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역사 단기강좌 (1938년 초판)
인물이오시프 스탈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안드레이 즈다노프, 예멜리얀 야로슬랍스키, 표트르 포스펠로프, 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용어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역사 단기강좌,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
제6장 제국주의 전쟁 시기의 볼셰비키당. 러시아의 제2차 혁명 (1914년~1917년 3월)
1. 제국주의 전쟁의 발생과 원인.
1914년 7월 14일(27일) 차르 정부는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7월 19일(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러시아는 전쟁에 뛰어들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레닌과 볼셰비키는 전쟁이 불가피함을 내다보았다. 레닌은 사회주의자들의 국제대회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사회주의자들이 취할 혁명적 노선을 규정하기 위한 자신의 제안을 내놓았다.
레닌은 전쟁이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동반자라고 지적했다. 남의 땅을 약탈하고, 식민지를 정복하고 수탈하며, 새로운 시장을 차지하는 일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정복 전쟁을 벌이는 원인이 되곤 했다.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전쟁은 노동계급 착취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고 합법적인 상태이다.
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자본주의가 마침내 발전의 최고이자 마지막 단계인 제국주의로 넘어갔을 때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제국주의 아래에서는 자본가들의 강력한 연합체(독점체)와 은행이 자본주의 국가들의 생활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금융자본이 자본주의 국가들의 주인이 되었다. 금융자본은 새로운 시장, 새로운 식민지의 장악, 자본 수출을 위한 새로운 장소, 새로운 원료 공급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미 19세기 말에 지구의 전 영토는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 분할되어 있었다. 그런데 제국주의 시대에 자본주의의 발전은 극도로 불균등하게, 또 도약적으로 진행된다. 이전에 첫째 자리를 차지했던 일부 나라들은 자국의 공업을 비교적 느리게 발전시키고, 이전에 뒤처져 있던 다른 나라들은 빠른 도약으로 그들을 따라잡고 앞지른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적·군사적 힘의 균형이 변했다. 세계를 새로 재분할하려는 지향이 나타났다. 세계의 새로운 재분할을 위한 투쟁은 제국주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했다. 1914년의 전쟁은 세계와 세력권의 재분할을 위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이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이었다. 그 책임은 모든 나라의 제국주의자들에게 있다.
특히 이 전쟁은 한편으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 영국 및 그들에게 종속된 러시아가 준비했다. 1907년에 삼국 협상, 즉 협상국이 생겨났다. 이것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동맹이었다. 또 하나의 제국주의 동맹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1914년 전쟁 초기에 이 동맹에서 이탈했다가 뒤에 협상국에 가담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한 나라는 불가리아와 터키였다.
제국주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에게서 식민지를, 러시아에게서 우크라이나, 폴란드, 발트 연안 지역을 빼앗으려 했다. 독일은 바그다드 철도를 건설하여 근동에서 영국의 지배를 위협했다. 영국은 독일의 해군 군비 증강을 두려워했다.
차르 러시아는 터키를 분할하려 했고, 흑해에서 지중해로 나가는 해협(다르다넬스)을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를 꿈꾸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일부인 갈리치아를 점령하는 것도 차르 정부의 계획에 들어 있었다.
영국은 전쟁을 통해 자국의 위험한 경쟁자인 독일을 격파하려 했다. 독일 상품은 전쟁 전에 세계 시장에서 영국 상품을 점점 더 많이 몰아내고 있었다. 그 밖에도 영국은 터키에게서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을 빼앗고 이집트에 굳건히 자리 잡을 작정이었다.
프랑스 자본가들은 독일에게서 석탄과 철이 풍부한 자르 분지와, 1870~1871년 전쟁에서 독일이 프랑스에게서 빼앗은 알자스-로렌을 빼앗으려 했다.
이와 같이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킨 것은 두 자본주의 국가 집단 사이의 가장 큰 모순들이었다.
세계 재분할을 위한 이 약탈 전쟁은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를 건드렸으며, 그 때문에 이후 일본, 미국 및 그 밖의 여러 나라가 이 전쟁에 끌려 들어갔다.
전쟁은 세계 전쟁이 되었다.
제국주의 전쟁은 부르주아지가 자국 인민에게 철저히 비밀로 하고 준비했다. 전쟁이 터지자 각 제국주의 정부는 자기가 이웃 나라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공격을 받았다고 증명하려고 애썼다. 부르주아지는 전쟁의 진정한 목적과 그 제국주의적·침략적 성격을 숨기면서 인민을 속였다. 각 제국주의 정부는 전쟁이 자기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수행된다고 선언했다.
인민을 속이는 부르주아지를 도운 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대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연대의 대의를 비열하게 배반했다. 그들은 전쟁에 반대하여 나서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조국 방위라는 깃발 아래 교전국들의 노동자와 농민을 서로 맞붙여 싸우게 하려는 부르주아지를 도왔다.
러시아가 제국주의 전쟁에서 협상국, 즉 프랑스와 영국 편에 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14년 이전에 러시아 산업의 가장 중요한 부문이 외국 자본, 주로 프랑스·영국·벨기에 자본, 다시 말해 협상국 자본의 손에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야금 공장들은 프랑스 자본가들의 손에 있었다. 야금업 전체로 보면 거의 4분의 3(72퍼센트)이 외국 자본에 의존했다. 석탄 산업 — 돈바스 — 에서도 상황은 같았다. 석유 채굴량의 약 절반이 영국·프랑스 자본의 손에 있었다. 러시아 산업 이윤의 상당 부분은 외국 은행, 주로 영국·프랑스 은행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러한 모든 사정에 더해 차르가 프랑스와 영국에서 맺은 10억 단위의 차관은 차리즘을 영국·프랑스 제국주의에 묶어 두었고, 러시아를 이 나라들의 공납국, 그들의 반(半)식민지로 만들었다.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전쟁을 시작함으로써 자신의 형편을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계산했다. 새로운 시장을 쟁취하고, 군수 주문과 납품으로 치부하고, 아울러 전시 상황을 이용해 혁명 운동을 억누르려 했던 것이다.
차르 러시아는 준비되지 않은 채 전쟁에 들어섰다. 러시아 산업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 크게 뒤처져 있었다. 산업에서는 설비가 낡은 옛 공장들이 우세했다. 농업은 반(半)농노제적 토지 소유가 남아 있고 궁핍해지고 몰락한 농민층이 대량으로 존재하는 상태에서, 오래 끄는 전쟁을 치를 튼튼한 경제적 기반이 될 수 없었다.
차르는 주로 농노주인 지주들에게 의존했다. 흑백인조 계열의 대지주들은 대자본가들과 블록을 이루어 나라와 국가 두마를 좌지우지했다. 그들은 차르 정부의 내정과 외교를 전적으로 지지했다. 러시아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는 차르 전제정을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땅의 탈취를 보장해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 운동을 진압해 줄 수 있는 철갑 주먹으로 여기고 기대를 걸었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당인 카데트는 반대파 행세를 했지만, 차르 정부의 외교 정책은 아무런 단서 없이 지지했다.
소부르주아 정당인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전쟁 초기부터 사회주의의 깃발로 위장하여, 부르주아지가 인민을 기만하고 전쟁의 제국주의적·약탈적 성격을 감추는 것을 도왔다. 그들은 부르주아지의 “조국”을 “프로이센 야만인”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방어해야 한다고 설파했고, “국내 평화” 정책을 지지했으며, 그리하여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독일 차르 정부가 “러시아 야만인”에 맞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도운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차르 정부가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도왔다.
볼셰비키당만이 혁명적 인터내셔널리즘의 위대한 기치에 충실하게 남아, 차르 전제정에 반대하고 지주와 자본가에 반대하고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결연한 투쟁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확고히 지켰다. 볼셰비키당은 전쟁 첫날부터 이 전쟁이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주와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남의 땅을 빼앗고 남의 민족을 약탈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보았고, 노동자들이 이 전쟁에 맞서 결연히 싸워야 한다는 방침을 고수했다.
노동계급은 볼셰비키당을 지지했다.
사실 전쟁 초기에 인텔리겐치야와 농민층의 쿨라크층을 휩쓴 부르주아적 애국 열풍은 노동자 일부에게도 번졌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불량배 집단인 「러시아 인민 동맹」의 성원들과 사회혁명당·멘셰비키 성향의 노동자 일부였다. 이들은 물론 노동계급의 정서를 반영하지 못했고 반영할 수도 없었다. 전쟁 첫날 차르 정부가 조직한 부르주아지의 쇼비니즘적 시위에 참가한 것은 바로 이런 분자들이었다.
2. 제2인터내셔널 정당들이 자기 제국주의 정부 편으로 넘어가다. 제2인터내셔널이 개별 사회쇼비니즘 정당들로 분열되다.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와 그 지도자들의 동요에 대해 여러 번 경고했다. 그는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이 말로만 전쟁에 반대할 뿐이며, 전쟁이 일어나면 입장을 바꾸어 제국주의 부르주아지 편으로 넘어가 전쟁 지지자가 될 수 있다고 줄곧 말했다. 전쟁 첫날부터 레닌의 예견이 옳았음이 확인되었다.
1910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대회는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에서 군사 예산에 반대표를 던져야 한다고 결정했다. 1912년 발칸 전쟁 때 바젤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국제 대회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이 자본가의 이윤을 늘리기 위해 서로 총을 쏘는 것을 범죄로 여긴다고 선언했다. 말로는, 결의안에서는 그러했다.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의 천둥이 울리고 이 결정들을 실제로 실행해야 할 때가 되자,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배신자요 변절자이며 부르주아지의 하수인임이 드러났다. 그들은 전쟁 지지자가 되었다.
1914년 8월 4일 독일 사회민주당은 의회에서 군사 예산에, 곧 제국주의 전쟁 지원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 영국, 벨기에 및 다른 나라 사회주의자들의 압도적 다수도 똑같이 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존재하기를 그쳤다. 그것은 실제로는 서로 싸우는 개별 사회쇼비니즘 정당들로 분열되었다.
사회주의 정당들의 지도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배신하고 사회쇼비니즘의 입장,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제국주의 정부들이 노동계급을 우롱하고 민족주의의 독으로 중독시키는 것을 도왔다. 이 사회적 배신자들은 조국 방위라는 깃발 아래 독일 노동자들을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영국·프랑스 노동자들을 독일 노동자들에게 부추겨 대립시켰다. 제2인터내셔널에서는 극소수만이 국제주의 입장에 남아 흐름을 거슬러 나아갔다. 물론 그들은 충분히 확고하지도, 완전히 분명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흐름을 거슬러 나아갔다.
볼셰비키당만이 처음부터 주저 없이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결연한 투쟁의 기치를 들었다. 레닌은 1914년 가을에 쓴 전쟁에 관한 테제에서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가 우연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제2인터내셔널을 망친 것은 기회주의자들이었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들에 대해 경고해 왔다.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은 전쟁 전에도 기회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기회주의자들은 혁명 투쟁의 포기를 공공연히 설교했고, 「자본주의가 평화롭게 사회주의로 성장해 들어간다」는 이론을 설교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기회주의와 싸우려 하지 않았고, 기회주의와의 평화를 주장하여 그것이 뿌리내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기회주의에 대해 조정 정책을 고수하는 사이에 제2인터내셔널 자체가 기회주의적으로 되었다.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는 식민지에서 얻는 이윤과 후진국 착취로 얻은 이윤으로, 더 높은 임금과 그 밖의 선심을 베풀어 숙련 노동자의 상층, 이른바 노동자 귀족을 체계적으로 매수했다. 이 계층에서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의 지도자, 시의회와 의회의 의원, 언론인과 사회민주주의 조직의 일꾼이 적지 않게 나왔다. 전쟁이 터지자 이 사람들은 자기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 혁명의 반대자가 되었고, 자기 부르주아지와 자기 제국주의 정부의 가장 맹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기회주의자들은 사회배외주의자가 되었다.
러시아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을 비롯한 사회배외주의자들은 국내에서는 노동자가 부르주아지와 계급 평화를 이룰 것을, 국외에서는 다른 민족과 전쟁을 벌일 것을 설교했다. 그들은 자기 나라 부르주아지에게는 전쟁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여, 전쟁의 진정한 책임자에 관해 대중을 속였다. 많은 사회배외주의자가 자기 나라 제국주의 정부의 장관이 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에 못지않게 위험한 것은 숨은 사회배외주의자, 이른바 중간파였다. 중간파인 카우츠키, 트로츠키, 마르토프 등은 공공연한 사회배외주의자를 변호하고 옹호했으며, 따라서 사회배외주의자와 함께 프롤레타리아트를 배반했다. 그러면서 노동계급을 속이려고 꾸며 낸, 전쟁과 싸운다는 “좌파적” 미사여구로 자기 배반을 가렸다. 실제로 중간파는 전쟁을 지지했다. 전쟁 비용에 반대표를 던지지 말고 전쟁 비용 표결에서 기권하는 데 그치자는 중간파의 제안은 전쟁을 지지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배외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자기 제국주의 정부가 전쟁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전시에 계급투쟁을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중간파인 트로츠키는 전쟁과 사회주의에 관한 모든 중요한 문제에서 레닌에 반대했고 볼셰비키당에 반대했다.
레닌은 전쟁이 시작된 첫날부터 새로운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할 역량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미 1914년 11월 전쟁 반대 선언에서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수치스러운 파산을 겪은 제2인터내셔널 대신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한다는 과제를 제기했다.
1915년 2월 런던에서 열린 협상국 사회주의자 협의회에서 레닌의 위임을 받아 리트비노프 동지가 발언했다. 리트비노프는 사회주의자들(반데르벨데, 삼바, 게드)이 벨기에와 프랑스의 부르주아 정부에서 탈퇴하고 제국주의자와 완전히 결별하여 그들과의 협력을 거부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모든 사회주의자에게 자기 나라 제국주의 정부에 반대하는 결연한 투쟁을 벌이고 전쟁 비용 찬성 투표를 규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협의회에서 리트비노프의 목소리는 외롭게 울렸다.
1915년 9월 초 치머발트에서 국제주의자들의 제1차 협의회가 열렸다. 레닌은 이 협의회를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 운동 발전의 “첫걸음”이라 불렀다. 레닌은 이 협의회에서 치머발트 좌파 그룹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 치머발트 좌파 안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유일하게 올바르고 끝까지 일관된 입장을 취한 것은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뿐이었다. 치머발트 좌파는 독일어로 잡지 『전령』을 발행했는데, 여기에 레닌의 논문이 실렸다.
1916년 스위스의 킨탈 마을에서 국제주의자들의 제2차 협의회를 소집하는 데 성공했다. 이 협의회를 제2차 치머발트 협의회라고 부른다. 이 무렵에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국제주의자 그룹이 갈라져 나왔고, 국제주의적 분자와 사회배외주의자 사이의 분열이 한층 뚜렷해졌다. 무엇보다도 대중 자신이 이 무렵에는 전쟁과 그로 인한 재난의 영향으로 좌경화했다. 킨탈 선언은 협의회에서 투쟁한 여러 그룹이 합의한 결과로 작성되었다. 이 선언은 치머발트 선언에 비해 한 걸음 전진한 것이었다.
그러나 킨탈 협의회도 볼셰비키 정책의 기본 원칙, 곧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할 것, 전쟁에서 자국 제국주의 정부의 패배를 추구할 것, 제3인터내셔널을 조직할 것은 채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킨탈 협의회는 국제주의적 분자가 분리되어 나오는 데 기여했고, 이들로부터 훗날 공산주의 제3인터내셔널이 형성되었다.
레닌은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같은 좌파 사회민주주의자 가운데 비일관적인 국제주의자들의 오류를 비판했으나, 동시에 그들이 올바른 입장을 취하도록 도왔다.
3. 전쟁, 평화, 혁명 문제에 관한 볼셰비키당의 이론과 전술.
볼셰비키는 대다수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그랬듯이 평화를 한탄하며 평화 선전에 그치는 단순한 평화주의자(평화 지지자)가 아니었다. 볼셰비키는 호전적인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전복할 때까지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혁명 투쟁을 벌이는 편에 섰다. 볼셰비키는 평화의 문제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 문제와 결부시켰으며, 전쟁을 없애고 병합도 배상금도 없는 공정한 평화를 쟁취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전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혁명을 포기하는 멘셰비키·사회혁명당원의 태도와 전쟁 중에 “시민적 평화”를 유지하자는 배신적 구호에 맞서, 볼셰비키는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 구호는 근로 대중, 그중에서도 병사 외투를 입은 무장한 노동자와 농민이 전쟁에서 벗어나 공정한 평화를 이루려면 무기를 자국 부르주아지에게 돌려 그 권력을 전복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부르주아 조국을 방위하자는 멘셰비키·사회혁명당원의 정책에 맞서, 볼셰비키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자국 정부를 패배시키자”는 정책을 내걸었다. 이는 군사 예산에 반대 투표하고, 군대 안에 비합법 혁명 조직을 만들고, 전선에서 병사들의 친선(형제화)을 지지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행동을 조직하여 이를 자국 제국주의 정부에 대한 봉기로 이끌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볼셰비키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인민에게 가장 덜 해로운 것은 차르 정부의 군사적 패배라고 보았다. 그 패배가 인민이 차리즘에 거둘 승리와,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적 예속과 제국주의 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이는 투쟁의 성공을 쉽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레닌은 자국 제국주의 정부의 패배를 추구하는 정책을 러시아 혁명가들만이 아니라 모든 교전국 노동계급의 혁명 정당이 수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볼셰비키는 모든 전쟁에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직 침략적 전쟁, 제국주의 전쟁에만 반대했다. 볼셰비키는 전쟁에 두 종류가 있다고 보았다.
가) 정의로운 전쟁, 비(非)약탈적 전쟁, 해방 전쟁. 즉 인민을 외부의 침략과 그 예속화 시도로부터 지키거나, 인민을 자본주의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거나, 끝으로 식민지와 종속 국가를 제국주의자들의 압제에서 해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 그리고
나) 부정의한 전쟁, 약탈적 전쟁. 즉 남의 나라와 남의 민족을 빼앗아 예속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
볼셰비키는 첫째 종류의 전쟁을 지지했다. 둘째 종류의 전쟁에 대해서는, 혁명과 자국 제국주의 정부의 전복에 이르기까지 단호하게 투쟁해야 한다고 보았다.
전쟁 중에 쓴 레닌의 이론적 저작들은 전 세계 노동계급에게 거대한 의의를 지녔다. 1916년 봄 레닌은 『제국주의론,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라는 저작을 썼다. 레닌은 이 책에서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이며, 이 단계에서 자본주의는 이미 “진보적” 자본주의에서 기생적 자본주의, 썩어가는 자본주의로 변했고, 제국주의는 죽어가는 자본주의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것은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없이 저절로 죽어 없어지며, 뿌리째 저절로 썩어 버린다는 뜻은 아니었다. 레닌은 노동계급의 혁명 없이는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없다고 언제나 가르쳤다. 그러므로 레닌은 제국주의를 죽어가는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동시에, 이 책에서 “제국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혁명의 전야이다”라는 것도 보여주었다.
레닌은 제국주의 시대에 자본주의적 압제가 갈수록 강화되고, 제국주의 조건에서 자본주의의 기초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분노가 커지며, 자본주의 국가들 내부에서 혁명적 폭발의 요소가 늘어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레닌은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와 종속 국가에서 혁명적 위기가 격화되고,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의 요소가 늘어나며, 제국주의에 맞선 해방 전쟁의 요소가 늘어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레닌은 제국주의 조건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불균등성과 모순이 특히 첨예해졌고, 상품 판매 시장과 자본 수출 시장을 둘러싼 투쟁, 식민지와 원료 공급원을 둘러싼 투쟁이 세계를 다시 나누기 위한 주기적인 제국주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레닌은 바로 자본주의 발전의 이러한 불균등성 때문에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나며, 이 전쟁이 제국주의의 힘을 약화시켜 제국주의 전선이 가장 약한 곳에서 전선이 돌파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에 근거하여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제국주의 전선을 어느 한 곳이나 여러 곳에서 돌파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며, 사회주의가 처음에는 몇몇 나라에서, 심지어 따로 떨어진 한 나라에서도 승리할 수 있고, 이들 나라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불균등하므로 모든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동시에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회주의는 처음에 한 나라나 몇몇 나라에서 승리하고 나머지 나라들은 한동안 부르주아 국가로 남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제국주의 전쟁 시기에 쓴 두 편의 서로 다른 논문에서 레닌이 이 천재적 결론을 어떻게 정식화했는지 보자.
1) “경제적·정치적 발전의 불균등은 자본주의의 절대적 법칙이다. 이로부터 사회주의의 승리는 처음에 소수의 나라에서, 심지어 단 하나의 개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나라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자기 나라에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한 뒤, 다른 나라들의 피억압 계급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서 나머지 자본주의 세계에 맞서게 될 것이다”… (1915년 8월에 쓴 논문 「유럽합중국 구호에 관하여」에서) (레닌, 제18권, 232~233쪽). 2) “자본주의의 발전은 여러 나라에서 극도로 불균등하게 이루어진다. 상품 생산 아래에서는 달리 될 수 없다. 여기에서 움직일 수 없는 결론이 나온다. 사회주의는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승리할 수 없다. 사회주의는 처음에 한 나라 또는 몇 나라에서 승리하고, 나머지 나라들은 얼마 동안 부르주아 국가로 또는 부르주아 이전의 국가로 남을 것이다. 이것은 마찰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부르주아지가 사회주의 국가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쇄하려고 직접 나서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경우 우리 쪽의 전쟁은 합법적이고 정당한 전쟁일 것이다. 그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다른 민족들을 부르주아지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전쟁일 것이다” (1916년 가을에 쓴 논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군사 강령」에서) (레닌, 제19권, 325쪽).
이것은 새롭고 완결된 사회주의 혁명 이론, 즉 개별 국가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할 가능성과 그 승리의 조건, 그 승리의 전망에 관한 이론이었으며, 이 이론의 기초는 레닌이 이미 1905년에 소책자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에서 마련해 두었다.
이 이론은 제국주의 이전 자본주의 시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퍼져 있던 입장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느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하기는 불가능하며, 사회주의는 모든 문명국에서 동시에 승리할 것이라고 여겼다. 레닌은 자신의 뛰어난 저서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 서술한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관한 자료에 근거하여 이 입장을 낡은 것으로 뒤엎고 새로운 이론적 입장을 제시했다. 이 입장에 따르면 모든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동시에 승리하기는 불가능하며, 하나의 개별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하기는 가능하다.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 이론이 지닌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의의는 이 이론이 마르크스주의를 새로운 이론으로 풍부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데에만 있지 않다. 그 의의는 또한 이 이론이 개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에게 혁명적 전망을 주고, 자국의 부르주아지를 공격하는 일에서 이들의 주도성을 풀어 주며, 그러한 공격을 조직하기 위해 전쟁 상황을 이용하도록 가르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에 대한 이들의 믿음을 굳건히 해 주는 데에도 있다.
전쟁과 평화와 혁명의 문제에 대한 볼셰비키의 이론적·전술적 입장은 이러했다.
볼셰비키는 이 입장에 기초하여 러시아에서 실천 활동을 벌였다.
잔혹한 경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두마 의원인 볼셰비키 바다예프, 페트롭스키, 무라노프, 사모일로프, 샤고프는 전쟁 초에 여러 조직을 순회하며 전쟁과 혁명에 대한 볼셰비키의 입장을 보고했다. 1914년 11월에는 전쟁에 대한 입장을 논의하기 위해 국가 두마 볼셰비키 의원단 회의가 열렸다. 회의 사흘째 되던 날, 회의 참석자 전원이 체포되었다. 재판소는 모든 의원에게 권리 박탈과 동시베리아 정착 유형을 선고했다. 차르 정부는 국가 두마의 볼셰비키 의원들을 “국가 반역죄”로 기소했다.
재판에서 우리 당의 명예가 되는 두마 의원들의 활동상이 드러났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차르의 법정에서 용감하게 처신하여, 법정을 차리즘의 침략 정책을 폭로하는 연단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카메네프는 달리 처신했다. 그는 비겁하게도 최초의 위험이 닥치자마자 볼셰비키당의 정책을 부인했다. 카메네프는 법정에서 전쟁 문제에 관해 볼셰비키와 의견이 다르다고 선언하고, 그 증거로 멘셰비키 이오르단스키를 증인으로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볼셰비키는 전쟁을 뒷받침하는 군수산업위원회에 반대하고, 멘셰비키가 노동자들을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의 영향 아래 두려는 시도에 반대하여 큰 활동을 벌였다. 부르주아지는 제국주의 전쟁을 전 인민의 전쟁으로 모두에게 내세우는 데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전쟁 중에 자신들의 전러시아 조직인 젬스트보 연합과 도시 연합을 만들어 국가 업무에 큰 영향력을 얻었다. 부르주아지는 노동자들 역시 자신의 지도와 영향 아래 두어야 했다. 부르주아지는 이를 위해 군수산업위원회에 “노동자 그룹”을 만드는 수단을 고안했다. 멘셰비키는 부르주아지의 이 발상을 받아들였다. 부르주아지에게는 이 군수산업위원회에 노동자 대표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유리했다. 그들이 노동자 대중 사이에서, 포탄·대포·소총·탄약 및 그 밖에 국방을 위해 일하는 공장에서 노동 생산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선동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전쟁을 위해, 모든 것을 전쟁에”— 이것이 부르주아지의 구호였다. 실제로 이 구호는 “군수품 납품과 남의 땅 탈취로 실컷 벌어들여라”를 의미했다. 멘셰비키는 부르주아지가 꾸민 이 거짓 애국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자본가들을 도우면서, 그들은 군수산업위원회의 “노동자 그룹” 선거에 노동자들이 참여하도록 열심히 선동했다. 볼셰비키는 이 책동에 반대했다. 그들은 군수산업위원회 보이콧을 주장했고 이 보이콧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노동자 일부는 그래도 저명한 멘셰비키 그보즈데프와 밀정 아브로시모프의 지도 아래 군수산업위원회 활동에 참여했다. 1915년 9월, 노동자 대표자들이 군수산업위원회의 “노동자 그룹” 최종 선거를 위해 모였을 때, 대표자 다수가 위원회 참여에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노동자 대표 다수는 군수산업위원회 참여에 반대하는 강경한 결의를 채택하며, 노동자들은 평화를 위해, 차리즘 타도를 위해 투쟁하는 것을 자신들의 과제로 삼는다고 선언했다.
볼셰비키는 군대와 함대에서도 큰 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전쟁의 전례 없는 참상과 민중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병사와 수병 대중에게 설명했으며, 혁명만이 제국주의 학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민중의 유일한 출구라고 설명했다. 볼셰비키는 군대와 함대, 전선과 후방 부대에 세포를 만들고 전쟁에 반대하는 호소문을 담은 전단을 뿌렸다.
크론시타트에서 볼셰비키는 당 페트로그라드 위원회와 긴밀히 연계된 “크론시타트 군사조직 중앙 집단”을 만들었다. 수비대에서 활동하기 위한 군사조직이 당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산하에 창설되었다. 1916년 8월 페트로그라드 오흐란카 책임자는 “크론시타트 집단은 일이 매우 진지하고 비밀리에 꾸려지고 있으며, 참가자들은 모두 과묵하고 신중한 사람들이다. 이 집단은 육지에도 대표자들을 두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당은 전선에서 교전 중인 군대의 병사들이 서로 친선을 맺도록 선동했으며, 적은 세계 부르주아지이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여 무기를 자기 나라의 부르주아지와 그 정부에 겨누어야만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개별 부대가 공격에 나가기를 거부하는 사례가 갈수록 잦아졌다. 이러한 일은 이미 1915년에 있었고, 특히 1916년에 많았다.
볼셰비키는 특히 발트 연안 지역의 북부 전선 군대에서 큰 활동을 전개했다. 북부 전선 군대 총사령관 루즈스키 장군은 1917년 초 상부에, 볼셰비키가 이 전선에서 전개한 방대한 혁명 활동에 관해 보고했다.
전쟁은 여러 민족의 삶과 국제 노동계급의 삶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전쟁은 국가들의 운명, 민족들의 운명, 사회주의 운동의 운명을 걸어놓았다. 그러므로 전쟁은 동시에 스스로 사회주의라 일컫는 모든 정당과 조류에 대한 시금석이자 시험이었다. 이 정당들과 조류가 사회주의의 대의, 국제주의의 대의에 충실할 것인가, 아니면 노동계급을 배반하고 자기 깃발을 거두어 자기 민족 부르주아지의 발밑에 내던지는 쪽을 택할 것인가— 그때 문제는 이렇게 제기되었다.
전쟁은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이 시험을 견뎌내지 못하고 노동계급을 배반하여 자기 민족의 제국주의 부르주아지 앞에 깃발을 숙였음을 보여주었다.
자기 안에서 기회주의를 키우고 기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에게 양보하는 방식으로 길러진 이 정당들은 달리 행동할 수도 없었다.
전쟁은 볼셰비키당이 이 시험을 명예롭게 견뎌내고 사회주의의 대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대의에 끝까지 충실했던 유일한 당임을 보여주었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유형의 당, 기회주의에 대한 타협 없는 투쟁의 정신으로 길러진 당, 기회주의와 민족주의에서 벗어난 당— 오직 그러한 당만이 위대한 시험을 견뎌내고 노동계급의 대의, 사회주의와 국제주의의 대의에 충실할 수 있었다.
볼셰비키당이 바로 그러한 당이었다.
4. 전선에서의 차르 군대의 패배. 경제 파탄. 차리즘의 위기.
전쟁은 이미 3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전쟁은 수백만의 인명을 앗아갔다. 전사자, 부상자, 전쟁이 낳은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그러했다. 부르주아지와 지주는 전쟁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은 갈수록 더 큰 궁핍과 고통을 겪었다. 전쟁은 러시아의 국민경제를 파괴했다. 약 1,400만 명의 건장한 일꾼이 군대에 끌려가 경영에서 떨어져 나갔다. 공장이 가동을 멈추었다. 곡물 파종 면적이 줄었다 — 일손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주민과 전선의 병사들은 굶주렸고, 신발도 옷도 없었다. 전쟁은 나라의 모든 자원을 집어삼켰다.
차르 군대는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다. 독일 포병은 차르 군대에 포탄을 우박처럼 퍼부었다. 차르 군대에는 대포가 모자랐고, 포탄이 모자랐고, 소총마저 모자랐다. 때로는 병사 세 명에 소총 한 자루가 돌아갔다. 이미 전쟁 중에 차르의 육군대신 수호믈리노프의 반역이 드러났는데, 그는 독일 간첩들과 내통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수호믈리노프는 독일 정보기관의 지령 — 전선에 포탄 공급을 끊고, 대포를 주지 않고, 소총을 주지 않는 것 — 을 수행했다. 차르의 일부 대신과 장군들도 몰래 독일군의 성공을 도왔다. 그들은 독일과 내통한 황후와 함께 독일인들에게 군사 기밀을 넘겼다. 차르 군대가 패배하여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1916년에 이르러 독일군은 이미 폴란드와 발트 연안 지방의 일부를 점령했다.
이 모든 일은 노동자, 농민, 병사, 인텔리겐치야 사이에 차르 정부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후방과 전선, 중앙과 변방을 가릴 것 없이 전쟁과 차리즘에 반대하는 인민 대중의 혁명운동을 강화하고 격화시켰다.
불만은 러시아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에게도 번지기 시작했다. 라스푸틴 같은 협잡꾼들이 차르 궁정에서 마음대로 놀아나며 독일과의 단독 강화를 향해 노골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분노하게 했다. 그들은 차르 정부가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또 차리즘이 자기 처지를 구하려고 독일과 단독 강화를 맺을 수도 있다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차르 니콜라이 2세를 몰아내고 그 대신 부르주아지와 연결된 미하일 로마노프를 차르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그들은 일석이조를 노렸다. 첫째, 권력에 접근하여 제국주의 전쟁의 계속을 보장하고, 둘째, 물결이 높아지고 있던 대규모 인민혁명의 도래를 작은 궁정 쿠데타로 미리 막으려는 것이었다.
이 일에서 러시아 부르주아지를 전적으로 지지한 것은 영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였다. 그들은 차르가 전쟁을 계속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또 차르가 독일과 단독 강화를 맺어 일을 끝내 버릴까 봐 두려워했다. 차르 정부가 단독 강화를 맺는다면,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러시아라는 동맹국을 전쟁에서 잃게 될 터였다. 러시아는 적의 병력을 자기 전선으로 끌어당겼을 뿐 아니라 수만 명의 정예 러시아 병사를 프랑스에 보내 주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정 쿠데타를 이루려는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시도를 지원했다.
이리하여 차르는 고립되었다.
전선에서 패배가 그치지 않는 동안 경제 파탄은 갈수록 더 심해졌다. 1917년 1~2월에 식량·원료·연료 부문의 파탄은 최고조에 이르러 가장 극심해졌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로 가는 식료품 수송이 거의 끊겼다. 공장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공장 폐쇄는 실업을 늘렸다. 노동자들의 처지는 특히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갈수록 더 광범위한 인민 대중이 이 견딜 수 없는 처지에서 벗어날 길은 오직 하나, 차르 전제정을 타도하는 것뿐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차르 체제는 분명히 치명적인 위기를 겪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궁정 쿠데타로 위기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인민은 자기 방식대로 위기를 해결했다.
5. 2월 혁명. 차르 체제의 붕괴.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성립. 임시정부의 성립. 이중권력.
1917년은 1월 9일의 파업으로 시작되었다. 파업 중에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바쿠,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시위가 일어났으며, 모스크바에서는 1월 9일에 전체 노동자의 약 3분의 1이 파업에 참가했다. 트베르스코이 대로에서 벌어진 2천 명 규모의 시위는 기마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비보르크 가도에서 병사들이 시위대에 합류했다.
“총파업이라는 사상은 — 페트로그라드 경찰은 이렇게 보고했다 — 날이 갈수록 새로운 지지자를 얻고 있으며, 1905년에 그러했던 것처럼 대중적인 것이 되고 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은 시작된 혁명운동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게 필요한 틀 안에 가두려고 애썼다. 국가 두마 개회일인 2월 14일에 맞추어 멘셰비키는 노동자들이 국가 두마까지 행진하도록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노동자 대중은 볼셰비키를 따라 두마가 아니라 시위로 나아갔다.
1917년 2월 18일 페트로그라드에서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되었다. 2월 22일에는 대부분의 대공장 노동자들이 파업했다. 국제 여성 노동자의 날인 2월 23일(3월 8일),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위원회의 호소에 따라 여성 노동자들이 기아와 전쟁과 차르 체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려고 거리로 나섰다.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를 노동자들이 페트로그라드 전역의 총파업으로 지지했다. 정치 파업은 차르 체제에 반대하는 전반적인 정치 시위로 바뀌기 시작했다.
2월 24일(3월 9일) 시위는 한층 더 큰 힘으로 다시 일어났다. 파업 노동자는 벌써 약 20만 명이었다.
2월 25일(3월 10일) 혁명운동은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 전체를 휩쓸었다. 구역별 정치 파업은 페트로그라드 전역의 총정치파업으로 바뀌었다.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경찰과 충돌했다. 노동자 대중 위에는 “차르를 타도하라!”, “전쟁을 타도하라!”, “빵을 달라!”라는 구호를 적은 붉은 기가 나부꼈다.
2월 26일(3월 11일) 아침, 정치 파업과 시위는 봉기를 시도하는 단계로 바뀌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경찰과 헌병을 무장해제하고 스스로 무장했다. 그러나 경찰과의 무장 충돌은 즈나멘스카야 광장에서 시위대가 총살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하발로프 장군은 노동자들이 2월 28일(3월 13일)까지 작업에 복귀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전선으로 보내질 것이라고 선언했다. 2월 25일(3월 10일) 차르는 하발로프 장군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내일 당장 수도의 소요를 중지시킬 것을 명한다.”
그러나 혁명을 “중지”시키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2월 26일(3월 11일) 낮에 파블로프스키 연대 예비대대 제4중대가 발포했으나, 노동자를 향해서가 아니라 노동자와 총격전을 벌이던 기마 경관 부대를 향해서였다. 군대를 얻기 위한 투쟁은 가장 격렬하고 집요하게 전개되었으며, 특히 여성 노동자들이 병사들에게 직접 다가가 그들과 형제처럼 어울리며, 자신들이 증오하는 차르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데 인민을 도우라고 호소했다.
이 시기 볼셰비키당의 실무 지도는 페트로그라드에 있던 우리 당 중앙위원회 뷰로가 몰로토프 동지를 책임자로 하여 맡고 있었다. 중앙위원회 뷰로는 2월 26일(3월 11일) 차르 체제에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계속하고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2월 27일(3월 12일) 페트로그라드의 군대는 노동자에게 발포하기를 거부하고 봉기한 인민 편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2월 27일 아침만 해도 봉기한 병사는 1만 명뿐이었으나, 저녁에는 이미 6만 명을 넘었다.
봉기한 노동자와 병사는 차르의 장관과 장군을 체포하고 혁명가들을 감옥에서 석방하기 시작했다. 석방된 정치범들은 혁명투쟁에 가담했다.
거리에서는 집 다락방에 기관총을 걸고 자리 잡은 경관과 헌병을 상대로 한 총격전이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군대가 재빨리 노동자 편으로 넘어간 것이 차르 전제정치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다른 도시와 전선에 퍼지자, 노동자와 병사는 곳곳에서 차르의 관리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2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승리했다.
혁명이 승리한 것은 노동계급이 혁명의 선봉에 서서, 병사 외투를 입은 수백만 농민 대중의 운동 — “평화를 위해, 빵을 위해, 자유를 위해” 일어선 운동 — 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가 혁명의 성공을 가져왔다.
“혁명을 수행한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였다. 그는 영웅적 면모를 보였고 피를 흘렸으며, 근로 인민과 최빈곤층의 가장 광범한 대중을 자기 뒤로 이끌었다…” — 레닌은 혁명 첫날들에 이렇게 썼다(레닌, 제20권, 23~24쪽).
1905년의 제1차 혁명은 1917년 제2차 혁명의 신속한 승리를 준비했다.
“1905~1907년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치른 3년간의 위대한 계급 전투와 혁명적 에너지가 없었다면, 제2차 혁명이 그 첫 단계를 완수하는 면에서 이처럼 며칠 만에 이루어지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 레닌은 이렇게 지적했다(같은 책, 13쪽).
혁명 첫날부터 소비에트가 나타났다. 승리한 혁명은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에 의거했다. 봉기한 노동자와 병사가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만들었다. 1905년 혁명은 소비에트가 무장봉기의 기관인 동시에 새로운 혁명 권력의 싹임을 보여주었다. 소비에트 사상은 노동자 대중의 의식 속에 살아 있었고, 그들은 차르 체제를 무너뜨린 바로 이튿날 그것을 실현했다. 다만 1905년에는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만 만들어졌으나, 1917년 2월에는 볼셰비키의 발의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나타났다는 차이가 있었다.
볼셰비키가 거리에서 대중의 직접적 투쟁을 지도하고 있는 동안, 타협주의 정당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들은 소비에트의 대의원 자리를 장악하여 그 안에서 다수를 차지했다. 볼셰비키당 지도자 대다수가 감옥과 유형지에 있었던 사정도 부분적으로 이를 도왔다(레닌은 망명 중이었고, 스탈린과 스베르들로프는 시베리아 유형지에 있었다). 반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들은 페트로그라드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그 집행위원회의 수뇌부에는 타협주의 정당의 대표자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들이 앉게 되었다. 모스크바와 다른 여러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 및 그 밖의 몇몇 도시에서만 소비에트의 다수가 처음부터 볼셰비키에게 속해 있었다.
무장한 민중인 노동자와 병사는 소비에트에 자기 대표를 보내면서 소비에트를 민중 권력의 기관으로 여겼다. 그들은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혁명적 민중의 모든 요구를 실현할 것이며, 무엇보다 먼저 강화가 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었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의 지나친 신뢰는 그들에게 쓰라린 결과를 가져왔다.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는 전쟁의 종식도, 강화의 쟁취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혁명을 이용하려고 생각했다. 혁명과 민중의 혁명적 요구에 대해서는,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는 혁명이 이미 끝났으며 이제 과제는 혁명을 공고히 하고 부르주아지와 함께 「정상적」이고 입헌적인 존재의 궤도로 들어서는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사회혁명당원-멘셰비키 지도부는 전쟁 종식 문제와 강화 문제를 덮어 버리고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
1917년 2월 27일(3월 12일), 국가 두마의 자유주의파 대의원들은 사회혁명당원-멘셰비키 지도자들과 막후에서 합의한 끝에, 제4차 두마 의장이며 지주이자 군주주의자인 로쟌코를 수반으로 하는 국가 두마 임시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며칠 뒤 국가 두마 임시위원회와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사회혁명당원-멘셰비키 지도자들은 볼셰비키 몰래 러시아의 새 정부, 즉 리보프 공을 수반으로 하는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리보프는 2월 혁명 이전에 이미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자기 정부의 총리로 내정했던 인물이었다. 임시정부에는 카데트의 수장 밀류코프, 10월당원의 수장 구치코프 및 자본가 계급의 다른 저명한 대표자들이 들어갔고, 「민주주의」의 대표자로서 사회혁명당원 케렌스키가 들어갔다.
결국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사회혁명당원-멘셰비키 지도자들은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주었고,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서도 볼셰비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다수결로 사회혁명당원-멘셰비키 지도자들의 행동을 승인했다.
이렇게 하여 러시아에 새로운 국가 권력이 형성되었는데, 레닌이 말한 대로 이 권력은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화한 지주」의 대표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부와 나란히 또 하나의 권력, 즉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존재했다. 소비에트의 병사 대의원들은 주로 전쟁에 동원된 농민들이었다.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는 차르 권력에 맞선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 기관이었으며, 동시에 그들의 권력 기관, 노동계급과 농민의 독재 기관이었다.
이렇게 하여 두 권력, 두 독재, 즉 임시정부로 대표되는 부르주아지의 독재와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로 대표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가 독특하게 뒤엉키게 되었다.
이중 권력이 생겨난 것이다.
소비에트에서 처음에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이 다수를 차지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승리한 노동자와 농민이 부르주아지의 대표자들에게 자발적으로 권력을 넘겨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레닌은 정치에 눈뜨고 정치로 끌려든 수백만의 사람들이 정치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대부분 소규모 소유자, 농민, 얼마 전까지 농민이었던 노동자, 곧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러시아는 당시 유럽의 모든 큰 나라 가운데 가장 소부르주아적인 나라였다. 그리하여 이 나라에서 “거대한 소부르주아적 물결이 모든 것을 휩쓸어, 의식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수적으로만이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압도했다. 다시 말해 매우 넓은 노동자층을 정치에 대한 소부르주아적 견해에 감염시키고 사로잡았다”(레닌, 제20권, 115쪽).
이 소부르주아적 자연발생성의 물결이 소부르주아 정당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을 수면 위로 떠올렸다.
레닌은 또 다른 원인으로 전쟁 중 프롤레타리아트 구성의 변화, 그리고 혁명 초기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과 조직성의 부족을 지적했다. 전쟁 중에 프롤레타리아트 자체의 구성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정규 노동자의 약 40퍼센트가 군대로 동원되었다. 전쟁 기간에 기업에는 동원을 피하려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심리와 거리가 먼 많은 소소유자, 수공업자, 소상인이 들어왔다.
노동자 가운데 이러한 소부르주아적 층이 소부르주아 정치가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의 자양분이 되는 토양이었다.
그리하여 정치에 익숙하지 않은 광범한 인민 대중이 소부르주아적 자연발생성의 물결에 휩쓸리고 혁명의 첫 성과에 취하여, 혁명 첫 몇 달 동안 타협주의 정당들의 포로가 되었고, 부르주아지의 권력이 소비에트의 활동을 방해하지 않으리라고 순진하게 믿으면서 부르주아지에게 국가 권력을 양보하는 데 동의했던 것이다.
볼셰비키당 앞에는 대중 속에서 인내심 있는 설명 작업을 통해 임시정부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폭로하고,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의 배신을 까발리며, 임시정부를 소비에트 정부로 교체하지 않고서는 평화를 얻을 수 없음을 보여주어야 할 과업이 놓여 있었다.
볼셰비키당은 온 힘을 다해 이 작업에 착수했다.
당은 합법적인 출판 기관을 복구한다. 2월 혁명 후 5일 만에 페트로그라드에서 『프라우다』가 발행되기 시작하고, 그로부터 며칠 뒤 모스크바에서 『사회민주주의자』가 발행되기 시작한다. 당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원에 대한 신뢰에서 벗어나는 대중의 선두에 서기 시작한다. 당은 병사와 농민에게 노동계급과 공동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음을 인내심 있게 설명한다. 또 혁명이 더 발전하지 않고서는,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소비에트 정부로 교체하지 않고서는 농민이 평화도 토지도 얻지 못하리라고 설명한다.
간단한 결론.
제국주의 전쟁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발전의 불균등성 때문에, 주요 열강 사이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에, 그리고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을 통해 세계를 새로 분할하고 새로운 힘의 균형을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전쟁은 이처럼 파괴적인 성격을 띠지 않았을 것이며, 어쩌면 이토록 맹렬한 기세로 전개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이 노동계급의 대의를 배반하지 않았더라면, 전쟁에 반대하는 제2인터내셔널 대회들의 결정을 위반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과감히 나서서 노동계급을 자기네 제국주의 정부에 맞서, 전쟁 도발자들에 맞서 일으켜 세웠더라면 그러했을 것이다.
볼셰비키당은 사회주의와 인터내셔널리즘의 대의에 충실했고 자기네 제국주의 정부에 반대하는 내전을 조직한 유일한 프롤레타리아 정당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나머지 모든 정당은 지도 상층부를 통해 부르주아지와 결부되어 있었기에 제국주의의 포로가 되었고, 제국주의자들 편으로 넘어갔다.
전쟁은 자본주의 총체적 위기의 반영으로서 이 위기를 격화시키고 세계 자본주의를 약화시켰다. 러시아의 노동자들과 볼셰비키당은 자본주의의 약점을 성공적으로 이용하여 제국주의 전선을 돌파하고 차르를 전복하고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창설한 세계 최초의 세력이었다.
혁명의 첫 성공에 도취하고,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잘되리라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들의 장담에 안심한 소(小)부르주아지, 병사, 그리고 노동자의 광범한 대중은 임시정부를 신뢰하고 지지하게 된다.
볼셰비키당 앞에는 과제가 놓였다 — 첫 성공에 도취한 노동자와 병사 대중에게, 혁명의 완전한 승리까지는 아직 멀었다는 것, 권력이 부르주아 임시정부의 손에 있고 소비에트에서는 타협분자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 인민은 평화도 토지도 빵도 얻지 못한다는 것, 완전한 승리를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권력을 소비에트에 넘겨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