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역사 단기강좌 (1938년 초판)
인물이오시프 스탈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안드레이 즈다노프, 예멜리얀 야로슬랍스키, 표트르 포스펠로프, 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용어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역사 단기강좌,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
제2장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창건. 당 내부에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분파의 출현 (1901~1904년)
1. 1901~1904년 러시아 혁명운동의 고양.
19세기 말 유럽에서 산업 공황이 터졌다. 이 공황은 곧 러시아도 휩쓸었다. 공황기인 1900~1903년 동안 크고 작은 기업 약 3천 개가 문을 닫았다. 1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거리로 내던져졌다. 기업에 남은 노동자들의 임금은 급격히 깎였다. 이전에 노동자들이 끈질긴 경제 파업으로 자본가들에게서 얻어낸 사소한 양보는 이제 자본가들이 도로 거두어 갔다.
산업 공황과 실업은 노동운동을 멈추게 하지도, 약화시키지도 못했다. 반대로 노동자들의 투쟁은 갈수록 혁명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경제 파업에서 정치 파업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노동자들은 시위로 나아가 민주적 자유를 요구하는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차르 전제정을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1901년 페테르부르크의 오부호프 군수공장에서 일어난 5월 1일 파업은 노동자와 군대 사이의 유혈 충돌로 번졌다. 무장한 차르 군대에 맞서 노동자들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돌과 쇠붙이뿐이었다. 노동자들의 끈질긴 저항은 꺾였다. 그 뒤에는 잔혹한 탄압이 따랐다. 노동자 약 800명이 체포되고, 많은 이가 감옥에 갇히거나 징역형을 받고 유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영웅적인 “오부호프 방어전”은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노동자들 사이에 동정의 물결을 일으켰다.
1902년 3월에는 바투미 사회민주당 위원회가 조직한 바투미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과 시위가 일어났다. 바투미 시위는 자캅카지예의 노동자와 농민 대중을 뒤흔들었다.
같은 1902년 로스토프나도누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곧 여러 공장의 노동자들이 이에 합류했다. 파업은 모든 노동자를 뒤흔들었고, 며칠 동안 도시 밖 집회에 노동자가 3만 명까지 모였다. 이 집회에서는 사회민주당 전단을 소리 내어 읽고 연사들이 연설했다. 경찰과 카자크는 수천 명에 달하는 이 노동자 집회를 해산시킬 힘이 없었다. 경찰이 노동자 몇 명을 죽이자, 이튿날 그들의 장례식에 거대한 노동자 시위대가 모였다. 차르 정부는 이웃 도시들에서 군대를 끌어모으고 나서야 파업을 진압할 수 있었다. 로스토프 노동자들의 투쟁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돈 위원회가 지도했다.
1903년에는 파업이 훨씬 더 큰 규모로 번졌다. 이 해 남부에서 대규모 정치 파업이 일어나 자캅카지예(바쿠, 트빌리시, 바투미)와 우크라이나의 가장 큰 도시들(오데사, 키예프, 예카테리노슬라프)을 휩쓸었다. 파업은 갈수록 끈질기고 조직적으로 되었다. 이전의 노동계급 행동과 달리, 거의 모든 곳에서 노동자들의 정치 투쟁을 사회민주당 위원회가 지도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차르 권력에 맞선 혁명 투쟁에 나섰다.
노동운동은 농민층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1902년 봄과 여름에 우크라이나(폴타바 현과 하리코프 현)와 볼가 연안에서 농민운동이 전개되었다. 농민들은 지주의 영지에 불을 지르고, 지주의 땅을 빼앗고, 자신들이 증오하던 지방 자치 감독관(젬스키 나찰니크)과 지주를 죽였다. 봉기한 농민들을 향해 군대가 투입되어, 농민들에게 총을 쏘고 수백 명씩 체포했으며, 지도자와 조직자들을 감옥에 던졌다. 그러나 농민들의 혁명운동은 계속 커져 갔다.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행동은 러시아에서 혁명이 무르익어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의 영향 아래 학생들의 반정부 운동도 강화되었다. 정부는 학생들의 시위와 파업에 대한 대응으로 대학을 폐쇄하고 수백 명의 학생을 감옥에 처넣었으며, 마침내 말을 듣지 않는 학생들을 군대에 보내는 방안까지 생각해 냈다. 이에 맞서 1901~1902년 겨울에 모든 고등교육기관의 학생들이 학생 총파업을 조직했다. 이 파업에는 3만 명 가까운 사람이 참가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운동, 특히 학생에 대한 탄압은 이른바 젬스트보에 자리 잡고 있던 자유주의 부르주아와 자유주의 지주들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식인 학생들을 탄압한 차르 정부의 “극단”에 반대하는 “항의”의 목소리를 내게 했다.
젬스트보 자유주의자들의 거점(據點)은 젬스트보 참사회였다. 젬스트보 참사회란 농촌 주민과 관련된 순전히 지방적인 사무(도로 건설, 병원과 학교 설립)를 맡아 처리하던 지방 행정 기관을 말한다. 자유주의 지주들은 젬스트보 참사회에서 상당히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그들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거의 그들과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그들 자신이 자기 영지에서 반(半)농노제적 경영으로부터 더 이익이 되는 자본주의적 경영으로 넘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두 자유주의 집단은 물론 차르 정부 편이었지만, 바로 이 “극단”이 혁명운동을 강화할 수 있다고 두려워하여 차르 정부의 “극단”에는 반대했다. 그들은 차르 정부의 “극단”을 두려워했지만 혁명은 그보다 더 두려워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차르 정부의 “극단”에 항의하면서 두 가지 목적을 추구했다. 첫째는 차르를 “깨우치는” 것이고, 둘째는 차르 정부에 대한 “큰 불만”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민중의 신뢰를 얻어 민중 또는 민중의 일부를 혁명에서 떼어내고, 그리하여 혁명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젬스트보 자유주의 운동이 차르 정부의 존립에 위험한 것은 아니었지만, 차르 정부의 “영구불변한” 기초가 그다지 순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징표이기는 했다.
젬스트보 자유주의 운동은 1902년에 부르주아 단체 『해방』의 조직으로 이어졌고, 이 단체는 장차 러시아의 주요 부르주아 정당이 될 카데트당의 핵심을 이루었다.
노동자와 농민의 운동이 갈수록 위협적인 물결이 되어 온 나라로 퍼져 가는 것을 보고, 차르 정부는 혁명운동을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썼다. 노동자 파업과 시위에는 군사력이 점점 더 자주 동원되었고, 총탄과 채찍이 노동자·농민의 행동에 대한 차르 정부의 예사로운 대답이 되었으며, 감옥과 유형지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차르 정부는 노동자를 혁명운동에서 떼어 놓기 위해 탄압의 성격을 띠지 않는 다른, 더 “유연한” 수단을 쓰려고 했다. 헌병과 경찰의 후견 아래 가짜 노동자 조직을 만들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 조직들은 당시 “경찰 사회주의” 조직, 또는 주바토프 조직(이 경찰 노동자 조직을 만든 헌병 대령 주바토프의 이름을 딴 것이다)이라고 불렸다. 차르의 오흐란카는 자기 요원을 통해, 차르 정부가 스스로 노동자의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도울 용의가 있다는 것을 노동자에게 주입시키려 애썼다. “차르 자신이 노동자 편에 서 있는데, 무엇 하러 정치를 하고, 무엇 하러 혁명을 일으킨단 말인가”라고 주바토프파는 노동자에게 말했다. 주바토프파는 몇몇 도시에 자기 조직을 만들었다. 주바토프 조직을 본보기로 삼아 같은 목적으로, 1904년에 가폰 신부가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공장 노동자 모임”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려는 차르 오흐란카의 시도는 실패했다. 차르 정부는 이런 수단으로는 커져 가는 노동운동을 감당할 수 없었다. 노동계급의 성장하는 혁명운동은 이 경찰 조직들을 자기 길에서 쓸어버렸다.
2. 마르크스주의 정당 건설을 위한 레닌의 계획. “경제주의자”의 기회주의. 레닌의 계획을 위한 『이스크라』의 투쟁. 레닌의 저서 『무엇을 할 것인가?』.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사상적 기초.
1898년에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제1차 당대회가 당의 창립을 선언했는데도 당은 여전히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의 강령과 규약도 없었다. 제1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당 중앙위원회는 체포되었고 다시는 복구되지 못했는데, 복구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제1차 당대회 이후 당의 사상적 혼란과 조직적 분산은 더욱 심해졌다.
1884~1894년이 나로드니키에 대한 승리와 사회민주주의의 사상적 준비 시기였고, 1894~1898년이 개별 마르크스주의 조직들을 하나로 모아 사회민주당을 소집하려 한, 그러나 실패한 시도의 시기였다면, 1898년 이후는 당 안의 사상적·조직적 혼란이 심해진 시기였다. 나로드니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승리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옳았음을 보여 준 노동계급의 혁명적 행동은 혁명적 청년들이 마르크스주의에 품은 공감을 키웠다. 마르크스주의는 유행이 되었다.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 조직들에는 인텔리겐치야 출신의 혁명적 청년들이 물밀듯 밀려들었는데, 이들은 이론에 약하고 조직적·정치적 경험이 없었으며, 출판물을 가득 메운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 글에서 얻은, 어렴풋하고 대개는 그릇된 마르크스주의 관념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은 마르크스주의 조직들의 이론적·정치적 수준을 떨어뜨리고, 그곳에 “합법 마르크스주의적” 기회주의 기분을 끌어들이고, 사상적 혼란과 정치적 동요와 조직적 무질서를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노동운동의 고양이 커지고 혁명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 분명해지면서, 혁명운동을 지도할 수 있는 단일한 중앙집권적 노동계급 정당의 건설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당의 지방 기관들, 곧 지방 위원회들과 그룹들과 서클들의 상태는 너무도 형편없었고, 그들의 조직적 분열과 사상적 불일치는 너무도 커서, 그러한 당을 건설하는 과제는 헤아릴 수 없는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어려움은 당을 차르 정권의 가혹한 박해 속에서 건설해야 했다는 데에만 있지 않았다. 차르 정권은 조직의 대열에서 가장 뛰어난 활동가들을 끊임없이 뽑아내어 유형지와 감옥과 징역으로 보냈다. 어려움은 또한 지방 위원회와 그 활동가들의 상당수가 자기 지방의 자잘한 실무 활동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고, 당의 조직적·사상적 통일이 없는 데서 오는 해악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당의 분열과 당 안의 사상적 혼란에 익숙해져 있었고, 단일한 중앙집권적 당 없이도 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데에 있었다.
중앙집권적 당을 건설하려면 지방 기관들의 이러한 후진성과 완고함과 편협한 실무주의를 극복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당 안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러시아에서는 『노동사상』, 해외에서는 『노동사업』이라는 자기들의 기관지를 가지고 있었고, 당 안의 조직적 분산과 사상적 혼란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했으며, 심지어 이를 자주 찬미하기까지 했고, 노동계급의 단일한 중앙집권적 정치당을 건설한다는 과제는 불필요하고 억지로 꾸며낸 과제라고 여겼다.
이들이 바로 “경제주의자”와 그 추종자들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단일한 정치당을 건설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경제주의자”를 격파해야 했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고 노동계급의 당을 건설하는 일에 레닌이 착수했다.
노동계급의 단일한 당 건설을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당 건설을 제2차 당대회 소집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대회가 지방 조직들을 통합하고 당을 창설하리라는 것이었다. 레닌은 그러한 견해에 반대했다. 그는 대회를 소집하기 전에 당의 목적과 과제에 관한 문제를 밝혀야 하고, 우리가 어떤 당을 건설하려는지 알아야 하며, “경제주의자”와 사상적으로 갈라서야 하고, 당의 목적과 과제에 관하여 두 가지 서로 다른 견해, 즉 “경제주의자”의 견해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의 견해가 있다는 것을 당에 정직하고 공개적으로 말해야 하며, “경제주의자”가 자기들의 기관지에서 자기 견해를 위해 선전하듯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견해를 위해 폭넓은 출판 선전을 벌여야 하고, 지방 조직들이 이 두 흐름 사이에서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필요한 예비 작업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당대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레닌은 직접 이렇게 말했다.
“통일하기에 앞서, 그리고 통일하기 위해서는 먼저 단호하고 분명하게 갈라서야 한다”(레닌, 제4권, 378쪽).
그리하여 레닌은 노동계급의 정치당 건설을,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견해를 선전하고 선동하는 전러시아 전투적 정치 신문의 조직부터 시작해야 하며, 그러한 신문의 발간이 당 건설의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닌은 유명한 논문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가?」에서 당 건설의 구체적 계획을 개략적으로 밝혔고, 이 계획은 나중에 그의 저명한 저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발전되었다.
“우리 생각으로는, 레닌은 이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라는 조직(당 창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편집자)을 만드는 활동의 출발점이자 첫 번째 실천적 걸음이며,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조직을 흔들림 없이 발전시키고 심화하고 확대해 나갈 수 있게 하는 기본 줄기가 되어야 할 것은 전러시아적 정치 신문의 발행이다… 이 신문이 없으면 원칙에 충실한 전면적인 선전과 선동을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데, 이것은 사회민주주의 일반의 항구적이고 주요한 과업이며, 정치와 사회주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가장 광범한 주민층 속에서 깨어난 현시기에는 특히 절박한 과업이다.”(같은 책, 110쪽)
레닌은 이러한 신문이 당의 사상적 결집 수단일 뿐만 아니라 지방 조직들을 당으로 조직적으로 통합하는 수단도 될 것이라고 보았다. 지방 조직의 대표자인 이 신문의 요원과 통신원 망이 당이 조직적으로 그 둘레에 모이게 될 골격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레닌의 말처럼, “신문은 집단적 선전자이고 집단적 선동자일 뿐만 아니라 집단적 조직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요원 망은, 레닌은 같은 논문에서 말했다,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그러한 조직의 골격이 될 것이다. 그 조직은 전국을 포괄할 만큼 충분히 크고, 엄격하고 세밀한 분업을 실시할 만큼 충분히 넓고 다방면적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전환’과 뜻밖의 사태에서도 자기 사업을 흔들림 없이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견실하고, 한편으로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적이 모든 병력을 한 곳에 모았을 때 그 적과 벌판에서 맞붙는 전투를 피할 수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적의 굼뜬 동작을 이용하여 공격을 가장 예상하지 않는 곳에서 그때를 틈타 공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유연한 조직이다.”(같은 책, 112쪽)
그러한 신문이 되어야 할 것은 『이스크라』였다.
실제로 『이스크라』는 당의 사상적·조직적 결집을 준비한, 바로 그러한 전러시아적 정치 신문이 되었다.
당 자체의 구조와 구성에 관해서는, 레닌은 당이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가) 정규 간부 지도 일꾼들의 좁은 범위로서, 여기에는 주로 직업적 혁명가, 즉 당 사업 외의 다른 모든 일에서 벗어나 있고 필요한 최소한의 이론 지식, 정치 경험, 조직 기능, 차르 경찰과 싸우는 기술과 경찰을 피해 숨는 기술을 갖춘 일꾼들이 들어가야 하며, 나) 광범한 지방 당 조직망과 수십만 근로 대중의 동정과 지지에 둘러싸인 수많은 당원 대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나는 단언한다, 라고 레닌은 썼다. (1) 지도자들의 안정적이고 연속성을 지키는 조직 없이는 어떠한 혁명 운동도 견고할 수 없다. (2) 자연발생적으로 투쟁에 끌려 들어오는 대중이 넓을수록… 그러한 조직의 필요성은 더욱 절박해지고, 그 조직은 더욱 견고해야 한다… (3) 그러한 조직은 주로 혁명 활동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4) 전제 국가에서는 그러한 조직의 성원을 혁명 활동을 직업으로 하고 정치 경찰과 싸우는 기술에서 직업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로만 좁힐수록 그러한 조직을 ‘일망타진’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며, 또 (5) 운동에 참여하고 그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 노동계급에서든 사회의 다른 계급에서든 더욱 많아질 것이다”(같은 책, 456쪽).
창설될 당의 성격과 노동계급에 대한 당의 역할, 그리고 당의 목적과 과업에 관해 레닌은 당이 노동계급의 전위 부대여야 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투쟁을 통합하고 이끄는 노동 운동의 지도 역량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당의 최종 목적은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수립하는 것이다. 당면 목적은 차르제를 타도하고 민주적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먼저 차르제를 타도하지 않고는 자본주의를 타도할 수 없으므로, 현 시기 당의 주요 과업은 노동계급을 일으키고 온 인민을 차르제와의 투쟁에 일으켜 세워, 차르제에 반대하는 인민의 혁명 운동을 전개하고, 사회주의로 가는 길의 첫째가는 중대한 장애물인 차르제를 타도하는 것이다.
“역사는 이제 우리 앞에, 다른 어느 나라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당면 과업 가운데서도 가장 혁명적인 당면 과업을 제기했다, 라고 레닌은 말했다. 이 과업의 수행, 곧 유럽의 반동뿐 아니라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시아 반동의 가장 강력한 보루를 무너뜨리는 일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국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로 만들 것이다”(레닌, 제4권, 382쪽).
그리고 이어서:
“우리는 정부와 개별적 요구를 놓고 벌이는 투쟁, 개별적 양보를 얻어 내는 일이 적과의 사소한 충돌, 전초에서의 작은 접전일 뿐이고 결정적인 격돌은 아직 앞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앞에는 적의 요새가 온전한 힘을 갖춘 채 서 있고, 그 요새에서 포탄과 총탄이 구름처럼 우리에게 쏟아져 가장 훌륭한 투사들을 앗아 간다. 우리는 이 요새를 점령해야 하며, 깨어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힘을 러시아 혁명가들의 모든 힘과 하나의 당으로 합친다면 반드시 점령할 것이다. 러시아에 있는 살아 있고 정직한 모든 것이 그 당으로 모여들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러시아 노동자 혁명가 표트르 알렉세예프의 위대한 예언이 실현될 것이다. ‘수백만 노동 대중의 근육질 팔이 일어나, 병사들의 총검으로 둘러싸인 전제정치의 멍에가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같은 책, 59쪽).
이것이 차르 전제 러시아의 조건에서 노동계급의 당을 창설하기 위한 레닌의 계획이었다.
‘경제주의자’들은 지체 없이 레닌의 계획에 반대하는 포문을 열었다.
“경제주의자”들은 차르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일반 정치 투쟁은 모든 계급의 일, 그중에서도 우선 부르주아지의 일이며, 따라서 노동계급에게는 중대한 이해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의 주된 이해관계는 임금 인상, 노동 조건 개선 등을 위해 사용자와 벌이는 경제 투쟁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차르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정치 투쟁이나 차르 전제정치의 전복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사용자 및 정부와 벌이는 경제 투쟁”의 조직을 당면한 주된 과제로 삼아야 하며, 이때 정부에 대한 경제 투쟁이란 공장 입법의 개선을 위한 투쟁을 뜻한다고 했다. “경제주의자”들은 이런 방법으로 “경제 투쟁 자체에 정치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경제주의자”들은 노동계급에게 정치 정당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공공연히 반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당이 노동운동의 지도 세력이 되어서는 안 되고, 노동계급의 자연발생적 운동에 간섭해서는 안 되며, 하물며 그것을 지도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 뒤를 따라가며 그것을 연구하고 거기서 교훈을 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제주의자”들은 나아가 노동운동에서 의식적 요소의 역할, 곧 사회주의적 의식과 사회주의적 이론의 조직하고 인도하는 역할은 보잘것없거나 거의 보잘것없으며,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을 사회주의적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서는 안 되고 오히려 스스로 노동계급의 중간층, 심지어 더 뒤떨어진 층의 수준에 적응하여 내려가야 하며, 노동계급에 사회주의적 의식을 불어넣어서는 안 되고 노동계급의 자연발생적 운동이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주의적 의식을 만들어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 건설에 관한 레닌의 조직 계획에 대해서는, 그들은 그것을 자연발생적 운동에 대한 일종의 폭력으로 여겼다.
레닌은 『이스크라』 지면에서, 특히 그의 유명한 저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경제주의자”들의 이 기회주의적 철학을 맹렬히 공격하여 그 철학을 산산조각 냈다.
1) 레닌은 노동계급을 차르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일반 정치 투쟁에서 떼어놓고 그 과제를 사용자 및 정부에 대한 경제 투쟁으로 제한하면서 사용자도 정부도 고스란히 남겨두는 것은 노동자들을 영원한 노예 상태에 처하게 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이 사용자 및 정부와 벌이는 경제 투쟁은 자본가들에게 노동력을 더 유리한 조건으로 팔기 위한 노동조합주의적 투쟁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게 노동력을 팔고 착취당할 수밖에 없게 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없애기 위해서도 투쟁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의 사슬에 묶인 개인 차르 전제정치가 노동운동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투쟁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도 전개할 수 없다. 따라서 당과 노동계급의 당면 과제는 차르 전제정치를 길에서 치워버리고 그로써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2) 레닌은 노동운동의 자생적 과정을 찬양하고 당의 지도적 역할을 부정하여 당의 역할을 사건의 기록자 역할로 축소하는 것은 ‘꼬리주의’를 설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즉 당을 자생적 과정의 꼬리로, 자생적 과정을 바라보기만 하고 흘러가는 대로 내맡기는 운동의 수동적 힘으로 전락시키라고 설교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한 설교를 하는 것은 당을 없애는 일, 즉 노동계급을 당 없이 내버려 두는 일, 즉 노동계급을 무장 해제된 상태로 내버려 두는 일이다. 그런데 온갖 투쟁 수단으로 무장한 차르 전제정치와, 현대적으로 조직되어 노동계급에 대한 투쟁을 지도하는 자기 당을 가진 부르주아지 같은 적들이 노동계급 앞에 버티고 있는 때에 노동계급을 무장 해제된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것은 노동계급을 배반하는 것이다.
3) 레닌은 노동운동의 자생성 앞에 머리를 숙이고 의식의 역할, 사회주의적 의식과 사회주의 이론의 역할을 깎아내리는 것은 첫째, 빛을 향하듯 의식을 향해 나아가는 노동자들을 조롱하는 것이고, 둘째, 당이 보는 앞에서 이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 즉 당이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데 쓰는 무기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며, 셋째, 기회주의의 늪으로 완전히, 그리고 끝내 굴러떨어지는 것이라고 밝혔다.
“혁명적 이론 없이는 혁명적 운동도 있을 수 없다고 레닌은 말했다… 선진 투사의 역할은 선진 이론의 지도를 받는 당만이 수행할 수 있다”(레닌, 제4권, 380쪽).
4) 레닌은 ‘경제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노동계급의 자생적 운동에서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하여 노동계급을 속이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자생적 운동에서가 아니라 과학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경제주의자’들은 노동계급에 사회주의적 의식을 불어넣을 필요가 없다고 부정함으로써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들어올 길을 닦아 주고, 그것이 노동계급 속에 들어와 뿌리내리기 쉽게 해 준다. 따라서 그들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의 결합이라는 사상을 묻어 버리고 부르주아지를 돕는다.
“노동운동의 자생성 앞에 머리를 숙이는 모든 태도, ‘의식적 요소’의 역할, 사회민주주의의 역할을 깎아내리는 모든 행위는, 깎아내리는 자가 그것을 바라든 바라지 않든 전혀 상관없이, 그 자체로 노동자들에 대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강화하는 것을 뜻한다”라고 레닌은 말했다(같은 책, 390쪽).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문제는 오직 이렇게 제기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냐,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냐. 중간은 없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조금이라도 깎아내리는 것, 그것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는 것은 그 자체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것을 뜻한다”(같은 책, 391~392쪽).
5) ‘경제주의자’들의 이 모든 오류를 종합하여 레닌은, ‘경제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을 자본주의에서 해방하는 사회혁명의 당이 아니라 자본주의 지배의 유지를 전제로 하는 ‘사회개혁’의 당을 가지려 한다는 결론, 따라서 ‘경제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근본 이익을 배반하는 개량주의자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6) 레닌은 끝으로, ‘경제주의’가 러시아에서 우연한 현상이 아니며, ‘경제주의자’들이 노동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적 영향의 전달자이고, 서유럽 사회민주당들 안에 기회주의자 베른슈타인의 추종자인 수정주의자들이라는 동맹자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서구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안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의 자유’라는 기치를 내걸고 나서서 마르크스 학설의 ‘수정’, 곧 재검토를 요구하고(여기서 ‘수정주의’라는 명칭이 나왔다), 혁명과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기회주의적 흐름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었다. 레닌은 러시아의 ‘경제주의자’들도 혁명적 투쟁과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포기하는 똑같은 노선을 걸었음을 보여주었다.
이상이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전개한 기본적인 이론적 명제들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보급된 결과, 이 책이 나온 지 1년 뒤(1902년 3월에 출간되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대회 무렵에는 ‘경제주의’의 사상적 입장에는 불쾌한 기억만이 남았고, ‘경제주의자’라는 별명은 대다수 당 일꾼들에게 모욕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것은 ‘경제주의’의 완전한 사상적 분쇄, 곧 기회주의와 꼬리주의와 자연발생성의 이데올로기를 분쇄한 것이었다.
그러나 레닌의 저작 『무엇을 할 것인가?』의 의의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역사적 의의는 레닌이 이 유명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일을 했다는 데 있다.
1) 마르크스주의 사상사에서 처음으로 기회주의의 사상적 뿌리를 밑바닥까지 드러내어, 그 뿌리가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의 자연발생성에 대한 숭배와 노동운동에서 사회주의적 의식의 역할을 깎아내리는 데 있음을 보여주었다.
2) 자연발생적 노동운동을 혁명화하고 이끄는 힘으로서 이론, 의식성, 당의 의의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3)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의 결합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명제를 훌륭하게 논증했다.
4)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이념적 토대를 천재적으로 정립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전개된 이론적 명제들은 뒤에 볼셰비키당 이데올로기의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이론적 자산을 갖춘 『이스크라』는 레닌의 당 건설 계획을 위해, 당 역량의 결집을 위해, 당 제2차 대회를 위해,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를 위해, ‘경제주의자’들에 반대하고 온갖 기회주의자들과 수정주의자들에 반대하는 광범한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고 실제로 전개했다.
『이스크라』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당 강령 초안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노동자 정당의 강령은 잘 알려진 대로 노동계급 투쟁의 목적과 과제를 과학적으로 정식화한 간결한 서술이다. 강령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운동의 최종 목적과, 최종 목적에 이르는 길에서 당이 투쟁하는 요구들을 함께 규정한다. 그러므로 강령 초안의 작성은 무엇보다도 중대한 의의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강령 초안을 작성하는 동안 『이스크라』 편집부 안에서 레닌과 플레하노프 사이에, 그리고 편집부의 다른 위원들과의 사이에도 심각한 의견 대립이 생겼다. 이 의견 대립과 논쟁은 하마터면 레닌과 플레하노프 사이의 완전한 결렬로 이어질 뻔했다. 그러나 결렬은 그때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레닌은 강령 초안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관한 가장 중요한 조항이 들어가고 혁명에서 노동계급의 지도적 역할이 명확히 명시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당 강령 가운데 농업 부분 전체도 레닌이 쓴 것이다. 레닌은 이미 그때 토지 국유화를 주장하고 있었으나, 투쟁의 첫 단계에서는 농민에게 "분할지", 즉 지주가 농민을 "해방"할 때 농민 토지에서 떼어낸 땅을 돌려 달라는 요구를 내세울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토지 국유화에 반대한 것은 플레하노프였다.
당 강령을 둘러싼 레닌과 플레하노프의 논쟁은 훗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에 생겨날 의견 차이를 어느 정도 미리 규정했다.
3.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대회. 강령과 규약의 채택 및 통일된 당의 창건. 당대회에서의 의견 차이와 당 안에서 볼셰비키 흐름과 멘셰비키 흐름이라는 두 흐름의 출현.
이와 같이 레닌의 원칙이 승리하고 『이스크라』가 레닌의 조직 계획을 위해 성공적으로 투쟁한 결과, 당을 창건하기 위해, 또는 당시의 말대로 하면 진정한 당을 창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기본 조건이 마련되었다. 이스크라파의 노선은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 조직들 사이에서 승리했다. 이제 당대회를 소집할 수 있게 되었다.
1903년 7월 17일(30일),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대회가 개막되었다. 당대회는 해외에서 비밀리에 열렸다. 처음에는 회의가 브뤼셀에서 열렸다. 그러나 곧 벨기에 경찰이 대표들에게 벨기에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당대회는 런던으로 옮겨 갔다.
당대회에는 26개 조직에서 모두 43명의 대표가 모였다. 각 위원회는 당대회에 대표를 2명씩 보낼 권리가 있었으나, 일부는 1명만 보냈다. 이리하여 43명의 대표가 51개의 결정권을 가졌다.
당대회의 주요 과제는 "『이스크라』가 제기하고 발전시킨 원칙적·조직적 토대 위에서 진정한 당을 창건하는 것"(레닌, 제6권, 164쪽)이었다.
당대회의 구성은 균일하지 않았다. 당대회에는 노골적인 "경제주의자"들이 패배했기 때문에 대표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그들은 매우 교묘하게 겉모습을 바꾸어 자기 대표 몇 명을 끼워 넣는 데 성공했다. 그 밖에 번트 대표들은 말로만 "경제주의자"와 달랐을 뿐, 실제로는 "경제주의자"의 편이었다.
따라서 당대회에는 『이스크라』의 지지자만이 아니라 그 반대자들도 있었다. 『이스크라』 지지자는 33명, 즉 다수였다. 그러나 스스로 이스크라파라고 자처한 사람이 모두 진정한 이스크라파-레닌주의자는 아니었다. 대표들은 몇 개의 그룹으로 갈라졌다. 레닌의 지지자, 즉 확고한 이스크라파는 24표를 가졌고, 이스크라파 9명은 마르토프를 따랐다. 이들은 불안정한 이스크라파였다. 일부 대표는 『이스크라』와 그 반대자들 사이에서 동요했는데, 이런 표는 당대회에서 10표였다. 이것이 중간파였다. 『이스크라』의 공공연한 반대자는 8표("경제주의자" 3표와 번트파 5표)를 가졌다. 이스크라파가 분열하기만 하면 『이스크라』의 적들이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당대회의 상황이 얼마나 복잡했는지 알 수 있다. 레닌은 당대회에서 『이스크라』의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많은 힘을 기울였다.
당대회의 가장 중요한 일은 당 강령의 채택이었다. 강령을 토론할 때 당대회의 기회주의적 부분이 반대를 제기한 주요 문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문제였다. 기회주의자들은 그 밖의 여러 강령 문제에서도 당대회의 혁명적 부분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문제를 두고 싸우기로 결정했는데, 해외의 여러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강령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조항을 두고 있지 않으므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에도 그것을 넣지 않을 수 있다고 내세웠다.
기회주의자들은 당 강령에 농민 문제에 관한 요구를 포함시키는 데도 반대했다. 이 사람들은 혁명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노동계급의 동맹자인 농민층을 멀리했고, 농민층에 적대적이었다.
분트파와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민족자결권에 반대했다. 레닌은 노동계급이 민족적 압제에 맞서 싸울 의무가 있다고 늘 가르쳤다. 강령에서 이 요구에 반대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포기하고 민족적 압제의 앞잡이가 되자는 제안과 같았다.
레닌은 이 모든 반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당대회는 『이스크라』가 제안한 강령을 채택했다.
이 강령은 두 부분, 즉 최대 강령과 최소 강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최대 강령에서는 노동계급 당의 주요 과제인 사회주의 혁명, 자본가 권력의 전복,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수립을 다루었다. 최소 강령에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하기 전에도 당이 수행할 당면 과제, 즉 차르 전제정치의 전복, 민주공화국의 수립, 노동자의 8시간 노동일 도입, 농촌에서 농노제의 모든 잔재 청산, 지주들이 농민에게서 빼앗은 토지(「오트레즈키」, отрезки)의 반환을 다루었다.
이후 볼셰비키는 「오트레즈키」의 반환 요구를 모든 지주 토지의 몰수 요구로 바꾸었다.
제2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은 노동계급 당의 혁명적 강령이었다.
이 강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 후 우리 당이 새로운 강령을 채택한 제8차 당대회까지 존속했다.
강령을 채택한 뒤 제2차 당대회는 당 규약 초안의 토의로 넘어갔다. 강령을 채택하여 당의 사상적 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당대회는, 당의 수공업적 방식과 서클주의, 조직적 분열, 확고한 규율의 부재를 끝내기 위해 당 규약도 채택해야 했다.
그러나 강령 채택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된 반면, 당 규약 문제는 당대회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날카로운 의견 대립은 규약 제1조, 즉 당원 자격에 관한 조항의 표현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누가 당원이 될 수 있는가, 당의 구성은 어떠해야 하는가, 조직 면에서 당은 조직된 전체여야 하는가 아니면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 이것이 규약 제1조와 관련하여 제기된 문제였다. 두 가지 표현이 맞섰다. 하나는 플레하노프와 확고한 이스크라파가 지지한 레닌의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악셀로드, 자술리치, 불안정한 이스크라파, 트로츠키, 그리고 당대회의 노골적인 기회주의 분자 전체가 지지한 마르토프의 표현이었다.
레닌의 표현은 당 강령을 인정하고 당을 물질적으로 지원하며 당 조직 중 하나의 성원인 사람은 누구나 당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면 마르토프의 표현은 강령의 인정과 당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당원 자격의 필수 조건으로 보면서도, 당 조직 중 하나에 참여하는 것은 당원 자격의 조건으로 보지 않았고, 당원이 당 조직 중 어느 하나의 성원이 아니어도 된다고 보았다.
레닌은 당을 조직된 부대로 보았다. 그 구성원은 스스로 당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당의 조직 가운데 하나에 의해 당에 받아들여지며, 따라서 당의 규율에 복종한다. 이에 반해 마르토프는 당을 조직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무엇으로 보았다. 그 구성원은 스스로 당원이 되며, 따라서 당의 조직 가운데 하나에 속하지 않는 한 당의 규율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마르토프의 표현은 레닌의 표현과 달리 불안정한 비프롤레타리아적 분자들에게 당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전야에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야 가운데에는 일시적으로 혁명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따금 당에 작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조직에 들어가 당의 규율에 복종하고 당의 임무를 수행하며 그에 따르는 위험을 무릅쓰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르토프와 다른 멘셰비키는 이런 사람들을 당원으로 간주하고, 그들에게 당의 일에 영향을 미칠 권리와 가능성을 주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심지어 모든 파업 참가자에게 당원으로 "등록"할 권리를 주자고 제안했다. 파업에는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들, 아나키스트와 사회혁명당원도 참가했는데도 그러했다.
그리하여 레닌과 레닌주의자들이 당대회에서 쟁취하려 한 단일하고 전투적이며 명확하게 조직된 당 대신, 마르토프파는 잡다하고 흐릿하며 정리되지 않은 당을 가지려 했다. 그런 당은 잡다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리고 확고한 규율을 가질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전투적인 당이 될 수 없었다.
불안정한 이스크라파가 확고한 이스크라파에게서 떨어져 나가 중간파와 손잡고, 여기에 공공연한 기회주의자들이 가세하자 이 문제에서 마르토프가 우세를 차지했다. 당대회는 찬성 28표, 반대 22표, 기권 1표로 규약 제1조를 마르토프의 표현대로 채택했다.
규약 제1조를 둘러싸고 이스크라파가 갈라선 뒤 당대회의 투쟁은 한층 더 격화되었다. 당대회는 끝을 향해, 곧 당의 지도 기관인 당 중앙기관지(『이스크라』) 편집부와 중앙위원회를 선출하는 순서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대회가 선거로 넘어가기 전에 당대회의 세력 관계를 바꾸어 놓은 몇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당 규약과 관련하여 당대회는 분트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분트는 당 안에서 특별한 지위를 요구했다. 분트는 자신을 러시아 유대인 노동자의 유일한 대표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분트의 이 요구에 응하는 것은 당 조직 안에서 노동자를 민족적 특징에 따라 분할하고, 노동계급의 단일한 계급적 지역 조직을 포기하는 것을 뜻했다. 당대회는 분트의 조직적 민족주의를 배격했다. 그러자 분트파는 당대회를 떠났다. 당대회가 두 「경제주의자」의 해외 동맹을 해외에서의 당 대표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자 그들도 당대회를 떠났다.
일곱 명의 기회주의자가 당대회에서 떠나자 세력 관계는 레닌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당의 중앙 기관 구성 문제는 처음부터 레닌의 관심의 중심에 있었다. 레닌은 확고하고 일관된 혁명가들을 중앙위원회에 선출해야 한다고 보았다. 마르토프파는 중앙위원회에서 불안정하고 기회주의적인 분자들이 우세하도록 하려 했다. 이 문제에서 당대회 다수는 레닌을 따랐다. 중앙위원회에는 레닌의 지지자들이 선출되었다.
레닌의 제안에 따라 『이스크라』 편집부에는 레닌, 플레하노프, 마르토프가 선출되었다. 마르토프는 당대회에서 『이스크라』 편집부 위원으로 옛 편집자 여섯 명 전원을 선출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 대다수는 마르토프의 지지자였다. 당대회는 다수결로 이 제안을 부결했다. 레닌이 제안한 세 사람이 선출되었다. 그러자 마르토프는 자신은 중앙 기관지 편집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렇듯 당의 중앙 기관 문제에 관한 표결로 당대회는 마르토프 지지자들의 패배와 레닌 지지자들의 승리를 확정했다.
이때부터 선거에서 다수표를 얻은 레닌의 지지자들을 볼셰비키라 부르게 되었고, 소수표를 얻은 레닌의 반대자들을 멘셰비키라 부르게 되었다.
제2차 당대회의 작업을 총괄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1) 당대회는 마르크스주의가 「경제주의」에, 공공연한 기회주의에 거둔 승리를 확정했다.
2) 당대회는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고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창건했으며, 그리하여 통일된 당의 틀을 세웠다.
3) 당대회는 당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두 부분으로 갈라놓은 심각한 조직상의 의견 차이가 있음을 드러냈는데, 전자는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조직 원칙을 옹호하고 후자는 조직상의 무원칙이라는 늪, 기회주의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4) 당대회는 당에 의해 이미 격파된 옛 기회주의자들, 「경제주의자」들의 자리를 당 안에서 새로운 기회주의자인 멘셰비키가 차지하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5) 당대회는 조직 문제에서 자기 지위에 걸맞은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동요를 겪었으며, 때로는 멘셰비키에게 우세를 넘겨주기까지 했다. 끝에 가서 바로잡기는 했으나, 조직 문제에서 멘셰비키의 기회주의를 폭로하고 그들을 당 안에서 고립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당 앞에 그러한 과제를 제기하지조차 못했다.
이 마지막 사정은 당대회 후에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의 투쟁이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화된 주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4. 제2차 당대회 후 멘셰비키 지도자들의 분열 행위와 당 내부 투쟁의 격화. 멘셰비키의 기회주의. 레닌의 저서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마르크스주의 당의 조직적 기초.
제2차 당대회 후 당 내부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멘셰비키는 제2차 당대회의 결정을 무산시키고 당의 중앙 기관을 장악하려고 온 힘을 다했다. 멘셰비키는 『이스크라』 편집부와 중앙위원회에 자기 대표들을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는데, 편집부에서는 다수를 차지하고 중앙위원회에서는 볼셰비키와 같은 수가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제2차 당대회의 직접적인 결정에 어긋났기 때문에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의 요구를 물리쳤다. 그러자 멘셰비키는 당 몰래 마르토프, 트로츠키, 악셀로드를 우두머리로 하는 자기들의 반당적 분파 조직을 만들고, 마르토프가 쓴 대로 "레닌주의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당에 반대하는 투쟁 수단으로 그들이 택한 것은 "당 활동 전체의 해체, 사업의 파괴,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의 발목 잡기"였다(레닌의 표현). 그들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해외 동맹」에 틀어박혔는데, 그 동맹의 10분의 9는 러시아 현지의 활동에서 유리된 망명 인텔리겐치야였으며, 멘셰비키는 그곳에서 당과 레닌과 레닌주의자들을 향해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멘셰비키에게는 플레하노프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제2차 당대회에서 플레하노프는 레닌과 보조를 같이했다. 그러나 제2차 당대회 후 플레하노프는 분열의 위협에 겁을 먹고 멘셰비키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멘셰비키와 “화해”하기로 결심했다. 플레하노프를 멘셰비키 쪽으로 끌어당긴 것은 그의 지난날 기회주의적 오류라는 짐이었다. 기회주의자인 멘셰비키와 타협하던 조정파 플레하노프는 이내 스스로 멘셰비키가 되었다. 플레하노프는 당대회에서 배척된 옛 멘셰비키 편집자 전원을 『이스크라』 편집부에 넣을 것을 요구했다. 레닌은 물론 이에 동의할 수 없었으므로, 당 중앙위원회에서 입지를 굳히고 그 자리에서 기회주의자들을 타격하기 위해 『이스크라』 편집부에서 나왔다. 플레하노프는 당대회의 의지를 어기고 독단으로 멘셰비키 출신의 옛 편집자들을 『이스크라』 편집부에 보선했다. 이 시점부터, 즉 『이스크라』 제52호부터 멘셰비키는 이 신문을 자기들의 기관지로 만들고 『이스크라』를 통해 자기들의 기회주의적 견해를 설교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당 안에서는 옛 『이스크라』를 레닌의, 볼셰비키의 『이스크라』라 하고, 새 『이스크라』를 멘셰비키의, 기회주의적인 『이스크라』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스크라』가 멘셰비키의 손에 넘어가면서 이 신문은 레닌과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투쟁의 기관지, 무엇보다 조직 문제 분야에서 멘셰비키 기회주의를 선전하는 기관지가 되었다. 멘셰비키는 「경제주의자」 및 번트파와 결합하여 『이스크라』 지면에서, 그들 말로는 레닌주의에 반대하는 공격을 개시했다. 플레하노프는 조정파의 입장을 지키지 못하고 얼마 후 자신도 이 공격에 가담했다. 사태의 논리상 그렇게 되기 마련이었다. 기회주의자들과의 조정을 고집하는 자는 기회주의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다. 새 『이스크라』 지면에는 마치 풍요의 뿔에서 쏟아지듯 이런 주장과 기사가 쏟아졌다. 당은 조직된 전체여서는 안 된다는 것, 당 안에 당 기관의 결정에 복종할 의무가 없는 자유로운 집단과 개인이 존재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 당을 지지하는 인텔리겐치야라면 누구에게나, 그리고 “모든 파업 참가자”와 “모든 시위 참가자”에게도 스스로 당원이라고 선언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것, 당의 모든 결정에 복종하라는 요구는 일을 보는 “형식적·관료적” 태도라는 것, 소수가 다수에 복종하라는 요구는 당원의 의지에 대한 “기계적 억압”이라는 것, 지도자든 일반 당원이든 모든 당원에게 당 규율에 대한 동일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당 안에 “농노제”를 세우는 것이라는 것, “우리”에게 당 안에서 필요한 것은 중앙집권제가 아니라 개인과 당 조직에 당의 결정을 이행하지 않을 권리를 주는 아나키즘적 “자치주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직적 방종, 당성과 당 규율의 파괴, 인텔리겐치야적 개인주의에 대한 찬양, 아나키즘적 무규율에 대한 변호를 마구 선전하는 것이었다.
멘셰비키는 명백히 당을 제2차 당대회에서 후퇴시켜 조직적 분산으로, 서클주의로, 소규모 수공업적 활동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멘셰비키에게 단호한 반격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이 반격을 레닌은 1904년 5월에 나온 자신의 유명한 저서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에서 가했다.
다음은 레닌이 이 책에서 전개했고 훗날 볼셰비키당의 조직적 기초가 된 기본적인 조직 원칙이다.
1)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노동계급의 일부이며, 그 부대다. 그러나 노동계급에는 부대가 많으므로, 노동계급의 모든 부대를 노동계급의 정당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정당이 노동계급의 다른 부대와 구별되는 점은 무엇보다도, 정당이 단순한 부대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전위 부대, 의식적인 부대, 마르크스주의 부대라는 데 있다. 정당은 사회생활에 대한 지식, 사회생활 발전 법칙에 대한 지식, 계급투쟁 법칙에 대한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노동계급을 이끌고 그 투쟁을 지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분과 전체를 혼동할 수 없듯이 정당과 노동계급을 혼동할 수 없으며, 파업에 참가한 사람이면 누구나 스스로를 당원이라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도 없다. 정당과 계급을 혼동하는 자는 정당의 의식 수준을 “파업 참가자 누구나”의 수준으로 낮추는 자이며, 노동계급의 전위적이고 의식적인 부대로서의 정당을 파괴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정당의 임무는 자신의 수준을 “파업 참가자 누구나”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을, “파업 참가자 누구나”를 정당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우리는 계급의 정당이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계급이 (그리고 전시에, 내전 시기에는 완전히 모든 계급이) 우리 당의 지도 아래 행동해야 하며, 가능한 한 긴밀하게 우리 당에 결합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아래에서 거의 모든 계급이나 계급 전체가 언젠가 자신의 전위 부대, 자신의 사회민주당의 의식과 활동성의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닐로프식 공상이며 ‘꼬리주의’일 것이다”라고 레닌은 썼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직업 조직(더 원시적이고, 발전하지 못한 층의 의식에도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조직)조차 노동계급의 거의 전부나 전부를 포괄할 수 없다는 점을 의심한 분별 있는 사회민주주의자는 아직 한 명도 없었다. 스스로를 속이고, 우리 임무의 방대함에 눈을 감고, 이 임무를 좁히는 것은 전위 부대와 그에게 끌리는 모든 대중 사이의 차이를 잊고, 전위 부대가 갈수록 더 넓은 층을 이 전위의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한다는 항구적 의무를 잊는 것일 뿐이다.” (레닌, 제6권, 205~206쪽)
2) 정당은 노동계급의 전위적이고 의식적인 부대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원에게 의무적인 자신의 규율을 가진 노동계급의 조직된 부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당원은 반드시 당 조직 가운데 하나의 구성원이어야 한다. 만약 정당이 계급의 조직된 부대, 조직의 체계가 아니라, 스스로를 당원이라고 선언하면서도 당 조직의 어느 하나에도 들어가지 않고, 따라서 조직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당의 결정에 복종할 의무도 없는 사람들의 단순한 총합이라면 — 정당은 결코 통일된 의지를 가질 수 없을 것이며, 당원들의 행동 통일을 결코 실현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노동계급의 투쟁을 지도할 가능성도 없을 것이다. 정당이 노동계급의 투쟁을 실제로 지도하고 노동계급을 하나의 목표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든 당원이 의지의 통일, 행동의 통일, 규율의 통일로 굳게 결합된 하나의 공동 부대로 조직될 경우뿐이다.
멘셰비키는 그렇게 되면 많은 인텔리겐치야, 이를테면 교수, 대학생, 김나지움 학생 등이 당 밖에 남게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들이 당의 이런저런 조직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 것은 당 규율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거나, 플레하노프가 제2차 당대회에서 말했듯이 “어느 지방 조직에 가입하는 것을 자신에게 굴욕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멘셰비키의 이 반박은 도리어 멘셰비키 자신을 논박한다. 당 규율을 부담스러워하고 당 조직에 가입하기를 두려워하는 당원은 당에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규율과 조직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당원이 되기로 결심했다면 기꺼이 조직에 가입한다. 규율과 조직을 두려워하는 것은 개인주의적 성향의 인텔리겐치야이며, 이들은 실제로 당 밖에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좋은 일이다. 당은 불안정한 분자들의 쇄도, 특히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고양되기 시작한 지금 더욱 거세진 쇄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내가 당은 조직들의 총합(단순한 산술적 총합이 아니라 복합체)이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 나는 이로써 당이 계급의 전위 부대로서 가능한 한 더 조직된 존재가 되어야 하며, 최소한의 조직성이라도 받아들이는 분자들만을 당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나의 소망과 요구를 완전히 명확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같은 책, 203쪽).
그리고 또 이렇게 썼다.
“말로는 마르토프의 공식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광범한 층의 이익을 옹호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공식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규율과 조직을 꺼리는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야의 이익에 이바지할 것이다. 인텔리겐치야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특수한 층으로서 대체로 바로 개인주의와 규율 및 조직에 대한 무능력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을 누구도 감히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같은 책, 212쪽).
그리고 다시 이렇게 썼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조직과 규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조직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는 교수 선생들과 김나지움 학생들을 조직의 통제 아래 한 일을 이유로 당원으로 인정해 주는 데에는 마음을 쓰지 않을 것이다…… 우리 당에서 조직과 규율의 정신에 입각한 자기 교육이 부족한 쪽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일부 인텔리겐치야이다”(같은 책, 307쪽).
3) 당은 단순히 조직된 부대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다른 모든 조직 가운데 “조직의 최고 형태”이며, 노동계급의 나머지 모든 조직을 지도하도록 부름받은 조직이다. 당은 선진 이론과 계급투쟁 법칙에 대한 지식, 혁명운동의 경험으로 무장한 계급의 가장 우수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의 최고 형태로서, 노동계급의 다른 모든 조직을 지도할 모든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또 지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당의 지도적 역할을 축소하고 깎아내리려는 멘셰비키의 시도는 당이 지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다른 모든 조직을 약화시키며—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약화시키고 무장해제하게 된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권력을 얻기 위한 투쟁에서 조직 외에 다른 무기가 없기” 때문이다(같은 책, 328쪽).
4) 당은 노동계급의 전위대와 노동계급의 수백만 대중을 잇는 연계를 구현한 것이다. 당이 아무리 훌륭한 전위대이고 아무리 잘 조직되어 있다 하더라도, 비당원 대중과의 연계 없이, 이 연계의 확대 없이, 이 연계의 강화 없이는 살아갈 수도 발전할 수도 없다. 자기 안에 갇혀 대중으로부터 고립되고 자기 계급과의 연계를 잃거나 약화시키기만 한 당은—대중의 신뢰와 지지를 잃을 수밖에 없고—따라서—필연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다. 당이 충만한 삶을 살고 발전하려면 대중과의 연계를 확대하고 자기 계급의 수백만 대중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사회민주당이 되려면, 레닌은 말했다, 바로 계급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레닌, 제6권, 208쪽).
5) 당이 올바르게 기능하고 대중을 계획적으로 지도하려면 중앙집권제 원칙 위에 조직되어야 한다. 단일한 당 규약과 단일한 당 규율을 두고, 맨 위에 단일한 지도 기관을 두되, 당대회가 이를 대표하고 당대회와 당대회 사이에는 당 중앙위원회가 이를 대표하며, 소수가 다수에, 개별 조직이 중앙에, 하급 조직이 상급 조직에 복종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 없이는 노동계급의 당은 진정한 당일 수 없고, 계급을 지도하는 자기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물론 차르 전제정치 아래에서 당이 비합법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당시 당 조직은 아래로부터의 선거제 원칙 위에 세워질 수 없었고, 그 때문에 당은 철저히 비밀 활동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레닌은 우리 당의 삶에서 이것이 일시적 현상이며, 차리즘이 청산되는 첫날부터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때에는 당이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당이 되고, 당 조직은 민주적 선거 원칙 위에, 민주적 중앙집권제 원칙 위에 세워질 것이었다.
“이전에 우리 당은, 레닌은 썼다, 형식적으로 조직된 전체가 아니라 개별 집단들의 총합일 뿐이었고, 따라서 이 집단들 사이에는 사상적 영향 외에 다른 관계가 있을 수 없었다. 이제 우리는 조직된 당이 되었으며, 이것은 곧 권력의 창출, 사상의 권위가 권력의 권위로 바뀌는 것, 하급 기관이 당의 상급 기관에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같은 책, 291쪽).
레닌은 멘셰비키가 조직적 허무주의와, 자기 위에 당의 권력과 당 규율을 허용하지 않는 귀족적 아나키즘에 빠져 있다고 비난하며 이렇게 썼다.
“러시아 허무주의자에게는 이 귀족적 아나키즘이 특히 두드러진다. 그에게 당 조직은 괴물 같은 ‘공장’으로 보이고, 부분이 전체에, 소수가 다수에 복종하는 것은 ‘농노화’로 보인다…… 중앙의 지도 아래 이루어지는 분업은 그로 하여금 인간을 ‘톱니바퀴와 나사’로 만든다며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비명을 지르게 한다(이때 이러한 전환 가운데 특히 치명적인 것은 편집자가 협력자로 바뀌는 것이라고 여긴다). 당의 조직 규약이 언급되면 그는 경멸적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형식주의자들’을 두고) 규약 없이도 전혀 지낼 수 있다는 식의 얕보는 말을 던진다”(같은 책, 310쪽).
6) 당이 자기 대열의 통일을 유지하려면 실천에서 단일한 프롤레타리아 규율을 관철해야 한다. 이 규율은 지도자에게나 평당원에게나 모든 당원에게 똑같이 의무적이다. 따라서 당 안에 규율이 의무적이지 않은 ‘선택받은 자’와 규율에 복종할 의무가 있는 ‘선택받지 못한 자’의 구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조건 없이는 당의 온전함과 그 대열의 통일을 유지할 수 없다.
“대회가 임명한 편집국에 반대하는 마르토프 일파에게 합리적인 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은, 레닌이 썼다, 그들 자신의 ‘우리는 농노가 아니다!’라는 말로 가장 잘 설명된다…… 자신을 대중 조직과 대중적 규율보다 높이 서 있는 ‘선택받은 영혼’으로 여기는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야의 심리가 여기서 놀랍도록 뚜렷하게 드러난다…… 인텔리겐치야적 개인주의에는…… 모든 프롤레타리아적 조직과 규율이 농노제로 보인다”(같은 책, 282쪽).
그리고 이어서:
“우리에게 진정한 당이 형성되어 감에 따라, 의식 있는 노동자는 아나키즘적 문구를 뽐내는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야의 심리와 프롤레타리아 군대 전사의 심리를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당원의 의무 이행을 평당원뿐 아니라 ‘상층 인사’에게도 요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같은 책, 312쪽).
의견 차이에 대한 분석을 총괄하고 멘셰비키의 입장을 “조직 문제에서의 기회주의”로 규정하면서, 레닌은 멘셰비키주의의 주된 죄과 가운데 하나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해방을 위해 싸울 때 쓰는 무기인 당 조직의 의의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멘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당 조직이 혁명의 승리에 중대한 의의를 지니지 않는다고 여겼다. 레닌은 멘셰비키와 달리, 승리하는 데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적 결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승리하려면 사상적 통일을 프롤레타리아트 조직의 “물질적 통일”로 “공고히” 해야 한다고 보았다. 레닌은 오직 이 조건에서만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적의 힘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레닌이 썼다, 권력 투쟁에서 조직 외에 다른 무기가 없다. 부르주아 세계에서 무정부적 경쟁의 지배로 분열되고, 자본을 위한 강제 노동에 짓눌리고, 완전한 궁핍과 야만화와 퇴화의 ‘밑바닥’으로 끊임없이 내던져지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마르크스주의 원칙에 의한 사상적 결합이 수백만 근로 대중을 노동계급의 군대로 결집시키는 조직의 물질적 통일로 공고해지는 덕분에만 무적의 힘이 될 수 있고 또 반드시 될 것이다. 이 군대 앞에서는 러시아 전제정치의 노쇠한 권력도, 국제 자본의 쇠퇴해 가는 권력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레닌, 제6권, 328쪽).
레닌은 이 예언적인 말로 자신의 책을 끝맺는다.
이상이 레닌이 그의 유명한 책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에서 전개한 조직상의 기본 명제이다.
이 책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서클주의에 맞서 당성을, 조직 파괴자들에 맞서 당을 옹호하고, 조직 문제에서 멘셰비키적 기회주의를 격파하고, 볼셰비키당의 조직적 기초를 놓았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의의가 이것으로 다하는 것은 아니다. 그 역사적 의의는 레닌이 이 책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당에 관한 학설, 곧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 조직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에 쥐어진 기본 무기이고, 이 무기 없이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학설을 정립했다는 데 있다.
레닌의 책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가 당 일꾼들 사이에 보급된 결과, 대다수 지방 조직이 레닌 주위로 결집했다.
그러나 조직들이 볼셰비키 주위로 긴밀히 결집하면 할수록 멘셰비키 지도자들은 더욱 악에 받쳐 행동했다.
1904년 여름, 멘셰비키는 플레하노프의 도움과 타락한 볼셰비키 두 사람, 크라신과 노스코프의 배신 덕분에 중앙위원회에서 다수를 장악했다. 멘셰비키가 분열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이스크라』와 중앙위원회를 잃은 것은 볼셰비키를 어려운 처지에 빠뜨렸다. 볼셰비키 자신의 신문을 조직할 필요가 있었다. 당의 새로운 중앙위원회를 만들고 멘셰비키와 결판을 내기 위해 새로운 제3차 당대회를 조직할 필요가 있었다.
이 일에 레닌이 나섰고, 볼셰비키가 나섰다.
볼셰비키는 제3차 당대회 소집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1904년 8월, 스위스에서 레닌의 지도 아래 22명의 볼셰비키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당에게」라는 호소문을 채택했는데, 이는 볼셰비키에게 제3차 당대회 소집을 위한 투쟁 강령이 되었다.
볼셰비키 위원회들의 세 지역 협의회(남부, 캅카스, 북부)에서 다수파 위원회 중앙국이 선출되었고, 이 중앙국이 제3차 당대회를 위한 실질적 준비를 이끌었다.
1905년 1월 4일, 볼셰비키 신문 『전진』 제1호가 나왔다.
이리하여 당 안에는 각자의 중앙과 각자의 출판 기관을 가진 두 개의 분리된 분파, 즉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형성되었다.
간단한 결론.
1901~1904년 기간에 혁명적 노동운동의 성장을 기반으로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주의 조직들이 성장하고 강화되었다. 「경제주의자」들과의 완강한 원칙적 투쟁에서 레닌의 『이스크라』의 혁명적 노선이 승리했고, 사상적 혼란과 「수공업적 방식」이 극복되었다.
『이스크라』는 흩어진 사회민주주의 서클과 집단을 서로 연결하고 제2차 당대회를 준비했다. 1903년 제2차 당대회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결성되었고, 강령과 당 규약이 채택되었으며, 당의 중앙 지도 기관들이 창설되었다.
제2차 당대회에서 벌어진 이스크라 노선의 최종 승리를 위한 투쟁 속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부에 두 집단이 나타났다. 볼셰비키 집단과 멘셰비키 집단이다.
제2차 당대회 이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의 주요한 견해 차이는 조직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멘셰비키는 「경제주의자」들과 가까워져 당 안에서 그들의 자리를 차지했다. 멘셰비키의 기회주의는 당분간 조직 문제 분야에서 드러났다. 멘셰비키는 레닌 유형의 전투적 혁명 정당에 반대했다. 그들은 윤곽이 모호하고 조직되지 않은 꼬리주의적 정당을 주장했다. 그들은 당 안에서 분열 노선을 밀고 나갔다. 그들은 플레하노프의 도움으로 『이스크라』와 중앙위원회를 장악하고, 이 중앙 기관들을 자신들의 분열주의적 목적에 이용했다.
멘셰비키 측의 분열 위협을 본 볼셰비키는 분열주의자들을 억제할 조치를 취하고, 제3차 당대회 소집을 위해 지방 조직들을 동원하고, 자신들의 신문 『전진』을 발간했다.
이리하여 제1차 러시아 혁명 직전, 이미 시작된 러일전쟁 시기에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서로 분리된 정치 집단으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