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역사 단기강좌 (1938년 초판)

인물이오시프 스탈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안드레이 즈다노프, 예멜리얀 야로슬랍스키, 표트르 포스펠로프, 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용어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역사 단기강좌,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

제8장 외국의 군사 간섭과 내전 시기의 볼셰비키당 (1918~1920년)

1. 외국의 군사 간섭의 시작. 내전의 첫 시기.

브레스트 강화의 체결과, 서부에서 전쟁이 아직 한창이던 때에 이루어진 일련의 혁명적·경제적 조치들의 결과로 소비에트 권력이 공고해진 것은 서구 제국주의자들, 특히 협상국 제국주의자들 사이에 극도의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협상국 제국주의자들은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강화 체결이 독일의 군사적 처지를 편하게 하고, 그만큼 전선에 있는 협상국 군대의 처지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면 모든 나라, 모든 전선에서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강해져 전쟁이라는 사업, 곧 제국주의자들의 사업이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마지막으로, 거대한 나라의 영토 위에 소비에트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곳에서 부르주아지의 권력이 전복된 뒤 이 권력이 거둔 성과가, 길어지는 전쟁에 깊은 불만을 품고 있으며 러시아인들을 본받아 총검을 두 주인과 압제자들에게 돌릴 수도 있는 서방의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전염성 있는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를 고려하여 협상국 정부들은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하고, 나라 안에 부르주아적 질서를 회복하며 독일인들과 맺은 강화 조약을 폐기하고 독일 및 오스트리아에 맞선 전선을 다시 세울 부르주아 정권을 세우기 위해 러시아에 대한 군사 간섭(개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협상국 제국주의자들은 소비에트 권력이 견고하지 못하다고 확신했고, 그 적들이 어느 정도 노력하면 소비에트 권력이 머지않아 무너지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의심치 않았기에, 이 더러운 일에 더욱 기꺼이 나섰다.

소비에트 권력의 성과와 그 공고화는 전복된 계급들인 지주와 자본가들, 패배한 정당들인 카데트,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원, 아나키스트, 온갖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백위군 장성들, 카자크 장교들 등의 대열에 한층 더 큰 불안을 가져왔다.

이 모든 적대 분자들은 10월 혁명이 승리한 첫날부터 소비에트 권력은 러시아에 토대가 없으며 멸망할 운명이고, 1~2주나 한 달 안에, 길어야 두세 달 안에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온 지붕 위에서 떠들어댔다. 그러나 소비에트 권력이 적들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계속 존재하며 굳건해졌으므로, 러시아 안의 소비에트 권력의 적들은 소비에트 권력이 자신들이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며, 이를 전복하려면 반혁명의 모든 세력이 진지하게 노력하고 맹렬히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반혁명 세력을 모으고 군사 간부들을 규합하며 무엇보다 카자크 및 쿨라크 지역에서 반란을 조직하는 광범위한 반혁명·반란 활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이미 1918년 전반기에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할 태세를 갖춘 두 개의 뚜렷한 세력, 곧 외국의 협상국 제국주의자들과 러시아 안의 반혁명이 형성되었다.

이 두 세력 중 어느 쪽도 독자적으로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하러 나설 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러시아의 반혁명에게는 소비에트 권력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는 데 필요한 약간의 군사 간부와, 주로 카자크 상층과 쿨라크층으로 이루어진 약간의 인적 자원이 있었다. 그러나 돈과 무기가 없었다. 반대로 외국 제국주의자들에게는 돈과 무기가 있었으나, 이 병력이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필요했을 뿐 아니라 소비에트 권력과의 싸움에는 충분히 믿을 만하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간섭에 충분한 병력을 “내줄” 수 없었다.

소비에트 권력과 싸우는 조건은 외국의 것과 국내의 것, 두 반소비에트 세력의 결합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결합은 1918년 전반기에 이루어졌다.

이렇게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외국의 군사 간섭이 이루어졌고, 이 간섭은 러시아 내부에 있던 소비에트 권력의 적들이 일으킨 반혁명 폭동의 지원을 받았다.

이렇게 휴식기가 끝나고 러시아에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이란 러시아 여러 민족의 노동자와 농민이 소비에트 권력의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에 맞서 벌인 전쟁이다.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은 선전포고도 없이 군사 간섭을 시작했다. 그 간섭은 러시아에 대한 전쟁이었고, 그것도 가장 나쁜 유형의 전쟁이었다. 이 "문명화된" 강도들은 몰래, 도둑처럼 접근하여 자기 군대를 러시아 영토에 상륙시켰다.

영국·프랑스군은 러시아 북부에 상륙하여 아르한겔스크와 무르만스크를 점령하고, 그곳의 백위군 폭동을 지원하고,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하고, 백위군의 "러시아 북부 정부"를 세웠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하여 연해주를 점령하고, 소비에트를 해산시켰으며, 뒤에 부르주아 질서를 되살린 백위군 폭도들을 지원했다.

북캅카스에서는 코르닐로프, 알렉세예프, 데니킨 장군이 영국·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아 백위군 "의용군"을 조직하고, 카자크 상층부의 폭동을 일으켜 소비에트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

돈 지방에서는 크라스노프와 마몬토프 장군이 독일 제국주의자들의 비밀 지원을 받아(독일인들은 러시아와 평화 조약이 있었으므로 이들을 공공연히 지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돈 카자크의 폭동을 일으키고, 돈 지방을 점령하고, 소비에트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

중부 볼가와 시베리아에서는 영국·프랑스의 음모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폭동이 일어났다. 포로로 이루어진 이 군단은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시베리아와 극동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가받았다. 그러나 이 군단은 도중에 사회혁명당원과 영국·프랑스인들에게 이용되어 소비에트 권력에 맞서는 폭동에 동원되었다. 군단의 폭동은 볼가와 시베리아의 쿨라크층, 그리고 보트킨스크 공장과 이제프스크 공장의 사회혁명당 성향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신호가 되었다. 볼가에는 사마라의 백위군·사회혁명당 정부가 세워졌다. 옴스크에는 시베리아 백위군 정부가 세워졌다.

독일은 영국·프랑스·일본·미국 블록의 이 간섭에 참가하지 않았고 참가할 수도 없었다. 우선 독일이 이 블록과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정에도,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평화 조약이 있었음에도, 빌헬름 황제의 독일 정부가 영국·프랑스·일본·미국의 간섭자들과 똑같이 소비에트 나라의 흉포한 적이라는 점을 볼셰비키 가운데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제로 독일 제국주의자들은 소비에트 나라를 고립시키고, 약화시키고, 파멸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다 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 라다와 맺은 "조약"에 따른 것이기는 하나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떼어 냈고, 백위군인 우크라이나 라다의 요청으로 우크라이나에 자국 군대를 들여보내 우크라이나 인민을 잔인하게 약탈하고 억압하기 시작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와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하게 금지했다. 그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자캅카지예를 떼어 내고,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의 요청으로 그곳에 독일군과 터키군을 들여보내 트빌리시와 바쿠에서 제멋대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비에트 권력에 맞선 돈 지방의 반란 장군 크라스노프를 온갖 방법으로 지원했는데, 은밀하게 무기와 식량을 대주었다.

이렇게 하여 소비에트 러시아는 주요 식량 지대, 원료 지대, 연료 지대에서 차단되었다.

이 시기 소비에트 러시아의 형편은 어려웠다. 빵이 부족했다. 고기가 부족했다. 굶주림이 노동자들을 괴롭혔다.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에게는 이틀에 빵 1/8푼트씩이 배급되었다. 빵을 전혀 배급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공장은 가동되지 않거나 거의 가동되지 않았다. 원료와 연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낙담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당도 낙담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헤아릴 수 없는 어려움과 그에 맞선 필사의 투쟁은, 노동계급 속에 얼마나 무진장한 에너지가 숨어 있는지, 볼셰비키당의 권위가 지닌 힘이 얼마나 크고 헤아릴 수 없는지를 보여주었다.

당은 나라를 군사 진영으로 선포하고, 나라의 경제생활과 문화·정치생활을 전시 체제로 개편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사회주의 조국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선포하고 인민에게 반격을 호소했다. 레닌은 “모든 것을 전선으로”라는 구호를 내놓았고, 수십만의 노동자와 농민이 지원병으로 붉은 군대에, 전선에 나갔다. 당원과 콤소몰 전체 구성원의 절반가량이 전선에 나갔다. 당은 외국 간섭군의 침입에 맞서, 또 혁명으로 타도된 착취계급의 반란에 맞서 인민을 조국 전쟁에 일으켜 세웠다. 레닌이 조직한 노동자·농민 국방회의는 전선에 인력, 식량, 피복, 무기를 공급하는 일을 지도했다. 지원병 원칙에서 의무 병역제로 옮겨 가자 수십만의 새 보충병이 붉은 군대에 들어왔고, 붉은 군대는 짧은 기간에 백만 대군이 되었다.

나라의 형편이 어렵고 붉은 군대가 아직 굳건해질 겨를이 없을 만큼 젊었는데도, 취해진 방위 조치의 결과로 이미 첫 성과가 나타났다. 크라스노프 장군은 점령을 확실하다고 여겼던 차리친에서 밀려나 돈 강 너머로 쫓겨났다. 데니킨 장군의 행동은 북캅카스의 작은 지역에 국한되었고, 코르닐로프 장군은 붉은 군대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체코슬로바키아군과 사회혁명당원·백위군 무리는 카잔, 심비르스크, 사마라에서 쫓겨나 우랄 쪽으로 밀려났다. 모스크바 주재 영국 사절단장 로카르트가 조직한 백위군 사빈코프의 야로슬라블 반란은 진압되었고, 로카르트는 체포되었다. 우리츠키 동지와 볼로다르스키 동지를 살해하고 레닌의 목숨을 노려 극악한 암살을 시도한 사회혁명당원들은, 볼셰비키에 대한 백색 테러의 대가로 적색 테러를 당했고 중부 러시아의 웬만큼 중요한 모든 거점에서 격파되었다.

적들과의 전투 속에서 젊은 붉은 군대는 단련되고 성장했다.

당시 붉은 군대에서 일하던 공산주의자 정치위원들은 군대를 강화하고, 군대를 정치적으로 교양하고, 군대의 전투력과 규율을 높이는 일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볼셰비키당은 붉은 군대의 이러한 성과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며 그 첫 성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은 더욱 심각한 새로운 전투가 앞에 놓여 있으며, 나라가 잃어버린 식량·원료·연료 지역을 되찾으려면 적과 오래 계속되는 심각한 전투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볼셰비키는 장기전을 위해 힘껏 준비하기 시작했으며, 모든 후방을 전선에 복무시키기로 결정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전시 공산주의를 도입했다. 소비에트 권력은 대공업 외에 중공업과 소공업까지 자신의 통제 아래 두어, 대중 소비품을 비축하고 이를 군대와 농촌에 공급하려 했다. 소비에트 권력은 곡물 거래의 독점제를 도입하여 곡물의 사적 거래를 금지하고, 농민의 모든 잉여 식량을 파악하여 곡물 비축을 늘리고 군대와 노동자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식량 징발제를 실시했다. 마지막으로 소비에트 권력은 모든 계급에 대한 일반 노동 의무제를 도입했다. 당은 부르주아지를 강제 육체노동에 동원하고 그렇게 해서 노동자들을 전선에 더 중요한 다른 일에 돌림으로써,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원칙을 실현했다.

나라를 방위하는 데 닥친 극도로 어려운 조건 때문에 취해졌고 임시적인 성격을 띤 이 모든 조치의 체계를 전시 공산주의라고 불렀다.

나라는 소비에트 권력의 국내외 적들과 오래 계속되는 심각한 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라는 1918년 말까지 군대의 규모를 세 배로 늘려야 했다. 이 군대에 공급할 보급 수단도 비축해야 했다.

레닌은 이 시기에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우리는 봄까지 100만 명의 군대를 가지기로 결정했는데, 이제 우리에게는 300만 명의 군대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가질 것이다.”

2. 독일의 군사적 패배. 독일의 혁명. 제3인터내셔널의 창립. 제8차 당대회.

소비에트 나라가 외국 간섭군에 맞서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고 있던 때에, 서방에서는 교전국들의 후방과 전선에서 결정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전쟁과 식량 위기의 틀 속에서 숨이 막히고 있었다. 영국, 프랑스, 북아메리카가 새로운 예비 병력을 계속 투입하고 있던 때에,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마지막 남은 빈약한 예비 병력마저 바닥나고 있었다. 극도로 지쳐 버린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머지않아 패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와 함께 독일과 오스트리아 안에서는 끝없고 파멸적인 전쟁에 반대하여, 또 민중을 기진맥진하게 하고 굶주림에 빠뜨린 이 나라들의 제국주의 정부에 반대하여 민중의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여기에는 10월 혁명이 끼친 거대한 혁명적 영향도 작용했고, 브레스트 강화 이전에 이미 전선에서 있었던 소비에트 병사들과 오스트리아·독일 병사들의 친선 교류도, 그 뒤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전쟁이 멈추고 강화가 체결된 것이 준 영향도 작용했다. 민중이 자기 나라의 제국주의 정부를 타도하여 증오스러운 전쟁을 끝낸 러시아의 본보기는 오스트리아·독일 노동자들에게 교훈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동부 전선에 있다가 브레스트 강화 뒤 서부 전선으로 옮겨 온 독일 병사들은 소비에트 병사들과 친선 교류를 한 이야기와, 소비에트 병사들이 어떻게 전쟁에서 벗어났는지에 관한 이야기로 그곳의 독일 군대를 와해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 군대는 같은 원인으로 이미 훨씬 전부터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정황의 결과로 독일 군대에서는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강해졌고 이전의 전투력은 사라졌으며, 독일군은 협상국 군대의 공세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독일 본국에서는 1918년 11월에 혁명이 터져 빌헬름과 그의 정부를 전복시켰다.

독일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협상국에 강화를 요청했다.

이리하여 일류 열강이던 독일은 단번에 이류 열강의 지위로 떨어졌다.

소비에트 권력의 처지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정황은 어느 정도 부정적인 의미가 있었다. 소비에트 권력에 반대하는 간섭을 조직한 협상국 국가들이 유럽과 아시아의 지배 세력이 되었고, 이들이 간섭을 강화하고 소비에트 국가를 봉쇄하여 소비에트 권력을 둘러싼 올가미를 더욱 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정황은 소비에트 국가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덜어 주는 훨씬 더 중대한 긍정적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소비에트 권력은 약탈적인 브레스트 강화를 폐기하고 배상금 지불을 중지하며, 에스토니아·라트비아·벨로루시·리투아니아·우크라이나·자캅카지예를 독일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해방하기 위한 군사적·정치적 공개 투쟁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둘째 —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 유럽의 중심부인 독일에 공화제와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유럽 나라들을 혁명화해야 했고 실제로 혁명화했으며, 이는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권력의 지위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독일의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부르주아 혁명이었고, 소비에트는 부르주아 의회의 순종적인 도구였다. 소비에트에서는 러시아 멘셰비키 같은 사회민주주의자, 곧 타협주의자들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바로 이 점이 독일 혁명의 약점을 설명해 준다. 그곳의 혁명이 얼마나 약했는지는, 독일 백위군이 R. 룩셈부르크와 K. 리프크네히트 같은 저명한 혁명가들을 죽이고도 처벌받지 않게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래도 그것은 혁명이었고, 빌헬름은 전복되었으며, 노동자들은 사슬에서 벗어났다. 이것만으로도 서방에서 혁명을 풀어놓지 않을 수 없었고 유럽 나라들에서 혁명의 고양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에서 혁명적 고양이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혁명 운동이 전개되었다. 헝가리에서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혁명의 물결을 바탕으로 유럽 각국의 공산당들이 전면에 나섰다.

공산당들을 제3인터내셔널, 곧 공산주의 인터내셔널로 통합할 현실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1919년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여러 나라 공산당 제1차 대회에서 레닌과 볼셰비키의 발의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창립되었다. 제국주의자들의 봉쇄와 박해 때문에 많은 대표들이 모스크바에 도착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제1차 대회에는 유럽과 아메리카의 주요 나라 대표들이 참석했다. 대회를 이끈 사람은 레닌이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관한 보고에서 레닌은 근로 대중에게 참된 민주주의인 소비에트 권력의 의의를 보여 주었다. 대회는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보내는 선언을 채택하여,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해, 모든 나라에서 소비에트가 승리하도록 결연히 투쟁할 것을 호소했다.

대회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ИККИ), 곧 제3차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집행 기관을 구성했다.

이리하여 새로운 유형의 국제적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조직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곧 마르크스-레닌주의 인터내셔널이 창설되었다.

1919년 3월, 모순된 상황 속에서 —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권력에 반대하는 협상국의 반동 블록이 강화되는 조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주로 군사적 패배를 당한 나라들에서 혁명이 고양되어 소비에트 국가의 처지가 크게 수월해진 조건에서 — 우리 당의 제8차 당대회가 열렸다.

대회에는 당원 313,766명을 대표하는 결정권 대의원 301명이 참석했다. 발언권만 가진 대의원은 102명이었다.

레닌은 대회를 열면서 첫마디를 대회 개회 전날 사망한 볼셰비키당 최고의 조직가 중 한 사람인 야. 므. 스베르들로프를 추모하는 데 바쳤다.

대회에서는 당의 새 강령이 채택되었다. 강령은 자본주의와 그 최고 단계인 제국주의를 설명한다. 강령은 두 가지 국가 체제, 곧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와 소비에트 체제를 비교한다. 강령에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당이 맡을 구체적 과업이 상세히 제시되어 있다. 즉 부르주아지의 수용을 끝까지 완수할 것, 국가 경제를 단일한 사회주의 계획에 따라 운영할 것, 노동조합이 국민경제 조직에 참여할 것, 사회주의적 노동 규율을 세울 것, 소비에트 기관의 통제 아래 전문가를 국민경제에 활용할 것, 중농을 사회주의 건설 사업에 점진적이고 계획적으로 끌어들일 것 등이다.

대회는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 규정하는 것과 함께, 이미 제2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옛 강령에 있던 산업 자본주의와 단순 상품 경제에 관한 서술도 강령에 포함시키자는 레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레닌은 강령에서 우리 경제의 복잡성을 고려하고, 나라 안에 여러 경제 구성이 있으며 그중에는 중농이 담당자인 소상품 경제도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강령을 토의할 때 레닌은 자본주의에 관한 항목, 소상품 생산에 관한 항목, 중농의 경제에 관한 항목을 강령에서 빼자고 제안한 부하린의 반볼셰비키적 견해에 단호히 맞섰다. 부하린의 견해는 소비에트 건설에서 중농의 역할을 부정하는 멘셰비키적·트로츠키주의적 견해였다. 아울러 부하린은 소상품 농민 경제에서 쿨라크 분자가 생겨나 성장한다는 사실을 얼버무렸다.

레닌은 민족 문제에 관한 부하린과 퍄타코프의 반볼셰비키적 견해에도 반격을 가했다. 그들은 민족자결권에 관한 항목을 강령에 넣는 것에 반대하고 민족 평등에도 반대했는데, 이 구호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를 방해하고 여러 민족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방해한다는 구실을 내세웠다. 레닌은 부하린과 퍄타코프의 이 극히 해로운 대국주의적·쇼비니즘적 견해를 논파했다.

당 제8차 대회의 작업에서 중농에 대한 태도 문제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토지에 관한 그 유명한 법령의 결과로 농촌은 점차 중농 중심이 되었다. 이제 중농은 농민 인구의 다수를 이루었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동요하던 중농층의 정서와 행동은 내전과 사회주의 건설의 운명에 막대한 의의를 지녔다. 내전의 향방은 중농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중 어느 계급이 중농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에 크게 달려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군, 백위군, 쿨라크, 사회혁명당원, 멘셰비키가 1918년 여름 볼가 연안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농층의 상당 부분이 그들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중부 러시아에서 쿨라크가 조직한 반란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18년 가을부터 중농 대중의 정서에는 소비에트 권력 쪽으로의 전환이 일어났다. 농민은 백위군의 승리가 지주 권력의 복원, 농민으로부터의 토지 몰수, 약탈, 매질과 농민에 대한 학대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쿨라크를 분쇄한 빈농위원회의 활동도 농민의 정서 변화에 기여했다. 이와 관련하여 1918년 11월 레닌은 다음과 같은 구호를 내놓았다.

“중농과 합의에 도달할 줄 알아야 한다. 단, 쿨라크와의 투쟁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오직 빈농층에 굳건히 의거해야 한다” (레닌, 제23권, 294쪽).

물론 중농층의 동요가 완전히 그친 것은 아니었지만, 중농층은 소비에트 권력에 더 가까워졌고 소비에트 권력을 더 확고히 지지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당 제8차 대회가 정한 중농층에 대한 정책이 크게 기여했다.

제8차 대회는 중농층에 대한 당 정책의 전환점이 되었다. 레닌의 보고와 대회의 결정은 이 문제에서 당의 새로운 노선을 규정했다. 대회는 당 조직과 모든 공산주의자가 중농층을 쿨라크와 엄격히 구별하고 분리하며, 중농의 필요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 중농층을 노동계급 편으로 끌어들이도록 요구했다. 중농의 후진성은 설득으로 극복해야 했으며, 결코 강제와 폭력의 수단으로 극복해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대회는 농촌에서 사회주의적 조치(코뮨, 농업 아르쩰의 창설)를 강제 없이 수행하도록 지시했다. 중농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모든 경우에 중농과 실질적 합의에 이르러야 했고, 사회주의적 개조를 수행하는 방식을 정할 때 중농에게 양보해야 했다. 대회는 이 동맹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적 역할을 유지하면서 중농과의 확고한 동맹 정책을 수행하도록 제안했다.

제8차 대회에서 레닌이 선포한 중농층에 대한 새 정책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빈농층에 의거하고, 중농과 확고한 동맹을 유지하며, 쿨라크와 투쟁할 것을 요구했다. 제8차 대회 이전에 당은 대체로 중농을 중립화하는 정책을 수행했다. 이는 당이 중농이 쿨라크 편, 나아가 부르주아지 편에 서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제8차 대회는 중농을 중립화하는 정책에서 벗어나, 백위군 및 외국의 간섭에 맞선 투쟁과 사회주의 건설의 성공을 위해 중농과 확고한 동맹을 맺는 정책으로 넘어갔다.

제8차 당대회가 농민층의 기본 대중인 중농에 대해 취한 노선은 외국 간섭군과 그 백위군 앞잡이들에 맞선 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19년 가을, 소비에트 권력과 데니킨 중에서 선택해야 했을 때 농민층은 소비에트를 지지했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가장 위험한 적을 물리쳤다.

당대회에서는 적군(赤軍) 건설 문제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대회에서는 이른바 「군사 반대파」가 발언했다. 이 반대파는 옛 「좌파 공산주의자」를 적지 않게 규합하고 있었다. 그러나 분쇄된 「좌파 공산주의」의 대표자들 외에도 「군사 반대파」에는 어떤 반대파에도 참여한 적이 없지만 군대에서의 트로츠키의 지도에 불만을 품은 일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군 대표자 대다수는 트로츠키에 대해, 곧 옛 차르 군대 출신 군사 전문가들에 대한 그의 추종 — 그 전문가들 중 일부는 내전 중에 우리를 노골적으로 배신했다 — 과, 군대 내 옛 볼셰비키 간부들에 대한 그의 오만하고 적대적인 태도에 대해 극렬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대회에서는 이른바 「실제 사례」들이 제시되었는데, 트로츠키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책임 있는 군 공산주의자인 전선 일꾼 여러 명을 총살하려 시도하여 적에게 이로운 짓을 했으며, 중앙위원회의 개입과 군 일꾼들의 항의만이 이 동지들이 죽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군사 반대파」는 당의 군사 정책에 대한 트로츠키의 왜곡에 맞서 싸웠으나, 군사 건설의 여러 문제에서는 잘못된 견해를 옹호했다. 레닌과 스탈린은 군대 내 빨치산주의의 잔재를 옹호하고, 정규 적군의 창설과 군사 전문가의 활용과 군대가 진정한 군대이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철의 규율에 반대한 「군사 반대파」에 맞서 단호히 발언했다. 스탈린 동지는 「군사 반대파」에 반박하면서 엄격한 규율의 정신으로 충만한 정규군의 창설을 요구했다.

“우리가 진정한 노동자·농민의, 주로 농민의, 엄격히 규율된 군대를 창설하여 공화국을 지키든가, 아니면 망하든가 둘 중 하나이다.”라고 스탈린 동지는 말했다.

대회는 「군사 반대파」의 여러 제안을 물리치는 동시에, 중앙 군사 기관들의 업무 개선과 군대 내 공산주의자들의 역할 강화를 요구하여 트로츠키에게 타격을 주었다.

대회에서 선출된 군사 위원회의 작업 결과, 군사 문제에 관한 대회의 만장일치 결정이 이루어졌다.

군사 문제에 관한 대회의 결정은 적군을 강화하고 적군을 당과 더욱 긴밀히 결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회에서는 다음으로 당과 소비에트의 건설, 소비에트 업무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에 관한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대회는 소비에트 업무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을 부정한 사프로노프—오신스키의 기회주의 그룹을 물리쳤다.

끝으로, 새 당원이 막대하게 밀려든 것과 관련하여 대회는 당의 사회적 구성을 개선하고 재등록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당 대열 첫 숙청의 시작이었다.

3. 간섭의 강화. 소비에트 국가의 봉쇄. 콜차크의 진격과 그의 분쇄. 데니킨의 진격과 그의 분쇄. 3개월간의 휴식. 제9차 당대회.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협상국은 소비에트 국가에 대규모 군사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독일이 패배하고 독일군이 우크라이나와 자캅카지예에서 물러난 뒤, 영국·프랑스군이 함대를 흑해에 투입하고 오데사와 자캅카지예에 군대를 상륙시켜 독일의 자리를 차지했다. 점령 지역에서 협상국 간섭군이 저지른 횡포는 노동자와 농민의 집단 전체를 무력으로 학살하는 데까지 이를 만큼 잔혹했다. 끝내 투르케스탄을 점령한 뒤에는 그 방자함이 극에 달해, 바쿠의 지도적 볼셰비키 26명—샤우먄, 피올레토프, 자파리제, 말리긴, 아지즈베코프, 코르가노프 동지 등—을 자카스피 지방으로 끌고 가 사회혁명당원들의 도움을 받아 잔혹하게 총살했다.

얼마 뒤 간섭군은 러시아에 대한 봉쇄를 선포했다. 외부 세계로 통하는 모든 해상 교통로와 그 밖의 교통로가 차단되었다.

이리하여 소비에트 국가는 거의 사방에서 포위되었다.

당시 협상국이 가장 큰 기대를 건 인물은 시베리아 옴스크에 있던 협상국의 앞잡이 콜차크 제독이었다. 그는 “러시아의 최고 통치자”로 선포되었다. 러시아의 모든 반혁명 세력이 그에게 복종했다.

이리하여 동부 전선이 주요 전선이 되었다.

1919년 봄 콜차크는 거대한 군대를 모아 거의 볼가 강까지 진출했다. 콜차크에 맞서 볼셰비키의 최정예 병력이 투입되었고 콤소몰원과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1919년 4월 붉은 군대는 콜차크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곧 콜차크 군대는 전 전선에 걸쳐 후퇴하기 시작했다.

동부 전선에서 붉은 군대의 공세가 한창일 때, 트로츠키는 수상쩍은 계획을 내놓았다. 우랄 앞에서 멈추어 콜차크 군 추격을 중단하고, 동부 전선의 군대를 남부 전선으로 돌리자는 것이었다. 당 중앙위원회는 우랄과 시베리아를 콜차크의 손에 남겨 두면 그가 일본인과 영국인의 도움으로 재기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 계획을 거부하고 공세를 계속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트로츠키는 이 지령에 동의하지 않아 사표를 냈다. 중앙위원회는 트로츠키의 사표를 반려하는 한편, 그에게 동부 전선 작전 지도에서 즉시 손을 떼라고 명령했다. 콜차크에 대한 붉은 군대의 공세는 새로운 힘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붉은 군대는 콜차크에게 잇따라 새로운 타격을 입히고 우랄과 시베리아를 백위군에게서 해방시켰으며, 이곳에서는 백위군 후방에서 일어난 강력한 빨치산 운동이 붉은 군대를 지원했다.

1919년 여름 제국주의자들은 북서부(발트 연안, 페트로그라드 부근)에서 반혁명 세력의 우두머리로 있던 유데니치 장군에게, 페트로그라드를 공격하여 붉은 군대의 주의를 동부 전선에서 돌려놓으라는 임무를 맡겼다. 페트로그라드 부근 두 요새의 수비대는 전직 장교들의 반혁명 선동에 넘어가 소비에트 권력에 반기를 들었고, 전선 사령부에서도 반혁명 음모가 적발되었다. 적은 페트로그라드를 위협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권력이 취한 조치와 노동자·수병의 지원으로 반란을 일으킨 요새들은 백위군에게서 해방되었고, 유데니치 군대는 패배하여 유데니치는 에스토니아로 쫓겨났다.

페트로그라드 부근에서 유데니치가 패배하자 콜차크와의 투쟁이 수월해졌다. 1919년 말에 이르러 콜차크 군대는 완전히 궤멸되었다. 콜차크 자신은 체포되어 이르쿠츠크에서 혁명위원회의 판결에 따라 총살되었다.

이리하여 콜차크는 끝장이 났다.

시베리아 민중은 콜차크를 두고 이런 노래를 불렀다.

“영국제 군복,

프랑스제 견장,

일본제 담배,

옴스크 통치자. 군복은 해지고, 견장은 떨어지고, 담배는 다 타고, 통치자는 내뺐다.”

콜차크가 자기에게 걸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을 보고, 간섭자들은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공격 계획을 바꾸었다. 오데사에 상륙한 부대는 도로 철수시켜야 했다. 간섭군이 소비에트 공화국의 군대와 접촉하면서 혁명 정신에 물들어 자기들의 제국주의 주인들에 맞서 봉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데사에서는 앙드레 마르티의 지도 아래 프랑스 수병들이 봉기했다. 이 때문에 이제 콜차크가 격파된 뒤 협상국은 주된 관심을 코르닐로프의 동지이자 「의용군」의 조직자인 데니킨 장군에게 돌렸다. 데니킨은 이 시기에 남부 쿠반 지역에서 소비에트 권력에 맞서 활동하고 있었다. 협상국은 그의 군대에 막대한 양의 무기와 장비를 공급하고 북쪽으로, 소비에트 권력을 향해 진격시켰다.

이리하여 이번에는 남부 전선이 주된 전선이 되었다.

데니킨은 1919년 여름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주된 원정을 시작했다. 트로츠키는 남부 전선의 사업을 망쳐 놓았고, 우리 군대는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다. 10월 중순까지 백위군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장악하고 오룔을 점령했으며, 우리 군대에 탄약과 소총, 기관총을 공급하던 툴라에 접근하고 있었다. 백위군은 모스크바로 다가가고 있었다. 소비에트 공화국의 형편은 심각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만큼 되어 갔다. 당은 경종을 울리고 인민에게 격퇴에 나서라고 호소했다. 레닌은 “모두 데니킨과의 투쟁에 나서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볼셰비키에게 고무된 노동자와 농민은 적을 격파하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였다.

데니킨을 격파하는 일을 조직하기 위해 중앙위원회는 스탈린 동지, 보로실로프, 오르조니키제, 부됸니를 남부 전선에 파견했다. 트로츠키는 남부에서의 붉은군대 작전 지휘에서 해임되었다. 스탈린 동지가 도착하기 전에 남부 전선 사령부는 트로츠키와 함께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에 따르면 주된 타격은 차리친에서 노보로시스크 방향으로 돈 강 유역의 초원을 거쳐 데니킨에게 가해져야 했는데, 붉은군대는 그 길에서 길이라곤 전혀 없는 곳을 만나게 되고 카자크 주민이 사는 지역을 지나야 했으며, 그 주민의 상당 부분은 당시 백위군의 영향 아래 있었다. 스탈린 동지는 이 계획을 혹독하게 비판하고, 데니킨을 격파할 자신의 계획을 중앙위원회에 제안했다. 주된 타격을 하리코프 — 돈바스 — 로스토프 방향으로 가하자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우리 군대가 진격하는 길에 있는 노동자·농민 지역 주민들의 뚜렷한 동정 덕분에 데니킨에 대한 우리 군대의 신속한 진격을 보장했다. 또한 이 지역에는 철도망이 잘 갖추어져 있어 우리 군대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정기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끝으로 이 계획은 돈바스를 해방하고 우리 나라에 연료를 보장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당 중앙위원회는 스탈린 동지의 계획을 채택했다. 1919년 10월 하순에 격렬한 저항 끝에 데니킨은 오룔 부근과 보로네주 부근의 결정적 전투에서 붉은군대에게 격파되었다. 데니킨은 빠르게 후퇴하기 시작했고, 이어 우리 군대에 추격당하며 남쪽으로 굴러떨어졌다. 1920년 초에 우크라이나 전역과 북캅카스가 백위군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남부 전선에서 결정적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제국주의자들은 다시 유데니치 군단을 페트로그라드로 투입하여, 우리 병력을 남부에서 끌어내고 데니킨 군대의 처지를 수월하게 하려 했다. 백위군은 도시 코앞까지, 페트로그라드까지 다가왔다. 페트로그라드의 영웅적인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의 첫 도시를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맞서 일어섰다. 공산주의자들은 언제나처럼 맨 앞에 서 있었다. 격렬한 전투 끝에 백위군은 격파되어 다시 우리 나라 국경 밖 에스토니아로 쫓겨 갔다.

이리하여 데니킨도 끝장났다.

콜차크와 데니킨이 격파된 뒤 짧은 휴식기가 찾아왔다.

제국주의자들은 백위군 부대가 격파되고 간섭이 실패로 돌아가며 소비에트 권력이 전국에서 공고해지고, 서유럽에서는 간섭자들이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해 벌이는 전쟁에 노동자들의 분노가 커지는 것을 보자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1920년 1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봉쇄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간섭의 장벽에 뚫린 매우 중대한 구멍이었다.

물론 이것이 소비에트 국가가 이미 간섭과 내전을 끝냈다는 뜻은 아니었다. 제국주의 폴란드의 공격 위험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극동, 자캅카지예, 크림에서도 간섭자들이 아직 완전히 쫓겨나지 않았다. 그러나 소비에트 국가는 일시적인 휴식을 얻어 더 많은 힘을 경제 건설에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당은 경제 문제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내전 중에 공장이 문을 닫아 많은 숙련 노동자가 생산 현장을 떠났다. 당은 이제 숙련 노동자들을 전문 분야의 일을 하도록 생산 현장으로 되돌렸다. 공산주의자 수천 명이 사정이 어려웠던 수송 복구에 파견되었다. 수송을 복구하지 않고서는 공업의 기본 부문 복구에 진지하게 착수할 수 없었다. 식량 사업이 강화되고 개선되었다. 러시아 전기화 계획의 작성이 시작되었다. 군사적 위험 때문에 아직 해산할 수 없는 적군 병사가 500만 명에 이르렀다. 그래서 적군의 일부 부대는 경제 건설에 쓰도록 노동군으로 전환되었다. 노동자·농민 방위 소비에트는 노동·방위 소비에트(СТО)로 개편되었다. 이를 돕기 위해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가 창설되었다.

이러한 정세에서 1920년 3월 말 제9차 당대회가 열렸다.

대회에는 당원 611,978명을 대표하는 결정권 대의원 554명이 참석했다. 협의권 대의원은 162명이었다.

대회는 수송과 공업 분야에서 국가의 당면 경제 과제를 규정하고, 경제 건설에 노동조합이 참여할 필요가 있음을 특히 지적했다.

대회는 통일 경제 계획 문제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 계획은 무엇보다 수송, 연료 부문, 야금을 끌어올리는 것을 내다보았다. 이 계획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한 것은 전체 국민경제의 전기화 문제였으며, 레닌은 이를 “10~20년에 걸친 위대한 프로그램”으로 내세웠다. 이를 기초로 나중에 유명한 고엘로 계획이 작성되었는데, 이 계획은 오늘날 이미 훨씬 초과 달성되었다.

대회는 공업에서의 1인 지도와 책임자의 개인 책임에 반대하고, 공업 지도에서 한없는 “합의제”와 무책임을 옹호한 반당 그룹 「민주중앙집권파」를 물리쳤다. 이 반당 그룹에서 주된 역할을 한 것은 사프로노프, 오신스키, 브. 스미르노프였다. 대회에서 그들을 지지한 것은 리코프, 톰스키였다.

4. 폴란드 귀족 지주들의 소비에트 국가 공격. 브란겔 장군의 도발. 폴란드 계획의 실패. 브란겔의 격파. 간섭의 종식.

콜차크와 데니킨이 격파되었는데도, 소비에트 국가가 백위군과 간섭군으로부터 북방 지방, 투르케스탄, 시베리아, 돈, 우크라이나 등을 해방하며 영토를 점점 더 넓혀 갔는데도, 협상국이 러시아에 대한 봉쇄를 철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도, 협상국들은 소비에트 정권이 무너뜨릴 수 없는 것으로, 승리자로 드러났다는 사실과 끝내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간섭을 한 번 더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이번에 간섭자들은 한편으로는 폴란드 국가의 실질적 우두머리인 부르주아 반혁명 민족주의자 피우수트스키를, 다른 한편으로는 크림에 데니킨 군대의 잔당을 모아 놓고 거기서 돈바스와 우크라이나를 위협하던 브란겔 장군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레닌의 표현대로, 지주(地主)의 폴란드와 브란겔은 소비에트 국가를 목 졸라 죽이려 한 국제 제국주의의 두 손이었다.

폴란드인들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우안(右岸) 지역을 점령하고, 소비에트 벨로루시를 점령하고, 이 지역들에 폴란드 귀족(지주)들의 권력을 되살리고, 폴란드 국가의 경계를 “바다에서 바다까지”, 단치히에서 오데사까지 넓히며, 브란겔이 자기들에게 준 원조의 대가로 브란겔이 붉은 군대를 격파하고 소비에트 러시아에 지주와 자본가의 권력을 되살리도록 돕는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협상국들의 승인을 받았다.

평화를 지키고 전쟁을 막기 위해 폴란드와 교섭을 시작하려던 소비에트 정부의 시도는 아무 결과도 거두지 못했다. 피우수트스키는 평화를 논의하려 하지 않았다. 피우수트스키는 싸우고 싶어 했다. 그는 콜차크 및 데니킨과 싸우느라 지친 붉은 군대가 폴란드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리라고 계산했다.

짧은 휴식은 끝났다.

1920년 4월 폴란드군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영내로 쳐들어와 키예프를 점령했다. 같은 때 브란겔은 공격으로 넘어가 돈바스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폴란드군의 공격에 대응하여 붉은 군대는 전선 전체에서 반격에 나섰다. 키예프를 해방하고 폴란드 지주들을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에서 몰아낸 뒤, 남부 전선의 붉은 군대는 공격의 기세를 타고 갈리치아의 리보프 문턱까지 이르렀고, 서부 전선의 군대는 바르샤바에 다가가고 있었다. 사태는 폴란드 지주들의 군대가 완전히 패배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붉은 군대 총사령부에서 트로츠키와 그 지지자들이 벌인 수상한 행동이 붉은 군대의 성과를 깨뜨렸다. 서부 전선에서 바르샤바 방면으로 향한 붉은 군대의 공세는 트로츠키와 투하쳅스키의 잘못으로 전혀 조직되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군대는 점령한 진지를 굳힐 틈을 얻지 못했고, 선두 부대는 너무 멀리 앞으로 끌려 나갔으며, 예비대와 탄약은 너무 멀리 후방에 남겨졌다. 그리하여 선두 부대는 탄약도 예비대도 없이 남겨졌고, 전선은 한없이 길어졌으며, 따라서 전선을 돌파하기가 쉬워졌다. 이 모든 탓에 소규모 폴란드군이 우리 서부 전선의 한 지점을 돌파하자, 탄약이 없던 우리 군대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리보프 어귀에 이르러 그곳에서 폴란드군을 압박하던 남부 전선의 군대에 대해서는, “혁명군사위원회 의장” 트로츠키가 리보프를 점령하지 못하게 금지하고, 기병군 곧 남부 전선의 주력을 서부 전선을 돕는다는 구실로 멀리 북동쪽으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리보프를 점령하는 것이야말로 서부 전선에 줄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하고 가장 좋은 도움임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남부 전선에서 기병군을 빼내어 리보프에서 물러나게 한 것은 사실상 남부 전선에서도 우리 군대가 후퇴함을 뜻했다. 이리하여 트로츠키의 파괴 명령으로 남부 전선의 군대에는 이해할 수 없고 아무 근거도 없는 후퇴가 강요되었으며, 이는 폴란드 귀족들을 기쁘게 했다.

이것은 직접적인 도움이었으나, 우리 서부 전선에 대한 도움이 아니라 폴란드 귀족들과 협상국에 대한 도움이었다.

며칠 뒤 폴란드군의 공세는 저지되었고, 우리 군대는 폴란드군에 대한 새로운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전쟁을 계속할 힘이 없는 데다 붉은 군대의 반격을 불안하게 기다리던 끝에, 드니프로강 우안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를 차지하려던 요구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러시아와 강화하는 쪽을 택했다. 1920년 10월 20일 폴란드와 리가에서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 조약에 따라 폴란드는 갈리치아와 벨로루시 일부를 차지했다.

폴란드와 강화를 맺은 뒤 소비에트 공화국은 브란겔을 끝장내기로 결정했다. 브란겔은 영국인과 프랑스인에게서 최신 무기, 장갑차, 탱크, 비행기, 군수품을 받았다. 그에게는 주로 장교로 이루어진 백위군 돌격 부대가 있었다. 그러나 브란겔은 쿠반과 돈에 상륙시킨 부대 둘레에 농민과 카자크의 상당한 병력을 모으지 못했다. 그래도 브란겔은 돈바스에 바싹 다가와 우리 석탄 지대를 위협했다. 소비에트 권력의 처지는 이 무렵 붉은 군대가 크게 지쳐 있었다는 점 때문에 더욱 어려워졌다. 붉은 군대 병사들은 브란겔군을 향해 공세를 펴면서 동시에 브란겔을 돕던 아나키스트-마흐노 일당을 쳐부수며 전례 없이 어려운 조건에서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브란겔 쪽에 기술상의 우위가 있었는데도, 붉은 군대에 탱크가 없었는데도, 붉은 군대는 브란겔을 크림 반도로 몰아넣었다. 1920년 11월 붉은 군대는 페레코프의 견고한 진지를 점령하고 크림으로 돌입하여 브란겔군을 격파하고 크림을 백위군과 간섭군으로부터 해방했다. 크림은 소비에트 땅이 되었다.

폴란드의 대국주의적 계획이 무너지고 브란겔이 격파됨으로써 간섭 시기는 끝난다.

1920년 말 자캅카지예를 아제르바이잔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인 무사바트당원, 그루지야의 민족주의 멘셰비키, 아르메니아의 다슈나크당원의 멍에에서 해방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소비에트 권력은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에서 승리했다.

이것은 아직 간섭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극동에서 일본의 간섭은 1922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밖에도 간섭을 조직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동방의 세묘노프 아타만과 웅게른 남작, 1921년 카렐리야에서의 백색 핀란드 간섭). 그러나 소비에트 국가의 주요 적들, 간섭의 기본 병력은 1920년 말까지 격파되었다.

외국 간섭자들과 러시아 백위군이 소비에트에 대항해 벌인 전쟁은 소비에트의 승리로 끝났다.

소비에트 공화국은 국가적 독립과 자유로운 존립을 지켜냈다.

이것은 외국의 군사 간섭과 내전의 종결이었다.

이것은 소비에트 권력의 역사적 승리였다.

5. 소비에트 국가는 어떻게, 그리고 왜 영국·프랑스·일본·폴란드 간섭군의 연합 세력과 러시아의 부르주아·지주·백위군 반혁명 세력을 이겼는가?

간섭 시기 유럽과 미국의 유력 언론을 살펴보면,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저명한 저술가 가운데 누구도, 군사 전문가 가운데 누구도 소비에트 권력의 승리를 믿지 않았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모든 나라와 민족의 저명한 저술가, 군사 전문가, 혁명사가, 이른바 학자라는 자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소비에트 권력의 날은 이미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남았고 소비에트 권력의 패배는 불가피하다고 외쳤다.

그들이 간섭의 승리를 확신한 것은, 소비에트 국가에는 아직 편성된 붉은 군대가 없어서 말하자면 싸우면서 그 군대를 만들어야 하는 반면, 간섭자들과 백위군은 어느 정도 준비된 군대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붉은 군대에는 경험 있는 군사 간부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한 간부의 대부분이 반혁명 쪽으로 넘어갔고, 간섭자들과 백위군은 그러한 간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러시아 군수 공업이 낙후되어 붉은 군대가 무기와 탄약의 부족과 품질 불량에 시달리는데도, 봉쇄 때문에 러시아는 사방이 막혀 있어서 다른 나라에서 무기를 들여올 수 없다고 보았다. 반면 간섭자들과 백위군의 군대는 일류 무기, 탄약, 피복을 풍족하게 공급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공급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끝으로, 간섭자들과 백위군의 군대는 당시 러시아에서 식량이 가장 풍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붉은 군대는 그러한 지역이 없어 식량 부족에 시달린다고 보았다.

그리고 실제로 이 모든 결점과 부족은 붉은 군대의 부대들에 있었다.

이 점에서—그러나 오직 이 점에서만—간섭자 나리들은 전적으로 옳았다.

그렇다면 그토록 심각한 결점을 가진 붉은 군대가, 그런 결점이 없는 간섭자들과 백위군의 군대를 이긴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1. 붉은 군대가 승리한 것은, 붉은 군대가 그 이름으로 싸운 소비에트 권력의 정책이 인민의 이익에 부합하는 올바른 정책이었고, 인민이 이 정책을 올바른 것으로, 자신의 정책으로 의식하고 이해하여 끝까지 지지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는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그릇된 정책을 위해 싸우는 군대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간섭군과 백위군이 바로 그러한 군대였다. 간섭군과 백위군에게는 모든 것이 있었다. 경험 많은 옛 지휘관도, 최고급 무기도, 탄약도, 군복도, 식량도 있었다. 하나가 부족했다. 그것은 러시아 여러 민족의 지지와 동조였다. 러시아의 여러 민족은 간섭군과 백위군 “통치자들”의 반민중적 정책을 지지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지지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간섭군과 백위군은 패배했다.

2. 붉은 군대가 승리한 것은, 붉은 군대가 끝까지 자기 민중에게 충실하고 헌신했으며, 그 때문에 민중이 붉은 군대를 자기의 친혈육 같은 군대로서 사랑하고 지지했기 때문이다. 붉은 군대는 민중의 자식이다. 붉은 군대가 어머니에게 충실한 아들처럼 자기 민중에게 충실하다면 민중의 지지를 받을 것이며, 반드시 승리하게 마련이다. 반면 자기 민중에 맞서 나아가는 군대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

3. 붉은 군대가 승리한 것은, 소비에트 권력이 모든 후방, 온 나라를 전선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일으켜 세우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전선을 온갖 방법으로 지원하는 튼튼한 후방이 없는 군대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 볼셰비키는 이 점을 알고 있었고, 바로 그래서 나라를 무기, 탄약, 군복, 식량, 보충병력을 전선에 공급하는 군영으로 만들었다.

4. 붉은 군대가 승리한 것은: 가) 붉은 군대 병사들이 전쟁의 목적과 임무를 이해하고 그 정당성을 자각했기 때문이며, 나) 전쟁의 목적과 임무가 정당하다는 자각이 그들의 규율 정신과 전투력을 강화했기 때문이며, 다) 그 때문에 붉은 군대 대중이 적과 싸우면서 흔히 유례없는 헌신성과 전례 없는 대중적 영웅주의를 보였기 때문이다.

5. 붉은 군대가 승리한 것은, 붉은 군대의 후방과 전선의 지도적 핵심이 볼셰비키당이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당은 단결과 규율에서 하나였고, 혁명 정신과 공동의 대의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치를 각오로 강했으며, 수백만 대중을 조직하고 복잡한 정세 속에서 그들을 올바르게 지도하는 능력에서 비할 데가 없었다.

“오직 당이 경계를 늦추지 않았기 때문에, 당이 가장 엄격하게 규율을 지켰기 때문에, 그리고 당의 권위가 모든 부처와 기관을 하나로 묶었기 때문에, 중앙위원회가 내린 구호에 따라 수십 명, 수백 명, 수천 명이, 그리고 마침내 수백만 명이 한 사람처럼 나섰기 때문에, 또 전대미문의 희생이 치러졌기 때문에—오직 그렇기 때문에 일어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다. 오직 그렇기 때문에 협상국 제국주의자들과 전 세계 제국주의자들이 두 차례, 세 차례, 네 차례 쳐들어왔는데도 우리는 승리할 수 있었다”(레닌, 제25권, 96쪽).

6. 붉은 군대가 승리한 것은 가) 자기 대열 안에서 프룬제, 보로실로프, 부됸니 같은 새로운 유형의 군사 지도자를 길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며, 나) 그 대열에서 코톱스키, 차파예프, 라조, 쇼르스, 파르호멘코를 비롯한 수많은 타고난 영웅들이 싸웠기 때문이며, 다) 레닌, 스탈린, 몰로토프, 칼리닌, 스베르들로프, 카가노비치, 오르조니키제, 키로프, 쿠이비셰프, 미코얀, 즈다노프, 안드레예프, 페트롭스키, 야로슬랍스키, 예조프[4], 제르진스키, 샤덴코, 메흘리스, 흐루쇼프, 시베르니크, 시키랴토프 등과 같은 활동가들이 붉은 군대의 정치 교육을 맡았기 때문이며, 라) 붉은 군대가 군사위원처럼 비범한 조직가와 선동가를 구성원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군사위원들은 자신들의 활동으로 붉은 군대 병사들의 대열을 결속시키고, 그들 사이에 규율과 전투적 용기의 정신을 심었으며, 지휘 요원 중 일부의 배신 행위를 신속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반대로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충성을 보였고 붉은 군대 부대를 굳건한 손으로 지휘할 능력이 있는 지휘관들, 당원이든 비당원이든 그들의 권위와 명성을 대담하고 단호하게 지지했다.

“군사위원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붉은 군대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레닌은 말했다.

7. 붉은 군대가 승리한 것은 백위군의 후방, 곧 콜차크, 데니킨, 크라스노프, 브란겔의 후방에서 훌륭한 볼셰비키들, 당원이든 비당원이든 그들이 지하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을 간섭자들과 백위군에 맞서 봉기하도록 일으키고, 소비에트 권력의 적들의 후방을 무너뜨려 붉은 군대의 진격을 수월하게 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시베리아, 극동, 우랄, 벨로루시, 볼가 연안의 빨치산들이 백위군과 간섭자들의 후방을 무너뜨려 붉은 군대에 헤아릴 수 없이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8. 붉은 군대가 승리한 것은 소비에트 국가가 백위군 반혁명 및 외국의 간섭에 맞선 투쟁에서 고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며, 소비에트 권력의 투쟁과 그 성과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동정과 지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자들이 간섭과 봉쇄로 소비에트 공화국을 목 졸라 죽이려 하던 때에, 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노동자들은 소비에트 편에 서서 소비에트를 도왔다. 소비에트 공화국에 적대적인 나라들의 자본가에 맞선 이들 노동자의 투쟁은 제국주의자들이 간섭을 단념할 수밖에 없게 하는 데 기여했다. 간섭에 참여한 영국, 프랑스 및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은 파업을 조직하고, 간섭자들과 백위군 장군들을 돕기 위한 군수품의 선적을 거부했으며, “러시아에서 손을 떼라!”라는 구호 아래 “행동위원회”를 만들었다.

“국제 부르주아지가 우리를 치려고 칼을 휘두를 때마다,— 레닌은 말했다,— 그 팔을 그들 자신의 노동자들이 붙잡는다.”

간단한 결론.

10월 혁명에 의해 격파된 지주와 자본가들은 백위군 장군들과 함께 자기 조국의 이익을 팔아 협상국 정부들과 결탁하여,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공동 군사 공격과 소비에트 권력 전복을 꾀한다. 이를 토대로 협상국의 군사 간섭과 러시아 변방에서의 백위군 반란이 조직되며, 그 결과 러시아는 식량 및 원료 지역으로부터 차단된다.

독일의 군사적 패배와 유럽에서 두 제국주의 연합 간 전쟁의 종결은 협상국의 강화와 간섭의 강화를 가져오고, 소비에트 국가에 새로운 어려움을 안겨 준다.

독일의 혁명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 시작된 혁명 운동은 — 거꾸로 — 소비에트 권력에 유리한 국제 정세를 조성하고 소비에트 국가의 처지를 수월하게 한다.

볼셰비키당은 노동자와 농민을 일으켜 외국 침략자와 부르주아·지주 백위군에 맞선 조국 전쟁에 나서게 한다. 소비에트 공화국과 그 붉은 군대는 협상국의 앞잡이인 콜차크, 유데니치, 데니킨, 크라스노프, 브란겔을 차례차례 격파하고,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에서 협상국의 또 다른 앞잡이인 피우수트스키를 몰아내며, 이렇게 해서 외국의 군사 간섭을 물리치고 그 군대를 소비에트 국가의 영토 밖으로 쫓아낸다.

이리하여 국제 자본이 사회주의 국가에 가한 첫 군사 공격은 완전한 파산으로 끝났다.

혁명에 의해 격파된 사회혁명당, 멘셰비키당, 아나키스트, 민족주의자들의 당은 간섭 시기에 백위군 장군들과 간섭자들을 지원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에 반대하는 반혁명 음모를 꾸미며, 소비에트 활동가들에 대한 테러를 조직한다. 10월 혁명 이전에는 노동계급 사이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졌던 이 당들은, 내전 시기에 인민 대중의 눈앞에서 반혁명 정당임이 완전히 폭로된다.

내전과 간섭의 시기는 이 당들이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소비에트 국가에서 공산당이 최종적으로 승리한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