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힐퍼딩, 『금융자본론』 발췌

인물루돌프 힐퍼딩, 카를 마르크스, 카를 카우츠키, 오토 바우어, 블라디미르 레닌, 프레트 욀스너 용어금융자본, 제국주의론, 이자 낳는 자본과 가공자본, 국가독점자본주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 독점자본과 경제잉여, 붕괴론 논쟁, 프롤레타리아 독재

머리말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의 가장 최근 발전에서 나타나는 경제 현상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를 해 보려 한다. 그것은 곧 이 현상들을, 페티[가]에서 시작하여 마르크스에서 가장 높은 표현을 얻은 고전파 국민경제학의 이론 체계 안에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라는 뜻이다. 그런데 「현대」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한편으로는 카르텔과 트러스트의 형성을 통한 「자유경쟁의 폐지」로, 다른 한편으로는 은행자본과 산업자본 사이의 갈수록 긴밀해지는 관계로 나타나는 집적 과정이다. 이 관계를 통해 자본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금융자본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며, 이것이 자본의 가장 높고 가장 추상적인 현상 형태를 이룬다.

자본 관계를 늘 감싸고 있는 신비로운 겉모습은 여기서 가장 꿰뚫어 보기 어려워진다. 반영된 것인데도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금융자본의 독특한 운동, 그 운동이 이루어지는 갖가지 형태, 산업자본과 상업자본의 운동에서 이 운동이 떨어져 나와 독립하는 것은 분석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더구나 지금의 자본주의 국면에서 금융자본이 빠르게 커지고 갈수록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금융자본의 법칙과 기능을 알지 못하고서는 현재의 경제 경향을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어떠한 과학적 경제학도 정치학도 불가능해졌으니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이 과정의 이론적 분석은 이 현상들 사이의 연관을 묻는 데로, 그리하여 은행자본과 그것이 다른 자본 형태와 맺는 관계를 분석하는 데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산업 기업이 설립되는 법적 형태가 특별한 경제적 의미를 갖는지, 곧 주식회사에 관해 경제 이론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조사해야 했다. 그런데 은행자본과 산업자본 사이의 관계는 화폐자본과 생산자본이라는 더 기본적인 형태에서 볼 수 있는 관계가 완성된 것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신용의 역할과 본질에 관한 물음이 떠올랐고, 이 물음은 다시 화폐의 역할이 밝혀져야만 답할 수 있었다. 이것이 더욱 중요했던 까닭은, 마르크스의 화폐 이론이 정식화된 뒤로 특히 네덜란드·오스트리아·인도의 화폐 제도가 보여 준 모습 때문에 일련의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기존 화폐 이론은 거기에 답을 찾지 못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 사정이, 현대 화폐 현상의 문제성을 날카롭게 알아차린 크나프[나]로 하여금 모든 경제적 설명을 옆으로 밀어 놓고 그 자리에 법학 용어를 들여놓는 시도에 빠지게 했다. 그 용어는 설명, 곧 과학적 파악을 주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편견 없고 예단 없는 기술(記述)의 가능성은 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화폐 문제를 더 깊이 다루는 일이 더욱 필요했던 까닭은,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경제 체계의 토대가 되어야 하는 가치 이론이 옳다는 경험적 증명을 할 수 있고, 동시에 화폐를 올바로 분석해야만 신용의 역할, 따라서 은행자본과 산업자본 사이 관계의 기본 형태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이 연구의 구성은 저절로 정해졌다. 화폐의 분석 뒤에 신용의 연구가 온다. 그다음에 주식회사의 이론과, 여기서 은행자본이 산업자본에 대해 차지하는 위치의 분석이 이어진다. 이는 「자본시장」으로서의 증권거래소에 대한 연구로 이어지며, 상품거래소는 거기에 구현된 화폐자본과 상업자본의 관계 때문에 따로 살펴보아야 했다. 산업 집적이 진행되면서 은행자본과 산업자본 사이의 관계는 점점 더 얽히고, 카르텔과 트러스트에서 정점에 이르는 이 집적 현상과 그 발전 경향을 연구할 필요가 생긴다. 독점적 결합체의 형성에 걸린 기대, 곧 「생산의 조절」과 그에 따른 자본주의 체제의 존속에 대한 기대, 특히 주기적 상업 공황에 대해 큰 의미가 부여되던 그 기대는 공황과 그 원인의 분석을 요구했고, 이로써 이론적 부분이 끝났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파악하려 한 발전은 동시에 사회의 계급 구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마지막 편에서는 부르주아 사회의 큰 계급들의 정치에 미치는 주된 영향을 따라가 보는 것이 적절해 보였다.

마르크스주의는 경제 이론을 더 발전시키는 일을 소홀히 했다는 비난을 자주 받아 왔고, 이 비난이 어느 정도 객관적 근거가 없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소홀함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국민경제학 이론은 연구해야 할 현상이 끝없이 복잡하므로 분명 가장 어려운 과학적 작업에 속한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자는 독특한 처지에 있다. 과학 연구에 필요한 시간을 주는 대학에서 배제되어 있으므로, 정치 투쟁의 시간이 남겨 주는 여가 시간으로 과학 작업을 미룰 수밖에 없다. 싸우는 사람들에게 과학이라는 건물을 짓는 그들의 일이 평화로운 미장이의 일만큼 빨리 나아가기를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능력에 대한 존중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면 부당한 일일 것이다.

경제 정책을 다루는 데에는, 최근의 숱한 방법론 논쟁을 거친 뒤라 정당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짧은 해명이 필요할지 모른다. 정치는 규범의 학문이며 궁극적으로 가치 평가에 따라 규정되는데, 그러한 가치 판단은 과학의 일이 아니므로 정치를 다루는 것은 과학적 고찰의 틀 밖에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규범 학문과 법칙 학문, 목적론과 인과성의 관계에 관한 인식론적 논의를 여기서 다루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막스 아들러[다]가 『마르크스 연구』 제1권에서 사회과학에서의 인과성 문제를 자세히 검토했으므로 나는 더욱 그것을 생략해도 될 것이다. 여기서는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정치에 대한 고찰도 인과 연관을 밝혀내는 것만을 목표로 할 수 있다는 것만 말해 두면 된다. 상품을 생산하는 사회의 법칙을 인식하면 동시에 이 사회 계급들의 의지를 규정하는 결정 요인이 드러난다. 계급 의지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견해로는 과학적 정치학, 곧 인과 연관을 기술하는 정치학의 과제다. 이론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의 정치학도 가치 판단에서 자유롭다.

그러므로 성 안팎에서 널리 퍼져 있기는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를 곧바로 사회주의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다. 논리적으로, 곧 오로지 과학 체계로서만 보면, 다시 말해 그 역사적 영향을 떼어 놓고 보면,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의 운동 법칙에 관한 이론일 뿐이며,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이 그것을 일반적으로 정식화하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그것을 상품 생산의 시대에 적용한다. 사회주의라는 귀결은 상품을 생산하는 사회에서 관철되는 경향들의 결과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옳다는 통찰은 사회주의가 필연적이라는 통찰을 포함하지만, 그것은 결코 가치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며 실천적 행동의 지침도 아니다. 어떤 필연성을 인식하는 것과 그 필연성에 봉사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의 궁극적 승리를 확신하면서도 그것과 싸우는 데 몸을 바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주는 사회의 운동 법칙에 대한 통찰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에게 언제나 우위를 주며, 사회주의의 적들 가운데 가장 위험한 자들은 분명 그 인식의 열매를 가장 많이 맛본 자들이다.

다른 한편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계급 지배를 유지하는 데에는 지배받는 자들이 그 지배의 필연성을 믿는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그 지배가 덧없는 것임을 인식하는 일 자체가 그 지배를 극복하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지배 계급은 마르크스주의의 결과를 인정하는 데 극복할 수 없는 반감을 품는다. 게다가 체계가 복잡하여 공부가 필요한데, 그 수고를 감수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 결과가 쓸모없고 해롭다고 확신하지 않는 사람뿐이다. 그래서 논리적으로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며 가치 판단에서 자유로운 과학인 마르크스주의는, 그 역사적 위치에서는 필연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자기 연구의 결과로 그 승리를 얻어 내는 계급의 대변자들의 소유물로 남는다. 오직 이런 뜻에서만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과학이며 부르주아 경제학에 대립한다. 그러면서도 마르크스주의는 자기 결과의 객관적 보편타당성을 주장하는 모든 과학의 요구를 굽힘 없이 고수한다.

이 작업은 골격으로 보면 이미 4년 전에 본질적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외부 사정 때문에 완성이 거듭 늦어졌다. 그러나 화폐 문제를 다룬 장들은 크나프의 저작이 나오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사소한 변경과 비판적 보충만 거쳤다는 점은 밝혀 두고 싶다. 이 장은 아마 가장 어려운 장이 될 것이다. 화폐 문제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사람 좋은 마음씨뿐 아니라 이론적 이해마저 너무 쉽게 멈춰 버리기 때문인데, 이는 이미 풀라턴[라]도 알고 있었던 바다. 그는 우울하게 이렇게 말한다. “사실 이것은 대중 전체에 효과적으로 또는 즉각 호소할 수 있는 주제가 결코 아니다. 이 주제에서 여론의 진보는 언제나 지극히 느렸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뒤로 사정이 나아지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둘러 확언해 두고자 한다. 첫 논의를 넘어서고 나면 그다음 연구는 성급한 독자에게서도 난해하다는 별다른 불평을 사지 않기를 바란다.

베를린-프리데나우, 1909년 성탄절

루돌프 힐퍼딩

제14장 자본주의적 독점과 은행

자본의 금융자본으로의 전화

자본주의 산업의 발전은 은행업의 집적을 발전시킨다. 집적된 은행 체제는 그 자체가 카르텔과 트러스트라는 자본주의적 집적의 최고 단계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동력이다. 그러면 이것들은 다시 은행 체제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카르텔이나 트러스트는 최대의 자본력을 가진 기업이다. 자본주의 기업들 사이의 상호 의존 관계에서 어느 기업이 다른 기업에 종속되는지는 무엇보다 자본력이 결정한다. 카르텔화가 많이 진행되면 그것만으로도 은행들이 카르텔이나 트러스트에 종속되지 않으려고 서로 결합하고 규모를 키우게 된다. 이렇게 카르텔화 자체가 은행의 결합을 촉진하고, 거꾸로 은행의 결합이 카르텔화를 촉진한다. 이를테면 제강 회사들의 결합에는 일련의 은행이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이 은행들은 개별 기업가의 뜻을 거슬러서라도 결합을 이루어 내려고 함께 움직인다. 거꾸로 처음에는 기업가들이 이룬 이익 공동체가, 그때까지 경쟁하던 두 은행에도 공동의 이해관계를 만들어 우선 특정 분야에서 함께 행동하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비슷하게, 산업의 결합(콤비네이션)은 지금까지 원료 산업 분야에서만 활동했을 수도 있는 은행의 산업 영역을 넓히도록 작용하여, 은행이 그 활동을 가공 산업으로까지 넓히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카르텔 자체는 한 산업 부문 전체의 막대한 지불 신용과 생산 신용을 언제나 감당할 수 있는 대은행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카르텔은 은행과 산업 사이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도 한다. 산업에서 자유경쟁이 폐지되면 우선 이윤율이 오른다. 이 높아진 이윤율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경쟁의 배제가 합병을 통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새 기업이 설립된다. 이 기업은 높아진 이윤을 기대할 수 있다. 이 높아진 이윤은 자본화되어 창업자 이득을 이룰 수 있다.[1] 이 창업자 이득은 트러스트가 성립하는 데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첫째, 이것을 얻는 것이 은행이 독점화를 촉진하는 매우 중요한 동기다. 둘째, 창업자 이득의 일부는 반대하지만 중요한 기업들에게 더 높은 매입가를 치러 공장을 팔도록, 곧 카르텔이 성립할 수 있게 하도록 움직이는 데 쓸 수 있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카르텔은 한 산업 부문의 기업들에 대해 수요를 행사한다. 이 수요는 어느 정도까지 기업들의 가격을 끌어올리고[2], 이 높아진 가격은 창업자 이득의 일부로 치러진다.

카르텔화는 카르텔에 든 기업들의 수익을 더 안전하고 고르게 만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전에 개별 기업에 그토록 자주 치명적이었던 경쟁의 위험이 제거된다. 그러면 우선 이 기업들의 주가가 오르며, 이는 다시 신주를 발행할 때 더 높은 창업자 이득을 뜻한다. 나아가 이 기업들에 투자된 자본의 안전성이 크게 높아진다. 이 덕분에 은행은 산업 신용을 더 넓히고 그리하여 이전보다 더 큰 정도로 산업 이윤에 참여할 수 있다. 이렇게 카르텔화를 통해 은행과 산업 사이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지며, 동시에 산업에 투자된 자본의 처분권은 점점 더 은행에 넘어간다.

우리는 자본주의 생산의 초기에 은행의 화폐가 두 원천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았다. 하나는 비생산적 계급들의 화폐이고, 다른 하나는 산업자본가와 상업자본가의 준비 자본이다. 또 우리는 신용의 발전이 자본가 계급의 준비 자본 전체뿐 아니라 비생산적 계급들의 화폐 대부분까지도 산업이 쓸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보았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산업은 산업자본가들이 소유한 자본 총액보다 훨씬 큰 자본으로 운영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비생산적 계급이 은행에, 그리고 은행을 통해 산업가에게 맡기는 화폐의 총액도 끊임없이 늘어난다.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이 자금의 처분권은 은행에 있다. 이렇게 자본주의와 그 신용 조직이 발전함에 따라 은행에 대한 산업의 종속이 커진다. 다른 한편 은행은 비생산적 계급들의 자금에 이자를 붙여 줄 때에만 그 자금을 끌어들이고, 늘 커지는 그 기본 부분을 계속 처분할 수 있다. 은행은 그 자금이 아직 그리 많지 않았을 때는 그것을 투기 신용과 유통 신용에 씀으로써 이자를 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자금이 늘어나고, 다른 한편으로 투기와 상업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이 자금은 점점 더 산업자본으로 전화되어야 했다. 생산 신용이 꾸준히 확대되지 않았다면 예금의 쓰임새, 따라서 은행 예금의 이자도 벌써 훨씬 낮아졌을 것이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부분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영국의 예금은행은 유통 신용만 중개하므로 예금 이자가 아주 적다. 그래서 예금이 주식 매입을 통해 끊임없이 산업 투자 영역으로 흘러 나간다. 여기서는 산업은행과 예금은행이 결합된 곳에서 은행이 하는 일을 대중이 직접 한다. 창업자 이득은 어느 경우에도 대중에게 돌아가지 않으므로 대중에게 결과는 같다. 그러나 산업에는 독일에 비해 영국에서 은행자본에 대한 종속이 덜하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은행에 대한 산업의 종속은 소유 관계의 결과다. 산업 자본 가운데 점점 더 큰 부분이 그것을 사용하는 산업가의 것이 아니다. 산업가는 그들에 대해 소유자를 대표하는 은행을 통해서만 자본의 처분권을 얻는다. 다른 한편 은행은 점점 더 큰 부분의 자본을 산업에 고정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은행은 점점 더 큰 규모로 산업자본가가 된다. 나는 이렇게 하여 실제로는 산업자본으로 전화된 은행자본, 곧 화폐 형태의 자본을 금융자본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소유자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화폐 형태를 유지하며, 소유자들이 화폐자본, 곧 이자 낳는 자본의 형태로 투자한 것이고, 소유자들은 언제든지 그것을 화폐 형태로 회수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렇게 은행에 투자된 자본의 대부분이 산업자본, 생산자본(생산수단과 노동력)으로 전화되어 생산 과정에 고정되어 있다. 산업에서 쓰이는 자본 가운데 점점 더 큰 부분이 금융자본, 곧 은행이 처분하고 산업가가 사용하는 자본이다.

금융자본은 주식회사의 발전과 함께 발전하며 산업의 독점화와 함께 정점에 이른다. 산업 수익이 안전하고 안정된 성격을 띠게 되면서, 은행자본을 산업에 투자할 가능성은 점점 더 넓어진다. 그런데 은행자본의 처분권은 은행이 갖고, 은행에 대한 지배권은 은행 주식의 과반을 가진 자들이 갖는다. 소유의 집중이 커질수록, 은행을 지배하는 힘을 주는 가공자본의 소유자와 산업을 지배하는 힘을 주는 가공자본의 소유자가 점점 더 같은 사람들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대은행이 가공자본에 대한 처분권까지 점점 더 얻게 되므로 더욱 그렇다.

우리는 산업이 점점 더 은행자본에 종속되는 것을 보았지만, 그것이 산업계의 거물이 금융계의 거물에 종속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본 자체가 최고 단계에서 금융자본이 되듯이, 자본 거물인 금융자본가는 은행자본을 지배하는 형태로 국민 자본 전체에 대한 처분권을 점점 더 한 손에 모은다. 여기서도 인적 결합[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카르텔화와 트러스트화와 함께 금융자본은 최고의 권력 단계에 이르고, 상업자본은 가장 깊은 굴욕을 겪는다. 자본주의의 한 순환이 완결되었다.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에 화폐자본은 고리대 자본과 상업자본으로서 자본의 축적에서도, 수공업적 생산이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바뀌는 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생산적」 자본가, 곧 이윤을 얻는 자본가, 다시 말해 상인과 산업가가 이자 자본가에 맞서 저항하기 시작한다.[3]

고리대 자본은 산업자본에 종속된다. 화폐거래 자본으로서 그것은, 그렇지 않았다면 산업가와 상인이 자기 상품의 형태 변화 과정에서 스스로 수행해야 했을 화폐 기능을 수행한다. 은행자본으로서 그것은 생산자들 사이의 신용 업무를 중개한다. 자본의 동원과 신용의 끊임없는 확대는 화폐자본가의 위치를 차츰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은행의 권력이 커지고, 은행은 산업의 창업자가 되고 마침내 지배자가 되어, 산업의 이윤을 금융자본으로서 빼앗는다. 옛날의 고리대금업자가 그의 「이자」로 농민의 노동 수확과 영주의 지대를 빼앗았던 것과 똑같이. 헤겔주의자라면 부정의 부정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은행자본은 고리대 자본의 부정이었고, 그 자신은 금융자본에 의해 부정된다. 금융자본은 고리대 자본과 은행자본의 종합이며, 경제 발전의 한없이 높은 단계에서 사회적 생산의 열매를 차지한다.

그러나 상업자본의 발전은 전혀 다르다. 산업의 발전은 상업자본을 매뉴팩처 시기에 차지했던 생산에 대한 지배적 지위에서 차츰 밀어낸다. 그런데 이 후퇴는 결정적으로 굳어지며, 금융자본의 발전은 상업을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나 축소시키고, 한때 그토록 당당하던 상인을 금융자본이 독점한 산업의 대리인으로 바꾸어 놓는다.

주석

  1. 미국의 설탕 트러스트는 1887년 해브마이어가 자본금을 모두 합해 650만 달러로 신고한 작은 회사 15개를 합병하여 설립했다. 트러스트의 주식 자본금은 5천만 달러로 정해졌다. 트러스트는 곧바로 정제당 가격을 올리고 원당 가격을 끌어내렸다. 1888년에 시작된 조사에서 트러스트는 정제당 1톤당 약 14달러를 벌었고, 이 덕분에 주식 자본금 전액에 대해 10퍼센트, 곧 회사 설립 때 실제로 납입된 금액에 대해서는 약 70퍼센트의 배당을 지급할 수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 밖에도 트러스트는 때때로 특별 배당을 지급하고 막대한 준비금을 쌓을 수 있었다. 오늘날 트러스트의 주식 자본금은 9천만 달러다. 절반은 7퍼센트 누적 배당권이 있는 우선주이고, 나머지 절반은 보통주로 현재 역시 7퍼센트를 낸다. (『베를리너 타게블라트』 1909년 7월 1일 자) 트러스트와 산업 결합에 관한 산업위원회 보고서에도 수많은 예가 있다. ↩
  2.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자본화된 이윤과 같은 「자본의 가격」이다. ↩
  3. 실제로 “고리대는 자본 축적의 주요 수단, 곧 토지 소유의 수입에 자본이 참여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그러나 산업자본과 상업자본은 이 낡은 형태의 자본에 맞서 많든 적든 토지 소유자와 손을 잡고 나아간다.” 마르크스, 『잉여가치 학설사』 제1권, 19쪽. ↩

제22장 자본수출과 경제 영역을 둘러싼 투쟁 (발췌)

[…]

우리는 자본수출을 외국에서 잉여가치를 낳도록 정해진 가치의 수출이라고 이해한다. 이때 본질적인 것은 그 잉여가치가 국내 자본의 처분 아래 남는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독일의 자본가가 자기 자본을 가지고 캐나다로 이주해 그곳에서 생산하고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독일 자본에는 손실, 곧 자본의 탈국민화를 뜻한다. 그것은 자본수출이 아니라 자본 이전이다. 이 자본 이전은 국내 자본에서는 빠져나가고 외국 자본에는 보태지는 것이다. 외국에서 쓰이는 자본이 국내의 처분 아래 남고, 그 자본이 낳은 잉여가치를 국내 자본가가 처분할 수 있을 때에만 자본수출을 말할 수 있다. 그때 이 자본은 국민의 「채권 대차표」의 한 항목이 되고, 해마다 들어오는 잉여가치는 국민의 국제수지의 한 항목이 된다. 자본수출은 그만큼 국내의 자본량을 줄이고, 생산된 잉여가치만큼 국민 소득을 늘린다.

주식회사와 발달한 신용 조직은 자본수출을 촉진하며, 기업가와 떨어져서도 자본이 이주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 성격을 바꾼다. 그리하여 소유권은 훨씬 더 오래, 또는 영구히 수출국에 남고, 자본의 현지 국민화는 어려워진다. 농업 생산을 위해 자본수출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특히 미국의 예가 보여 주듯이 보통 국민화가 훨씬 빨리 일어난다.

자본수출은 수출국의 처지에서 보면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다. 자본은 이자 낳는 자본으로 외국에 가거나, 이윤 낳는 자본으로 외국에 간다. 후자의 경우 그것은 다시 산업자본, 상업자본, 은행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다. 자본이 수출되어 들어가는 나라의 처지에서는 이자가 잉여가치의 어느 부분에서 지급되는지도 문제가 된다. 외국에 있는 저당 채권에 대해 내야 하는 이자는 지대의 일부[3]가, 산업 기업의 사채에 대해 내야 하는 이자는 산업 이윤의 일부가 외국으로 흘러 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유럽에서 금융자본으로의 발전과 함께, 유럽 자본은 흔히 이미 금융자본으로서 이주한다. 독일의 대은행이 외국에 지점을 세운다. 이 지점이 차관을 주선하고, 그 수익금은 발전소를 짓는 데 쓰인다. 건설은 국내에서 그 은행과 관계를 맺고 있는 전기 회사에 맡겨진다. 또는 과정이 더 단순해진다. 외국의 은행 지점이 외국에 산업 기업을 세우고, 그 주식을 본국에서 발행하며, 납품은 다시 본점이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들에 맡긴다. 국가의 차관 사업이 산업 납품을 따내는 데 봉사하게 되면 이 과정은 가장 큰 규모로 일어난다. 이러한 자본수출의 발전을 빠르게 촉진하는 것은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긴밀한 결합이다.

자본수출의 조건은 이윤율의 차이다. 자본수출은 국민적 이윤율을 균등화하는 수단이다. 이윤의 크기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곧 자본주의 발전의 정도에 달려 있다. 발전이 앞설수록 일반 이윤율은 낮다. 이 일반적 규정은, 여기서는 가장 발달한 생산 방법으로 가격이 정해지는 세계시장 상품이 문제이므로 그다지 고려되지 않지만, 여기에 특수한 규정들이 더해진다. 먼저 이자율을 보면, 자본주의 발전이 미약하고 신용·은행 조직이 모자라는 나라에서는 이자율이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보다 훨씬 높고, 게다가 그 이자에는 대개 임금이나 기업가 이득의 일부까지 들어 있다. 높은 이자는 대부 자본 수출의 직접적 유인이 된다. 기업가 이득이 더 높은 것은 노동력이 대단히 싸고 그 낮은 질이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으로 메워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천연 그대로든 원주민을 폭력으로 수탈해서든 아직 자유로운 토지가 많아서 지대가 낮거나 명목에 불과하고, 낮은 땅값이 생산비를 낮추기 때문이다. 여기에 특권과 독점으로 이윤이 높아지는 것이 더해진다. 그리고 새 시장 자체가 판로인 생산물이라면, 여기서 자본주의적으로 생산된 상품이 수공업적으로 생산된 상품과 경쟁하게 되므로 높은 특별 이윤이 실현된다.

[…]

이렇게 유럽에서는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와 국가관이 금융자본의 필요에 적응하는 데 처음부터 장애가 적었다. 그리고 독일의 통일이 반혁명적인 길로 이루어졌다는 사정은 이곳에서 민중의 의식 속에 국가권력의 지위를 크게 강화할 수밖에 없었으며, 프랑스에서는 군사적 패배가 우선 모든 힘을 국가권력의 회복에 집중하게 했다. 그래서 금융자본의 필요는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만났고, 금융자본은 그것들로 자기 이해에 맞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이데올로기는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정반대다. 금융자본은 자유가 아니라 지배를 원한다. 금융자본은 개별 자본가의 독립성에 관심이 없고 오히려 그를 묶어 두기를 요구한다. 금융자본은 경쟁의 무정부성을 혐오하고 조직을 원한다. 물론 그것은 점점 더 높은 규모로 경쟁에 나설 수 있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을 관철하기 위해, 자기의 우월한 힘을 유지하고 키우기 위해, 금융자본은 관세 정책과 운임 정책으로 국내 시장을 확보해 주고 외국 시장의 정복을 쉽게 해 줄 국가를 필요로 한다. 금융자본은 무역 정책에서 다른 나라들의 상반된 이해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국가를 필요로 한다.[23] 끝으로 금융자본은 외국에서 자기의 금융적 이해를 관철하고, 정치적 힘을 동원하여 작은 나라들에 유리한 납품 계약과 통상 조약을 강요할 강한 국가를 필요로 한다. 온 세계를 자기 금융자본의 투자 영역으로 바꿀 수 있도록 세계 어디에서나 개입할 수 있는 국가를. 금융자본은 마침내 팽창 정책을 펴고 새 식민지를 병합할 수 있을 만큼 강한 국가를 필요로 한다. 자유주의가 국가의 권력 정치에 반대했고, 귀족과 관료라는 낡은 세력에게 국가의 권력 수단을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허락함으로써 그들에 맞서 자기의 지배를 확보하려 했다면, 아무런 제약 없는 권력 정치는 금융자본주의의 요구가 된다. 그리고 군국주의와 해군 확장에 드는 지출이 가장 강력한 자본가 층에게 대개 독점적 이윤을 낳는 중요한 판로를 직접 보장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팽창 정책에 대한 요구는 부르주아지의 세계관 전체도 뒤집어 놓는다. 부르주아지는 평화적이고 인도적이기를 그친다. 옛 자유무역론자들은 자유무역을 가장 올바른 경제 정책일 뿐 아니라 평화 시대의 출발점이라고 믿었다. 금융자본은 이 믿음을 오래전에 잃었다. 금융자본은 자본주의적 이해의 조화 따위를 믿지 않으며, 경쟁 투쟁이 점점 더 정치적 권력 투쟁이 된다는 것을 안다. 평화의 이상은 빛이 바래고, 인류애라는 이념 대신 국가의 위대함과 힘이라는 이상이 들어선다. 그런데 근대 국가는 통일을 향한 민족들의 노력이 실현된 것으로 생겨났다. 민족 사상은 민족을 국가의 토대로 구성하는 데서 자연스러운 한계를 찾았다. 그것은 모든 민족이 자기 국가를 이룰 권리를 인정했고, 그리하여 국가의 경계가 민족의 자연적 경계에서 주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민족 사상은 자기 민족을 다른 민족들 위로 높이려는 사상으로 바뀐다.[24] 이제 자기 민족에게 세계 지배를 확보해 주는 것이 이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그 노력이 비롯된 자본의 이윤 추구만큼이나 끝이 없는 노력이다. 자본은 세계의 정복자가 되며, 새 나라를 하나 정복할 때마다 넘어서야 할 새 국경을 정복한다. 이 노력은 경제적 필연이 된다. 뒤처지는 것은 무엇이든 금융자본의 이윤을 낮추고 경쟁력을 떨어뜨리며, 결국 더 작은 경제 영역을 더 큰 경제 영역에 공물을 바치는 처지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근거를 얻은 이 노력은 민족 사상의 저 기묘한 굴절을 통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된다. 그 민족 사상은 더 이상 모든 민족이 정치적 자결과 독립을 누릴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사람의 얼굴을 한 모든 것은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의 신조를 민족의 차원에서 표현하는 것도 더는 아니다. 오히려 독점이 경제적으로 누리는 특혜가 자기 민족이 차지해야 할 특권적 지위에 비쳐 나타난다. 자기 민족은 다른 모든 민족보다 선택받은 민족으로 나타난다. 다른 민족의 정복은 폭력으로, 곧 아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이루어지므로, 지배 민족은 이 지배를 자기의 특별한 자연적 성질, 곧 인종적 성질 덕분에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인종 이데올로기 속에서 금융자본의 권력 추구에 자연과학의 옷을 입힌 정당화가 생겨나며, 금융자본은 이렇게 자기 행동이 자연과학적으로 조건 지어져 있고 필연적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민주주의적 평등의 이상이 있던 자리에 과두제적 지배의 이상이 들어섰다.

그런데 이 이상이 대외 정치의 영역에서는 겉보기에 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듯하지만, 국내 정치의 영역에서는 노동계급에 대해 주인의 입장을 내세우는 것으로 뒤바뀐다. 동시에 노동자의 힘이 커지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요구에 맞서는 방벽으로서 국가권력을 더욱 강화하려는 자본의 노력도 강해진다.

이리하여 제국주의 이데올로기가 낡은 자유주의 이상들을 극복한 것으로서 생겨난다. 그것은 그 이상들의 순진함을 비웃는다. 무기의 우월만이 결정하는 자본주의 투쟁의 세계에서 이해의 조화를 믿다니 얼마나 환상인가! 오직 힘만이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곳에서 영원한 평화의 나라를 기대하고 국제법을 설교하다니 얼마나 환상인가. 국가 안의 법률관계를 규율하는 것을 국경 너머로까지 넓히려 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노동자를 하나의 문제로 만들어 국내에서는 사회 개혁을 고안해 내고, 식민지에서는 유일하게 합리적인 착취 방법인 계약 노예제를 없애려 하는 이 인도주의 타령은 얼마나 무책임한 영업 방해인가. 영원한 정의는 아름다운 꿈이지만, 도덕으로는 국내에서조차 철도 하나 놓지 못한다. 경쟁자가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어떻게 세계를 정복하겠는가?

그러나 제국주의는 빛바랜 부르주아지의 이상들 자리에 모든 환상의 해체를 놓지만, 그것은 스스로 새롭고 더 큰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일 뿐이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이해 집단들의 실제 대립을 저울질할 때는 냉철하며, 정치 전체를 서로 싸우면서도 서로 결합하는 자본주의 신디케이트들의 사업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이상을 드러낼 때는 사람을 휘어잡고 도취시킨다. 제국주의자는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또한 온갖 발전 단계와 온갖 발전 가능성에 있는 인종들의 풀 수 없는 뒤엉킴을 색채 찬란한 현실로 보지 않고 인류라는 핏기 없는 개념 속에 녹여 버리는 환상가도 몽상가도 아니다. 그는 단단하고 맑은 눈으로 민족들의 뒤섞임을 바라보고, 그 모두의 위에 자기 민족을 본다. 자기 민족은 실재하며, 강력하고 갈수록 더 강력하고 더 커지는 국가 안에 살아 있고, 그의 모든 노력은 그 민족을 높이는 데 바쳐진다. 이로써 모든 생명력 있는 사회 이데올로기의 조건인, 개별 이익을 더 높은 공동 이익에 바치는 일이 이루어지고, 민중과 동떨어진 국가와 민족 자체가 하나로 묶이며, 민족 이념이 추진력으로서 정치에 봉사하게 된다. 계급 대립은 사라지고 전체에 대한 봉사 속에 지양된다. 가진 자들에게 출구가 없고 위험한 계급투쟁의 자리에, 민족의 위대함이라는 같은 목표로 단결한 민족의 공동 행동이 들어섰다.

찢긴 부르주아 사회에 새로운 끈을 두르는 듯한 이 이상은, 그사이 부르주아 사회의 해체 과정이 더 진행되었던 만큼 더욱 열광적인 반향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주석

  1. 이를테면 헝가리 지대의 일부는 오스트리아에서 유통되는 헝가리 저당은행의 저당 채권에 이자를 치르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흘러간다. ↩
  2. 최근 독일의 통상 조약들을 국제적으로 관철하는 데, 러시아의 정치적 힘이 극동의 분쟁 때문에 너무 약해져 정치적 압력을 가할 수 없었다는 사정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생각해 보라. ↩
  3. 오토 바우어, 『마르크스 연구』 제2권, 제30절, 491쪽 이하, 「제국주의와 민족성 원리」를 보라. ↩

제25장 프롤레타리아와 제국주의

프롤레타리아의 경제 정책은 자본가의 경제 정책과 근본적으로 모순되며, 개별 문제에 대한 모든 입장이 이 대립으로 특징지어진다. 자본에 맞서는 임금노동의 투쟁은 무엇보다 노동계급(생산적 사무직원과 생산 관리자를 포함한)이 창조한 연간 생산물의 새로운 가치 가운데 몫을 둘러싼 투쟁이다. 이 투쟁은 직접적으로는 노동계약을 둘러싼 투쟁으로 나타나며, 국가의 경제 정책을 둘러싼 투쟁으로 이어진다. 무역 정책에서 노동자의 이익은 무엇보다 국내 시장의 확대를 요구한다. 임금이 클수록 새 가치 가운데 직접 상품, 그것도 소비수단에 대한 수요를 이루는 부분이 커진다. 그런데 소비수단 산업, 넓게는 완제품 산업의 확대는 일반적으로 유기적 구성이 낮은 부문, 곧 노동 흡수력이 큰 산업의 확장을 뜻한다. 이는 노동 수요를 빠르게 늘리고, 그리하여 노동시장에서 노동자의 처지를 유리하게 하며, 노동조합 조직을 강화하고, 새로운 임금 투쟁에서 이길 가능성을 높인다. 기업가의 이익은 그 반대다. 임금 인상을 통한 국내 시장의 확대는 그들에게 이윤율의 하락과 거듭된 하락의 전망을 뜻하며, 이는 다시 축적을 늦춘다. 동시에 그들의 자본은 경쟁이 가장 심하고 카르텔화의 가능성이 가장 낮은 완제품 산업으로 내몰린다. 그들의 이익은 시장을 넓히는 것이지만 이윤율을 희생해서가 아니다. 이는 국내 시장을 그대로 둔 채 국외 시장을 넓힐 때 이루어진다. 새 생산물의 일부는 노동자의 소득이 되지 않고 국내 생산물에 대한 수요를 늘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국외 시장을 위한 생산에 쓰이는 자본으로 투자된다. 이 경우 이윤율은 더 높고 축적은 더 빠르다. 그래서 기업가의 무역 정책은 언제나 무엇보다 국외 시장을, 노동자의 무역 정책은 국내 시장을 염두에 두며, 그리하여 노동자의 무역 정책은 특히 임금 정책으로 귀착된다.

보호관세가 특히 완제품 산업을 위한 육성관세를 뜻하는 동안은 임금노동의 이익과 모순되지 않는다. 보호관세는 소비자인 노동자에게 손해를 주지만 산업 발전을 앞당기므로, 노동조합이 상황을 이용할 만큼 발달해 있다면 생산자인 노동자에게 보상을 줄 수 있다. 이 보호관세 시기에 피해를 보는 쪽은 공장 노동자라기보다는 수공업자, 가내공업자, 농민이다. 그러나 보호관세가 카르텔 보호관세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우리는 카르텔이 무엇보다 유기적 구성이 가장 높은 생산 부문에서 발달한다는 것을 안다. 이 부문에서 특별 이윤이 만들어지면 완제품 산업과 소비재 산업의 발전이 가로막힌다. 동시에 농업 관세와 필연적으로 결합되는 모든 생활 수단의 가격 상승은 실질임금의 하락을 뜻하며, 따라서 국내 시장이 공산품에 대한 노동자의 수요로 정해지는 한에서 국내 시장의 축소를 뜻한다. 노동자는 소비자로서도, 그리고 노동 흡수력이 큰 산업이 불리해짐으로써 생산자로서도 손해를 본다. 동시에 카르텔화는 노동시장에서 기업가의 지위를 강화하고 노동조합을 약화시킨다. 게다가 카르텔 보호관세는 자본수출을 늘리는 가장 강한 자극이며,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의 팽창 정책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자본수출이 자본주의의 빠른 팽창의 조건이라는 것을 보았다. 이 팽창은 사회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 일반을 유지하는 생존 조건이며, 동시에 경제적으로는 이윤율을 유지하고 일시적으로 높이는 조건이다. 이 팽창 정책은 가진 자들의 모든 층을 금융자본에 봉사하도록 하나로 묶는다. 이렇게 보호관세와 팽창은 지배 계급의 공동 요구가 된다. 그런데 자본가 계급들이 자유무역 정책에서 등을 돌린다는 것은 자유무역 정책이 완전히 가망 없다는 뜻이다. 자유무역은 프롤레타리아의 적극적 요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자유무역은 보호관세 정책에 대한 방어일 뿐이다. 보호관세 정책은 더 빠르고 더 엄격한 카르텔화, 그리하여 기업가 조직의 강화, 민족 대립의 격화, 군비의 증강, 조세 부담의 증가, 생활비의 상승, 국가권력의 확대, 민주주의의 약화, 노동자에게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의 출현을 뜻한다. 부르주아지가 자유무역에서 등을 돌리고 나면 자유무역을 위한 투쟁은 가망이 없어진다. 프롤레타리아 혼자서는 너무 약해서 지배자들에게 자기 정책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프롤레타리아가 이제 제국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게 엮인 현대의 보호관세 정책으로 개종한다는 뜻일 수는 결코 없다. 프롤레타리아가 이 정책이 자본가 계급에게 필연적이며, 따라서 자본가 계급이 지배하는 한 이 정책이 승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이제 자기 정책을 포기하고 적의 정책 앞에 항복할 까닭은 없으며, 더구나 착취의 일반화와 강화가 자기의 계급적 처지에 가져다준다는 이른바 이익에 관한 환상에 빠져들 까닭은 더더욱 없다. 그렇다고 해서 프롤레타리아가, 제국주의 정책이야말로 자본주의가 뜻하는 혁명을 비로소 일반화하고 그리하여 동시에 사회주의 승리의 조건도 일반화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금융자본의 정책이 전쟁으로 치닫고 그리하여 혁명적 폭풍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군국주의와 전쟁 정책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가차 없는 적대를 꺾을 수 없듯이, 자본의 팽창 정책이 결국 프롤레타리아의 궁극적 승리를 가장 강력하게 촉진한다고 해서 프롤레타리아가 이 정책을 지지할 수는 없다. 오히려 거꾸로, 승리는 이 정책에 맞선 끊임없는 투쟁에서만 나올 수 있다. 그래야만 프롤레타리아가 이 정책이 이끌 수밖에 없는 붕괴의 상속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정치적·사회적 붕괴이지 경제적 붕괴가 아니며, 경제적 붕괴란 애초에 합리적인 관념이 아니다. 보호관세와 카르텔은 생활비의 상승을 뜻하고, 기업가 조직은 노동조합의 공세에 맞서는 자본의 저항력을 강화한다. 군비와 식민 정책은 프롤레타리아가 떠맡아야 할 조세 부담을 갈수록 빠르게 늘린다. 이 정책의 필연적 결과인 자본주의 국가들의 폭력적 충돌은 비참의 엄청난 급증을 뜻한다. 그러나 민중을 혁명화하는 이 모든 힘은, 새로운 사회의 창조자가 되어야 할 계급이 이 정책 전체와 그 필연적 결과를 자기 의식 속에서 앞질러 내다볼 때에만 경제를 새로 짜는 일에 쓰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민중의 이익에 반하는 이 정책의 필연적 결과를 민중에게 끊임없이 밝혀 줄 때에만 가능하며, 이는 다시 제국주의 정책에 맞선 끊임없고 가차 없는 투쟁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데 자본이 제국주의 정책 말고 다른 정책을 펼 수 없다면, 프롤레타리아는 제국주의 정책에 맞서, 산업자본이 홀로 지배하던 시대의 정책을 내세울 수 없다. 더 진전된 자본주의 정책에 맞서 극복된 자유무역 시대의 정책과 국가 적대를 내세우는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할 일이 아니다. 금융자본의 경제 정책, 곧 제국주의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대답은 자유무역일 수 없고, 사회주의일 수밖에 없다. 반동적이 되어 버린 자유경쟁 회복의 이상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극복함으로써 경쟁을 완전히 폐지하는 것만이 이제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목표가 될 수 있다. 보호관세냐 자유무역이냐 하는 부르주아적 양자택일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이렇게 답하며 빠져나온다. 보호관세도 자유무역도 아니라 사회주의, 생산의 조직, 경제를 자본 거물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의해서 그리고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것이다. 사회는 자연의 운동 법칙을 알아낸 뒤로 자연을 복종시켰듯이 마침내 경제도 복종시키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먼 이상이기를 그치고, 「현재의 요구」에 방향만 일러 주는 「최종 목표」이기도 그치며, 프롤레타리아의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정치의 본질적 구성 요소가 된다. 바로 부르주아지의 정치가 가장 완전하게 관철되고, 노동계급의 정치적·민주적 요구가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실현된 나라들에서야말로, 노동자 정치의 독립성을 지키고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지키는 데 그것이 우월함을 보여 주기 위해 사회주의를 제국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답으로 선전의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금융자본은 사회적 생산에 대한 처분권을 점점 더 적은 수의 최대 자본 결합체의 손에 넘긴다. 금융자본은 생산의 지휘를 소유에서 분리하고, 자본주의 안에서 이를 수 있는 한계까지 생산을 사회화한다. 자본주의적 사회화의 한계를 이루는 것은 첫째, 세계시장이 개별 국가들의 국민적 경제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국제적 카르텔화로 힘겹고 불완전하게만 극복할 수 있다. 동시에 이 분할은 카르텔과 트러스트가 국가의 권력 수단을 빌려 서로 벌이는 경쟁 투쟁을 길게 끈다. 둘째로, 완전을 기하기 위해 여기서 언급해야 하는 것은 농업에서 집적을 가로막는 지대의 형성이다. 셋째로, 중소 경영의 생존 능력을 연장하기 위한 경제 정책적 조치들이다.

금융자본은 그 경향에서 보면 생산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확립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적대적 형태의 사회화다. 사회적 생산에 대한 지배는 과두 집단의 손에 남아 있다. 이 과두 집단의 소유를 박탈하기 위한 투쟁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사이 계급투쟁의 마지막 국면을 이룬다.

금융자본의 사회화 기능은 자본주의의 극복을 대단히 쉽게 만든다. 금융자본이 가장 중요한 생산 부문들을 자기 통제 아래 두게 되면, 사회가 자기의 의식적 집행 기관, 곧 프롤레타리아가 정복한 국가를 통해 금융자본을 장악하는 것만으로 가장 중요한 생산 부문에 대한 처분권을 곧바로 얻기에 충분하다. 다른 모든 생산 부문은 이 생산 부문들에 의존하므로, 대공업에 대한 지배는 그것만으로 이미 다른 어떤 직접적 사회화가 없어도 가장 효과적인 사회적 통제를 뜻한다. 광업과 철강업에서 기계 공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전기 공업과 화학 공업을 처분하고 운송 체계를 지배하는 사회는, 이 가장 중요한 생산 영역을 지배함으로써 다른 산업들에 대한 원료의 배분과 그 생산물의 운송을 손에 쥐고, 그리하여 그 산업들도 지배할 수 있다. 베를린의 여섯 대은행[바]을 장악하는 것은 오늘날 이미 대공업의 가장 중요한 영역을 장악하는 것을 뜻할 것이며, 자본주의적 회계가 아직 적절한 것으로 판명되는 과도기 동안 사회주의 정책의 초기 단계를 대단히 쉽게 해 줄 것이다. 수용(收用)은 수많은 농민 소경영과 영업 소경영에까지 미칠 필요가 전혀 없다. 이 소경영들은 오래전부터 대공업에 의존하게 되었으므로, 대공업이 직접 사회화되듯이 대공업의 장악을 통해 간접적으로 사회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로 분산되어 있어서 수용 과정이 오래 걸리고 정치적으로 위험할 곳에서는 그 과정이 천천히 무르익게, 곧 국가권력의 일회적 수용 행위를, 사회가 의식적으로 베푸는 경제적 이익을 통한 점진적 사회화로 바꿀 수 있다. 금융자본이 사회주의에 필요한 한에서의 수용을 이미 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금융자본은 조직의 면에서 사회주의의 마지막 전제 조건을 만들어 내듯이, 정치의 면에서도 이행을 더 쉽게 만든다. 제국주의 정책으로 나타나는 자본가 계급 자신의 행동은 프롤레타리아를 필연적으로 독립적 계급 정치의 길로 이끌며, 이 정치는 자본주의 일반의 궁극적 극복으로만 끝날 수 있다. 자유방임의 원칙이 지배하여 경제 문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따라서 계급 지배의 조직이라는 국가의 성격이 가려져 있던 동안에는, 정치 투쟁의 필요성, 무엇보다 정치적 최종 목표인 국가권력 장악의 필요성을 이해하려면 비교적 높은 수준의 통찰이 필요했다. 바로 불간섭의 고전적 나라인 영국에서 노동계급의 독립적 정치 행동이 생겨나기가 그토록 어려웠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제 이것이 바뀐다. 자본가 계급은 국가 조직을 직접, 노골적으로, 손에 잡히게 장악하고, 그것을 자기의 착취 이익의 도구로 삼는데, 그 방식은 마지막 한 사람의 프롤레타리아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여서, 그는 이제 프롤레타리아의 정치권력 장악이 자기의 가장 가깝고 개인적인 이익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자본가 계급의 공공연한 국가 장악은 모든 프롤레타리아에게, 자기에 대한 착취를 끝낼 유일한 수단으로서 정치권력 장악을 추구하도록 직접 강요한다.[1]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은 부르주아 사회 안의 모든 계급 대립을 격화시킨다. 그런데 제국주의의 가장 단호한 적인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다른 계급들로부터 지원군이 온다. 처음에는 다른 모든 계급의 지지를 받던 제국주의는 결국 자기 지지자들을 쫓아 버린다. 독점화가 진행될수록 특별 이윤의 부담이 다른 모든 계급을 짓누른다. 트러스트로 인한 물가 상승은 그들의 생활 수준을 떨어뜨리며, 식료품 가격의 상승 경향이 가장 필요한 생활 수단까지 끌어올리므로 더욱 그렇다. 동시에 조세 부담이 늘어 중간층도 타격을 받는다. 그리고 이 중간층 자신이 점점 더 반항적이 된다. 사무직원들은 승진 전망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보고 점점 더 착취받는 프롤레타리아로 느낀다. 상업과 영업의 중간층도 자기들이 카르텔에 의존하게 되어 수수료를 받는 대리인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 모든 대립은 자본의 팽창이 더딘 진행의 시기로 들어서는 순간 견딜 수 없을 만큼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주식회사와 카르텔의 발전이 더 이상 그렇게 빠르게 진행되지 않고, 새로운 창업자 이득의 발생, 따라서 자본수출의 충동이 느려질 때 일어난다. 그런데 이 충동은 자본주의 도입을 통한 외국의 급속한 개방이 늦어지면 느려질 수밖에 없다. 극동의 개방, 캐나다·남아프리카·남아메리카의 급속한 발전이, 1895년 이래 자본주의가 어지러울 만큼 가파르게, 그리고 짧은 불황으로만 중단되며 발전해 온 데 큰 몫을 했다. 그런데 이 발전이 느려지면 국내 시장에서 카르텔의 압박은 더욱 날카롭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집적이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것이 바로 불황기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세계시장의 확대가 더뎌지면서 자기 몫을 둘러싼 자본주의 민족들 사이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며, 지금까지 경쟁에 열려 있던 큰 시장이 이를테면 영국에까지 보호관세가 확대됨으로써 다른 나라들의 경쟁에서 멀어진다면 더욱 그렇다. 전쟁 위험은 군비와 조세 부담을 늘리고, 마침내 생활 수준이 점점 더 위협받는 중간층을 프롤레타리아의 대열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는 국가권력의 약화와 전쟁의 충돌에서 열매를 거둔다.[2]

이것은 역사의 법칙이다. 계급 대립에 기초한 사회 구성체에서 거대한 사회적 변혁은 지배 계급이 이미 자기 권력의 집중에서 가능한 최고 수준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일어난다. 지배 계급의 경제 권력은 언제나 동시에 사람에 대한 권력, 인간 노동력에 대한 처분권을 뜻한다. 그런데 그로써 경제적 지배자는 지배받는 자들의 힘에 의존하게 된다. 그는 자기 권력을 늘리면서 동시에 계급적 적대 속에서 자기와 마주 선 자들의 힘도 강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배받는 자로서 그들은 무력해 보인다. 투쟁 속에서만, 지배 계급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데서만 드러날 수 있는 그들의 힘은 잠재적인 것으로 보이며, 지배자들의 힘만이 눈에 보이는 유일한 힘이다. 두 힘이 충돌할 때, 곧 혁명의 시기에 비로소 억눌린 자들의 힘이 실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경제 권력은 동시에 정치 권력을 뜻한다. 경제에 대한 지배는 동시에 국가권력의 권력 수단에 대한 처분권을 준다. 경제 영역에서 집적이 강할수록 국가에 대한 지배는 더 무제한적이 된다. 국가의 모든 권력 수단을 이렇게 단단히 한데 모은 것은 국가 권력의 최고 발현으로, 국가는 경제적 지배를 유지하는 극복할 수 없는 도구로 보이며, 그럼으로써 동시에 정치권력의 장악이 경제적 해방의 전제 조건으로 보인다. 부르주아 혁명은 절대주의 국가가 대영주들의 국내 영역 권력을 극복하고 모든 권력 수단을 자기 안에 모은 뒤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리고 몇몇 최대 영주의 손에 정치권력이 집중된 것 자체가 절대 왕정의 승리의 전제 조건이었다.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는 소수의 자본 거물이나 거물 결합체의 손에 경제 권력이 집중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국가권력을 지배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완성된 금융자본은 자본 과두 집단의 손에 경제적·정치적 전권이 최고 단계로 모인 것을 뜻한다. 금융자본은 자본 거물들의 독재를 완성한다. 동시에 금융자본은 한 나라의 국민적 자본 지배자들의 독재를 다른 나라의 자본주의적 이익과 점점 더 양립할 수 없게 만들고, 나라 안에서의 자본의 지배를, 금융자본에 착취당하면서도 투쟁으로 부름받은 민중의 이익과 점점 더 양립할 수 없게 만든다. 적대적 이익들의 거대한 충돌 속에서 자본 거물들의 독재는 마침내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뒤바뀐다.

주석

  1. “현대의 보호관세 제도는, 그리고 이것이 그 역사적 의의인데, 자본주의의 마지막 국면을 연다. 자본주의의 운동 법칙인 이윤율의 하락을 막기 위해, 자본은 자유경쟁을 없애고 스스로를 조직하며, 그 조직을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이제 그것을 곧바로 직접 자기의 착취 이익에 봉사하게 할 수 있는 처지가 된다. 이제 노동자만이 아니라 전체 주민이 자본가 계급의 이윤 추구에 복종하게 된다. 사회가 가진 모든 권력 수단이 의식적으로 한데 모여, 자본이 사회를 착취하는 수단으로 바뀐다. 이것은 사회주의 사회의 완전한 부정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사회의 직접적 전 단계다. 곧 오늘날의 사회에 있는 모든 경제적 잠재력의 의식적 사회화이지만,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에 대한 착취의 정도를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한 방식으로 높이기 위해 한데 모은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상태의 명백함, 눈에 훤히 보임이 그 지속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상태는, 생산수단의 집중이 의식과 행동의 집중까지 가져다준 자본가 계급의 행동에 맞서, 자기 힘을 의식하기만 하면 그 힘을 거역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루돌프 힐퍼딩, 「보호관세의 기능 변화」, 『노이에 차이트』 제21년차 제2권. ↩
  2. 카를 카우츠키, 『권력으로 가는 길』, 특히 마지막 장 「혁명의 새 시대」를 보라. ↩

옮긴이 주

  1. 윌리엄 페티(1623~1687). 잉글랜드의 경제학자로, 마르크스는 그를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창시자로 꼽았다. ↩
  2.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크나프(1842~1926). 독일 경제학자. 『화폐 국정 이론』(1905)에서 화폐는 상품이 아니라 국가가 지불 수단으로 정한 법적 창조물이라고 주장했다. ↩
  3. 막스 아들러(1873~1937).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힐퍼딩과 함께 『마르크스 연구』를 펴냈고, 『금융자본론』도 그 제3권으로 나왔다. ↩
  4. 존 풀라턴(1780?~1849). 영국 경제학자로 은행학파의 대표자. 인용은 『통화의 조절에 관하여』(1844)에서 나온 것이다. ↩
  5. Personalunion. 같은 사람이 은행과 산업 기업의 이사회·감사회 자리를 함께 차지해 두 기업을 잇는 것을 말한다. ↩
  6. 당시 독일 금융을 주도한 도이체 방크, 디스콘토게젤샤프트, 드레스드너 방크, 다름슈테터 방크, 베를리너 한델스게젤샤프트, 샤프하우젠 방크페어라인을 가리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