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1990

제19차 당협의회와 최초의 경쟁 선거

일당 국가는 왜 스스로 경쟁 선거를 도입했는가?

1988년 6월 제19차 전연방 당협의회에서 고르바초프는 권력을 당 기구에서 선출된 소비에트로 옮기는 정치 개혁을 통과시켰다. 회의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 논쟁의 무대가 되었고, 리가초프옐친에게 던진 「보리스, 자네가 틀렸네」라는 말은 온 나라의 유행어가 되었다. 1989년 3월 인민대의원 선거는 소련 역사상 첫 경쟁 선거였다. 지역 당 간부 수십 명이 무명의 도전자에게 패했고, 2년 전 실각했던 옐친은 모스크바 전역구에서 89%를 얻어 부활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

1985년 3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오를 무렵, 소련은 실물 지표와 일상 체감 모두에서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국민소득 증가율은 1960년대 후반 이후 계속 하강하여 1980년대 초에는 제로에 근접했고, 1986년 세계 유가 폭락으로 가장 큰 외화 수입원이 무너졌다.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전 폭발은 총체적 무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개혁파에게 결정적인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고르바초프 자신이 후일 "체르노빌이야말로 진정한 원인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폐쇄된 정보 체계와 관료제의 마비가 초래한 참사는 낡은 시스템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반박 불가능한 증거였다. 당과 국가의 상층부조차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말을 공공연히 주고받았다.

고르바초프 진영의 첫 번째 대응은 가속화(우스코레니예)였다. 1985~1986년, 그들은 기계 제조와 중공업에 막대한 투자를 쏟아부으며 기존 체제 안에서의 반등을 시도했다. 그러나 낡은 계획 체계는 투입된 자금을 흡수하지 못했고, 생산 증가는커녕 재정 적자만 1988년 GDP의 약 10%까지 불어났다. 경제 개혁만으로는 구조를 바꿀 수 없다는 인식이 1986년 가을 무렵 지도부 안에서 굳어졌다. 결정적 전환은 1987년 1월 27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일어났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당 간부정책에 관하여」라는 보고에서, 당의 최고 지도부가 "주관적 이유로"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브레즈네프 시대의 "침체와 사회주의에 낯선 현상들"을 초래한 책임이 당 자체에 있다고 공개 선언했다. 스탈린 사후 어느 서기장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그가 내놓은 처방은 단순한 간부 교체가 아니라 정치 체제 자체의 민주화, 즉 복수 후보와 비밀 투표, 소비에트로의 실권 이양이었다. 그는 당 기구의 머리 위로 인민에게 직접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 노선에 대한 반격은 두 차례의 굵직한 충돌로 표면화되었다. 첫째, 1987년 10월 21일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보리스 옐친이 개혁의 더딘 속도와 예고르 리가초프의 음모, 고르바초프 주변의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돌발 연설을 했다. 옐친은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직과 정치국 후보위원 자리에서 즉시 해임되었고, 이 사건으로 개혁파와 보수파의 균열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둘째, 1988년 3월 13일 레닌그라드의 화학 강사 니나 안드레예바가 『소베츠카야 로시야』에 발표한 「나는 원칙을 양보할 수 없다」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전면적 옹호이자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전방위적 공격이었다. 중앙위 서기 리가초프는 이 글을 지역 신문들에 재배포하도록 지시했고, 3월 24~25일 이틀에 걸친 정치국 회의에서 보로트니코프와 리가초프는 이 글을 "소비에트의 과거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 대한 이해할 만한 반응"이라고 옹호했다. 고르바초프와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는 마침내 4월 5일 『프라우다』에 반박문을 실어 이 글을 "반페레스트로이카 세력의 선언"이라고 규정했다.

이런 교착 속에서 고르바초프는 1941년 이후 한 번도 소집된 적 없는 '당협의회'라는 무기를 꺼냈다. 당규약상 중앙위원회는 당대회 사이에 전연방 당협의회를 소집할 권한이 있었지만,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조항이었다. 고르바초프가 당대회가 아닌 당협의회를 선택한 데는 계산이 있었다. 당대회 대의원들은 지역 당 기구가 통제하는 '순환 권력'으로 선출되는 반면, 협의회는 중앙위가 직접 소집하므로 보수파 노멘클라투라의 장악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리고 1988년 봄, 안드레예바 사건 직후의 정치적 분위기에서, 고르바초프는 개혁이 당 내부의 설득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선거라는 외부 충격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6월 28일, 4,991명의 대의원이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 모였을 때, 그들이 품고 들어간 질문은 하나였다. 개혁은 당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당을 해체할 것인가.

1941년 이후 처음, 1920년대 이후 가장 뜨거웠던 나흘

제19차 전연방 당협의회는 1941년 제18차 당협의회 이후 47년 만에 소집된 전당 규모의 회의였다. 당규약상 당협의회는 당대회와 당대회 사이에 중앙위원회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소집할 수 있었지만, 스탈린 사후 실질적으로 사문화된 제도였다. 고르바초프가 이 형식을 부활시킨 데는 계산이 있었다. 당대회가 아니었기에 중앙위원회를 새로 선출할 권한은 없었지만, 정치 개혁의 방향을 전당 차원에서 승인받아 보수파의 저항을 우회하려는 목적이었다.

협의회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1988년 3월 13일, 레닌그라드의 화학 강사 니나 안드레예바가 『소비에츠카야 로시야』에 「나는 원칙을 양보할 수 없다」를 발표했다. 스탈린의 공업화와 전쟁 지도를 옹호하고 페레스트로이카 아래 소련사의 '폄훼'를 공격한 이 글은 예고르 리가초프가 편집하고 정치국원 여러 명의 승인을 받아 실렸다. 당 안팎에서는 보수파의 조직적 반격 신호로 읽혔다. 고르바초프는 3주간의 침묵 끝에 4월 5일 『프라우다』에 반박문을 직접 지시했고, 이후 정치 개혁의 수위를 급격히 높였다. 5월 23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협의회에 제출할 10개 조항의 테제를 승인했다.

6월 28일 크렘린궁에서 4,991명의 대의원이 모인 가운데 개막한 협의회는 첫날부터 소련 정치사에 전례 없는 풍경을 연출했다. 고르바초프의 3시간 30분 개회 연설은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정치 개혁의 핵심 구상을 공개했다. 핵심은 권력을 당 기구에서 선출된 소비에트로 옮기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2,250명 규모의 인민대의원대회를 신설하여 3분의 2는 경쟁 선거로, 3분의 1은 당·노조 등 공공조직이 선출하게 하고, 이 대회가 400여 명의 상설 최고회의와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구상이었다. 모든 수준의 소비에트에 복수 후보와 비밀 투표를 도입하고, 간부 임기는 2기 10년으로 제한하며, 당 서기와 소비에트 의장을 겸임하게 해 당 간부를 주민 투표에 노출시킨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고르바초프가 기대했던 순탄한 통과는 아니었다. 회의 둘째 날부터 협의는 비공개로 전환되었고, 중계는 20분 편집본만 송출되었다. 리가초프가 회의 진행을 맡으면서 보수파의 반격이 노골화되었다. 경제학자 레오니트 아발킨은 당 서기와 소비에트 의장의 겸임이 당-국가 분리 원칙에 위배된다고 비판했고, 키예프의 대의원 드미트리 모토르니는 부실 기업 폐쇄가 가져올 사회적 비용을 경고했다.

결정적 장면은 폐막일인 7월 1일에 연출되었다. 1987년 10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의 '정치적 과오'로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에서 해임되고 정치국 후보위원에서도 물러난 보리스 옐친이 연단에 올랐다. 그는 "나의 유일한 잘못은 시기가 나빴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정치국 전체가 '침체'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에 대한 징계의 철회를 요청했다. 리가초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네, 보리스, 틀렸네. 우리는 더 이상 전술만 다른 게 아니라… 자네의 에너지는 창조적이 아니라 파괴적이야!"라고 쏘아붙이며 10분간 옐친을 공격했다. 전국이 생중계로 지켜본 이 대결은 '보리스, 자네가 틀렸네'라는 유행어와 함께 당 지도부의 공개적 분열을 온 나라에 각인시켰다.

고르바초프는 보수파의 저항에 맞서 마지막 날 인민대의원대회 신설안을 기습적으로 제출해 표결에 부쳤고, 지친 대의원들의 지지를 얻어 통과시켰다. 협의회는 「소비에트 사회의 민주화와 정치 체제 개혁에 관하여」를 비롯한 5개 결의를 채택하고 폐막했다. 고르바초프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정치 개혁의 의미를 정의하자면, 그것은 헌법에 따라 권력이 속해야 할 사람들의 손으로 공산당의 손에서 권력을 옮기는 것이었다. 당 노멘클라투라에게는 '치명적 결과'를 수반하는, 악마적으로 복잡한 정치 작전이었다."

단일후보가 지고, 이름이 지워지고, 89%가 말한 것

1989년 3월 26일은 소련 역사상 집권당이 선거 결과를 통제하지 못한 첫날이었다. 선거법 자체는 여전히 당의 손아귀에 있었다. 전체 2,250석 중 750석은 공산당, 콤소몰, 노조, 여성위원회, 과학원 등 공공조직에 사전 할당되어 있었고, 일반 유권자가 아니라 각 조직 내부 투표로 선출되었다. 직접 선거로 뽑는 1,500석조차 후보 등록까지 세 겹의 필터를 통과해야 했다: 500인 이상 유권자 회의에서 추천, 선거구 예비회의에서 과반 득표, 그리고 노동집단 대표들로 구성된 지역선거총회의 최종 승인. 이 체를 통과한 5,074명의 후보 중 399개 선거구에서는 단 한 명만 남았고, 등록 후보의 약 85%는 당원이었다.

그런데도 유권자들은 이 장치들을 무력화할 방법을 찾아냈다. 소련식 투표용지는 찬성하는 후보의 이름이 아니라 반대하는 후보의 이름을 줄 쳐 지우는 방식이었다. 단독 출마한 후보라도 투표자의 절반 이상이 이름을 지우면 낙선했다. 레닌그라드주 당 제1서기이자 정치국원 후보였던 유리 솔로비요프는 자기 선거구에서 단독 후보였음에도 유권자 3분의 2가 이름을 지워 낙선했다. 키예프 시당 제1서기와 시장도 단독 출마했다가 같은 방식으로 떨어졌다. 톰스크에서도 주당 제1서기가 무투표로 패했다. 전국적으로 지역 당 제1서기 3분의 1이 낙선했고, 정치국원 1명과 중앙위원 5명도 의석을 얻지 못했다.

경쟁이 치열했던 선거구에서는 결과가 더 극적이었다. 모스크바 시 전체를 하나의 선거구로 한 전역구에서 보리스 옐친은 570만 명이 투표한 가운데 89%를 얻어 당의 공식 후보 예브게니 브라코프(7% 미만)를 압도했다. 1987년 정치국에서 쫓겨난 지 2년 만의 복귀였다. 레닌그라드 시당 제1서기 아나톨리 게라시모프는 28세 조선소 기술자 유리 볼디레프에게 15% 대 74%로 참패했다. 모스크바 시장 발레리 사이킨은 주택 페인트공 감독 니나 아게예바에게 밀렸다. 발트 3국에서는 민족주의 인민전선이 리투아니아 42석 중 30석, 라트비아 29석 중 25석, 에스토니아에서는 절반을 휩쓸었다.

3월 28일 소집된 정치국 회의에서 고르바초프는 "인민이 다시 우리보다 앞서 나갔다"고 말했고, 리가초프는 언론을 탓하며 "필요한 곳에서는 권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콜라이 리슈코프 각료회의 의장은 "3월 26일은 전환점"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당 지도부가 진정 두려워해야 했던 것은 선거 결과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가 증명한 사실, 즉 71년간 당이 독점해 온 정당성이 더 이상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온 나라가 라디오를 귀에 대고, 고르바초프가 마이크를 껐던 13일

1989년 5월 25일, 크렘린 대궁전회의장에 모인 2,250명의 인민대의원 앞에서 제1차 대회가 개막했다. 개회 첫날 대회는 고르바초프를 최고 소비에트 의장으로 만장일치 선출했지만, 그 직전 알렉산드르 오볼렌스키 의원이 대안 후보로 나서며 단일후보 관행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등록되지는 않았으나, 소련 의회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둘째 날인 26일, 본회의는 542명의 상임 최고 소비에트를 선출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전역구에서 89%로 당선된 보리스 옐친은 이 투표에서 탈락했다. 지난 2년간 옐친을 향한 당 기구의 적의가 수치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사흘 뒤인 29일, 시베리아 출신의 법학자 알렉세이 카잔니크 의원이 자신의 자리를 옐친에게 양보하겠다고 선언했다. 「옐친이 최고 소비에트에 들어가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은 전국에 충격을 주었고, 카잔니크는 하룻밤 사이에 이름을 알렸다.

대회의 전 회의는 텔레비전과 라디오로 생중계되었다. 소련 시민들은 직장에서, 이발소에서, 버스 안에서 라디오를 귀에 대고 중계를 들었고, 공장의 생산성은 곤두박질쳤다. 처음으로 국민은 검열되지 않은 정치적 충돌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역사가 유리 아파나시예프는 연단에서 보수파 의원들을 향해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라고 말했고, 이 말은 그대로 시대의 유행어가 되었다.

6월 2일에는 아프간전 참전용사 세르게이 체르보노피스키가 사하로프를 연단에서 몰아붙였다. 사하로프가 캐나다 언론에 소련군의 아프간 행위를 살인과 압제라고 말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의장석과 다수 의원은 체르보노피스키 편에 섰고, 사하로프가 연단에서 야유와 고함을 견디며 서 있는 장면은 생중계를 타고 전국에 흘러갔다.

폐회일인 6월 9일, 사하로프는 이미 발언 시간을 다 써버린 상태에서 다시 연단에 올랐다. 그가 들고 있던 「권력에 관한 포고」 초안의 핵심은 헌법 6조의 삭제, 즉 공산당의 권력 독점을 끝내라는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시간이 다 됐다. 대회에 대한 존경이 없는가」라며 마이크를 꺼버렸다. 사하로프는 「나는 대회보다 조국과 국민을 더 존경한다」고 응수했다. 회의장 안에서는 마이크가 꺼졌지만, 텔레비전 중계 마이크는 살아 있었다. 2,250명의 의원은 듣지 못했지만, 수백만의 시청자는 전부 들었다.

바로 그날, 사하로프·옐친·아파나시예프·가브릴 포포프·빅토르 팔름을 공동의장으로 388명이 모여 지역간대의원그룹을 결성했다. 소련 역사상 최초의 합법적 의회 야당이었다. 대회는 아무런 결정적 권력 이동도 이루지 못했지만, 사하로프가 말했듯 「모든 다리를 불태웠다」.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된 13일이었다.

여섯 번째 조항이 무너진 40일

1990년 2월 4일, 소련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가 모스크바 중심부를 가득 메웠다. 크림스키 다리에서 시작된 인파는 정원환을 따라 크렘린 앞 마네즈 광장까지 행진했다. 경찰 추산 20만, 모스크바 라디오는 30만, 주최 측은 50만이라고 주장했다. 플래카드에는 숫자 '6'이 그려져 있었다. 헌법 6조, 즉 "소비에트 사회의 지도적이며 방향을 제시하는 힘은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이다"를 폐지하라는 요구였다. 연단에 선 가브릴 포포프는 "모든 민주 조직을 반관료 전선으로 통일하자"고 외쳤고, 보리스 옐친도 연설했다.

시위 바로 다음 날인 2월 5일, 중앙위원회 확대 플레넘이 열렸다. 의제는 제28차 당대회를 위한 플랫폼 초안이었지만, 전부 6조를 이야기했다. 고르바초프는 두 가지를 제안했다: 당의 권력 독점을 명시한 6조의 철폐, 그리고 대통령제의 도입. 아나톨리 솝차크가 훗날 기록했듯, "발언한 거의 모든 사람이 6조 철폐에 부정적이었다. '소위 민주주의자들'을 가장 격렬한 어조로 비난했다. 그리고 나서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던졌다."

고르바초프 자신도 플레넘 직전까지 양면적이었다. 1989년 6월 정치국 회의에서는 6조의 "수정"만으로 충분하다고 했고, 12월 제2차 인민대의원대회에서는 사하로프가 제기한 6조 폐지 안건을 의제에조차 올리지 못하게 막았다. 그런데 불과 두 달 뒤 정반대 입장에 서 있었다. 무엇이 바뀌었는가.

첫째, 거리였다. 2월 4일 시위는 당 중앙위원회 개막 24시간 전에 당의 존재 이유 자체를 문제 삼는 군중이 크렘린 성벽 앞까지 밀려들었다는 사실로, 당 간부들에게 체제 정당성의 붕괴를 생생히 보여주었다. 둘째, 당 자체의 균열이었다. 1990년 초 당원 이탈이 가속화되고, 리투아니아 공산당은 전연방 당에서 분리될 움직임을 보였으며,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당 조직이 사실상 와해 상태였다. 셋째, 고르바초프의 계산이 있었다. 6조를 포기하는 대신 대통령제를 얻는 거래였다. 당의 집단 지도라는 틀을 넘어, 선거로 정당성을 부여받는 강력한 행정 수반이 되는 것. 보수파도 이 거래를 받아들였다: 당의 헌법적 독점을 내주더라도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으로서 질서를 잡아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플레넘은 2월 7일 6조 개정을 압도적으로 결의했다. 한 달 뒤인 3월 12일, 제3차 임시 인민대의원대회가 소집되었다. 나흘간의 회기에서 두 개의 역사적 결정이 내려졌다. 3월 14일,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6조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새 6조는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기타 정당들, 그리고 노동조합, 청년, 기타 사회 조직과 대중운동은… 소비에트 국가의 정책 수립과 국가·사회 사무의 관리에 참여한다"고 규정했다. 공산당이 여전히 첫머리에 이름을 올렸지만, '기타 정당들'이라는 문구가 소련 헌법에 처음 등장했고, 당의 '지도적 역할'은 삭제되었다. 표결은 찬성 1,771, 반대 164, 기권 74였다. 전체 대의원 2,245명 중 236명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사실은 당의 분열을 드러냈다.

다음 날인 3월 15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 선거는 첫 회에 한해 대의원대회 간선으로 치러졌다.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와 바딤 바카틴 내무장관도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둘 다 사퇴해 고르바초프가 단독 후보가 되었다. 2,000명이 투표해 찬성 1,329표(59.2%), 반대 495표, 무효 54표, 122명은 아예 투표하지 않았다. 3분의 2 정족수를 불과 46표 차이로 넘긴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고르바초프는 연단에서 "개를 목줄에서 풀어줄 수는 없다"며 당 서기장직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정반대였다. 6조의 지도적 역할이 삭제된 헌법 아래에서 당은 더 이상 국가 위에 서는 존재가 아니었다. 대통령으로서 고르바초프가 얻은 권한, 즉 군 통수권, 총리 지명권, 비상사태 선포권은 역설적이게도 당을 우회하는 새로운 권력 중심을 만들었다. 이반 프롤로프가 플레넘에서 말했듯, "우리가 지금 말하는 것은 형식적으로는 헌법 6조와 7조의 개정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말 그대로 쿠데타, 정치체제 변화의 완전한 완성입니다." 당은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판 셈이었다.

열린 문은 다시 닫히지 않았다

제19차 당협의회가 확정한 것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소련에서 더 이상 단일후보 선거는 없으며, 당 기관은 국가 기관과 분리되고, 최고 권력은 당 중앙위원회가 아니라 선출된 인민대의원대회에 속한다는 원칙이 당의 이름으로 선언된 것이다. 1988년 12월 1일 헌법 개정으로 이 원칙들은 법제화되었다. 이 지점에서 19차 당협의회는 되돌릴 수 없는 분기점이었다. 1941년 이후 처음 소집된 당협의회가 공개 토론의 장이 된 것 자체로, 소련 정치는 이미 이전 시기로 복귀할 수 없는 지점을 통과했다.

그러나 당협의회가 해결하지 못한 것은 해결한 것만큼이나 컸다. 경제 개혁의 구체적 방향은 여전히 모호했다. 유리 아파나시예프는 대회 직후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해결책은 분명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민족 문제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고, 2년 안에 연방을 흔들 핵심 균열로 등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이 경쟁 정치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은 애초에 제기조차 되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는 7월 4일 정치국 회의에서 "당이 아닌 다른 제도가 필요한가 하는 물음에 당협의회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말했지만, 불과 2년 뒤 당은 헌법 6조를 스스로 포기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가장 첨예하게 갈리는 지점은 당협의회의 제도 설계가 당의 붕괴를 초래했는가 하는 문제다. 특히 '당 위원장과 소비에트 의장의 겸직' 원칙은 당 간부들에게 유권자의 심판을 받게 함으로써 당을 활성화하려던 고르바초프의 의도와 달리, 당 엘리트들이 당 기구를 떠나 소비에트로 이동하는 통로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슈빈은 이것을 "행정 자원과 가장 활동적인 당 간부들이 소비에트 구조로 빠져나간" 과정이라고 분석하며, 소련 붕괴는 체제의 불가피한 실패가 아니라 엘리트 간 권력 투쟁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논쟁은 고르바초프의 의도 자체를 둘러싼다. 그가 당의 지도적 역할을 보존하려 했는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해체했는가 하는 물음이다. 고르바초프는 회고록에서 "권력을 소비에트로 옮기는 것"이 목표였고 2천만 당원이 2억 인민을 통치할 근거가 무엇이냐고 자문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사회주의와 연방을 보존하려 했고, 당협의회를 반대파를 무력화하고 사회를 결집하는 수단으로 구상했다. 안드레이 콜레스니코프의 표현대로, 고르바초프는 "나사를 풀고 글라스노스트와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사회주의뿐 아니라 제국 자체를 잃게 될 것이라고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다."

19차 당협의회는 일당 체제가 스스로 경쟁 정치를 도입한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드문 실험이었다. 그 실험의 결과에 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실험의 설계자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그리고 다른 길이 가능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닫히지 않은 질문으로 남아 있다.

결국 개혁은 가능했는가

제19차 당협의회가 열린 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소련은 사라졌다. 이 시간적 근접성 때문에 협의회를 바라보는 역사가들의 시선은 한 가지 질문으로 수렴되었다: 1988년 6월의 정치 개혁은 개혁 가능한 체제를 개혁하려다 실수로 무너뜨린 것인가, 아니면 태생적으로 개혁이 불가능한 체제에 문을 열어준 순간 붕괴가 확정된 것인가.

첫 번째 입장은 소련 체제의 '개혁불가능성 테제'다. 마틴 말리아는 소련을 '원죄'를 지닌 체제로 보았다. 스탈린주의라는 DNA가 박힌 체제는 부분 개혁으로는 살 수 없고, 진짜 개혁이 시작되는 순간 정당성의 기초가 무너져 전체가 붕괴한다는 주장이다. 스티븐 코트킨의 《피해 간 아마겟돈》은 제목 그대로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소련을 구한 것이 아니라, 소련의 붕괴가 대규모 유혈 사태 없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피해 간' 것이라고 보았다. 이 관점에서 19차 당협의회는 개혁의 시작이 아니라 붕괴의 개시다. 당이 독점에서 물러나는 순간, 그 공백을 채울 다른 어떤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입장은 2004년 스티븐 코언이 《슬라빅 리뷰》에 발표한 논문 「소련 체제는 개혁 가능했는가」로 대표된다. 코언은 1985년부터 1991년까지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소련 체제를 이루는 다섯 개 구성요소, 즉 공식 이데올로기, 공산당과 그 독재, 소비에트 네트워크, 국가 독점 경제, 공화국 연방이 모두 놀라울 정도로 개혁 가능했음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한다. 당은 다당제를 받아들였고, 경제는 협동조합법을 통과시켰으며, 연방은 주권 공화국들의 연합이라는 새 틀을 논의하고 있었다. 코언에게 실패는 체제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개혁의 정치적 관리와 '잃어버린 대안들', 특히 1987~88년에 가격 개혁과 경제 구조조정을 먼저 하지 않고 정치 개혁을 앞세운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아치 브라운의 《고르바초프 팩터》(1996)는 한 사람의 행위자성에 초점을 맞춘다. 소련은 깊은 위기에 빠져 있었지만 붕괴 직전은 아니었다. 1988년 정치 개혁을 선택한 것은 체제의 필연적 요구가 아니라 고르바초프 개인의 판단이었고, 그 판단은 당 관료집단이 경제 개혁을 가로막는 현실을 돌파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블라디슬라프 주보크의 《붕괴》(2021)는 여기에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그에 따르면 소련 경제의 구조적 문제는 중국이 증명했듯 정치 체제를 유지한 채로도 대처할 수 있었다. 결정적 변수는 고르바초프가 경제 안정화에 앞서 정치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개혁이 필요한 바로 그 시점에 소비재 부족이라는 재앙적 상황과 자유로운 출국이 만나 엘리트들의 체제 이탈을 촉발한 데 있었다.

이 논쟁의 바닥에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 깔려 있다. 고르바초프 자신은 퇴임 후 회고에서 1987~88년에 가격 개혁을 단행하지 못한 것을 '전략적 실수'라고 불렀지만, 정치 개혁 없이는 경제 개혁도 관료제의 저항에 막혔을 것이라는 신념은 끝내 거두지 않았다. 19차 당협의회는 그 신념의 산물이었고, 그 신념의 결과였다. 협의회가 결정한 것은 분명하다: 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는 끝났다. 그러나 그것이 개혁의 실패였는지, 개혁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길이 있었는지는 30년이 넘도록 닫히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무엇이 정착되었고, 무엇은 끝내 정착되지 않았는가

제19차 당협의회가 열렸을 때도, 그리고 그로부터 3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역사가들이 합의한 것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이 회의가 소련 정치체제의 돌이킬 수 없는 변형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경쟁 선거, 생중계된 의회, 합법 야당, 이 모든 것은 1988년 6월의 나흘 없이는 불가능했다. 다른 하나는 그 변형의 방향과 의미에 대한 평가가 첨예하게 갈린다는 사실이다.

회의가 실제로 정착시킨 것은 경쟁 선거라는 원리 자체였다. 1989년 3월, 소련 시민은 생애 처음으로 단일후보가 아닌 복수후보 중에서 선택했고, 그 결과는 지역 당 간부들의 대량 낙선으로 이어졌다. 이 선거가 없었다면 인민대의원대회도, 지역간대의원그룹도, 헌법 6조 삭제도 없었다. 이 점에서 아치 브라운이 『고르바초프 팩터』(1996)에서 주장한 대로, 당협의회는 "소비에트 체제를 내부로부터 변형시킨 결정적 돌파구"였다.

그러나 회의가 정착시키지 못한 것, 혹은 내부모순을 안고 정착시킨 것이 더 많다. 첫째, 권력 분립과 당·정직 겸임(совмещение)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원칙을 하나의 결의에 담았다. 당 기구를 국가로부터 분리하겠다고 선언하면서도, 제1서기가 해당 소비에트 의장을 겸임하게 한 것은 개혁의 설계자들 사이에서도 격렬한 논란을 낳았다. 알렉산드르 슈빈의 표현대로, 이는 "민주적 외관 아래 당의 통제를 유지하려는 안전장치"였다. 실제로 이 조항은 보리스 옐친이 당협의회 연단에서 공개적으로 반대한 거의 유일한 제도적 쟁점이었다.

둘째, '공공단체 할당'이라는 이름으로 전체 의석 2,250석 중 750석을 당과 그 위성조직에 배정한 것은 '경쟁 선거'라는 원칙 자체에 대한 중대한 예외였다. 당은 스스로 연 문의 절반을 여전히 잠그고 있었던 셈이다. 보리스 메주예프의 지적처럼, 이 조항은 "개혁이 전면적 민주화로 가는 것을 막는 구조적 제동장치"로 작동했다.

셋째, 회의는 민족 문제에 관해 '민족관계에 관하여'라는 모호한 결의 하나를 통과시켰지만, 연방 구조의 실질적 재편에는 이르지 못했다. 회의 폐막 5개월 후 에스토니아가 주권 선언을 했고, 이듬해 발트 3국 전체가 '주권 퍼레이드'의 포문을 열었다. 블라디슬라프 주보크의 『붕괴』(2022)가 강조하듯, 고르바초프는 민족 문제의 폭발성을 끝까지 과소평가했고, 정치개혁이 오히려 원심력에 제도적 통로를 열어주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가장 첨예한 논쟁은 '개혁이 과연 성공할 수 있었는가'라는 반사실적 질문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브라운은 고르바초프가 의식적으로 일당 독재를 해체했으며, 소련 체제의 평화적 소멸 자체가 개혁의 성공이라고 본다. 주보크는 정반대로, 개혁의 설계 자체가, 너무 급진적이면서도 너무 소심했고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풀면서도 당의 손아귀를 끝내 놓지 않은 것이, 국가 붕괴의 직접적 원인이었다고 본다. 러시아 학계 일각은 '중국식 경로', 즉 정치적 자유화 없는 경제개혁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하지만, 당협의회 무렵 이미 경제개혁이 당 기구의 저항으로 좌초되어 있었기에 정치개혁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 질문은 오늘날까지도 닫히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끝나지 않은 하나의 질문

제19차 당협의회와 그 후속 개혁을 두고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합의되지 않은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소비에트 체제는 애초에 개혁 가능했는가, 아니면 개혁을 시도하는 행위 자체가 붕괴를 불러왔는가.

옥스퍼드의 정치학자 아치 브라운은 1996년 저서 『고르바초프 팩터』에서 고르바초프가 1987년 1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기점으로 체제 내 개량을 넘어 체제 변혁을 의식적으로 택했으며, 1988년 당협의회의 경쟁 선거 도입은 단순한 전술이 아니라 진정한 민주화 의도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브라운에게 1991년의 붕괴는 체제의 개혁 불가능성을 입증한 것이 아니라, 개혁이 성공할 만큼 충분한 시간을 얻지 못한 채 보수파의 쿠데타와 공화국들의 이탈이라는 우발적 요인에 의해 좌초된 사례였다.

정반대 입장의 대표적 논자는 프린스턴의 역사학자 스티븐 코트킨이다. 2001년 『아마겟돈은 피했다』에서 코트킨은 소비에트 체제가 이데올로기·당·계획경제·연방이라는 네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이 중 어느 하나라도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시도는 전체 구조의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고르바초프가 1988년 당협의회에서 당 기구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경쟁 선거를 도입한 순간, 체제는 이미 회복 불가능한 길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이 논쟁을 가장 정교하게 전개한 사람은 뉴욕대의 정치학자 스티븐 코언이다. 2004년 『슬라빅 리뷰』에 발표한 논문 「소비에트 체제는 개혁 가능했는가」에서 코언은 개혁 불가능성 가정 자체가 사후적 결정론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이데올로기, 당 독재, 소비에트 체계, 국유 경제, 공화국 연방이라는 체제의 다섯 구성요소 각각이 1985년부터 1991년 사이에 실제로 얼마나 극적으로 변모했는지를 하나하나 검토한 뒤, 코언은 그 모든 요소가 놀라울 정도로 개혁 가능했음이 드러났다고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붕괴를 설명하는 것은 체제의 본질적 결함이 아니라, 개혁이 진행되던 특정한 정치적·인적 조건들이다.

또 다른 축은 제리 호프가 1997년 『민주화와 혁명』에서 제시한 관점이다. 호프는 고르바초프가 1985년부터 1987년 사이 중앙위원회 위원 69명 중 62명, 150명의 주당 제1서기 중 108명을 교체할 정도로 막강한 인사권을 행사했음을 보여주며, 그가 약한 지도자였다는 통념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호프의 고르바초프는 개혁을 추진할 충분한 권력을 가졌지만 경제 개혁의 순서와 방법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 지도자였다.

러시아 학계 내부에서도 평가는 엇갈린다. 알렉산드르 슈빈과 같은 역사가들은 고르바초프가 1988년 당협의회에서 「사회주의적 법치국가」를 구상했으며, 다당제가 아니라 소비에트 내 복수 후보제를 통해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진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반면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등 군 출신 역사가들은 개혁의 의도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소련은 붕괴로 가는 직선 코스에 올랐고, 1988년 6월의 나흘이 그 분기점이었다고 평가한다.

이 모든 논쟁을 가로지르는 합의점이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은 1988년 당협의회에서 시작된 정치 개혁이 소비에트 체제의 궤도를 돌이킬 수 없이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 자체다. 누구의 해석을 따르든, 그 나흘은 20세기 후반의 정치 지도를 다시 그린 사건으로 남는다.

결과

1989년 5월 제1차 인민대의원대회가 전국에 생중계되면서 정치는 하루아침에 극장이 되었고, 온 나라가 일을 멈추고 중계를 지켜보았다. 사하로프 등이 결성한 지역간대의원그룹은 사실상 최초의 합법 야당이 되었다. 1990년 3월에는 헌법 6조에 명시된 당의 지도적 역할이 삭제되고 대통령제가 도입되었다. 당은 스스로 연 문을 통해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연표

  1. 1988.06
    제19차 당협의회

    정치개혁 결의가 채택되고 공개 논쟁이 부활했다.

  2. 1989.03
    인민대의원 선거

    소련 사상 첫 경쟁 선거에서 당 간부들이 대거 낙선했다.

  3. 1989.05
    제1차 인민대의원대회

    생중계된 대회에서 지역간대의원그룹이 결성되었다.

  4. 1990.03
    헌법 6조 삭제

    당의 지도적 역할 조항이 삭제되고 대통령제가 도입되었다.

관련 인물 14명

참여10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1923–2005

정치개혁 구상의 이론적 뒷받침을 맡았다.

보리스 옐친1931–2007

모스크바 전역구에서 89%를 얻어 정치적으로 부활했다.

안드레이 사하로프1921–1989

지역간대의원그룹을 이끌다 1989년 12월 대회 회기 중에 죽었다.

가브릴 포포프1936–

지역간대의원그룹의 공동의장이었다.

아나톨리 솝차크1937–2000

대회 연단에서 스타로 떠오른 법학자였다.

소련 각료회의 의장니콜라이 리시코프1929–2024

2월 플레넘에서 대통령제 도입에 반대했고, 3월 대의원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사퇴해 고르바초프의 무경쟁 당선을 가능케 했다.

《프라우다》 주필, 중앙위원회 서기이반 프롤로프1929–1999

2월 플레넘에서 6조 개정을 두고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쿠데타"라고 말했다.

지역간대의원그룹 공동의장유리 아파나시예프1934–2015

지역간대의원그룹 공동의장으로서 제2차 대의원대회에서 6조 폐지를 요구했다.

옐친에게 의석을 양보한 인민대표알렉세이 카잔니크1941–2019

1989년 5월 29일, 옐친이 최고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지 못하자 자신의 의석을 옐친에게 양보했고, 이 행동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으며 대회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았다.

반페레스트로이카 선언문의 저자니나 안드레예바1938–2020

『소비에츠카야 로시야』 기사로 스탈린을 옹호하고 페레스트로이카를 공격했다.

관련 용어

출처: Archie Brown, The Gorbachev Factor (1996)Stephen Kotkin, Armageddon Averted: The Soviet Collapse, 1970–2000 (2001)William Taubman, Gorbachev: His Life and Time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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