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웨이 해전
진주만 반년 뒤 미드웨이를 미끼로 미국 항모를 꾀어내려던 야마모토의 작전은 왜 거꾸로 일본 항모 네 척을 잃는 매복으로 끝났고, 암호 해독과 우연, 교리와 산업력 가운데 무엇이 승패를 갈랐으며, 이 해전을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이라 부를 때 무엇이 가려지는가?
1942년 4월 둘리틀 공습으로 본토 방어의 빈틈이 드러나자, 진주만에서 살아남은 미국 항모를 없애려던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군령부를 꺾고 미드웨이 점령 작전을 관철했다. 그러나 산호해 해전으로 대형 항모 두 척이 빠졌고, 전력을 여러 부대로 나눈 계획은 진주만 하이포 지국의 암호 해독에 노출되었다. 니미츠는 「AF」가 미드웨이임을 확인하고 엔터프라이즈·호닛·요크타운을 섬 북동쪽에 매복시켰다. 6월 4일 미드웨이를 공습한 나구모 주이치가 예비 공격대의 무장을 바꾸는 사이, 뇌격기들이 희생을 치르며 일본 직위 전투기를 끌어내렸고 뒤이은 급강하폭격기가 아카기·가가·소류를 불태웠다. 히류가 요크타운을 무력화했지만 그날 오후 피격되었고, 일본은 항모 네 척과 중순양함 한 척, 3,057명을 잃었다. 미국은 요크타운과 구축함 해먼, 307명을 잃었다.

진주만 이후: 2단계 작전을 둘러싼 다툼
1941년 12월 7일(하와이 시각) 나구모 주이치가 지휘한 항공모함 여섯 척의 함재기가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를 기습해 전함 여덟 척을 모두 손상시키고 그중 네 척을 격침했다. 다만 진주만에 배치된 미국 항공모함 세 척은 바다에 나가 있었고, 기름 저장 시설과 수리 시설도 공격받지 않았다. 일본은 그 뒤 몇 달 만에 영국령 홍콩, 필리핀, 영국령 말라야,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차지해 첫 전략 목표를 이루었고, 특히 동인도의 석유를 손에 넣었다. 1942년 1월부터 다음 단계의 계획이 시작되었지만 육군과 해군의 전략 차이, 그리고 도쿄의 해군 군령부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이끄는 연합함대 사이의 내분 때문에 후속 전략은 4월에야 정해졌다. 군령부는 오스트레일리아 일부를 점령하자고 했으나 중국과 만주에 대군을 묶어 둔 육군이 병력을 내주지 않았고, 3월 13일 두 군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 사이의 해상 연결을 끊기 위해 피지와 사모아 점령을 준비하기로 합의했다. 1 2 3
야마모토는 사임을 내비치는 위협으로 이 관료적 다툼에서 이겼고 자신의 안을 관철했다. 그는 전쟁 전부터 해군력은 석유와 공업력에 달려 있으며 일본이 미국을 이길 가망은 거의 없다고 보았고, 그래서 전쟁 초에 큰 타격을 주면 미국이 강화 협상에 나올지 모른다는 데 기대를 걸었다. 그의 주된 전략 목표는 진주만에서 살아남은 미국 항공모함 전력을 없애는 것이었다. 이 걱정을 키운 것이 4월 18일의 둘리틀 공습이었다. 미국 육군항공대의 B-25 폭격기 16대가 항공모함 호닛에서 이륙해 도쿄와 여러 일본 도시를 폭격했다. 군사적으로는 보잘것없었지만 일본 본토 방어의 빈틈과 미국 폭격기에 대한 취약성을 드러낸 충격이었다. 남태평양에서 미국 항모들이 거듭한 기습도 그들이 여전히 위협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2 4 5
둘리틀 공습의 대가를 가장 크게 치른 것은 중국이었다. 폭격기들은 연료가 모자라 중국 동부 해안에 불시착하거나 승무원이 낙하산으로 뛰어내렸고, 한 대는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의 소련 땅에 내렸다. 일본과 전쟁 중이 아니던 소련은 국제법에 따라 승무원을 억류했다. 일본 육군은 동부 연안의 성들이 다시 일본 공격에 쓰이지 못하게 하고 중국인들에게 보복하려고 저장·장시 작전을 벌였다. 약 5만 제곱킬로미터가 초토화되었고 조종사들을 찾는 동안 중국 민간인 약 1만 명이 살해되었다. 6월 11일 일본군이 들어간 장시성 난청에서 벌어진 학살과 방화는 선교사들이 「난청 대학살」이라 불렀고, 일본군은 철수하면서 731부대가 가져온 병원균으로 음식과 우물을 오염시켰다. 5
한편 남쪽에서는 포트모르즈비와 툴라기를 점령하려는 MO 작전이 5월 4~8일 산호해 해전으로 이어졌다. 이노우에 시게요시가 총지휘한 일본군의 계획은 미국이 신호 정보로 미리 알아냈고, 미국은 항모 기동부대 둘과 오스트레일리아·미국 연합 순양함 부대를 보냈다. 양측 함대가 서로를 보지도 포격하지도 않고 수평선 너머에서 함재기로만 싸운 첫 해전이었다. 일본은 경항모 쇼호를 잃고 대형 항모 쇼카쿠가 크게 손상되었으며, 미국은 렉싱턴을 잃고 요크타운이 손상되었다. 격침한 배로 보면 일본의 전술적 승리였지만 이노우에는 포트모르즈비 침공 함대를 불러들였고, 개전 뒤 처음으로 일본의 큰 진격이 멈추었다. 더 중요하게도 쇼카쿠의 손상과 즈이카쿠의 함재기 손실 때문에 두 항모는 한 달 뒤 미드웨이에 나가지 못했다. 6 2

야마모토의 MI 작전과 알류샨 작전
야마모토는 진주만을 다시 치면 미국 함대가 항모까지 모두 나올 것이라 보았지만, 개전 뒤 하와이의 지상 항공 전력이 커져 직접 공격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 대신 고른 것이 하와이 제도 북서쪽 끝, 오아후에서 약 2,10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환초 미드웨이였다. 하와이 주요 섬에 있는 미국 항공기 대부분의 작전 반경 밖이었다. 일본의 큰 구상에서 미드웨이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지만, 미국이 이곳을 진주만의 필수 전초로 여겨 반드시 지키러 나올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실제로 미국도 미드웨이를 중요하게 여겼다. 해전 뒤 이곳에 들어선 잠수함 기지는 진주만에서 출발한 잠수함의 작전 반경을 약 1,900킬로미터 늘렸다. 작전의 목적은 미드웨이를 점령하고 미국 태평양 함대, 특히 항모를 꾀어내 격멸하는 것이었다. 2
MI 작전이라 이름 붙은 계획은 일본 해군의 다른 작전들처럼 지나치게 복잡해서, 수백 해리에 흩어진 여러 전단이 정확한 시간에 맞물려야 했다. 계획은 미국 태평양 함대가 쓸 수 있는 항모가 엔터프라이즈와 호닛 두 척뿐이라는 낙관적인 정보에 기대고 있었다. 산호해에서 크게 손상된 요크타운도 격침된 것으로 믿었고, 잇단 승리로 미국의 사기가 꺾였다는 판단도 크게 빗나갔다. 야마모토는 미국을 속이려고 전력을 분산했다. 전함과 순양함은 나구모의 항모 부대에서 수백 해리 뒤에 따라갔다. 항모가 미국 함대를 약화시킨 뒤 주간 포격전으로 마무리하려 했다는 해석도 있고, 전함을 믿지 않았던 야마모토가 군령부의 전함파를 달래려고 거함 야마토에 직접 타고 나갔다는 해석도 있다. 결과적으로 나구모의 호위는 고속 전함 두 척, 중순양함 두 척, 경순양함 한 척과 구축함 열두 척뿐이었고, 야마모토와 곤도 노부타케가 거느린 경항모 두 척, 전함 다섯 척, 중순양함 네 척, 경순양함 두 척은 미드웨이에서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2
육군의 협조를 얻으려고 해군은 알류샨 열도의 애투섬과 키스카섬을 점령하는 육군 작전을 지원하기로 했다. 육군은 이 섬들을 차지해 알래스카의 미국 폭격기가 일본 본토에 닿지 못하게 하려 했고, 미국인들은 거꾸로 이곳이 서해안 도시를 폭격하는 기지가 될까 두려워했다. 오랫동안 이 AL 작전은 미국 전력을 북쪽으로 끌어내려는 양동으로 설명되었지만 원래 계획에서는 미드웨이 공격과 동시에 시작할 작전이었다. 나구모 부대의 출항이 하루 늦어지면서 AL 작전이 6월 3일 하루 먼저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더치하버를 두 차례 공습한 뒤 6월에 애투와 키스카를 점령했고, 미국은 1943년 5월 애투를 되찾았으며 8월 키스카에 상륙했을 때는 일본군이 이미 철수한 뒤였다. AL 작전은 미드웨이를 칠 수 있었던 배들을 또 빼 갔다. 2 7
일본 기동부대 자체에도 약점이 많았다. 산호해에서 쇼카쿠와 즈이카쿠가 빠지면서 나구모는 가장 앞선 두 척을 잃고 아카기·가가(제1항공전대)와 히류·소류(제2항공전대) 넷만 거느렸다. 네 척에 실린 항공기는 248대였지만, 급강하폭격기 생산은 크게 줄었고 뇌격기 생산은 아예 멈춰 손실을 메울 기체가 없었으며, 개전 이래 쉬지 않고 쓴 기체는 닳아 있었다. 항모는 연료관이 그물처럼 깔리고 나무 바닥과 목재 들보, 면 배관 단열재 같은 가연물로 가득했고 소화용 거품 장비도 없었다. 「주먹은 날릴 수 있어도 맞을 수는 없는」 함대였다. 레이더가 없어 조기 경보가 약했고 전투기와의 무선도 나빴다. 정찰 준비도 엉망이었다. 잠수함 초계선은 늦게 배치되어 미국 항모가 미드웨이 북동쪽 집결점 「포인트 럭」에 들키지 않고 도착했고, 대형 비행정으로 진주만을 정찰하려던 K 작전은 급유 예정지 프렌치프리깃 암초에 미국 군함이 있어 무산되었다. 2
하이포 지국의 암호 해독과 미국의 매복
니미츠에게는 결정적인 이점이 하나 있었다. 미국 암호 분석가들이 일본 해군 암호 JN-25b를 부분적으로 풀어, 1942년 초부터 곧 「AF」라는 목표에 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전문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진주만의 하이포 지국을 이끈 조지프 로슈포르는 AF가 미드웨이이고 공격이 중부 태평양에서 5월 말이나 6월 초에 온다고 보았다. 반면 워싱턴의 해군 암호 부서 OP-20-G는 알류샨이나 포트모르즈비, 심지어 미국 서해안을 목표로 꼽고 시기도 6월 중순이라 주장했으며, 해군 작전부장 어니스트 킹도 그쪽 판단을 따랐다. 하이포의 재스퍼 홈스는 미드웨이 기지가 해저 케이블로 지시를 받아 담수화 장치가 고장 나 물이 모자란다는 전문을 암호 없이 내보내게 하자고 제안했다. 로슈포르는 이 안을 정보참모 에드윈 레이턴을 거쳐 니미츠에게 올렸고, 니미츠가 승인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AF에 물이 부족하다」는 일본 전문이 잡혔다. 2 8
날짜를 알아내는 일은 더 어려웠다. 일본 전문의 날짜·시각 부분은 JN-25로 부호화하기 전에 한 번 더 암호화되어 있었다. 레이턴은 조지프 피니건 대위가 그 잠금 방식을 찾아냈다고 적었고, 5월 26일 수송선단을 호위할 구축함 부대에 내린 명령을 이 표로 풀어 공격일이 6월 4일이나 5일임을 굳혔다. 일본은 새 암호책을 도입하려 했지만 늦어져 5월 24일에야 바꾸었고, 그때는 중요한 해독이 이미 끝난 뒤였다. 5월 한 달 로슈포르의 부서는 하루 최대 140건의 전문을 해독·분석해 보고했고, 니미츠가 최종 명령을 내리기 전 주에는 하루 5백~1천 건이 처리되었다. 미국은 일본군이 언제, 어디에, 어떤 전력으로 나타날지 상당히 정확히 안 채 전투에 들어갔다. 니미츠는 일본이 함대를 서로 지원할 수 없을 만큼 넷으로 나눈 데다 미국 항모 비행단이 일본보다 크기 때문에, 미드웨이 기지의 항공기까지 더하면 대략 대등하다고 계산했다. 8 2
니미츠는 쓸 수 있는 비행갑판을 모두 모았다. 엔터프라이즈와 호닛의 제16기동부대를 이끌던 윌리엄 홀시가 대상포진으로 쓰러지자 호위 지휘관 레이먼드 스프루언스가 대신 맡았고, 프랭크 잭 플레처의 요크타운 부대는 남서태평양에서 급히 불려 왔다. 산호해에서 손상된 요크타운은 퓨젓사운드 조선소에서 몇 달은 고쳐야 한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진주만 해군 조선소가 밤낮으로 매달려 72시간 만에 두세 주 작전할 수 있는 상태로 되살렸다. 출항한 뒤에도 수리선 베스털의 작업반이 배 안에서 일을 계속했고, 비행단은 새러토가의 비행대와 남은 조종사를 그러모아 다시 짰다. 미드웨이 섬에는 장거리 정찰용 PBY 31대, 해병대 항공기, 육군항공대의 B-17 17대와 어뢰를 단 B-26 4대 등 모두 122대가 모였다. 해병대의 F2A 전투기와 SB2U 폭격기는 이미 낡은 기종이었지만 그것밖에 없었다. 2

6월 4일 아침: 미드웨이 공습과 나구모의 딜레마
6월 3일 오전 PBY를 몰던 잭 리드 소위가 미드웨이 서남서 약 930킬로미터에서 일본 점령 부대를 발견했고, 이어 출격한 B-17들의 폭격은 한 척도 맞히지 못했다. 그날 밤 PBY의 어뢰가 유조선 아케보노마루를 맞혔는데, 해전 내내 미국 항공기의 어뢰 공격이 성공한 것은 이것뿐이었다. 6월 4일 새벽 4시 30분 나구모는 급강하폭격기 36대, 뇌격기 36대, 제로 전투기 36대로 미드웨이를 공격하게 하고 동시에 정찰기 일곱 대를 띄웠다. 중순양함 도네의 정찰기 한 대는 30분 늦게 떴고, 정찰은 기체가 너무 적은 데다 날씨도 나빴다. 미드웨이의 레이더가 5시 53분 일본 편대를 잡자 해병대 전투기가 맞섰지만 F2A 대부분이 격추되었고, 6시 34분부터 기지는 심하게 폭격당했다. 그러나 공격대 108대 가운데 11대가 격추되고 14대가 크게 손상되었으며, 활주로와 지상 방어 시설 대부분이 살아남았다. 공격대 지휘관은 7일까지 상륙하려면 2차 공격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2
미드웨이에서 먼저 뜬 미국 항공기들도 일본 항모를 공격했다. 호닛 비행단에서 떼어 온 신형 TBF 어벤저 6대, 해병대 급강하폭격대, 어뢰를 단 B-26, B-17들이 차례로 덤볐지만 일본은 제로기 세 대만 잃고 어벤저 5대, SB2U 2대, SBD 8대, B-26 2대를 떨어뜨렸다. 미숙한 SBD 비행대를 이끈 해병대 로프턴 헨더슨 소령도 이때 죽었고, 두 달 뒤 과달카날의 주 비행장이 그의 이름을 얻었다. 크게 부서진 B-26 한 대는 아카기의 함교로 곧장 날아들다 아슬아슬하게 비껴 바다에 떨어졌다. 함교에 부딪혔다면 나구모와 참모들이 죽었을 수도 있었다. 이 경험이 예비 공격대를 대함 무장으로 남겨 두라는 야마모토의 명령을 어기고 미드웨이를 다시 치기로 한 나구모의 결심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그 사이 미국 잠수함 노틸러스가 다가와 어뢰를 쏘았고, 구축함 아라시가 오랫동안 이를 쫓았다. 2 9
야마모토의 명령에 따라 나구모는 항공기 절반을 예비로 남겨 두었고, 뇌격기는 미국 군함에 대비해 어뢰를 달고 있었다. 7시 15분 그는 이 예비 기체를 지상 공격용 폭탄으로 바꿔 달라고 명령했다. 30분쯤 뒤인 7시 40분 늦게 뜬 도네의 정찰기가 동쪽에 상당한 미국 함대가 있다고 알렸는데, 나구모가 이 보고를 받은 것은 8시 무렵으로 보인다. 그는 무장 교체를 다시 뒤집고 함대 구성을 확인하라고 했으며, 항모가 한 척 있다는 보고는 20~40분 뒤에야 왔다. 제2항공전대를 이끈 야마구치 다몬은 지금 있는 급강하폭격기 34대로 당장 공격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미드웨이 공격대가 곧 돌아와 내려앉아야 했고, 비행갑판에 기체를 늘어놓아 띄우는 데만 30분 넘게 걸렸으며, 무장이 덜 된 채 호위 전투기도 없이 보내면 방금 본 미국 폭격기들처럼 격추될 터였다. 일본 해군 교리는 완전한 편성의 공격을 선호했고, 나구모는 공격대를 거둔 뒤 어뢰로 무장한 예비를 띄우기로 했다. 2 10
나구모의 선택은 교리에 맞았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7시 45분쯤 있는 기체만이라도 띄우고 돌아오는 공격대의 불시착을 감수했다면 미국 항모 두 척을 격침할 만한 균형 잡힌 공격대가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연료와 폭탄을 실은 기체를 격납고에 두는 것은 비행갑판에 두는 것보다 훨씬 위험했다. 다만 어느 쪽을 골랐어도 미국의 공격은 막을 수 없었다. 엔터프라이즈와 호닛은 7시부터 함재기를 띄워 7시 55분에 발진을 마쳤고 요크타운도 9시 8분까지 발진을 끝냈다. 결정타를 날릴 비행기들은 이미 날아오고 있었다. 아카기를 비롯한 항모들의 격납고에서는 폭탄과 어뢰가 탄약고에 넣어지지 못한 채 쌓여 갔다. 2

뇌격기의 희생과 급강하폭격기의 일격
플레처는 아침 PBY의 발견 보고를 받고 스프루언스에게 가능한 한 빨리 공격대를 띄우라고 명령했고, 요크타운은 다른 일본 항모가 나타날 경우에 대비해 잠시 남겨 두었다. 스프루언스는 거리가 극한에 가깝지만 공격이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일본은 108대를 7분 만에 띄웠지만 엔터프라이즈와 호닛은 117대를 띄우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스프루언스는 공격대가 모이기를 기다리지 말고 곧바로 목표로 가라고 명령했다. 전투기·급강하폭격기·뇌격기가 따로따로 도착해 피해가 커지더라도, 일본 항모를 쉬지 않고 공격해 반격 준비를 못 하게 하고 비행갑판이 가장 취약한 순간을 잡는 쪽에 걸었다. 호닛의 공격대는 스탠호프 링 중령을 따라 보고된 240도가 아니라 265도로 날아가 일본 항모를 놓쳤고, 전투기 10대는 연료가 떨어져 바다에 내렸다. 이 비행은 「아무 데도 가지 않은 비행」으로 불렸다. 2
호닛의 제8뇌격비행대를 이끈 존 월드런 소령은 링의 편대에서 떨어져 나와 올바른 방향으로 날아가 9시 20분 일본 항모를 찾아냈다. 전투기 호위가 없던 TBD 데버스테이터 15대는 한 발도 맞히지 못하고 모두 격추되었고, 승무원 30명 가운데 조지 게이 소위 한 명만 살아남았다. 엔터프라이즈의 제6뇌격비행대는 14대 가운데 9대를 잃었고, 10시 무렵 공격한 요크타운의 제3뇌격비행대는 12대 가운데 10대를 잃었다. 개량되지 않은 마크 13 어뢰는 목표 밑으로 지나가거나 일찍 터지거나 아예 터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 공격은 세 가지 결과를 남겼다. 일본 항모는 회피 기동에 쫓겨 반격을 준비하지 못했고, 직위 전투기는 낮은 고도의 뇌격기를 쫓느라 자리를 벗어났으며, 제로기 다수는 탄약과 연료가 바닥났다. 특히 남동쪽에서 들어온 제3뇌격비행대가 직위 전투기 대부분을 그쪽으로 끌어당겼다. 2
바로 그때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의 급강하폭격대 세 개가 남서쪽과 북동쪽에서 다가왔다. 엔터프라이즈 비행단장 웨이드 매클러스키는 일본 함대를 찾느라 연료가 떨어져 가는데도 수색을 계속했고, 노틸러스를 쫓다가 전속력으로 본대에 돌아가던 구축함 아라시의 항적을 발견해 따라갔다. 니미츠는 훗날 수색을 계속하기로 한 그의 판단이 「우리 항모 부대와 미드웨이 부대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평가했다. 세 비행대는 거의 동시에 알맞은 위치와 고도에 도착했다. 일본 직위 전투기는 뇌격기를 쫓아 낮은 곳에 있었고, 격납고에는 무장과 연료를 마친 공격기가 가득했으며, 급히 급유하느라 연료 호스가 갑판 위를 뒤덮었고, 거듭된 무장 교체로 폭탄과 어뢰가 탄약고가 아니라 격납고에 쌓여 있었다. 2 11
10시 22분부터 엔터프라이즈의 두 비행대가 가가와 아카기를 하나씩 치려다 의사소통이 어긋나 둘 다 가가로 내리꽂혔다. 이를 알아챈 리처드 베스트 대위와 두 요기는 강하를 멈추고 북쪽의 아카기로 향했다. 가가는 3~5발을 맞고 불길에 휩싸였고, 함교 앞에 떨어진 폭탄에 오카다 지사쿠 함장과 고급 장교 대부분이 죽었다. 아카기는 거의 확실히 베스트가 떨어뜨린 한 발만 맞았지만, 폭탄이 중앙 승강기 가장자리를 뚫고 격납고에서 무장한 기체들 사이에서 터져 치명상이 되었다. 나구모의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는 기체들이 꼬리를 쳐든 채 불꽃과 검은 연기를 뿜어 불길을 잡을 수 없었다고 적었다. 같은 시각 맥스 레슬리 소령의 요크타운 제3폭격비행대는 소류에 적어도 세 발을 꽂았다. 6분 만에 소류와 가가는 이물에서 고물까지 불탔고, 아카기도 끝내 버려졌다. 나구모는 떠나기를 꺼렸지만 구사카의 설득으로 10시 46분 경순양함 나가라로 기함을 옮겼다. 세 척은 모두 자침 처분되었고, 가가는 구축함 하기카제의 어뢰로 가라앉았다. 2 9

히류의 반격과 요크타운의 최후
남은 항모 히류는 곧바로 반격했다. 야마구치가 띄운 1차 공격대 급강하폭격기 18대와 제로기 6대는 돌아가는 미국 비행기들을 따라가 처음 만난 항모 요크타운에 폭탄 세 발을 꽂았다. 갑판에 구멍이 나고 보일러가 하나만 남자 플레처는 지휘부를 중순양함 애스토리아로 옮겼다. 그러나 손상 통제반은 한 시간 안에 갑판을 메우고 보일러를 되살려 19노트로 항공 작전을 다시 시작하게 했다. 한 시간쯤 뒤 뇌격기 10대와 제로기 6대의 2차 공격대가 도착했을 때 수리가 워낙 잘되어 일본 조종사들은 손상되지 않은 다른 항모라고 여겼다. 어뢰 두 발을 맞은 요크타운은 동력을 모두 잃고 좌현으로 23도 기울었다. 각각 미국 항모 한 척씩을 격침했다는 잘못된 보고에 일본 측 사기는 크게 올랐고, 남은 기체로 마지막 한 척을 치려 했다. 2 12
늦은 오후 요크타운의 정찰기가 히류를 찾아냈고, 엔터프라이즈는 자기 비행대와 갈 곳 잃은 요크타운 비행대를 섞은 급강하폭격기 24대를 보냈다. 열 대 넘는 제로기가 지켰지만 히류는 네댓 발을 맞고 불타 더는 항공기를 띄울 수 없었다. 버려진 히류는 일본 구축함의 어뢰를 맞고도 몇 시간 더 떠 있다가 이튿날 아침 가라앉았다. 야마구치와 가쿠 도메오 함장은 배와 함께 남기를 택했고, 일본은 아마도 가장 뛰어난 항모 지휘관을 잃었다. 밤이 되자 순양함에서는 제대로 지휘할 수 없다고 본 플레처가 작전 지휘를 스프루언스에게 넘겼다. 스프루언스는 큰 승리를 거둔 것을 알았지만 일본에 무엇이 남았는지 몰라, 야간 수상 전투를 피해 동쪽으로 물러났다가 자정에 다시 서쪽으로 돌았다. 야마모토는 수상 부대로 미국 항모를 찾게 하고 순양함으로 섬을 포격하려다 결국 전면 철수를 명령했다. 스프루언스가 추격해 야마토를 비롯한 전함들과 밤에 마주쳤다면 야간전에 강한 일본 해군에게 순양함과 항모를 잃었을 가능성이 컸다는 평가가 많다. 2 12
6월 5일 새벽 미국 잠수함 탬버가 섬을 포격하러 오던 순양함 부대를 발견했지만 「큰 배 네 척」이라는 모호한 보고만 보냈다. 이를 피하려고 기동하던 중순양함 모가미와 미쿠마가 충돌했고, 이후 이틀 동안 미드웨이와 스프루언스의 항모에서 뜬 공격대가 낙오한 배들을 쳤다. 미쿠마는 격침되었고 모가미는 크게 부서진 채 돌아갔다. 한편 요크타운은 예인선에 끌려 구조 작업이 순조로웠으나, 6일 오후 구축함 경계망을 빠져나온 일본 잠수함 I-168의 어뢰 두 발을 맞았다. 같은 일제 사격의 세 번째 어뢰가 요크타운에 전력을 대 주던 구축함 해먼을 두 동강 냈고, 해먼은 자기 폭뢰가 터지면서 80명과 함께 가라앉았다. 요크타운은 7일 아침 7시 1분 전복해 침몰했다. 2 13
해전이 끝났을 때 일본군 전사자는 3,057명이었다. 항모 네 척에서만 2,181명(아카기 267명, 가가 811명, 히류 392명, 소류 711명)이 죽었고, 중순양함 미쿠마와 모가미에서 792명이 더 죽었다. 미국은 항모 요크타운과 구축함 해먼을 잃고 307명이 죽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7일 하와이에서 직접 폭격기를 이끌고 나왔다가 추락한 제7공군 사령관 클래런스 팅커 소장도 있었다. 포로 처우는 대조적이었다. 일본군은 붙잡은 미국 항공병 세 명을 신문한 뒤, 두 명은 물을 채운 석유통에 묶어 바다에 던졌고 한 명은 구축함 아라시에서 살해했다. 나구모의 보고서는 한 명이 「6일 사망해 수장했다」고만 적었다. 미국은 미쿠마 승조원 두 명과 히류 승조원 35명을 구명정에서 건져 진주만으로 데려갔다. 2

패전의 은폐와 그 뒤
6월 10일 일본 해군은 군 연락회의에 해전 결과를 불완전하게 전했다. 15일 군 수뇌부에 제출된 나구모의 상세 보고서는 「적은 우리 계획을 알지 못했다(빨라도 5일 새벽까지 우리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적었는데, 실제로는 작전 전체가 처음부터 미국의 암호 해독에 노출되어 있었다. 일본 신문과 방송은 큰 승리를 알렸다. 항모와 인원 손실을 정확히 보고받은 것은 쇼와 천황 히로히토와 해군 최고 지휘부뿐이었고, 육군조차 한동안 함대가 건재하다고 믿었다. 14일 하시라지마로 돌아온 부상자들은 「비밀 환자」로 분류되어 격리 병동에 갇혀 다른 환자는 물론 가족과도 만나지 못했다. 나머지 장병들도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남태평양 부대로 흩어졌고 대부분 그곳에서 전사했다. 2
연합함대의 제독과 참모 가운데 문책받은 사람은 없었다. 나구모는 미국 항모 두 척을 격침했다고 보고했고, 오히려 재건된 항모 부대를 다시 맡아 과달카날 작전 때 동부 솔로몬과 산타크루스 해전을 지휘했다. 산타크루스에서 전술적으로 이긴 뒤에도 그는 숙련 조종사를 잃는 소모가 「일본에 결정적인 전략적 손실」이라고 인정했다. 해전 뒤 그는 공격성을 잃은 듯했고, 1944년 두 아들에게 미드웨이 이야기를 하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944년 7월 6일 그는 사이판에서 자결했다. 일본 해군은 교훈도 반영했다. 급유와 무장을 격납고가 아닌 비행갑판에서 하고, 쓰지 않는 연료관의 기름을 빼고, 새 항모는 승강기를 둘로 줄이고 소화 장비를 늘렸다. 그러나 쇼카쿠, 히요, 다이호의 손실은 문제가 남아 있었음을 보여 준다. 무엇보다 교육 기간을 줄여 길러 낸 보충 조종사들의 질이 급격히 떨어졌고, 쉬지 못한 고참들은 전선에서 소모되었다. 2 9
미국 쪽 공로자들의 운명도 고르지 않았다. 니미츠는 로슈포르를 해군 수훈장에 추천했지만 킹이 거부했다. 킹은 그를 자기가 본 가장 군인답지 않은 장교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고 한다. 워싱턴의 OP-20-G를 이끈 존 레드먼이 하와이 암호 지국의 운영을 킹에게 문제 삼은 뒤 로슈포르는 암호 분석에서 밀려나 샌프란시스코의 부유식 건선거 지휘관으로 옮겼고, 다시는 바다에 나가지 못했다. 자원이 더 많던 워싱턴이 하와이보다 먼저 일본의 의도를 알았어야 했다는 당혹감 때문에 그가 희생양이 되었다는 서술도 있다. 그는 종전 때 킹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로훈장을 받았고, 수훈장은 사후인 1986년에야 받았다. 스프루언스는 퇴각하는 일본 함대를 쫓지 않았다고 비판받았지만, 1975년 클레이 블레어는 밤에는 함재기를 띄울 수 없었고 뇌격기 대부분을 잃었으며 구축함 연료도 바닥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의 판단을 옹호했다. 8 2

평가: 「전환점」 서술과 그 너머
미드웨이는 흔히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으로 불린다. 존 키건은 「해전사에서 가장 놀랍고 결정적인 일격」이라 했고, 크레이그 시먼즈는 살라미스, 트라팔가르, 쓰시마와 나란히 놓았다. 일본에 맞선 연합국의 첫 대규모 해상 승리였고, 일본이 이겼다면 1942년 말 새 항모가 나오기 전까지 태평양의 미국 항모는 새러토가 한 척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에는 단서가 붙는다. 미국은 여러 달의 힘겨운 전투를 더 치르고서야 대등에서 우위로 넘어갔고, 미드웨이는 연합국이 주도권을 쥐고 8월 과달카날에 상륙할 길을 열었을 뿐이다. 1943년 2월까지 이어진 과달카날 작전, 그리고 뉴기니의 밀른만·부나-고나 전투가 연합국을 방어에서 공세로 바꾼 진짜 전환점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해전 뒤 남솔로몬 상륙을 밀어붙인 것도 킹이었다. 2 14 15
손실의 무게를 두고도 평가가 엇갈린다. 항모 네 척과 함께 숙련 조종사를 잃어 일본 해군 항공대가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는 서술이 오래 통용되었다. 그러나 조너선 파셜과 앤서니 툴리는 미드웨이에서 잃은 숙련 승무원이 110명, 탑승 승무원의 25%가 조금 못 되며, 일본 해군이 개전 때 항모 자격 승무원 약 2천 명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것만으로 치명적이지는 않았다고 본다. 더 큰 타격은 항모 정비 인력의 40% 이상과 비행갑판 요원, 그들이 지닌 조직적 경험을 잃은 것이었고, 급격한 하락을 부른 것은 몇 달 뒤 동부 솔로몬·산타크루스 해전과 솔로몬 전역의 지속적인 소모였다는 것이다. 공업력의 차이는 분명했다. 일본이 항모 세 척을 만드는 동안 미국은 대형·경항모 20여 척과 수많은 호위 항모를 취역시켰고, 1938년의 제2차 빈슨법에 따른 조선 계획은 이미 3년째였다. 개전 전 야마모토가 석유와 공업력을 들어 승산이 없다고 본 판단이 이렇게 확인되었다. 2 4
기억의 문제도 있다. 진주만 공격대를 이끈 후치다 미쓰오는 맹장 수술 직후라 6월 4일 아카기 함교에 있었고, 1951년 동료와 함께 일본 쪽에서 본 미드웨이 해전기를 펴냈다. 그는 「5분! 그 짧은 시간에 전세가 뒤바뀔 줄 누가 알았겠는가」라며, 미국 급강하폭격기가 덮쳤을 때 갑판에 무장과 연료를 마친 반격 기체가 가득해 몇 분만 더 있었으면 모두 떠났을 것처럼 썼다. 이 「운명의 5분」 서술은 오래 정설처럼 퍼졌지만, 파셜과 툴리의 『부서진 칼』(2005), 댈러스 아이섬, 시먼즈, 에번 모즐리는 이를 반박했다. 영어 위키백과의 「미드웨이 해전」 항목도 공격 순간 일본 비행갑판에 남은 기체는 방어용 전투기뿐이었다고 적는다. 모즐리는 「파셜과 툴리가 후치다를 설득력 있게 반박했다」고 적었다. 진주만 3차 공격을 주장했다는 그의 다른 회고도 자기 미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불운의 서사가 작전 계획과 교리의 실패를 가려 온 셈이다. 16 2
미드웨이는 전쟁 전에 쌓은 암호 분석과 정보 수집의 가치를 보여 주었고, 그 성과는 1943년 4월 야마모토의 비행 일정을 해독해 그의 탑승기를 격추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해전 뒤 일본은 인도 아대륙에서 독일과 만나려던 구상도 접었고, 태평양에서 다시는 대규모 공세를 펴지 못했다. 그러나 이 해전을 항모와 조종사의 이야기로만 읽으면 놓치는 것이 있다. 같은 봄 둘리틀 공습의 보복으로 저장성과 장시성에서는 조종사 수색 과정에서만 중국 민간인 약 1만 명이 살해되었고, 미드웨이로 바다의 주도권이 넘어간 뒤에도 일본의 중국 침략 전쟁은 3년을 더 이어졌다. 패전을 승리로 꾸미고 부상병을 격리한 일본 군부의 정보 통제는, 국민에게 전쟁의 실상을 숨긴 채 총력전을 끌고 간 천황제 국가의 모습을 드러낸다. 2 3
결과
일본은 항모 네 척과 숙련 정비 인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고, 태평양에서 다시는 대규모 공세를 펴지 못했다. 연합국은 주도권을 쥐고 두 달 뒤 과달카날에 상륙했으며, 이후 솔로몬 전역의 소모전과 압도적인 미국 산업력이 격차를 벌렸다. 일본 군부는 패전을 승리로 발표하고 부상병을 격리해 실상을 숨겼다. 미드웨이는 흔히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으로 불리지만, 과달카날 작전을 진짜 전환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운명의 5분」 같은 불운의 서사는 계획과 교리의 실패를 가렸다는 비판을 받는다.
연표와 지도
- 11941.12.07진주만 공격
나구모 주이치의 항모 여섯 척이 진주만을 기습해 전함 여덟 척을 손상시키고 네 척을 격침했지만, 미국 항모 세 척은 바다에 나가 있었다.
- 21942.03.13피지·사모아 작전 합의
오스트레일리아 침공에 병력을 내주지 않은 육군과 해군 군령부가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연결을 끊기 위한 피지·사모아 점령 준비에 합의했다.
- 31942.04.18둘리틀 공습
항모 호닛에서 이륙한 B-25 16대가 도쿄와 여러 일본 도시를 폭격했다. 본토 방어의 빈틈이 드러나 야마모토의 미드웨이 작전이 힘을 얻었다.
- 1942.05.04–
08 산호해 해전함대끼리 서로 보지 않고 함재기로만 싸운 첫 해전에서 렉싱턴과 쇼호가 침몰했다. 일본은 포트모르즈비 침공을 취소했고 쇼카쿠·즈이카쿠는 미드웨이에 나가지 못했다.
- 1942.05.24일본 해군의 새 암호책
늦어진 새 암호책이 이날에야 쓰이기 시작했지만, 하이포 지국은 이미 「AF」가 미드웨이임을 확인한 뒤였다.
- 41942.05.26공격일 판명
수송선단 호위 명령을 해독한 하이포 지국이 공격일을 6월 4일이나 5일로 판단했다.
- 51942.06.03알류샨 작전 개시
나구모 부대의 출항이 하루 늦어져 미드웨이와 동시에 시작할 예정이던 알류샨 작전이 먼저 시작되었다.
- 1942.06.03점령 부대 발견
PBY를 몰던 잭 리드 소위가 미드웨이 서남서 약 930킬로미터에서 일본 점령 부대를 발견했다.
- 61942.06.04미드웨이 공습
새벽 4시 30분 나구모가 띄운 108대가 미드웨이 기지를 폭격했지만 활주로와 방어 시설 대부분이 살아남았다.
- 71942.06.04나구모의 무장 교체
7시 15분 예비 공격대를 지상 공격용 폭탄으로 바꾸라던 나구모는 미국 함대 발견 보고를 받고 다시 어뢰로 바꾸게 했다.
- 81942.06.04제8뇌격비행대 전멸
9시 20분 존 월드런의 TBD 15대가 호위 없이 공격하다 모두 격추되고 조지 게이 한 명만 살아남았다.
- 91942.06.04가가·아카기·소류 피격
10시 22분부터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의 급강하폭격기가 덮쳐 6분 만에 일본 항모 세 척이 불길에 휩싸였다.
- 101942.06.04히류의 반격
야마구치 다몬이 히류에서 띄운 두 차례 공격대가 요크타운에 폭탄 세 발과 어뢰 두 발을 맞혔다.
- 111942.06.04히류 피격
늦은 오후 엔터프라이즈에서 뜬 급강하폭격기 24대가 히류에 네댓 발을 맞혀 항공 작전을 끝냈다.
- 121942.06.05히류 침몰과 일본 함대의 철수
히류가 가라앉으며 야마구치와 가쿠 도메오 함장이 함께 죽었고, 야마모토는 전면 철수를 명령했다.
- 131942.06.05모가미·미쿠마 충돌
잠수함 탬버를 피하던 중순양함 두 척이 충돌했고, 이후 공습으로 미쿠마가 격침되었다.
- 141942.06.06I-168의 어뢰 공격
일본 잠수함 I-168이 예인 중이던 요크타운에 어뢰 두 발을 맞히고 구축함 해먼을 격침했다.
- 151942.06.07요크타운 침몰
요크타운이 아침 7시 1분 전복해 가라앉았다. 같은 날 제7공군 사령관 팅커 소장이 폭격기를 이끌고 나왔다가 죽었다.
- 161942.06애투·키스카 점령
일본군이 알류샨 열도의 애투섬과 키스카섬을 점령했다.
- 171942.06.10불완전한 보고
해군이 군 연락회의에 해전 결과를 불완전하게 전했고, 일본 언론은 큰 승리를 알렸다.
- 181942.06.14하시라지마 귀항
함대가 돌아오자 부상자들은 「비밀 환자」로 격리되고 장병들은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남태평양으로 흩어졌다.
- 1942.08.07과달카날 상륙
미드웨이 뒤 킹이 제안한 솔로몬 작전으로 미군이 과달카날에 상륙했다.
- 1943.04.18야마모토 격추
비행 일정을 해독한 미군 P-38이 부건빌 근처에서 야마모토의 탑승기를 격추했다.
- 191943.05.11–
29 애투 탈환전미군이 애투섬 탈환에 나섰고 29일 일본군의 마지막 돌격으로 전투가 끝났다.
- 1944.07.06나구모의 자결
중부태평양방면함대를 이끌던 나구모가 사이판에서 자결했다.
관련 인물 15명
미국 (연합국)8명
집행 · 지휘3
대상포진에 걸린 홀시 대신 엔터프라이즈와 호닛을 이끌었다. 극한 거리에서 공격대를 즉시 띄우는 도박을 했고, 밤에는 야마토가 있는 일본 수상 부대와의 야간전을 피해 물러났다.
제17기동부대 지휘관, 전술 지휘관프랭크 잭 플레처1885–1973요크타운에서 전체 지휘를 맡아 스프루언스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요크타운이 피격되자 애스토리아로 옮겼고, 밤에 작전 지휘를 스프루언스에게 넘겼다.
엔터프라이즈 비행단장웨이드 매클러스키1902–1976연료가 떨어져 가는데도 수색을 계속해 구축함 아라시의 항적을 따라 일본 항모를 찾아냈다. 니미츠는 이 판단이 해전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평가했다.
참여4
「AF」가 미드웨이이고 공격이 6월 초에 온다고 판단해 워싱턴의 반론을 이겼다. 해전 뒤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암호 업무에서 밀려났다.
미국 함대 사령장관 겸 해군 작전부장어니스트 킹1878–1956해전 전에는 워싱턴 OP-20-G의 판단을 따랐고, 해전 뒤 로슈포르의 훈장 추천을 거부했다. 미드웨이 직후 솔로몬 작전을 제안해 과달카날 상륙을 밀어붙였다.
제16기동부대 지휘관(해전 직전 입원)윌리엄 홀시1882–1959엔터프라이즈와 호닛의 제16기동부대를 이끌다 해전 직전 병으로 쓰러져, 니미츠에게 스프루언스를 후임으로 추천했다.
태평양 함대 정보참모에드윈 T. 레이턴1903–1984로슈포르의 「AF」 물 부족 전문 제안을 니미츠에게 올렸고, 일본 공격이 6월 첫 주 미드웨이를 향한다는 판단으로 니미츠를 설득했다.
일본 제국7명
집행 · 지휘4
미드웨이를 공습한 뒤 예비 공격대의 무장을 바꾸던 중 미국 함대 발견 보고를 받았다. 교리대로 공격대를 거두고 완전한 편성을 기다리다 급강하폭격기의 공격으로 항모 세 척을 잃었다.
제2항공전대 사령관야마구치 다몬1892–1942미국 항모가 보고되자 당장 공격하자고 건의했고, 세 항모가 피격된 뒤 히류에서 두 차례 공격대를 띄워 요크타운을 무력화했다. 히류가 침몰할 때 함장과 함께 배에 남았다.
제1항공함대 참모장구사카 류노스케1893–1971불타는 아카기의 참상을 기록했고, 떠나기를 꺼리던 나구모를 설득해 경순양함 나가라로 기함을 옮기게 했다.
미드웨이 공략부대·엄호대 지휘관곤도 노부타케1886–1953경항모·전함·순양함으로 이뤄진 공략부대를 이끌었으나, 야마모토의 주력과 함께 미드웨이에서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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