포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게 만든 직접적 계기였다. 석방 뒤에도 그는 강등과 감시를 견디며 광산 안에서 지하 출판물을 배포했고, 1989년 연대 재건을 준비했다.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을 두루 거친 KGB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
그는 회고록 제목처럼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했다. 1994년 10월 사태 관련자 사면을 막으라는 옐친의 요구를 거부하고 “러시아 장교로서 국민에게 한 맹세를 지켰다”며 사임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경력을 쌓아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1987–1991)을 지낸 인물이다. KGB 제5총국(이념적 방첩 및 반체제 탄압)에서 오래 근무하며 민족주의 감시와 반소 활동 단속을 전담하다가, 페레스트로이카기 우크라이나 공화국 보안기관 수장으로 발탁되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잠시 독립 우크라이나의 국가안보국(SBU)을 이끌었고, 이후 러시아로 옮겨 보안장관과 연방방첩국(FSK) 국장을 역임하며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한 특이한 이력을 남겼다. 러시아 보안장관 시절 1993년 10월 사태 수감자 사면 문제로 옐친 대통령과 갈등하다 사임하였으며, 회고록 『3개국의 특별기관에서』를 남겼다.
1989년 11월 9일, 크렌츠는 중앙위원회에서 여행 규정 초안을 낭독한 뒤 "자, 이걸 기자들에게 설명해 주게"라며 샤보프스키에게 쪽지를 건넸고, 몇 시간 후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
에리히 호네커의 후계자로 지목된 동독 공산주의 지도자로, 1989년 10월 호네커 축출 후 SED 총서기가 되었다. 취임 3주 만에 여행 규정 초안을 승인하고 11월 9일 중앙위원회에서 낭독한 뒤 이를 귄터 샤보프스키에게 건네며 기자회견에서 발표하도록 했고, 그날 밤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 개혁을 약속했으나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12월 초 전권을 내놓았다. 통일 후 국경 사망 사건에 대한 형사책임으로 6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가 발족되자 스트로예프는 이를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 페레스트로이카기 정치국원 중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오룔 지역 집단농장의 목동으로 일을 시작해 미추린스크 원예대학을 졸업한 농업 테크노크라트다. 30년간 오룔 주 당조직에서 성장하여 1985년 주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중앙위원회 농업 담당 비서로 발탁되어 1990년 정치국 위원에 올랐다. 농공복합체 개편과 식량 위기 대응 등 페레스트로이카기 농업 정책의 최고 실무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승인을 거부했다. 소련 해체 후 오룔 주지사(1993~2009)와 연방평의회 의장(1996~2001)을 지내며 탈소비에트 러시아 지역 엘리트로 재편에 성공했다.
테레슈코바의 예비 우주비행사, 카마닌이 신체적 최고라 했지만 대중역할엔 내성적이었던 낙하산 국가대표
「우리는 해볼 가치가 있다고 결정했다」: 비밀경찰로부터 우주비행사단 입단 제의를 받고, 약혼자와 함께 단골 카페에서 문 닫을 때까지 고민한 끝에.
우랄 공과대학을 졸업한 기계공학자이자 국가대표 낙하산 선수로, 1962년 소련 최초 여성 우주비행사단 5인에 선발되었다. 1963년 보스토크 6호 비행에서 발렌티나 테레슈코바의 주예비 비행사로 훈련받았으며, 니콜라이 카마닌은 그녀를 신체적으로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했으나 대외 선전에 필요한 외향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포노마료바와 함께 보스호트 계획 최초 여성 우주유영 임무를 준비했으나 계획 취소로 무산되었고, 1969년 여성 비행사단 해체 후 우주비행사훈련센터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심리학 후보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 7월, 그는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와 함께 파업 중인 루블린으로 파견된 정부 대표단에 합류했다.
즈지스와프 쿠로프스키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청년조직에서 성장해 당·국가 기구의 중견 간부가 된 정치가였다. 그는 비아위스토크 지역 당 지도부와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농업·청년·경제 행정을 연결했다. 1980년 루블린 노동자들의 파업이 확산되자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와 함께 정부 대표단으로 파견되어 임금과 생활 조건을 둘러싼 요구를 협상했다. 이후에도 대외경제 관료로 일하며 인민공화국 체제의 관리자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