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역사 단기강좌 (1938년 초판)
인물이오시프 스탈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안드레이 즈다노프, 예멜리얀 야로슬랍스키, 표트르 포스펠로프, 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용어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역사 단기강좌,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
제7장 10월 사회주의 혁명의 준비와 수행 시기의 볼셰비키당 (1917년 4월~1918년)
1. 2월 혁명 이후 국내 정세. 당의 지하 탈출과 공개적 정치 활동으로의 이행. 레닌의 페트로그라드 도착. 레닌의 4월 테제.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에 대한 당의 방침.
사건들과 임시정부의 행동은 나날이 볼셰비키 노선의 정당성을 확인해 주었다. 그것들은 임시정부가 인민을 위하지 않고 인민에 반대하며, 평화를 위하지 않고 전쟁을 위하고, 평화도 토지도 빵도 주려 하지 않고 줄 수도 없음을 갈수록 분명히 보여 주었다. 볼셰비키의 설명 활동은 유리한 토양을 만났다.
노동자와 병사들이 차르 정부를 전복하고 군주제의 뿌리를 뽑고 있는 동안, 임시정부는 군주제를 보존하는 쪽으로 분명히 기울었다. 임시정부는 1917년 3월 2일 구치코프와 슐긴을 몰래 차르에게 보냈다. 부르주아지는 니콜라이 로마노프의 동생 미하일에게 권력을 넘기려 했다. 그러나 철도 노동자 집회에서 구치코프가 “황제 미하일 만세”라는 외침으로 연설을 마치자, 노동자들은 구치코프를 즉각 체포하고 수색하라고 요구하며 분개하여 말했다. “무나 겨자나 매한가지다.”
노동자들이 군주제 복원을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노동자와 농민이 혁명을 수행하며 피를 흘리면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빵과 토지를 얻으려 애쓰며, 경제 파탄과의 투쟁에서 단호한 조치를 요구하고 있을 때, 임시정부는 인민의 이러한 절실한 요구에 귀를 막고 있었다. 자본가와 지주의 가장 저명한 대표자들로 구성된 이 정부는 농민에게 토지를 넘겨 달라는 요구를 들어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또한 이 정부는 근로 대중에게 빵을 줄 수도 없었다. 그러려면 대규모 곡물 상인의 이익을 건드려야 했고, 온갖 수단으로 지주와 쿨라크에게서 곡물을 거두어들여야 했는데, 정부 자신이 이 계급들의 이익과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 평화를 줄 수도 없었다. 영국·프랑스 제국주의자들과 결탁한 임시정부는 전쟁을 끝낼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혁명을 이용하여 러시아가 제국주의 전쟁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고, 콘스탄티노플과 해협을 점령하고 갈리치아를 점령하려는 자신의 제국주의적 계획을 실현하려 했다.
임시정부의 정책을 믿던 인민 대중의 신뢰가 머지않아 끝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2월 혁명 후 형성된 이중권력이 더 이상 오래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사건의 흐름은 권력이 어느 한곳, 즉 임시정부의 울타리 안이든 소비에트의 손이든 한곳에 집중되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물론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의 타협 정책은 아직은 인민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머지않아 제헌의회가 열려 모든 것을 잘 처리해 줄 것”이라고 믿는 노동자가 적지 않았고, 병사와 농민은 더욱 많았다. 이들은 전쟁이 약탈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닌은 이런 사람들을 선의로 오도된 조국방위파라고 불렀다. 이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혁명당원·멘셰비키의 약속과 설득의 정책은 아직은 옳은 정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약속과 설득이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사건의 흐름과 임시정부의 행동이 날이 갈수록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의 타협 정책이 질질 끌며 남을 쉽게 믿는 사람들을 속이는 정책임을 드러내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대중의 혁명 운동에 대한 은밀한 투쟁 정책, 혁명에 반대하는 막후 모략 정책에만 늘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때로는 민주적 자유에 대한 공공연한 공세로 넘어가려는 시도, 특히 병사들 사이에서 “규율을 회복”하려는 시도,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시도, 즉 혁명을 부르주아지에게 필요한 틀 안에 가두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이 방향으로 아무리 애써도 성공하지 못했고, 인민 대중은 민주적 자유 — 언론·출판·결사·집회·시위의 자유 — 를 열성적으로 행사했다. 노동자와 병사는 처음으로 쟁취한 민주적 권리를 최대한 활용하여 나라의 정치 생활에 적극 참여하고, 조성된 정세를 이해하고 따져 보아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려고 애썼다.
2월 혁명 후, 차리즘의 극히 어려운 조건 속에서 비합법적으로 활동하던 볼셰비키당 조직들은 지하에서 나와 공개적인 정치·조직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볼셰비키 조직의 당원 수는 4만~4만 5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투쟁 속에서 단련된 간부들이었다. 당 위원회들은 민주적 중앙집권제 원칙에 따라 개편되었다. 모든 당 기관의 선거제가 아래로부터 위까지 확립되었다.
당이 합법적 지위로 이행하자 당 내의 의견 차이가 드러났다. 예컨대 카메네프와 모스크바 조직의 일부 활동가인 리코프, 부브노프, 노긴은 임시정부와 조국방위파의 정책을 조건부로 지지한다는 준멘셰비키적 입장에 서 있었다. 막 유배에서 돌아온 스탈린, 몰로토프 및 그 밖의 사람들은 당의 다수와 함께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 정책을 고수했으며, 조국방위론에 반대하고 평화를 위한 적극적 투쟁,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을 호소했다. 당 활동가의 일부는 오랜 감옥이나 유배 생활의 결과로 정치적으로 뒤떨어진 탓에 동요했다.
당의 지도자 레닌이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1917년 4월 3일(16일), 오랜 망명 생활 끝에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왔다.
레닌의 귀국은 당과 혁명에 막대한 의의를 지녔다.
레닌은 아직 스위스에 있을 때, 혁명에 관한 첫 소식만을 접하고서도 『멀리서 보낸 편지』에서 당과 러시아 노동계급에게 이렇게 썼다.
“노동자들이여! 여러분은 차리즘에 반대하는 내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민의 영웅주의가 낳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여러분은 혁명의 제2단계에서 자신의 승리를 준비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와 전 인민의 조직이 낳는 기적을 보여주어야 한다”(레닌, 제20권, 19쪽).
레닌은 4월 3일 밤에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다. 핀란드 역과 역 앞 광장에는 레닌을 맞이하려고 수천 명의 노동자, 병사, 수병이 모였다. 레닌이 객차에서 내리자 형언할 수 없는 환희가 대중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레닌을 번쩍 들어 올려 자기들의 지도자를 그대로 역의 큰 홀로 메고 들어갔다. 그곳에서 멘셰비키 치헤이제와 스코벨레프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환영” 연설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연설에서 그들은 레닌이 자기들과 “공통의 언어”를 찾으리라는 “희망을 표명”했다. 그러나 레닌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들 곁을 지나 노동자와 병사 대중에게 다가가 장갑차 위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으며, 그 연설에서 대중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위한 투쟁을 호소했다. “사회주의 혁명 만세!” — 레닌은 오랜 망명 생활 끝에 한 이 첫 연설을 이렇게 맺었다.
러시아에 도착한 레닌은 온 힘을 다해 혁명 활동에 몸을 바쳤다. 도착한 이튿날 레닌은 볼셰비키 회의에서 전쟁과 혁명에 관해 보고했고, 이어 볼셰비키 외에 멘셰비키도 참석한 회의에서 자기 보고의 테제를 되풀이했다.
이것이 바로 당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하는 명확한 혁명 노선을 제시한 레닌의 유명한 4월 테제였다.
레닌의 테제는 혁명과 당의 이후 활동에 막대한 의의를 지녔다. 혁명은 나라의 생활에서 가장 큰 전환을 뜻했고, 당은 차리즘을 전복한 뒤의 새로운 투쟁 조건에서 새로운 방향 설정이 필요했으며, 그래야 대담하고 확신 있게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레닌의 테제가 당에 이 방향 설정을 주었다.
레닌의 4월 테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 곧 혁명의 제1단계에서 제2단계 — 사회주의 혁명 단계 — 로의 이행을 위한 당의 투쟁에 천재적인 계획을 제시했다. 당은 이전의 모든 역사를 통해 이 위대한 과업에 대비해 왔다. 이미 1905년에 레닌은 소책자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에서, 차리즘을 전복한 뒤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 혁명의 실현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테제에서 새로운 점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하는 일에 착수하기 위한, 이론적으로 근거를 갖춘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했다는 것이었다.
경제 분야에서 과도적 조치는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동시에 나라 안의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모든 은행을 하나의 국립은행으로 합병하여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통제를 도입하며, 사회적 생산과 생산물 분배에 대한 통제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정치 분야에서 레닌은 의회제 공화국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이행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실천에서 중대한 전진이었다.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의회제 공화국을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최선의 정치 형태로 여겼다. 이제 레닌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사회의 정치 조직 형태로서 가장 적합한 것은 소비에트 공화국이라고 하여, 의회제 공화국을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러시아에서 현 시기의 특징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과 조직성이 부족하여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넘겨준 혁명의 제1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가장 가난한 계층의 손에 권력을 넘겨주어야 할 제2단계로 이행하는 데 있다”고 테제는 말했다(같은 책, 83쪽).
그리고 이어서: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에서 의회제 공화국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후퇴일 것이다 — 온 나라의 아래에서 위까지 노동자·고농·농민 대표 소비에트의 공화국이다”(레닌, 제20권, 88쪽).
레닌은 새 임시정부 아래에서도 전쟁은 여전히 약탈적인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말했다. 당의 과업은 이 점을 대중에게 설명하고, 부르주아지를 타도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강압적인 평화가 아니라 진정으로 민주적인 평화로 끝낼 수 없음을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임시정부에 대해 레닌은 “임시정부에 대한 어떠한 지지도 안 된다!”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레닌은 테제에서 또한 우리 당이 아직 소비에트에서 소수이며, 그곳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부르주아지의 영향을 퍼뜨리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의 블록이 지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당의 과업은 다음과 같았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혁명 정부의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이며, 따라서 이 정부가 부르주아지의 영향을 받는 동안 우리의 과업은 오직 대중의 실천적 요구에 특히 맞추어 그들의 전술이 범한 오류를 인내심 있게, 체계적으로, 끈질기게 설명하는 일일 수 있음을 대중에게 설명하는 것. 우리가 소수인 동안 우리는 오류를 비판하고 밝히는 일을 하며, 동시에 모든 국가 권력이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로 넘어가야 할 필요성을 선전한다…”(같은 책, 88쪽).
이는 레닌이 당시 소비에트의 신뢰를 받고 있던 임시정부에 대한 봉기를 호소하지도, 그 타도를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설명과 포섭 활동을 통해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얻고, 소비에트의 정책을 바꾸고, 소비에트를 통해 정부의 구성과 정책을 바꾸려 했음을 의미했다.
이는 혁명의 평화적 발전을 향한 방침이었다.
레닌은 나아가 “더러운 속옷”을 벗어던질 것, 즉 사회민주당이라는 당 이름을 버릴 것을 요구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도, 러시아 멘셰비키도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기회주의자들, 사회주의의 배신자들에 의해 더럽혀지고 욕되게 되었다. 레닌은 볼셰비키당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기 당을 불렀던 것처럼 공산당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했다. 이 이름은 과학적으로 올바른데, 볼셰비키당의 최종 목적이 공산주의의 달성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자본주의에서 직접 사회주의로, 곧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와 각자의 노동에 따른 생산물 분배로만 넘어갈 수 있다. 레닌은 우리 당이 더 멀리 본다고 말했다.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점차 공산주의로 성장해야 하며, 공산주의의 깃발에는 “각자에게서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라고 쓰여 있다.
마지막으로 레닌은 자신의 테제에서 새로운 인터내셔널, 곧 기회주의와 사회쇼비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운 제3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창설할 것을 요구했다.
레닌의 테제는 부르주아지,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원들 사이에서 격렬한 아우성을 불러일으켰다.
멘셰비키는 노동자들에게 호소문을 냈는데, 그 글은 혁명이 위험에 처했다는 경고로 시작되었다. 멘셰비키의 견해로는, 위험은 볼셰비키가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로 권력을 넘길 것을 요구하고 나선 데 있었다.
플레하노프는 자신의 신문 『예딘스트보』에 레닌의 연설을 “헛소리”라고 부른 글을 실었다. 플레하노프는 “혁명 밖에는 레닌 한 사람만 남을 것이고, 우리는 우리 길을 갈 것이다”라고 선언한 멘셰비키 치헤이제의 말을 끌어댔다.
4월 14일 페트로그라드 전시(全市) 볼셰비키 협의회가 열렸다. 협의회는 레닌의 테제를 승인하고 이를 자기 활동의 기초로 삼았다.
얼마 뒤 당의 지방 조직들도 레닌의 테제를 승인했다.
카메네프, 리코프, 퍄타코프 같은 몇몇 개인을 제외한 당 전체가 레닌의 테제를 크나큰 만족으로 받아들였다.
2. 임시정부 위기의 시작. 볼셰비키당 4월 협의회.
볼셰비키가 혁명의 한층 더 큰 전개를 준비하고 있을 때, 임시정부는 계속해서 반인민적 행위를 일삼았다. 4월 18일 임시정부 외무장관 밀류코프는 협상국 동맹국들에 “세계대전을 결정적 승리로 끝까지 이끌려는 전 인민의 열망과, 임시정부가 우리 동맹국들에 대해 진 의무를 완전히 준수할 의향”을 밝혔다.
이렇게 임시정부는 차르의 조약들에 충성을 맹세했고, 제국주의자들이 “승리의 종결”을 이루는 데 필요한 만큼의 인민의 피를 더 흘리겠다고 약속했다.
4월 19일 이 성명(“밀류코프 각서”)이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알려졌다. 4월 20일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대중에게 임시정부의 제국주의 정책에 항의할 것을 호소했다. 1917년 4월 20~21일(5월 3~4일) 최소 10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병사 대중이 “밀류코프 각서”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혀 시위에 나섰다. 깃발에는 “비밀 조약을 공표하라!”, “전쟁 타도!”,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가 울긋불긋 나부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넵스키 거리와 다른 곳에서 부르주아지의 개별 집단과 충돌이 일어났다.
가장 노골적인 반혁명분자들, 예컨대 코르닐로프 장군은 시위자들을 총살하라고 요구했고, 심지어 그에 따른 명령까지 내렸다. 그러나 군부대들은 그런 명령을 받고도 이를 집행하기를 거부했다.
당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위원 가운데 소수 집단(바그다티예프 등)이 시위 중에 임시정부를 즉각 타도하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이 “좌파” 모험주의자들의 행동을 단호히 규탄했다. 그런 구호는 시기상조이며 옳지 않고, 당이 소비에트의 다수를 자기 편으로 얻는 것을 방해하며, 혁명의 평화적 발전을 지향하는 당의 방침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4월 20~21일의 사건은 임시정부 위기의 시작을 의미했다.
이것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의 타협 정책에 생긴 첫 번째 심각한 균열이었다.
1917년 5월 2일 대중의 압력으로 밀류코프와 구치코프가 임시정부에서 물러났다.
제1차 연립 임시정부가 구성되었으며, 여기에는 부르주아지 대표들과 함께 멘셰비키(스코벨레프, 체레텔리)와 사회혁명당원(체르노프, 케렌스키 등)이 들어갔다.
이리하여 1905년에 사회민주당 대표가 임시 혁명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부정했던 멘셰비키는, 이제 자기 대표가 임시 반혁명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것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이 반혁명적 부르주아지의 진영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1917년 4월 24일 볼셰비키 제7차(4월) 협의회가 열렸다. 당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볼셰비키 협의회가 공개적으로 소집되었는데, 이 협의회는 그 의의에서 당 역사상 당대회와 같은 자리를 차지한다.
전러시아 4월 협의회는 당이 급속히 성장했음을 보여주었다. 협의회에는 표결권을 가진 대의원 133명과 발언권만 가진 대의원 18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조직된 당원 8만 명을 대표했다.
협의회는 전쟁과 혁명의 모든 기본 문제, 곧 현 정세, 전쟁, 임시정부, 소비에트, 토지 문제, 민족 문제 등에 관한 당의 노선을 토의하여 작성했다.
레닌은 보고에서 이미 4월 테제에서 밝힌 명제들을 발전시켰다. 당의 임무는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준 … 혁명의 제1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층의 손에 권력을 넘겨주어야 할 제2단계로” 이행하는 것이었다(레닌). 당은 사회주의 혁명을 준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했다. 당의 당면 과제로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는 이중권력, 곧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사이의 권력 분할을 끝내야 하며,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 넘기고 지주와 자본가의 대표들은 권력 기관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협의회는 당의 가장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임시정부는 그 성격상 지주와 부르주아지의 지배 기관이다”라는 진리를 대중에게 끊임없이 설명하는 것이라고 확정했다. 아울러 거짓 약속으로 인민을 속이고 제국주의 전쟁과 반혁명의 타격 앞에 인민을 내몰고 있는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의 타협 정책이 얼마나 해로운지를 폭로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확정했다.
협의회에서 레닌에 반대하여 카메네프와 리코프가 발언했다. 그들은 멘셰비키를 따라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을 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으며, 러시아에서는 부르주아 공화국만이 가능하다고 되풀이했다. 그들은 당과 노동계급에게 임시정부를 “통제”하는 데 그치라고 제안했다. 본질적으로 그들도 멘셰비키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유지, 부르주아지 권력의 유지라는 입장에 서 있었다.
지노비예프도 볼셰비키당이 침메르발트 연합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이 연합과 결별하고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창설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협의회에서 레닌에 반대하여 발언했다. 전쟁 기간이 보여주었듯이, 이 연합은 평화를 위한 선전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부르주아 조국방위파와 결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레닌은 이 연합에서 즉시 탈퇴하고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지노비예프는 침메르발트파와 함께 남을 것을 제안했다. 레닌은 지노비예프의 이 발언을 단호히 규탄하면서 그의 전술을 “극단적으로 기회주의적이고 해로운” 것이라고 했다.
4월 협의회는 토지 문제와 민족 문제도 논의했다.
토지 문제에 관한 레닌의 보고에 따라 협의회는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위원회의 처분에 넘기고, 국내의 모든 토지를 국유화한다는 결정을 채택했다. 볼셰비키는 농민층에게 토지를 위한 투쟁에 나서라고 호소했으며, 볼셰비키당이 농민이 지주를 타도하는 것을 실제로 돕는 유일한 혁명 정당임을 농민 대중에게 입증했다.
민족 문제에 관한 스탈린 동지의 보고는 큰 의의를 지녔다. 레닌과 스탈린은 혁명 이전, 제국주의 전쟁 직전에 이미 민족 문제에 관한 볼셰비키당 정책의 기초를 마련했다. 레닌과 스탈린은 프롤레타리아트 당이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피압박 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하여 볼셰비키당은 분리와 독립 국가 수립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자결권을 옹호했다. 이 관점을 협의회에서 중앙위원회 보고자인 스탈린 동지가 옹호했다.
레닌과 스탈린에 반대하여 퍄타코프가 발언했는데, 그는 부하린과 함께 전쟁 기간에 이미 민족 문제에서 민족 쇼비니즘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퍄타코프와 부하린은 민족의 자결권에 반대했다.
민족 문제에서 당의 단호하고 일관된 입장, 민족의 완전한 평등과 민족적 압박 및 민족적 불평등의 모든 형태를 없애기 위한 당의 투쟁은 피압박 민족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게 해주었다.
4월 협의회가 채택한 민족 문제에 관한 결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족적 압박 정책은 전제정치와 군주제의 유산으로서, 지주·자본가·소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계급적 특권을 지키고 여러 민족의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려는 이해관계에서 이를 지지한다. 현대 제국주의는 약소 민족을 예속시키려는 경향을 강화함으로써 민족적 압박을 격화시키는 새로운 요인이 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족적 압박의 제거가 달성될 수 있는 한, 그것은 모든 민족과 언어의 완전한 평등을 보장하는 철저히 민주적인 공화제 국가 체제와 국가 운영 아래서만 가능하다. 러시아를 구성하는 모든 민족에게는 자유롭게 분리하고 독립 국가를 세울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한 권리를 부인하고 그 실제적 실현을 보장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강탈 또는 병합 정책을 지지하는 것과 같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족의 분리 권리를 인정할 때에만 여러 민족 노동자들의 완전한 단결이 보장되고 민족들의 진정으로 민주적인 접근이 촉진된다... 민족의 자유로운 분리 권리에 관한 문제를, 어느 민족이 어느 시점에 분리하는 것이 합목적적인가 하는 문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후자의 문제는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이 개별 사안마다 사회 발전 전체의 이익과 사회주의를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완전히 독자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당은 광범한 지역 자치, 위로부터의 감독 폐지, 의무적인 국가 언어 폐지, 그리고 자치 지역과 자치 구역의 경계를 지방 주민 스스로가 경제적·생활 조건, 주민의 민족 구성 등을 고려하여 정할 것을 요구한다.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은 이른바 ‘문화·민족 자치’, 즉 학교 사업 등을 국가의 관할에서 떼어내 일종의 민족 의회의 손에 넘기는 것을 단호히 배격한다. 같은 지역에 살고 심지어 같은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문화·민족 자치는 이런저런 ‘민족 문화’에 속하는가에 따라 인위적으로 갈라놓는다. 다시 말해 개별 민족의 부르주아 문화와 노동자들의 연계를 강화하는데, 사회민주주의의 과제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문화를 강화하는 데 있다. 당은 어느 한 민족의 어떠한 특권도, 민족적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어떠한 침해도 무효로 선언하는 기본법을 헌법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한다. 노동계급의 이익은 러시아 모든 민족의 노동자들이 정치적·직업적·협동조합적·계몽적 조직 등 단일한 프롤레타리아트 조직으로 융합할 것을 요구한다. 여러 민족 노동자들이 단일한 조직으로 이렇게 융합해야만 프롤레타리아트는 국제 자본 및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승리를 거두며 싸울 수 있다”(『결의문집 속의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제1부, 239~240쪽).
이와 같이 4월 협의회에서는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퍄타코프, 부하린, 리코프와 그들의 소수 동조자들의 기회주의적이고 반레닌적인 노선이 폭로되었다.
협의회는 모든 중요한 문제에서 명확한 입장을 취하고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향한 노선을 추진하면서 만장일치로 레닌을 따랐다.
3. 수도에서 볼셰비키당의 성공. 전선에서 임시정부 군대의 실패한 공세. 노동자와 병사의 7월 시위 진압.
당은 4월 협의회의 결정에 기초하여 대중을 획득하고 그들을 전투적으로 교육하고 조직하기 위한 방대한 사업을 전개했다. 이 시기 당의 노선은 볼셰비키 정책을 끈기 있게 설명하고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의 타협주의를 폭로함으로써 이들 정당을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에서의 활동 외에도 볼셰비키는 노동조합과 공장위원회에서 방대한 활동을 벌였다.
볼셰비키는 특히 군대에서 큰 활동을 전개했다. 곳곳에 군사 조직이 창설되기 시작했다. 전선과 후방에서 볼셰비키는 병사와 수병을 조직하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활동했다. 병사들을 혁명화하는 데 특히 큰 역할을 한 것은 볼셰비키의 전선 신문 『참호 프라우다』였다.
볼셰비키의 이러한 선전·선동 활동 덕분에 혁명 첫 몇 달 만에 여러 도시에서 노동자들은 소비에트, 특히 구(區) 소비에트를 다시 선출하여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볼셰비키당 지지자를 선출했다.
볼셰비키의 활동은 특히 페트로그라드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1917년 5월 30일~6월 3일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협의회가 열렸다. 이 협의회에서는 이미 대표의 4분의 3이 볼셰비키를 따랐다. 페트로그라드 프롤레타리아트는 거의 전적으로 볼셰비키의 구호인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따랐다.
1917년 6월 3일(16일) 제1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에서 아직 소수였다. 그들은 대회에서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원 및 기타 700~800명에 맞서 100명을 조금 넘는 대표를 가졌을 뿐이었다.
제1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볼셰비키는 부르주아지와의 타협이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을 집요하게 폭로하고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밝혔다. 레닌은 대회에서 연설하여 볼셰비키 노선이 옳음을 입증하면서, 오직 소비에트 권력만이 근로 대중에게 빵을, 농민에게 토지를 줄 수 있고 평화를 달성하며 나라를 파탄에서 건져낼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때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 구역에서는 시위를 조직하고 소비에트 대회에 요구를 제출하기 위한 대중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자발적 시위를 미리 막고 대중의 혁명적 기분을 자기 목적에 이용하려고 계산하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6월 18일(7월 1일)에 페트로그라드에서 시위를 열기로 결정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은 시위가 반(反)볼셰비키 구호 아래 진행되리라고 계산했다. 볼셰비키당은 이 시위를 준비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나섰다. 스탈린 동지는 그때 『프라우다』에 “…우리의 과제는 6월 18일 페트로그라드의 시위가 우리의 혁명적 구호 아래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1917년 6월 18일 혁명 희생자들의 묘지에서 벌어진 시위는 볼셰비키당 세력의 참다운 사열이 되었다. 이 시위는 대중의 혁명성이 높아지고 있음과 볼셰비키당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임시정부에 대한 신뢰와 전쟁 계속의 필요성을 내세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의 구호는 볼셰비키 구호의 거대한 물결 속에 묻혔다. 40만 명의 시위자는 “전쟁 타도!”, “자본가 장관 열 명 타도!”,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깃발에 적어 들고 행진했다.
이것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의 완전한 패배였고, 수도에서 임시정부가 당한 패배였다.
그러나 소비에트 제1차 대회의 지지를 받은 임시정부는 제국주의 정책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6월 18일, 임시정부는 영국·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뜻을 이행하여 전선의 병사들을 공세로 내몰았다. 부르주아지는 이 공세에서 혁명을 끝장낼 유일한 가능성을 보았다. 공세가 성공하면 부르주아지는 모든 권력을 자기 손에 장악하고, 소비에트를 밀어내고 볼셰비키를 짓밟기를 바랐다. 공세가 실패하면 그 책임을 모두 볼셰비키에게 돌리고, 군대를 해체했다고 그들을 고발할 수 있었다.
공세가 실패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공세는 실제로 실패했다. 병사들의 피로, 공세의 목적에 대한 병사들의 이해 부족, 병사들에게 낯선 지휘부에 대한 불신, 포탄과 포병의 부족 — 이 모든 것이 전선에서 공세가 실패하는 원인이 되었다.
전선에서 공세가 시작되었다는 소식, 이어 공세가 실패했다는 소식은 수도를 뒤흔들었다. 노동자와 병사들의 분노는 끝이 없었다. 임시정부가 평화 정책을 선포하면서 인민을 속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임시정부가 제국주의 전쟁을 계속하는 편에 서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소비에트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임시정부의 범죄적 행동에 맞서려 하지 않았거나 맞설 수 없었고, 스스로 그 뒤꽁무니를 따라갔다는 것이 드러났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병사들의 혁명적 분노는 넘쳐흘렀다. 7월 3일(16일) 페트로그라드의 비보르크 구에서 시위가 자발적으로 시작되었다. 시위는 온종일 계속되었다. 개별 시위는 권력을 소비에트로 넘기라는 구호 아래 거대한 전체 무장 시위로 확대되었다. 볼셰비키당은 이 시점에서 무장 봉기를 하는 데 반대했다. 당은 혁명적 위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고, 군대와 지방이 아직 수도의 봉기를 뒷받침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수도에서 고립된 채 시기상조로 일어나는 봉기는 반혁명이 혁명의 전위를 격파하기 쉽게 해줄 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이 시위에 나서는 것을 막을 수 없음이 분명해지자, 당은 시위에 참여하여 시위에 평화적이고 조직적인 성격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볼셰비키당은 이에 성공했고, 수십만의 시위자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소비에트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로 향하여, 소비에트가 권력을 자기 손에 장악하고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와 결별하며 적극적인 평화 정책을 수행할 것을 요구했다.
시위가 평화적이었음에도 시위자들에 맞서 반동 부대 — 사관후보생 부대와 장교 부대 — 가 투입되었다. 페트로그라드의 거리는 노동자와 병사들의 피로 흥건히 물들었다. 노동자들을 격파하기 위해 전선에서 가장 몽매하고 반혁명적인 군부대가 불려 왔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은 부르주아지 및 백위군 장군들과 결탁하여 노동자·병사 시위를 진압한 뒤 볼셰비키당에 덤벼들었다. 『프라우다』 편집부 사무실이 파괴되었다. 『프라우다』, 『병사의 프라우다』 등 여러 볼셰비키 신문이 폐간되었다. 거리에서 노동자 보이노프가 『프라우다 전단』을 팔았다는 이유만으로 사관후보생들에게 살해되었다. 적위대의 무장 해제가 시작되었다.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혁명적 부대는 수도에서 철수하여 전선으로 보내졌다. 후방과 전선에서 체포가 이루어졌다. 7월 7일에는 레닌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볼셰비키당의 주요 활동가 여러 명이 체포되었다. 볼셰비키 출판물을 인쇄하던 『트루드』 인쇄소가 파괴되었다. 페트로그라드 재판소 검사의 발표는 레닌과 다른 여러 볼셰비키를 “국가 반역”과 무장 봉기 조직 혐의로 재판에 회부한다고 밝혔다. 레닌에 대한 고발은 간첩과 도발자의 진술을 근거로 데니킨 장군의 사령부에서 날조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체레텔리와 스코벨레프, 케렌스키와 체르노프 같은 멘셰비키·사회혁명당원의 저명한 대표들이 참여한 연립 임시정부는 노골적인 제국주의와 반혁명의 수렁으로 굴러떨어졌다. 임시정부는 평화 정책 대신 전쟁 계속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인민의 민주적 권리를 보호하는 대신 이 권리를 없애고 노동자와 병사를 무력으로 탄압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부르주아지의 대표인 구치코프와 밀류코프가 감히 하지 못한 일을 “사회주의자” 케렌스키와 체레텔리, 체르노프와 스코벨레프가 감히 해냈다.
이중 권력은 끝났다.
이중 권력은 부르주아지에 유리하게 끝났다. 모든 권력이 임시정부의 손에 넘어갔고, 사회혁명당원·멘셰비키가 지도하는 소비에트는 임시정부의 부속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혁명의 평화적 시기는 끝났다. 총검이 일정에 올랐기 때문이다.
달라진 정세를 고려하여 볼셰비키당은 자기 전술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당은 지하로 들어가 자기 지도자 레닌을 깊은 지하에 숨기고, 무력으로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전복하고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기 위해 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4. 무장 봉기 준비를 향한 볼셰비키당의 노선. 제6차 당대회.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 신문들의 엄청난 중상모략 속에서 볼셰비키당 제6차 당대회가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제5차 런던 대회 후 10년 만에, 볼셰비키 프라하 협의회 후 5년 만에 열렸다. 대회는 1917년 7월 26일부터 8월 3일까지 계속되었으며 비합법적으로 진행되었다. 신문에는 대회 소집만 알려졌을 뿐 대회 장소는 밝혀지지 않았다. 첫 회의들은 비보르크 지구에서 열렸다. 마지막 회의들은 나르바 관문 근처의 학교 건물에서 열렸는데, 그 자리에는 지금 문화의 집이 세워져 있다. 부르주아 신문은 대회 참가자들의 체포를 요구했다. 형사들은 대회 장소를 찾느라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녔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이처럼 차르제가 무너진 지 다섯 달 만에 볼셰비키는 몰래 모여야 했고, 프롤레타리아 당의 지도자 레닌은 이 시기에 라즐리프 역 근처의 오두막에 숨어 있어야 했다.
임시정부의 앞잡이들에게 쫓기던 레닌은 대회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자신의 동지이자 제자인 스탈린, 스베르들로프, 몰로토프, 오르조니키제를 통해 지하에서 대회를 지도했다.
대회에는 표결권을 가진 대의원 157명과 발언권만 가진 대의원 128명이 참석했다. 그 무렵 당원은 약 24만 명이었다. 7월 3일까지, 즉 노동자 시위가 진압되기 전 볼셰비키가 아직 합법적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당은 인쇄 기관 41종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중 29종은 러시아어로, 12종은 다른 언어로 발행되었다.
7월 사태 때의 볼셰비키와 노동계급에 대한 박해는 우리 당의 영향력을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키웠다. 지방에서 온 대의원들은 노동자와 병사들이 대거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을 떠나고 있으며 그들을 경멸하여 "사회주의 간수"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수없이 전했다. 멘셰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당원이던 노동자와 병사들은 당원증을 찢고 저주를 퍼부으며 그 당들을 떠나, 볼셰비키에게 자기들을 당에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대회의 주요 의제는 중앙위원회의 정치 보고와 정치 정세에 관한 문제였다. 이 문제들에 관한 보고에서 스탈린 동지는 혁명을 진압하려는 부르주아지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음을 더없이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혁명이 생산과 생산물 분배에 대한 노동자 통제의 실현, 토지의 농민에게로의 이전, 권력을 부르주아지의 손에서 노동계급과 농촌 빈농의 손으로 넘기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혁명이 그 성격상 사회주의 혁명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7월 사태 이후 나라의 정치 정세는 급격히 바뀌었다. 이중권력은 사라졌다.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가 지도하는 소비에트는 모든 권력을 장악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소비에트는 힘없는 기관이 되었다. 권력은 부르주아 임시정부의 손에 집중되었고, 임시정부는 계속해서 혁명의 무장을 해제하고 그 조직들을 부수고 볼셰비키당을 짓밟았다. 혁명이 평화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스탈린 동지는 남은 길은 하나,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은 농촌 빈농과 동맹한 프롤레타리아트뿐이다.
여전히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이 지도하는 소비에트는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굴러떨어졌으며, 현재의 정세에서는 임시정부의 앞잡이 구실밖에 할 수 없다. 스탈린 동지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가 7월 사태 이후에는 철회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구호를 일시적으로 철회한다고 해서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을 포기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혁명적 투쟁 기관으로서의 소비에트 일반이 아니라,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이 지도하는 현재의 소비에트일 뿐이다.
"혁명의 평화적 시기는 끝났다 — 하고 스탈린 동지는 말했다 — 비평화적 시기, 충돌과 폭발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제6차 대회 회의록, 111쪽).
당은 무장봉기를 향해 나아갔다.
대회에는 부르주아지의 영향을 반영하여 사회주의 혁명 노선에 반대하고 나선 자들이 있었다.
트로츠키주의자 프레오브라젠스키는 권력 장악에 관한 결의에, 서방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야만 나라를 사회주의 길로 이끌 수 있다고 명시하자고 제안했다.
스탈린 동지는 이 트로츠키주의적 제안에 반대하여 나섰다.
"러시아가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여는 나라가 될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 하고 스탈린 동지는 말했다 — ……유럽만이 우리에게 길을 가리켜줄 수 있다는 낡은 생각은 버려야 한다.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와 창조적 마르크스주의가 있다. 나는 후자의 입장에 선다" (같은 책, 233~234쪽).
부하린은 트로츠키주의 입장에 서서, 농민은 조국방위파적 기분에 젖어 있고 부르주아지와 블록을 이루고 있으므로 노동계급을 따라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하린에게 반박하면서 스탈린 동지는 농민에도 여러 부류가 있다고 논증했다.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를 지지하는 부유한 농민이 있는가 하면, 노동계급과의 동맹을 추구하고 혁명의 승리를 위한 투쟁에서 노동계급을 지지할 빈농층도 있다는 것이었다.
당대회는 프레오브라젠스키와 부하린의 수정안을 부결하고 스탈린 동지의 결의안 초안을 승인했다.
당대회는 볼셰비키의 경제 강령을 토의하고 승인했다. 그 기본 조항은 지주 토지의 몰수와 국내 모든 토지의 국유화, 은행 국유화, 대공업 국유화, 생산과 분배에 대한 노동자 통제이다.
당대회는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위한 투쟁의 의의를 강조했다. 노동자 통제는 대공업 국유화로 이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제6차 당대회는 모든 결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층의 동맹이 사회주의 혁명 승리의 조건이라는 레닌의 테제를 특히 강력하게 강조했다.
당대회는 노동조합의 중립성에 관한 멘셰비키 이론을 규탄했다. 당대회는 러시아 노동계급 앞에 놓인 중대한 과제는 노동조합이 볼셰비키당의 정치적 지도를 인정하는 전투적 계급 조직으로 남아 있을 때에만 수행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당대회는 「청년 동맹에 관하여」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청년 동맹은 당시 흔히 자발적으로 생겨났다. 당은 이후의 활동 결과 이 젊은 조직들을 당의 예비대로서 당에 확고히 묶어 두는 데 성공했다.
당대회에서는 레닌의 법정 출석 문제가 토의되었다. 카메네프, 리코프, 트로츠키 등은 당대회 이전부터 레닌이 반혁명 세력의 법정에 출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탈린 동지는 레닌의 법정 출석에 단호히 반대했다. 제6차 당대회도 그것은 재판이 아니라 보복적 학살이 될 것이라고 보고 레닌의 법정 출석에 반대했다. 당대회는 부르주아지가 노리는 것이 오직 하나, 가장 위험한 적인 레닌에 대한 육체적 학살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당대회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지도자들에 대한 부르주아지와 경찰의 박해에 항의하고 레닌에게 인사를 보냈다.
제6차 당대회는 새 당 규약을 채택했다. 당 규약에는 당의 모든 조직이 민주적 중앙집권제의 원칙에 따라 구성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었다.
그것은 다음을 뜻했다.
1) 위로부터 아래까지 당의 모든 지도 기관의 선거제,
2) 당 기관이 자기 당 조직 앞에 정기적으로 보고할 의무,
3) 엄격한 당 규율과 소수의 다수에 대한 복종,
4) 상급 기관 결정의 하급 기관과 모든 당원에 대한 절대적 구속력.
당 규약에는 지방 조직이 당원 두 명의 추천을 받아 입당을 받아들이되, 당 조직 당원 총회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고 명시되었다.
제6차 당대회는 「구역간파」를 그 지도자 트로츠키와 함께 당에 받아들였다. 이들은 1913년부터 페트로그라드에 존재한 작은 집단으로, 트로츠키주의자-멘셰비키와 당에서 떨어져 나간 일부 전 볼셰비키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역간파」는 전쟁 중에 중간주의 조직이었다. 이들은 볼셰비키에 맞서 싸웠지만, 여러 점에서 멘셰비키와도 의견이 같지 않았으므로 중간적이고 동요하는 중간주의적 위치에 있었다. 제6차 당대회 때 「구역간파」는 모든 점에서 볼셰비키와 일치한다고 선언하고 자신들을 당에 받아들여 줄 것을 요청했다. 당대회는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 진정한 볼셰비키가 될 수 있으리라고 보고 요청을 들어주었다. 「구역간파」 가운데 일부, 예컨대 볼로다르스키와 우리츠키 등은 실제로 나중에 볼셰비키가 되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와 그의 가까운 친구 몇몇은 나중에 드러났듯이 당을 위해 일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을 흔들어 안에서 폭파하려고 당에 들어온 것이었다.
제6차 당대회의 모든 결정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층을 무장 봉기에 대비시키는 데 맞추어져 있었다. 제6차 당대회는 당이 무장 봉기와 사회주의 혁명을 향하도록 방향을 잡아 주었다.
당대회가 발표한 당 선언은 노동자, 병사, 농민에게 부르주아지와의 결전을 위해 힘을 준비할 것을 호소했다. 선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었다.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라, 우리의 전투 동지들이여! 굳세고 용감하고 침착하게, 도발에 넘어가지 말고 힘을 모으고, 전투 대열을 갖추어라! 당의 깃발 아래로, 프롤레타리아와 병사들이여! 우리의 깃발 아래로, 억압받는 농촌이여!”
5. 혁명에 반대한 코르닐로프 장군의 음모. 음모의 분쇄.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가 볼셰비키 편으로 넘어감.
모든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지는 힘이 빠진 소비에트를 분쇄하고 노골적인 반혁명 독재를 세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백만장자 랴부신스키는 “굶주림의 앙상한 손, 인민의 궁핍이 인민의 거짓 친구들인 민주적 소비에트와 위원회의 목을 움켜쥘 것”이라는 데에서 상황의 출구를 본다고 뻔뻔스럽게 말했다. 전선에서는 야전 군법회의와 병사에 대한 사형이 맹위를 떨쳤고, 1917년 8월 3일 총사령관 코르닐로프 장군은 후방에서도 사형을 도입할 것을 요구했다.
8월 12일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부르주아지와 지주의 힘을 동원하기 위해 임시정부가 소집한 국가 협의회가 개막되었다. 협의회에는 주로 지주, 부르주아지, 장성, 장교, 카자크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소비에트는 협의회에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이 대표했다.
국가 협의회 개막일에 볼셰비키는 항의의 뜻으로 모스크바에서 노동자 대다수를 참여시킨 총파업을 조직했다. 같은 시기에 다른 여러 도시에서도 파업이 일어났다.
사회혁명당원 케렌스키는 허풍을 떨며 협의회 연설에서 “철과 피”로 혁명 운동의 모든 시도를, 농민이 지주 토지를 제멋대로 빼앗으려는 시도까지 포함하여 진압하겠다고 위협했다.
반혁명 장군 코르닐로프는 “위원회와 소비에트를 폐지할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당시 총사령관의 사령부를 일컫던 대본영의 코르닐로프 장군에게로 은행가, 상인, 공장주들이 돈과 지원을 약속하며 줄지어 찾아갔다.
코르닐로프 장군에게는 “동맹국”, 즉 영국과 프랑스의 대표들도 찾아와 혁명에 반대하는 행동을 늦추지 말라고 요구했다.
사태는 코르닐로프 장군의 반혁명 음모로 치닫고 있었다.
코르닐로프의 음모는 공공연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사람들의 주의를 이 음모에서 돌리기 위해 음모자들은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 반년 기념일인 8월 27일에 맞춰 봉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케렌스키가 이끄는 임시정부는 볼셰비키를 맹렬히 공격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에 대한 테러를 강화했다. 동시에 코르닐로프 장군은 군대를 페트로그라드로 진격시켜 소비에트를 해산하고 군사독재 정부를 세우기 위해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코르닐로프는 자신의 반혁명 행동에 대해 사전에 케렌스키와 협의해 두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가 행동에 나선 바로 그 순간 케렌스키는 태도를 급격히 바꾸어 자기 동맹자와 선을 그었다. 케렌스키는 인민 대중이 코르닐로프 일파에 맞서 일어나 그것을 격파하면서, 만일 케렌스키 정부가 지금 당장 코르닐로프 일파와 선을 긋지 않으면 그 부르주아 정부까지 함께 쓸어버릴 것을 두려워했다.
8월 25일 코르닐로프는 크리모프 장군이 지휘하는 제3기병군단을 페트로그라드로 진격시키면서 “조국을 구할” 작정이라고 선언했다. 코르닐로프의 반란에 맞서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반혁명에 대한 적극적인 무장 반격을 호소했다. 노동자들은 재빨리 무장하고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며칠 사이에 적위대 부대는 몇 배로 늘어났다. 노동조합은 조합원을 동원했다. 페트로그라드의 혁명적 군부대들도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페트로그라드 주위에는 참호를 파고 철조망을 치고 철도 인입선을 뜯어냈다. 무장한 크론시타트 수병 수천 명이 페트로그라드 방어를 위해 도착했다.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해 오던 “야만 사단”에는 대표들이 파견되어 산악 출신 병사들에게 코르닐로프 행동의 의미를 설명했고, “야만 사단”은 페트로그라드 진격을 거부했다. 다른 코르닐로프 부대에도 선동원들이 파견되었다. 위험이 있는 곳마다 코르닐로프 일파와 싸우기 위한 혁명위원회와 사령부가 만들어졌다.
사회혁명당원·멘셰비키 지도자들은 케렌스키를 포함해 모두 겁에 질려 죽을 지경이 되어 이 며칠 동안 볼셰비키에게 보호를 구했다. 수도에서 코르닐로프를 격파할 수 있는 유일한 실제 역량이 볼셰비키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을 동원해 코르닐로프 일파를 격파하면서도 볼셰비키는 케렌스키 정부와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대중 앞에서 케렌스키 정부와, 정책 전반으로 객관적으로 코르닐로프의 반혁명 음모를 도운 멘셰비키·사회혁명당원을 폭로했다.
이 모든 조치의 결과 코르닐로프 일파는 격파되었다. 크리모프 장군은 자살했다. 코르닐로프와 그의 동조자인 데니킨과 루콤스키는 체포되었다(그러나 곧 케렌스키가 이들을 석방했다).
코르닐로프 일파의 격파는 혁명과 반혁명 사이의 역량 관계를 단번에 드러내 밝혀 주었다. 그것은 장군들과 카데트당으로부터 부르주아지의 포로가 되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에 이르기까지 반혁명 진영 전체가 파멸할 운명임을 보여 주었다.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을 질질 끄는 정책과 장기전이 불러온 경제 파탄이 인민 대중 사이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렸음이 명백해졌다.
코르닐로프 일파의 격파는 더 나아가 볼셰비키당이 반혁명의 어떤 책동도 격파할 수 있는 혁명의 결정적 역량으로 성장했음을 보여 주었다. 우리 당은 아직 집권당이 아니었지만, 코르닐로프 사건이 벌어진 때에는 진정한 집권 세력처럼 행동했다. 당의 지시를 노동자와 병사들이 주저 없이 수행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코르닐로프 반란의 격파는 죽은 것처럼 보였던 소비에트가 사실은 혁명적 반격의 거대한 힘을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코르닐로프 군대의 길을 막고 그 힘을 꺾은 것이 바로 소비에트와 그 혁명위원회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코르닐로프 반란과의 투쟁은 시들어 가던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되살리고, 타협주의 정책의 포로 상태에서 해방하고, 혁명 투쟁의 넓은 길로 이끌어 내고, 볼셰비키당 쪽으로 돌려세웠다.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전례 없이 커졌다.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농촌에서도 빠르게 커지기 시작했다.
코르닐로프 반란은 광범한 농민 대중에게, 지주와 장군들이 볼셰비키와 소비에트를 격파한 다음에는 농민층을 덮칠 것임을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광범한 빈농 대중은 점점 더 긴밀하게 볼셰비키 주위에 결집하기 시작했다. 1917년 4월부터 8월까지의 시기에 동요하여 혁명의 발전을 지체시켰던 중농은 코르닐로프가 격파된 뒤 빈농 대중에 합류하여 분명하게 볼셰비키당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광범한 농민 대중은 볼셰비키당만이 자신들을 전쟁에서 구해 낼 수 있고, 지주를 쳐부술 수 있으며, 농민에게 토지를 넘겨줄 각오가 되어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1917년 9월과 10월에는 농민들이 지주 토지를 탈취하는 일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지주 토지를 제멋대로 경작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혁명에 일어선 농민들을 설득도 징벌 부대도 더 이상 막지 못했다.
혁명의 고양은 점점 더 커졌다.
소비에트가 되살아나고 새로워지는 시기, 소비에트가 볼셰비키화되는 시기가 펼쳐졌다. 공장과 군부대는 대표를 다시 선출하면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 대신 볼셰비키당의 대표를 소비에트에 보냈다. 코르닐로프 반란에 승리한 다음 날인 8월 31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볼셰비키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표명했다. 치헤이제가 이끄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옛 멘셰비키·사회혁명당원 간부회는 사임하여 볼셰비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9월 5일, 모스크바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볼셰비키 쪽으로 넘어갔다.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사회혁명당원·멘셰비키 간부회 역시 사임하여 볼셰비키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이는 성공적인 봉기에 필요한 기본 전제들이 이미 무르익었음을 의미했다.
“전권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가 다시 의제에 올랐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권력을 멘셰비키·사회혁명당원 소비에트의 손에 넘기자는 옛 구호가 아니었다. 아니다— 이것은 나라의 전권을 볼셰비키가 이끄는 소비에트에 넘기기 위해 소비에트가 임시정부에 대항하여 봉기하자는 구호였다.
타협주의 정당들 사이에는 분열이 시작되었다.
사회혁명당에서는 혁명적 기운에 찬 농민들의 압력으로 좌익인 “좌파” 사회혁명당원이 갈라져 나왔는데, 이들은 부르주아지와의 타협 정책에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멘셰비키 쪽에도 이번에는 이른바 “인터내셔널주의자”라는 “좌파” 그룹이 나타나 볼셰비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나키스트는 본래부터 영향력이 미미한 집단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해체되어 여러 작은 집단으로 흩어졌다. 그중 일부는 사회 밑바닥의 범죄·도둑질 분자 및 도발 분자와 뒤섞였고, 일부는 “사상적” 수탈자가 되어 농민과 도시 소시민을 약탈하고 노동자 클럽의 건물과 저축을 빼앗았으며, 또 다른 일부는 공공연히 반혁명 진영으로 건너가 부르주아지의 뒷전에서 제 개인의 삶을 꾸려 나갔다. 그들은 모두 모든 권력에 반대했고, 특히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 권력에 반대했는데, 혁명 권력이 자신들에게 인민을 약탈하고 인민의 재산을 횡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코르닐로프 반란이 분쇄된 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은 고조되는 혁명의 상승세를 약화시키려고 또 한 번 시도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1917년 9월 12일 사회주의 정당, 타협주의 소비에트, 노동조합, 젬스트보, 상공업계, 군부대의 대표로 전러시아 민주주의 협의회를 소집했다. 이 협의회에서 예비의회(공화국 임시평의회)가 선출되었다. 타협파는 예비의회를 이용해 혁명을 중단시키고 나라를 소비에트 혁명의 길에서 부르주아 입헌 발전의 길, 부르주아 의회주의의 길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파산한 정치꾼들이 혁명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절망적인 시도였다. 그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실패했다. 노동자들은 타협파의 의회 놀음을 비웃었다. 그들은 장난삼아 예비의회를 “대기실”이라 불렀다.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예비의회를 보이콧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카메네프, 테오도로비치 같은 사람들이 앉아 있던 예비의회의 볼셰비키 의원단은 예비의회의 울타리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 중앙위원회는 그들을 예비의회에서 나오게 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예비의회 참가를 끈질기게 주장하며, 이로써 당이 봉기 준비에서 멀어지게 하려 했다. 전러시아 민주주의 협의회의 볼셰비키 의원단에서 예비의회 참가에 단호히 반대하고 나선 이는 스탈린 동지였다. 그는 예비의회를 “코르닐로프 반란의 낙태아”라 불렀다.
레닌과 스탈린은 잠시라도 예비의회에 참가하는 것을 중대한 오류로 여겼는데, 그것이 대중 속에 예비의회가 근로 대중을 위해 정말로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기만적인 희망을 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볼셰비키는 다수를 차지하리라 기대한 제2차 소비에트 대회의 소집을 끈질기게 준비했다.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에 앉아 있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이 온갖 구실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볼셰비키 소비에트의 압력으로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1917년 10월 하순으로 정해졌다.
6. 페트로그라드의 10월 봉기와 임시정부 체포. 제2차 소비에트 대회와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 제2차 소비에트 대회의 평화에 관한 법령과 토지에 관한 법령.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한 원인.
볼셰비키는 봉기 준비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레닌은 두 수도의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인 모스크바 소비에트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차지한 볼셰비키가 국가 권력을 자기 손에 장악할 수 있으며 또 장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나온 길을 총괄하면서 레닌은 “인민의 다수는 우리 편이다”라고 강조했다. 레닌은 중앙위원회와 볼셰비키 조직에 보낸 논문과 편지에서 봉기의 구체적 계획을 제시했다. 군부대와 함대, 적위대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봉기의 성공을 보장하려면 페트로그라드의 어떤 결정적 지점을 점령해야 하는지 등에 관한 것이었다.
10월 7일 레닌은 핀란드에서 페트로그라드로 비합법적으로 들어왔다. 1917년 10월 10일 당 중앙위원회의 역사적인 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 며칠 안에 무장봉기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레닌이 쓴 당 중앙위원회의 역사적인 결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앙위원회는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 상황(독일 함대의 봉기는 전 유럽에서 세계 사회주의 혁명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극단적인 표현이며, 다음으로 러시아 혁명을 교살하기 위한 제국주의자들의 강화(講和) 위협이 있다)과 군사적 상황(러시아 부르주아지와 케렌스키 일당이 페테르부르크를 독일인들에게 넘겨주기로 한 의심할 바 없는 결정),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획득한 것 — 이 모든 것이 농민 봉기, 그리고 우리 당에 대한 인민의 신뢰가 바뀐 것(모스크바 선거), 마지막으로 제2의 코르닐로프 사건의 명백한 준비(페테르부르크에서 군대 철수, 페테르부르크로 카자크 수송, 카자크에 의한 민스크 포위 등)와 결부되어, 무장봉기를 당면 의제로 올려놓는다. 이렇게 무장봉기가 불가피하며 완전히 무르익었다고 인정하면서, 중앙위원회는 모든 당 조직이 이를 지침으로 삼고 이 관점에서 모든 실천적 문제(북부 지역 소비에트 대회, 페테르부르크에서의 군대 철수, 모스크바 사람들과 민스크 사람들의 행동 등)를 토의하고 해결할 것을 제안한다.” (레닌, 제21권, 330쪽).
이 역사적 결정에 반대하여 발언하고 표를 던진 중앙위원회 위원은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멘셰비키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의회제 공화국을 꿈꾸었고, 노동계급에게는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힘이 없으며 아직 권력을 장악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노동계급을 중상했다.
트로츠키는 이 회의에서 결의에 직접 반대표를 던지지는 않았지만, 봉기를 무산시키고 실패로 몰아넣을 수정안을 제안했다. 그는 제2차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기 전에는 봉기를 시작하지 말자고 제안했는데, 이는 봉기를 질질 끌고, 봉기 날짜를 미리 드러내며, 임시정부에 이를 미리 알리자는 것을 뜻했다.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현지에서 봉기를 조직하기 위해 전권 위원들을 돈바스, 우랄, 헬싱포르스, 크론시타트, 남서부 전선 등지로 파견했다. 보로실로프, 몰로토프, 제르진스키, 오르조니키제, 키로프, 카가노비치, 쿠이비셰프, 프룬제, 야로슬랍스키 등 여러 동지가 현지의 봉기를 지도하라는 당의 특별 임무를 받았다. 우랄의 샤드린스크에서는 즈다노프 동지가 군인들 사이에서 활동했다. 서부 전선의 벨로루시에서는 예조프 동지가 병사 대중을 봉기에 대비시켰다.[3] 중앙위원회 전권 위원들은 현지 볼셰비키 조직의 지도자들에게 봉기 계획을 알리고, 페트로그라드의 봉기를 지원하기 위한 동원 태세를 갖추게 했다.
당 중앙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산하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이 위원회는 봉기의 합법적 사령부가 되었다.
그사이 반혁명 세력도 서둘러 힘을 모으고 있었다. 장교단은 반혁명적인 “장교 동맹”으로 조직되었다. 반혁명 분자들은 곳곳에 돌격대대 편성을 위한 사령부를 만들었다. 10월 말까지 반혁명 세력은 43개의 돌격대대를 보유했다.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기사들로 이루어진 대대도 특별히 조직되었다.
케렌스키 정부는 정부를 페트로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옮기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로써 이 정부가 페트로그라드의 봉기를 막기 위해 페트로그라드를 독일인들에게 넘겨줄 준비를 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병사들의 항의로 임시정부는 페트로그라드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10월 16일 당 중앙위원회 확대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스탈린 동지를 위원장으로 하는 봉기 지도 당 중앙이 선출되었다. 이 당 중앙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산하 군사혁명위원회의 지도 핵심이었으며, 사실상 봉기 전체를 지도했다.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투항주의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다시 봉기에 반대하고 나섰다. 반박을 당하자 그들은 봉기와 당에 반대하는 공개 발언을 출판물에 실었다. 10월 18일 멘셰비키 신문 『노바야 지즌』에는 볼셰비키가 봉기를 준비하고 있으며 자신들은 봉기를 모험으로 본다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성명이 실렸다. 이로써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봉기에 관한 중앙위원회의 결정, 곧 가까운 시일 안에 봉기를 조직한다는 결정을 적들에게 폭로했다. 이것은 배신이었다. 레닌은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썼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자기 당 중앙위원회의 무장봉기 결정을 로쟌코와 케렌스키에게 넘겨주었다.” 레닌은 중앙위원회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당에서 제명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배신자들이 알려 준 덕분에 사전에 경고를 받은 혁명의 적들은 즉시 봉기를 미리 막고 혁명의 지도 참모부인 볼셰비키당을 분쇄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는 비밀회의를 열어 볼셰비키와 싸울 조치를 결정했다. 10월 19일 임시정부는 전선에서 페트로그라드로 군대를 급히 불러들였다. 거리에는 증강된 순찰대가 오가기 시작했다. 반혁명 세력은 특히 모스크바에서 큰 병력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임시정부는 제2차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기 하루 전에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소재지인 스몰니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볼셰비키의 지도 중추를 분쇄한다는 계획을 세워 두었다. 이를 위해 정부가 충성을 기대한 군대가 페트로그라드 쪽으로 집결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존속할 날과 시간은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 어떤 힘도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의 진군을 더는 막을 수 없었다.
10월 21일 볼셰비키는 모든 혁명 부대에 군사혁명위원회의 코미사르를 파견했다. 봉기 전날까지 내내 군부대와 공장에서는 활발한 전투 준비가 진행되었다. 전투함인 순양함 『아브로라』와 『자랴 스보보디』도 일정한 임무를 받았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회의에서 트로츠키는 허풍을 떨다가 적에게 봉기 시기, 곧 볼셰비키가 봉기 개시로 정한 날짜를 누설했다. 케렌스키 정부가 무장봉기를 좌절시키지 못하게 하려고 당 중앙위원회는 예정된 날짜보다 앞서, 제2차 소비에트 대회 개최 하루 전에 봉기를 시작하여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케렌스키는 10월 24일(11월 6일) 이른 아침 볼셰비키당의 중앙 기관지 『라보치 푸티』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라보치 푸티』 편집부와 볼셰비키 인쇄소로 장갑차를 보내는 것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오전 10시까지 스탈린 동지의 지시에 따라 적위대원과 혁명적 병사들이 장갑차를 몰아내고 인쇄소와 『라보치 푸티』 편집부에 강화된 경비를 세웠다. 오전 11시까지 『라보치 푸티』가 임시정부를 타도하자는 호소문을 싣고 나왔다. 같은 시각에 봉기 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혁명적 병사 부대와 적위대 부대가 스몰니로 서둘러 집결했다.
봉기가 시작되었다.
10월 24일 밤 레닌이 스몰니에 도착하여 봉기 지도를 직접 맡았다. 밤새 혁명적 군부대와 적위대 부대가 스몰니로 모여들었다. 볼셰비키는 이들을 수도의 중심으로 보내 임시정부가 틀어박힌 겨울궁전을 포위하게 했다.
10월 25일(11월 7일)에 적위대와 혁명적 부대가 역, 우체국, 전신국, 각 부처, 국립은행을 점령했다.
예비의회가 해산되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가 있던 스몰니는 혁명의 전투 사령부가 되었고, 거기서 전투 명령이 나갔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은 이날들에 볼셰비키당의 지도 아래 훌륭한 학교를 거쳤음을 보여주었다. 볼셰비키의 활동으로 봉기를 준비한 혁명적 부대들은 전투 명령을 정확히 수행하며 적위대와 나란히 싸웠다. 해군도 육군에 뒤지지 않았다. 크론시타트는 볼셰비키당의 요새였고, 그곳에서는 오래전부터 임시정부의 권력이 인정되지 않았다. 순양함 『아브로라』는 겨울궁전을 겨눈 대포의 우렛소리로 10월 25일에 새로운 시대, 곧 위대한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10월 25일(11월 7일)에 볼셰비키의 호소문 「러시아 시민에게」가 발표되었다. 이 호소문에서는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타도되었고 국가 권력이 소비에트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밝혔다.
임시정부는 사관생도와 돌격대대의 경비 아래 겨울궁전에 숨어 있었다. 10월 25일에서 26일로 넘어가는 밤에 혁명적 노동자, 병사, 수병이 겨울궁전을 강습하여 점령하고 임시정부를 체포했다.
페트로그라드의 무장봉기가 승리했다.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1917년 10월 25일(11월 7일) 저녁 10시 45분에 스몰니에서 개막했다. 그때 페트로그라드의 승리한 봉기는 이미 한창이었고 수도의 권력은 사실상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손에 있었다.
볼셰비키는 대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얻었다. 멘셰비키, 번트파, 우파 사회혁명당원은 자기들의 운이 다했음을 알고 대회의 작업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고 선언한 뒤 대회장을 떠났다. 그들은 소비에트 대회에서 낭독된 성명에서 10월 혁명을 “군사 음모”라고 불렀다. 대회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을 낙인찍으며, 그들이 떠난 것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환영한다고 밝혔다. 배반자들이 떠난 덕분에 대회가 참으로 혁명적인 노동자·병사 대표 대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회의 이름으로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의 손으로 넘어갔음이 선포되었다.
“대회는 노동자, 병사, 농민의 거대한 다수의 의지에 의거하고, 페트로그라드에서 노동자와 수비대가 이룩한 승리한 봉기에 의거하여 권력을 자기 손에 쥔다”라고 제2차 소비에트 대회의 호소문은 밝혔다.
1917년 10월 26일(11월 8일) 밤에 제2차 소비에트 대회는 평화에 관한 포고를 채택했다. 대회는 교전국들에 평화 협상을 진행하기 위하여 적어도 석 달 동안 즉시 휴전할 것을 제안했다. 대회는 모든 교전국의 정부와 인민에게 호소하는 동시에, “인류의 가장 선진적인 세 민족과 현재의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가장 큰 국가들인 영국, 프랑스, 독일의 의식 있는 노동자들”에게 호소했다. 대회는 이 노동자들에게 “평화의 대업을 성공적으로 끝까지 이끌고, 아울러 근로 대중과 착취당하는 주민 대중을 모든 노예 상태와 모든 착취로부터 해방하는 대업을 성공적으로 끝까지 이끌”도록 도울 것을 촉구했다.
같은 날 밤 제2차 소비에트 대회는 토지에 관한 법령을 채택했는데, 이 법령은 “지주의 토지 소유는 일체의 보상 없이 즉시 폐지된다”고 규정했다. 이 토지법의 기초로는 242건의 지방 농민 지령을 토대로 작성된 전농민 지령이 채택되었다. 이 지령에 따라 토지 사유권은 영구히 폐지되고 전인민적·국가적 토지 소유로 대체되었다. 지주·황실 영지·수도원의 토지는 모든 근로 대중이 무상으로 사용하도록 넘겨졌다.
이 법령에 따라 농민층은 10월 사회주의 혁명으로부터, 이전에 지주, 부르주아지, 황실, 수도원, 교회의 손에 있던 1억 5천만 데샤티나 이상의 새 토지를 받았다.
농민들은 지주에게 해마다 내던 약 5억 금루블의 소작료를 면제받았다.
모든 지하자원(석유, 석탄, 광석 등)과 산림, 수자원은 인민의 소유로 넘어갔다.
끝으로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최초의 소비에트 정부인 인민위원회의가 구성되었다. 인민위원회의는 전원 볼셰비키로 이루어졌다. 최초의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는 레닌이 선출되었다.
이렇게 역사적인 제2차 소비에트 대회는 끝났다.
대회 대표들은 페트로그라드에서 소비에트가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소비에트 권력이 전국으로 퍼지도록 하기 위해 각지로 떠났다.
모든 곳에서 권력이 곧바로 소비에트로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페트로그라드에는 이미 소비에트 권력이 서 있었지만, 모스크바에서는 그 뒤에도 며칠 동안 거리에서 완강하고 잔혹한 전투가 이어졌다. 권력이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반혁명 정당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은 백위군 및 융커와 함께 노동자와 병사들에 맞서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서야 반란자들은 격파되었고 모스크바에도 소비에트 권력이 확립되었다.
페트로그라드 자체와 그 일부 지구에서도 혁명이 승리한 첫날부터 반혁명 세력이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하려고 시도했다. 봉기 때 페트로그라드에서 북부 전선 지역으로 도망친 케렌스키는 1917년 11월 10일 카자크 부대 일부를 모아 크라스노프 장군의 지휘 아래 페트로그라드로 진격시켰다. 1917년 11월 11일에는 사회혁명당원들이 이끄는 반혁명 조직 「조국과 혁명 구원 위원회」가 페트로그라드에서 융커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자들은 별 어려움 없이 격파되었다. 융커 반란은 하루 만에, 11월 11일 저녁까지 수병과 적위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11월 13일에는 풀코보 고지에서 크라스노프 장군이 격파되었다. 10월 봉기 때와 마찬가지로 레닌은 반소비에트 반란의 진압을 직접 지도했다. 그의 굽힘 없는 강인함과 승리에 대한 침착한 확신은 대중을 고무하고 결속시켰다. 적은 격파되었다. 크라스노프는 포로로 잡혀 소비에트 권력에 맞선 투쟁을 중단하겠다는 “명예를 걸고 한 약속”을 했다. 이 “명예를 건 약속”을 받고 그는 석방되었으나, 나중에 밝혀졌듯이 크라스노프는 장군으로서 한 약속을 어겼다. 케렌스키는 여자 옷으로 갈아입고 “행방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몸을 숨기는 데 성공했다.
모길료프의 총사령관 사령부에서는 두호닌 장군도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소비에트 정부가 두호닌에게 독일군 사령부와 휴전 교섭을 즉시 시작하라고 제안했을 때, 그는 정부의 지시를 이행하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소비에트 권력의 명령으로 두호닌은 해임되었다. 반혁명 사령부는 격파되었고, 이때 두호닌은 자신에게 맞서 봉기한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당 내부의 잘 알려진 기회주의자들인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리코프, 실랴프니코프 등도 소비에트 권력에 대항하여 공격을 시도했다. 그들은 10월 혁명으로 방금 전복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이 참여하는 「동질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1917년 11월 15일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이 반혁명 정당들과의 합의를 거부하고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혁명의 파업 파괴자로 규정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11월 17일 당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리코프, 밀류틴은 중앙위원회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같은 날인 11월 17일 노긴은 자기 이름으로, 또 인민위원회의에 속해 있던 리코프, 베. 밀류틴, 테오도로비치, 아. 실랴프니코프, 데. 랴자노프, 유레네프, 라린의 이름으로 당 중앙위원회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으며 열거된 인사들이 인민위원회의에서 탈퇴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 줌의 비겁자들이 도망치자 10월 혁명의 적들은 환호했다. 모든 부르주아지와 그 앞잡이들은 볼셰비즘이 붕괴했다고 떠들며 볼셰비키당의 멸망을 예언하고 고소해했다. 그러나 한 줌의 탈주자들은 당을 단 한순간도 흔들지 못했다. 당 중앙위원회는 그들을 혁명의 탈주자이자 부르주아지의 앞잡이로 경멸하며 낙인찍고는 당면한 일로 넘어갔다.
「좌파」 사회혁명당원들은 볼셰비키에게 확실히 동조하던 농민 대중 속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볼셰비키와 다투지 않고 당분간 그들과 통일전선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1917년 11월에 열린 농민 소비에트 대회는 10월 사회주의 혁명의 모든 성과와 소비에트 권력의 법령을 승인했다. 「좌파」 사회혁명당원들과 합의가 체결되었고, 몇몇 「좌파」 사회혁명당원(콜레가예프, 스피리도노바, 프로샨, 시테인베르크)이 인민위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 합의는 브레스트 강화가 조인되고 빈농위원회가 조직될 때까지만 유지되었다. 그때 농민층 내부에서 깊은 계층 분화가 일어났고, 「좌파」 사회혁명당원들은 갈수록 쿨라크층의 이익을 반영하여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소비에트 권력에 의해 격파되었다.
1917년 10월부터 1918년 1~2월까지 소비에트 혁명은 온 나라로 퍼져나갔다. 소비에트 권력이 거대한 나라의 영토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레닌은 이를 소비에트 권력의 “개선 행진”이라고 불렀다.
위대한 10월 사회주의 혁명은 승리했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이처럼 비교적 쉽게 승리하게 된 여러 원인 가운데 다음의 주요 원인들을 지적해야 한다.
1. 10월 혁명은 러시아 부르주아지라는, 비교적 약하고 조직이 허술하며 정치적 경험이 적은 적과 맞섰다. 경제적으로 아직 튼튼하지 못하고 전적으로 정부 주문에 의존하던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난국에서 벗어날 출구를 찾는 데 필요한 정치적 자주성도, 충분한 주도력도 갖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예컨대 프랑스 부르주아지가 가진 대규모의 정치적 술책과 정치적 기만의 경험도 없었고, 예컨대 영국 부르주아지가 가진 대규모의 사기적 타협의 수련도 없었다. 얼마 전까지 2월 혁명으로 전복된 차르와 합의를 모색하던 그들은 그 뒤 권력을 잡고서도, 증오스러운 차르의 정책을 모든 기본에서 계속하는 것보다 나은 방도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들은 차르와 마찬가지로 “승리할 때까지의 전쟁”을 지지했다. 전쟁이 나라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어 인민과 군대를 극도로 지치게 했는데도 그러했다. 그들은 차르와 마찬가지로 지주의 토지 소유를 기본적으로 보존하자고 주장했다. 농민층이 토지 부족과 지주의 억압으로 죽어가고 있는데도 그러했다. 노동계급에 대한 정책을 보면,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노동계급에 대한 증오에서 차르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 그들은 공장주들의 억압을 보존하고 강화하려 했을 뿐 아니라, 대규모 공장 폐쇄(직장 폐쇄)를 적용하여 그 억압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들려 했기 때문이다.
인민이 차르의 정책과 부르주아지의 정책 사이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보지 못하고, 차르에 대한 증오를 부르주아지의 임시정부에 옮겨놓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라는 타협주의 정당들이 인민 사이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부르주아지가 그들 뒤에 숨어 권력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이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의 앞잡이임을 스스로 폭로하여 인민 사이의 영향력을 잃은 뒤, 부르주아지와 그 임시정부는 공중에 뜬 신세가 되었다.
2. 10월 혁명의 선두에는 러시아 노동계급이라는 혁명적 계급이 서 있었다. 이 계급은 투쟁 속에서 단련되었고, 짧은 기간에 두 차례의 혁명을 겪었으며, 제3차 혁명을 앞두고 평화를 위한, 토지를 위한, 자유를 위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인민의 지도자라는 권위를 획득했다. 러시아 노동계급처럼 인민의 신뢰를 얻은 혁명의 지도자가 없었다면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도 없었을 것이고, 그러한 동맹 없이는 10월 혁명이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3. 러시아 노동계급은 혁명에서 농민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빈농이라는 믿음직한 동맹자를 가지고 있었다. “정상적” 발전의 수십 년의 경험에 능히 비길 수 있는 혁명 8개월의 경험은 농민층의 근로 대중에게 헛되지 않았다. 이 기간에 그들은 러시아의 모든 정당을 실제로 시험해볼 수 있었고, 카데트도 사회혁명당원도 멘셰비키도 농민을 위해 지주와 진지하게 싸우거나 피를 흘리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러시아에는 지주와 얽매이지 않고 농민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주를 분쇄할 각오가 된 정당이 오직 하나, 즉 볼셰비키당뿐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사정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 동맹의 현실적 기초가 되었다. 노동계급과 빈농의 동맹이 존재했기에 중농의 태도도 정해졌다. 중농은 오랫동안 동요하다가 10월 봉기 직전에야 비로소 제대로 혁명 쪽으로 돌아서서 빈농에 합류했다.
그러한 동맹이 없었다면 10월 혁명이 승리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증명할 필요도 없다.
4. 노동계급의 선두에는 정치 투쟁에서 단련된 볼셰비키당과 같은 당이 서 있었다. 인민을 결정적인 돌격으로 이끌 만큼 충분히 용감하고, 목적에 이르는 길의 모든 암초를 피해 갈 만큼 충분히 신중한 볼셰비키당과 같은 당이라야만, 평화를 위한 전체 민주주의 운동, 지주 토지를 탈취하기 위한 농민의 민주주의 운동, 민족적 평등권을 위한 억압받는 민족들의 민족해방 운동,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 운동과 같은 이처럼 서로 다른 혁명 운동들을 하나의 공동의 혁명적 흐름으로 그토록 능숙하게 결합할 수 있었다.
이 서로 다른 혁명적 흐름들이 하나의 공동의 강력한 혁명적 흐름으로 결합된 것이 러시아 자본주의의 운명을 결정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5. 10월 혁명은 제국주의 전쟁이 아직 한창이던 때, 주요 부르주아 국가들이 두 적대 진영으로 갈라져 있던 때, 이 나라들이 서로 전쟁에 몰두하고 서로를 약화시키느라 “러시아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거나 10월 혁명에 맞서 적극적으로 나설 여력이 없던 때에 시작되었다.
이러한 사정이 10월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크게 쉽게 해 주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7. 소비에트 권력의 강화를 위한 볼셰비키당의 투쟁. 브레스트 강화. 제7차 당대회.
소비에트 권력을 강화하려면 낡은 부르주아 국가 기구를 파괴하고 부수어 그 자리에 소비에트 국가의 새 기구를 세워야 했다. 나아가 신분제의 잔재와 민족 억압 체제를 없애고, 교회의 특권을 폐지하고, 합법·비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반혁명 출판물과 반혁명 조직을 없애고, 부르주아 제헌의회를 해산해야 했다. 끝으로, 토지 국유화에 이어 모든 대공업도 국유화하고, 그다음에는 전쟁 상태에서 벗어나 소비에트 권력의 강화에 무엇보다 방해가 되는 전쟁을 끝내야 했다.
이 모든 조치는 1917년 말부터 1918년 중반까지 몇 달 사이에 시행되었다.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가 조직한 옛 부처 관리들의 태업은 분쇄되고 청산되었다. 부처들은 폐지되고 그 대신 소비에트 관리 기구와 그에 해당하는 인민위원부들이 만들어졌다. 나라의 공업을 관리하기 위해 최고국민경제회의가 설치되었다. 반혁명과 태업에 맞서 싸우기 위해 에프. 제르진스키를 책임자로 하는 전러시아 비상위원회(ВЧК, 체카)가 조직되었다. 붉은 군대와 함대의 창설에 관한 법령이 공포되었다. 제헌의회는 선거가 대체로 아직 10월 혁명 이전에 치러졌고, 평화·토지·소비에트로의 권력 이양에 관한 제2차 소비에트 대회의 법령들을 승인하기를 거부했으므로 해산되었다.
사회생활 모든 분야에서 봉건제의 잔재와 신분제, 불평등을 최종적으로 청산하기 위해 신분제 폐지, 민족적·종교적 제한 철폐, 교회와 국가의 분리 및 학교와 교회의 분리, 여성의 평등권, 러시아 여러 민족의 평등권에 관한 법령들이 공포되었다.
“러시아 인민들의 권리 선언”으로 알려진 소비에트 정부의 특별 결정에서는 러시아 여러 민족의 자유로운 발전과 완전한 평등이 법임을 규정했다.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힘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소비에트 인민경제를 조직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소비에트 공업을 조직하기 위해 은행, 철도, 대외무역, 상선대, 그리고 석탄, 야금, 석유, 화학, 기계 제조, 섬유, 설탕 등 모든 부문의 대규모 공업 전체가 국유화되었다.
우리나라를 재정적 예속과 외국 자본가들의 착취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차르와 임시정부가 체결한 러시아의 외국 차관은 무효화(취소)되었다. 우리나라의 인민들은 약탈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빌린 빚, 우리나라를 외국 자본에 얽매인 예속 상태로 몰아넣은 빚을 갚으려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조치와 이와 비슷한 조치들은 부르주아지, 지주, 반동적 관료, 반혁명 정당들의 힘을 뿌리째 약화시켰고, 소비에트 권력을 나라 안에서 크게 강화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 전쟁 상태에 있는 한, 소비에트 권력의 지위가 완전히 굳어졌다고 볼 수는 없었다. 소비에트 권력을 최종적으로 굳히려면 전쟁을 끝내야 했다. 그래서 당은 10월 혁명이 승리한 첫날부터 평화를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모든 교전 민족과 그 정부에게 정의롭고 민주적인 평화에 관한 협상을 즉시 시작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소비에트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프랑스와 영국이 평화 협상을 거부했으므로, 소비에트 정부는 소비에트의 의지를 실행하여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 협상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협상은 12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시작되었다. 12월 5일에는 휴전에 관한, 즉 군사 행동의 일시 중지에 관한 협정이 조인되었다.
협상은 인민경제가 파탄 나고, 전쟁에 대한 피로가 전반에 퍼지고, 우리 부대들이 전선을 떠나고, 전선이 무너진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협상 중에 독일 제국주의자들이 옛 차르 제국의 영토를 크게 떼어 차지하려 하며, 폴란드, 우크라이나, 발트 연안 국가들을 독일에 종속된 국가로 만들려 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러한 조건에서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갓 태어난 소비에트 공화국의 존립을 걸고 도박을 한다는 뜻이었다. 노동계급과 농민층 앞에는, 숨 돌릴 틈을 얻고 소비에트 권력을 굳히며 적의 공격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새로운 붉은 군대를 창설하기 위해, 가혹한 강화 조건을 받아들이고 당시 가장 위험한 약탈자였던 독일 제국주의 앞에서 물러서야 할 필요가 놓였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에서 가장 악명 높은 백위군에 이르기까지 모든 반혁명분자는 강화 조인에 반대하여 미친 듯이 선동했다. 그들의 노선은 분명했다. 그들은 평화 협상을 깨뜨리고 독일군의 공격을 도발하여, 아직 굳건하지 못한 소비에트 권력을 타격 앞에 내놓고 노동자와 농민의 성과를 위험에 빠뜨리려 했다.
이 더러운 일에서 그들의 동맹자가 된 것은 트로츠키와 그의 앞잡이 부하린이었다. 부하린은 라데크, 퍄타코프와 함께 당에 적대적인 집단을 이끌었는데, 이 집단은 위장을 위해 스스로를 「좌파 공산주의자」 집단이라 불렀다. 트로츠키와 「좌파 공산주의자」 집단은 당 내부에서 전쟁 계속을 요구하며 레닌에 반대하여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이자들은 아직 군대도 없는 젊은 소비에트 공화국을 독일 제국주의의 타격 앞에 내놓는 쪽으로 일을 몰고 갔으므로, 명백히 독일 제국주의자들과 국내 반혁명분자들에게 이롭게 행동한 것이다.
이것은 좌익적 구호로 교묘하게 위장한 일종의 도발 정책이었다.
1918년 2월 10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의 평화 협상이 중단되었다. 레닌과 스탈린이 당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강화 조인을 주장했음에도, 브레스트 주재 소비에트 대표단 의장이었던 트로츠키는 볼셰비키당의 직접적 지령을 배신적으로 위반했다. 그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독일이 제시한 조건으로 강화를 조인하기를 거부한다고 선언하는 동시에, 독일 측에 소비에트 공화국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며 군대의 동원 해제를 계속한다고 통보했다.
이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독일 제국주의자들은 소비에트 국가의 이익을 배반한 자에게 이보다 더 큰 것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
독일 정부는 휴전을 깨고 공세로 전환했다. 우리의 낡은 군대의 잔여 부대는 독일군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빠르게 진격하여 광대한 영토를 점령하고 페트로그라드를 위협했다. 소비에트 국가에 침입한 독일 제국주의는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하고 우리 조국을 자기 식민지로 만들 목적을 세웠다. 낡고 붕괴된 제정 군대는 무장한 독일 제국주의의 대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 군대는 독일군의 타격을 받으며 후퇴했다.
그러나 독일 제국주의자들의 무력 간섭은 국내에 강력한 혁명적 고양을 불러일으켰다. 당과 소비에트 정부가 던진 “사회주의 조국이 위험에 처했다!”라는 호소에 노동계급은 붉은 군대 부대의 편성을 강화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혁명적 인민의 군대인 신군대의 젊은 부대들은 이빨까지 무장한 독일 약탈자의 공격을 영웅적으로 격퇴했다. 나르바와 프스코프 근처에서 독일 점령군은 단호한 반격을 받았다. 그들의 페트로그라드 진격은 저지되었다. 독일 제국주의 군대를 격퇴한 날인 2월 23일은 젊은 붉은 군대의 탄생일이 되었다.
이미 1918년 2월 18일에 당 중앙위원회는 독일 정부에 즉시 강화를 체결하자는 전보를 보내자는 레닌의 제안을 채택했다. 더 유리한 강화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독일군은 공세를 계속했고, 2월 22일에야 독일 정부는 강화 조인에 동의를 표했는데, 강화 조건은 처음의 것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레닌, 스탈린, 스베르들로프는 강화에 관한 결정을 얻어내기 위해 중앙위원회에서 트로츠키, 부하린 및 다른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맞서 극히 끈질긴 투쟁을 해야 했다. 레닌은 부하린과 트로츠키가 실제로는 독일 제국주의자들을 도왔고 독일 혁명의 성장과 발전을 방해했다고 지적했다.”(레닌, 제22권, 307쪽).
2월 23일 중앙위원회는 독일 사령부의 조건을 받아들여 강화 조약에 조인하기로 결정했다. 트로츠키와 부하린의 배신은 소비에트 공화국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다. 폴란드는 말할 것도 없고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도 독일에 넘어갔으며,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분리되어 독일의 종속(의존) 국가인 괴뢰국으로 바뀌었다. 소비에트 공화국은 독일에 배상금을 지불할 의무를 졌다.
한편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레닌에 맞서는 투쟁을 계속하면서 배신의 수렁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일시적으로 「좌파 공산주의자」들(부하린, 오신스키, 야코블레바, 스투코프, 만체프)에게 장악된 당 모스크바 지방국은 중앙위원회에 대한 불신임이라는 분열적 결의를 채택하고, 자신들은 “가까운 시일 안에 당의 분열을 거의 피할 수 없다고” 본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이 결의에서 반(反)소비에트적 결정을 채택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국제 혁명의 이익을 위해,—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이 결정에서 썼다,— 우리는 이제 순전히 형식적인 것이 되어 가는 소비에트 권력을 잃을 가능성까지도 감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레닌은 이 결정을 “기괴하고 해괴한 것”이라고 불렀다.
당시 당에게는 트로츠키와 「좌파 공산주의자」의 이러한 반당적 행동의 진정한 원인이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반소비에트적 「우파-트로츠키 블록」 재판(1938년 초)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부하린과 그가 이끄는 「좌파 공산주의자」 집단은 트로츠키 및 「좌파」 사회혁명당원과 함께 당시 소비에트 정부에 반대하는 비밀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 부하린, 트로츠키와 그 음모 가담자들은 브레스트 강화조약을 파기하고,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스베르들로프를 체포하여 살해한 다음, 부하린파·트로츠키주의자·「좌파」 사회혁명당원으로 새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좌파 공산주의자」 집단은 비밀 반혁명 음모를 꾸미는 한편, 트로츠키의 지원 아래 볼셰비키당에 대한 공개적 공격을 벌여 당을 분열시키고 당의 대열을 와해하려 했다. 그러나 당은 이 어려운 시기에 레닌, 스탈린, 스베르들로프를 중심으로 굳게 단결했고, 다른 모든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강화 문제에서도 중앙위원회를 지지했다.
「좌파 공산주의자」 집단은 고립되어 패배했다.
강화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제7차 당대회가 소집되었다.
제7차 당대회는 1918년 3월 6일에 개막했다. 우리 당이 권력을 장악한 뒤 소집된 첫 대회였다. 대회에는 결정권을 가진 대의원 46명과 발언권만 가진 대의원 58명이 참석했다. 대회에서는 14만 5천 명의 당원이 대표되었다. 실제로 당시 당원은 적어도 27만 명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대회가 긴급히 소집되었기 때문에 상당수 조직이 대의원을 보낼 겨를이 없었고, 영토가 일시적으로 독일군에게 점령된 조직들은 대의원을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브레스트 강화에 관해 보고하면서 이 대회에서 “…우리 당이 당내 좌파 반대파의 형성과 관련하여 겪고 있는 이 심각한 위기는 러시아 혁명이 겪은 가장 큰 위기의 하나이다”라고 말했다(레닌, 제22권, 321쪽).
브레스트 강화 문제에 관한 레닌의 결의안은 찬성 30표, 반대 12표, 기권 4표로 채택되었다.
레닌은 결의안이 채택된 다음 날 「불행한 강화」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강화 조건은 견딜 수 없이 무겁다. 그러나 역사는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조직, 조직, 또 조직을 위해 일하라. 어떤 시련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같은 책, 288쪽).
대회 결의안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소비에트 공화국에 반대하여 군사 행동을 벌이는 일이 앞으로도 불가피하다고 지적하고, 따라서 대회는 노동자와 농민의 자기 규율과 규율을 높이고, 대중이 사회주의 조국을 헌신적으로 방위하도록 준비시키고, 붉은 군대를 조직하고, 주민 전체에게 보편적 군사 훈련을 실시하기 위해 가장 정력적이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당의 기본 과업으로 본다고 밝혔다.
대회는 브레스트 강화 문제에서 레닌 노선이 옳았음을 확인하고, 트로츠키와 부하린의 입장을 규탄했으며, 패배한 「좌파 공산주의자」가 대회에서까지 분열 활동을 계속하려 한 시도를 낙인찍었다.
브레스트 강화의 체결은 당이 소비에트 권력을 강화하고 나라의 경제를 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게 해주었다.
강화의 체결은 제국주의 진영 내의 충돌(오스트리아·독일과 협상국 사이에 계속된 전쟁)을 이용하고, 적의 힘을 와해하고, 소비에트 경제를 조직하고, 붉은 군대를 창설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강화의 체결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층을 자기 편에 붙들어 두고, 내전 시기에 백위군 장군들을 격파할 힘을 축적할 수 있게 해주었다.
10월 혁명 시기에 레닌은 볼셰비키당에게, 필요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는 어떻게 두려움 없이 결연하게 공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브레스트 강화 시기에 레닌은 당에게, 적의 힘이 우리 힘을 명백히 능가하는 때에는 어떻게 질서 있게 후퇴해야 하는지, 그러면서도 적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최대한의 정력으로 준비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역사는 레닌 노선의 정당성을 남김없이 입증했다.
제7차 당대회에서는 당의 명칭을 바꾸고 당 강령을 개정하기로 결정했다. 당은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이라 부르게 되었다. 레닌은 우리 당을 공산당이라 부를 것을 제안했는데, 이 명칭이 당이 자기 앞에 세운 목표, 즉 공산주의의 실현에 정확히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새 강령을 작성하기 위해 레닌, 스탈린 및 그 밖의 사람들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가 선출되었으며, 레닌이 작성한 초안이 강령의 기초로 채택되었다.
이리하여 제7차 당대회는 거대한 역사적 과업을 수행했다. 당대회는 당 내부에 숨어 있던 적인 「좌파 공산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를 격파했고, 제국주의 전쟁에서 벗어났으며, 강화와 휴식을 얻어 냈고, 당이 붉은 군대를 조직할 시간을 벌게 했으며, 당에게 인민 경제에 사회주의 질서를 세울 의무를 지웠다.
8. 사회주의 건설 착수에 관한 레닌의 계획. 빈농위원회와 쿨라크층의 제압. 「좌파」 사회혁명당원의 반란과 그 진압. 제5차 소비에트 대회와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헌법의 채택.
강화를 체결하고 휴식을 얻은 소비에트 권력은 사회주의 건설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17년 11월부터 1918년 2월까지의 시기를 레닌은 「자본에 대한 적위대식 공격」 시기라고 불렀다. 소비에트 권력은 1918년 상반기 동안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힘을 꺾고, 인민 경제의 핵심 요충(공장, 은행, 철도, 대외 무역, 상선대 등)을 자기 손에 장악하고, 부르주아 국가 권력 기구를 부수고,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하려는 반혁명의 첫 시도들을 승리적으로 청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는 아직 한참 부족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낡은 것을 파괴하는 데서 새로운 것을 건설하는 데로 넘어가야 했다. 그래서 1918년 봄에 사회주의 건설의 새 단계, 즉 「수탈자들에 대한 수탈」에서 쟁취한 승리를 조직적으로 굳히고 소비에트 인민 경제를 건설하는 단계로의 이행이 시작되었다. 레닌은 사회주의 경제의 토대를 쌓기 시작하기 위해 휴식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볼셰비키는 생산을 새롭게 조직하고 관리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레닌은 볼셰비키당이 러시아를 설득했고, 볼셰비키당이 러시아를 부자들에게서 인민을 위해 되찾았다고 썼으며, 이제 볼셰비키당은 러시아를 관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 단계에서 레닌은 국민경제에서 생산되는 것을 계산하고, 생산되는 모든 제품의 소비를 통제하는 일을 주요 과제로 보았다. 나라의 경제에서는 소부르주아적 요소가 우세했다. 도시와 농촌의 수백만 영세 경영자들은 자본주의가 성장할 토양이었다. 이 영세 경영자들은 노동 규율도, 전 국가적 규율도 인정하지 않았고, 계산에도 통제에도 복종하지 않았다. 이 어려운 시기에 특히 위험한 것은 투기와 장사치 근성이라는 소부르주아적 자연발생성, 그리고 영세 경영자와 상인들이 인민의 궁핍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시도였다.
당은 생산에서의 해이함, 공업에서의 노동 규율 결여에 맞서 힘차게 투쟁했다. 새로운 노동 습관은 대중에게 더디게 몸에 붙었다. 그 때문에 노동 규율을 위한 투쟁이 이 시기에는 중심 과제가 되었다.
레닌은 공업에서 사회주의 경쟁을 전개하고, 성과급제를 도입하고, 평균주의와 투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국가로부터 더 많이 뜯어내려 하고, 게으름을 피우고, 투기에 종사하는 자들에게는 설득이라는 교육적 조치와 함께 강제의 방법도 적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새로운 규율, 즉 노동 규율, 동지적 결합의 규율, 소비에트 규율은 수백만 근로 대중이 일상적인 실천 활동 속에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 일은 한 역사적 시대 전체가 걸릴 것이다”라고 지적했다(레닌, 제23권, 44쪽).
사회주의 건설의 이 모든 문제, 새로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창출하는 문제는 레닌이 그의 유명한 저작 『소비에트 권력의 당면 과제』에서 밝혔다.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사회혁명당원 및 멘셰비키와 한통속이 되어 이 문제들에서도 레닌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부하린, 오신스키 등은 규율을 확립하는 것에 반대하고, 기업의 1인 책임경영제에 반대하고, 공업에서 전문가를 이용하는 것에 반대하고, 경제 채산제의 실시에 반대했다. 그들은 그러한 정책이 부르주아적 질서로의 복귀를 뜻한다고 주장하면서 레닌을 중상했다. 동시에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건설과 사회주의의 승리는 불가능하다는 트로츠키주의적 견해를 설파했다.
「좌파 공산주의자」들의 「좌파적」 문구 뒤에는 규율에 반대하고 경제 생활의 국가 조절, 계산과 통제에 적대적이었던 쿨라크, 게으름뱅이, 투기꾼에 대한 옹호가 숨어 있었다.
새로운 소비에트 공업의 조직 문제를 해결한 당은 농촌 문제로 넘어갔다. 당시 농촌에서는 빈농과 쿨라크층의 투쟁이 들끓고 있었다. 쿨라크들은 세력을 키우며 지주에게서 몰수한 토지를 가로챘다. 빈농은 도움이 필요했다. 쿨라크들은 프롤레타리아 국가와 싸우면서 국가에 고정 가격으로 곡물을 파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기근을 이용해 소비에트 국가가 사회주의적 조치의 시행을 포기하도록 만들려 했다. 당은 반혁명적 쿨라크층을 격파한다는 과제를 내세웠다. 빈농을 조직하고, 잉여 곡물을 가진 쿨라크층과 성공적으로 싸우기 위해 노동자들의 농촌 원정이 조직되었다.
“노동자 동지들이여! — 레닌은 썼다 — 혁명의 상황이 위급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혁명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여러분뿐이며, 달리 아무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뇌물과 횡령에 넘어가지 않으며, 쿨라크, 투기꾼, 약탈자, 뇌물수수자, 조직 파괴자들에 맞서 철의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회주의에 헌신하는 선발된 선진 노동자 수만 명 — 바로 이것이 필요하다”(레닌, 제23권, 25쪽).
“빵을 위한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라고 레닌은 말했으며, 이 구호 아래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농촌으로 원정을 보냈다. 식량 독재를 확립하고 식량인민위원부 기관들에 고정 가격으로 곡물을 매입할 비상 전권을 부여하는 일련의 법령이 공포되었다.
1918년 6월 11일의 법령으로 빈농위원회(콤베드)가 창설되었다. 빈농위원회는 쿨라크층과의 투쟁에서, 몰수된 토지의 재분배와 농기구 분배에서, 쿨라크의 잉여 식량을 징발하는 일에서, 노동자 중심지와 붉은 군대에 식량을 공급하는 일에서 큰 역할을 했다. 쿨라크의 토지 5천만 헥타르가 빈농과 중농의 손으로 넘어갔다. 쿨라크층에게서 생산수단의 상당 부분이 몰수되어 빈농에게 돌아갔다.
빈농위원회의 조직은 농촌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전개하는 데 있어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었다. 빈농위원회는 농촌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거점이었다. 붉은 군대 간부의 편성도 상당 부분 빈농위원회를 통해 농민층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농촌 원정과 빈농위원회의 조직은 농촌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공고히 했고, 중농을 소비에트 권력 편으로 획득하는 데 거대한 정치적 의의를 지녔다.
1918년 말, 빈농위원회는 자신의 과제를 완수하자 농촌의 소비에트와 합쳐져 존재를 마감했다.
1918년 7월 4일 제5차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원들은 쿨라크를 옹호하며 레닌에 반대하는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그들은 쿨라크층과의 투쟁 중단과 농촌에 노동자 식량 부대를 보내는 일의 포기를 요구했다. 「좌파」 사회혁명당원들은 자신들의 노선이 대회 다수의 단호한 반격에 부딪히자 모스크바에서 반란을 일으켜 트레흐스뱌티텔스키 골목을 점거하고 거기서 크렘린에 포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몇 시간 만에 이 「좌파」 사회혁명당원의 모험은 볼셰비키에 의해 진압되었다. 나라 안 여러 곳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원의 지방 조직들도 봉기를 시도했으나, 이 모험은 어디서나 신속히 청산되었다.
이제 반소비에트 「우파-트로츠키주의 블록」 재판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좌파」 사회혁명당원의 반란은 부하린과 트로츠키의 인지와 동의 아래 일으켜진 것이었으며, 소비에트 권력에 대항하는 부하린파, 트로츠키주의자, 「좌파」 사회혁명당원의 반혁명 음모라는 공동 계획의 일부였다.
같은 시기에 「좌파」 사회혁명당원 블륨킨은 후에 트로츠키의 앞잡이가 되었는데, 독일 대사관에 잠입하여 독일과의 전쟁을 도발할 목적으로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 미르바흐를 살해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부는 전쟁을 막고 반혁명분자들의 도발을 좌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제5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헌법, 즉 최초의 소비에트 헌법이 채택되었다.
간단한 결론.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 8개월 동안 볼셰비키당은 가장 어려운 과제를 수행한다. 당은 노동계급과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획득하고, 수백만 농민을 사회주의 혁명 편으로 끌어들인다. 당은 이 대중을 소부르주아 정당(사회혁명당, 멘셰비키, 아나키스트)의 영향에서 빼내고, 근로 대중의 이익에 반하는 이 정당들의 정책을 한 걸음 한 걸음 폭로한다. 볼셰비키당은 전선과 후방에서 거대한 정치 활동을 전개하며 대중을 10월 사회주의 혁명에 대비시킨다.
이 시기 당 역사에서 결정적인 계기는 레닌이 망명지에서 돌아온 것, 레닌의 4월 테제, 당의 4월 협의회와 제6차 당대회이다. 노동계급은 당의 결정에서 승리에 대한 힘과 확신을 얻고, 혁명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는다. 4월 협의회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넘어가기 위한 투쟁으로 당을 이끈다. 제6차 당대회는 부르주아지와 그 임시정부에 맞선 무장 봉기로 당을 이끈다.
타협적 정당인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아나키스트 및 기타 비공산주의 정당들은 발전을 마친다. 이들은 모두 10월 혁명 직전에 이미 자본주의 체제의 온전함과 존속을 옹호하는 부르주아 정당이 된다. 부르주아지를 전복하고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기 위한 대중의 투쟁을 이끄는 것은 볼셰비키당뿐이다.
동시에 볼셰비키는 당 내부의 투항주의자들, 즉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리코프, 부하린, 트로츠키, 퍄타코프가 당을 사회주의 혁명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시도를 분쇄한다.
볼셰비키당이 이끄는 노동계급은 빈농층과 동맹하여 병사와 수병의 지지 아래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전복하고,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며, 새로운 유형의 국가, 즉 사회주의 소비에트 국가를 세운다. 또한 지주의 토지 소유를 폐지하고 토지를 농민층에게 사용하도록 넘기며, 나라의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자본가를 몰수하며, 전쟁에서 벗어나는 길, 즉 평화를 쟁취하여 필요한 숨돌릴 틈을 얻고, 이렇게 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전개할 조건을 만든다.
10월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부르주아지에게서 생산수단을 빼앗아 공장, 토지, 철도, 은행을 온 인민의 소유, 사회적 소유로 바꾸었다.
10월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수립하고 거대한 국가의 지도를 노동계급에게 넘겨, 노동계급을 지배계급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10월 사회주의 혁명은 인류 역사에 새로운 시대,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