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1945

태평양 전쟁

일본 제국은 왜 1941년 아시아와 태평양을 공격했고, 연합국은 어떻게 1945년 항복을 받아냈는가?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일본 제국이 미국과 영국 세력권을 공격하면서 본격화된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의 전쟁으로, 1937년부터 이어진 중일전쟁과 일본의 자원 및 제국 확장 정책이 배경이었다. 미국의 대일 석유·자재 제재와 중국에서의 충돌 속에서 일본 지도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석유와 동남아 자원을 점령하고 미국의 협상 의지를 꺾으려 했지만, 진주만 공격은 미국을 전면전으로 끌어들였다. 일본은 1942년 초 필리핀, 말라야,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으로 빠르게 팽창했으나 산호해와 미드웨이에서 공세의 한계가 드러났다. 1942년 과달카날부터 연합국은 남서태평양과 중부태평양에서 도약식 공세를 진행했고, 1944년 필리핀 탈환과 마리아나 제도 점령으로 일본 본토를 폭격할 거점을 확보했다. 1945년 봉쇄, 폭격,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소련의 대일 참전이 겹치면서 일본은 8월 15일 항복을 공표했고 9월 2일 도쿄만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제국의 안전이라는 말이 만주를 가리키기 시작할 때

1931년 직전의 동아시아는 평화로운 현상유지가 아니라, 제국들이 조약과 군사기지를 겹쳐 놓은 불안정한 질서였다.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 뒤 대만과 조선, 남사할린, 그리고 중국 동북부의 관동주 조차지와 남만주철도라는 권익을 확보했다. 일본의 지배층은 이를 서구 열강에게 포위되지 않기 위한 방어선이자 산업화를 지속할 자원 기반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중국인에게 만주는 중국 영토였고, 1920년대 국민정부와 장쉐량의 동북군은 군벌 분열을 넘어 관세와 철도, 주권을 회복하려 했다. 일본의 철도 경비대와 이주민 보호 주장은 중국의 통일 움직임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압력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1929년 세계공황은 일본 농촌의 소득과 생계를 무너뜨렸고, 관세 경쟁과 블록 경제는 원료와 시장을 제국별로 가두었다. 일본 본토에는 석유와 고무, 철광석이 충분하지 않았으며, 산업과 군대는 해외 수입과 식민지 생산에 의존했다. 만주는 석탄과 철, 농업 생산, 철도망을 한곳에 묶은 공간으로 보였고, 관동군 장교들에게는 소련과 맞닿은 완충지대이자 장차 강대국 전쟁을 준비할 산업 기지였다. 일본 내부에서도 외교 협상과 군축을 중시한 세력, 중국에서 더 공격적으로 나가려는 세력이 다퉜지만, 군부는 천황에 대한 통수권을 정부의 통제로부터 분리해 해석할 수 있는 제도적 틈을 이용했다.

결정적 행위자는 도쿄의 단일한 계획만이 아니었다. 관동군의 이시와라 간지이타가키 세이시로는 1931년 9월 18일 남만주철도 선로 옆에 폭약을 터뜨리고 중국군의 공격인 것처럼 꾸몄다. 손상은 열차 운행을 막지 못할 만큼 작았지만, 관동군은 이를 구실로 봉천을 점령하고 곧 만주 전역으로 진격했다. 정부가 사후에 이를 승인하면서 현지 군대의 독단은 성공의 선례가 되었다. 1932년 세워진 만주국은 자립국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일본군의 정치적, 경제적 통제 아래 있었다.

중국은 국제연맹에 호소했고, 미국은 문호 개방 정책과 중국의 영토 보전을 내세워 일본의 합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스팀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국제연맹의 리튼 보고서는 일본의 행동을 정당한 자위가 아니라 현상 변경으로 보고 만주국 승인을 거부했다.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군사적 정복을 막지 못한 이 대응은 일본 지도자들에게 무력으로 먼저 사실을 만들면 외교가 뒤따라온다는 신호를 주었고, 중국의 주권 회복 시도와 일본의 제국적 안전 구상이 충돌하는 장기전의 문을 열었다. 다만 이것이 경제공황만의 자동적인 결과였던 것은 아니다. 군부의 자율성, 인종적 제국 이데올로기, 중국의 저항, 국제 질서의 무력함이 함께 작용한 선택이었다.

철도를 지킨다는 명분이 중국 전역의 전쟁이 되기까지

1931년의 만주 점령은 도쿄 내각이 치밀하게 설계한 단일한 계획이라기보다, 현지 군부가 중앙의 통제를 시험하며 기정사실을 만든 사건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뒤 남만주철도와 관동주를 보유했고, 관동군은 철도 경비를 넘어 만주를 일본의 대륙 방어선이자 공업·식량·광물 공급지로 보았다. 9월 18일 밤 봉천 근처 유조호에서 철로 옆에 설치한 폭약은 열차 운행을 멈추지도 못했지만, 관동군은 중국군의 공격이라고 발표하고 봉천의 중국 수비대를 공격했다. 미 국무부가 다음 날 받은 전문에는 장쉐량이 보복을 금하고 무기를 보관하라고 명령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장제스와 장쉐량에게 이것은 군사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남부의 내전까지 치르는 중국이 시간을 사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비저항은 일본군이 대가 없이 도시를 점령하도록 만들었다. 관동군은 도쿄의 명령을 어기고 철도선을 따라 장춘과 하얼빈까지 진격했고, 1932년 만주국을 세웠다. 국제연맹의 리튼 보고서는 일본이 주장한 자위와 독립국 건설을 그대로 승인하지 않았다. 일본이 만주의 기존 질서와 주민의 자결을 파괴해 만든 현상은 합법적 변화가 아니라 군사 점령 뒤의 사후 정당화라는 판단이었다.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했지만, 중국의 문제도 단순하지 않았다. 국민정부는 일본과 싸우기 전에 공산당을 제압하려 했고, 그 틈에서 동북과 화북의 저항은 지역군, 학생, 농민, 공산당 세력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조직했다. 1936년 서안사변 뒤 장제스는 일본을 우선 상대하는 국공합작을 받아들였다. 1937년 7월 7일 풍대의 일본군 야간훈련 뒤 노구교 부근에서 실종 병사를 둘러싼 교전이 일어났을 때, 양측은 처음에는 현지 협상으로 봉합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완평성을 압박했고 중국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이 충돌이 곧바로 전면전을 필연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만주에서 이미 작동한 현지 군부의 독주와 중국의 항복 거부가 이번에는 서로 물러설 공간을 없앴다. 일본 지도부는 한 달이면 중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보았으나, 중국은 수도를 잃고도 충칭으로 정부를 옮겨 전쟁을 계속했다. 일본이 ‘사변’이라고 부른 명칭은 선전 이상의 기능을 했다. 정식 선전포고를 피하면 미국과 영국의 중립법과 경제 제재를 덜 자극하면서, 중국에 대한 전쟁을 제한된 치안 작전처럼 보이게 할 수 있었다. 실제 결과는 그 반대였다. 철도와 자원지대를 확보하려던 전쟁은 중국인의 장기 저항, 국민당과 공산당의 경쟁적 동원, 점령지 민간인에 대한 폭력 속에서 일본이 끝내 빠져나오지 못한 대륙전이 되었다.

동맹은 안전보장이었고, 남진은 탈출구였다

1940년 9월 27일 베를린에서 일본, 독일, 이탈리아가 맺은 삼국동맹은 서로의 작전계획을 하나로 만든 통합사령부가 아니었다. 조약 제1조와 제2조는 독일·이탈리아가 유럽의 ‘신질서’를 지도하고 일본이 ‘대동아’의 신질서를 지도한다는 분업을 인정했다. 제3조의 공동 원조도 당시 전쟁에 관여하지 않은 국가의 공격을 받을 때라는 조건이 붙었다. 일본 지도자들이 여기서 얻으려 한 것은 유럽 전선의 독일을 태평양에 불러오는 약속보다 미국이 일본을 공격하면 독일과 이탈리아도 상대해야 한다는 억지력이었다. 반대로 미국은 이 문서를 중국에서의 전쟁과 유럽의 파시즘을 연결하는 선언으로 읽었다. 실제로 세 나라의 이해는 달랐고 상호 원조 조항은 발동되지 않았다. 동맹은 강한 약속처럼 보였지만,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 위험을 계산하는 방식도 바꾸었다.

일본의 국내 논리는 자원 부족과 제국의 자기보존을 한 문장으로 묶었다. 중국에서 철수하면 1937년 이래의 희생과 만주국을 포기하는 셈이고, 서구 세력이 자원과 해상로를 통제하는 한 일본은 다시 봉쇄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대동아 공영권’은 서구 식민주의를 몰아내는 해방의 언어로 제시됐지만, 실제 계획은 일본군의 점령과 일본 중심의 무역 통제였다. 1940년 9월 일본군은 비시 프랑스와 협정을 맺고 북부 인도차이나에 진입해 중국으로 가는 보급로를 압박했다. 1941년 7월 남부 인도차이나의 비행장과 항구까지 장악하자, 영국령 말라야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석유지대에 대한 작전이 현실적인 선택지가 되었다.

이 조치는 미국의 계산도 바꾸었다. 미국은 1937년 이후에도 일본에 석유를 팔았지만, 1940년부터 철강·고철과 항공연료 수출을 단계적으로 제한하고 중국에 대한 차관과 보급을 늘렸다. 남부 진입 뒤 루스벨트 행정부는 1941년 7월 26일 일본 자산을 동결했고, 8월 1일부터 석유와 휘발유 수출을 사실상 끊었다. 일본 석유의 80퍼센트 이상이 미국산이었으므로 이는 단순한 항의가 아니라 시간제한이 있는 경제 압박이었다. 일본 해군은 비축유가 고갈되기 전에 후퇴하거나, 동남아 자원지대를 점령하거나,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다. 남방 작전은 필리핀의 미국 기지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자원을 얻으려는 전쟁은 미국과의 전쟁을 먼저 무력화해야 하는 전쟁으로 변했다.

외교는 마지막까지 별개의 선택지로 남아 있었다. 일본의 1941년 11월 20일 제안은 남부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나는 대신 중국에 대한 미국·영국·네덜란드의 지원과 제재를 끝내고 석유를 공급하라는 것이었다. 일본 군부가 중국과 만주국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 반면, 코델 헐이 11월 26일 내놓은 「미국과 일본 간 합의 기초안 개요」는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의 철수, 무력에 의한 영토 변경의 거부, 무차별 무역을 요구했다. 일본 쪽에서는 이를 생존 조건을 거부하는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였고, 미국 쪽에서는 침략을 멈추게 할 최소한의 원칙으로 보았다. 어느 쪽도 상대의 핵심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석유 봉쇄는 일본을 자동으로 전쟁에 밀어 넣은 것이 아니라, 제국을 유지할 것인지 확장을 중단할 것인지의 선택을 짧은 시간 안에 강제했고, 일본 지도부는 전자를 택하면서 남진과 대미 선제공격을 한 묶음으로 만들었다.

첫 타격은 제국을 넓혔지만, 남방의 길을 닫지는 못했다

일본 지도부가 1941년 12월 7일을 택한 이유는 미국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미국 함대가 남방 작전을 방해하기 전에 잠시 묶어 둘 수 있다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중국 전쟁을 끝내지 못한 채 석유와 고무가 필요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유전과 말라야의 고무를 차지하려면 필리핀의 미군과 영국 해군,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가 위협이었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대규모 기습으로 전함 전력을 마비시키면 일본이 남방 자원지대를 점령하고 방어선을 굳힐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구상은 장기전의 승리가 아니라, 충격을 받은 미국이 협상으로 돌아오리라는 짧은 전쟁의 도박이었다. 해군 군령부 내부에서는 하와이까지 공격하는 위험과 작전의 지속 가능성을 두고 반대가 있었고, 육군과 해군 사이에도 남방 점령 이후 무엇을 방어할지에 대한 합의가 완전하지 않았다.

진주만 공격은 전함 네 척을 침몰시키고 미국인 2,403명을 죽였지만, 일본이 필요로 한 전쟁의 조건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미국 항공모함 세 척은 항구에 없었고, 유류 저장고와 수리 시설도 폭격을 피했다. 더 결정적인 것은 공격이 미국 사회에 협상을 요구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참전을 결집시켰다는 점이다. 일본은 같은 시간대에 필리핀, 괌, 웨이크, 말라야와 홍콩도 공격했다. 도쿄의 관점에서는 포위망을 끊는 동시 공세였지만, 미국과 영국의 관점에서는 예고 없는 제국 전쟁의 시작이었다. 11월 26일 미국의 「미국과 일본 간 합의 기초안 개요」가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의 철수를 요구했다는 사실은 일본 내부에서 최후통첩으로 읽혔지만,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외교 기록과 후대 연구가 보여 주는 것은 워싱턴이 일본을 함정에 빠뜨렸다는 증거가 아니라, 일본 군부가 이미 무력으로 자원과 전략 공간을 확보하기로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첫 승리는 곧 방어의 부담이 되었다. 1942년 봄 일본은 라바울을 중심으로 한 방어권을 넓히고, 솔로몬 제도의 툴라기와 뉴기니 남동부의 포트모르즈비를 차지해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의 연결을 끊으려 했다. MO 작전에서 포트모르즈비는 단순한 섬 하나가 아니었다. 그곳의 비행장은 오스트레일리아 북동부를 위협하고, 라바울을 지키며, 이후 남태평양으로 나아갈 발판이었다. 미국은 일본 통신을 해독해 목표와 시기를 알아냈고, 프랭크 잭 플레처가 지휘한 항공모함 요크타운과 렉싱턴을 산호해로 보냈다. 5월 4일부터 8일까지 양측은 서로의 함대를 직접 보지 않고 항공기로 공격했다. 미국은 렉싱턴을 잃었고 요크타운이 손상되었으며, 일본은 경항공모함 쇼호를 잃고 쇼카쿠가 크게 손상되었고 즈이카쿠의 항공대가 소모되었다. 배의 침몰 수만 세면 일본의 전술적 우세였지만, 항공 엄호를 잃은 포트모르즈비 상륙 선단은 물러났다. 산호해는 일본의 팽창을 멈춘 첫 전투였다. 제국은 더 넓어졌지만, 그 넓이를 지킬 항공모함과 숙련 승무원은 이미 대체하기 어려운 손실을 입고 있었다.

암호가 바꾼 바다, 비행장을 둘러싼 소모전

미드웨이에서 일본의 패배는 단순히 항공모함 네 척을 잃은 사건이 아니었다. 일본 해군의 작전은 속도와 기습, 숙련된 항공 승무원의 반복 투입을 한꺼번에 요구했지만, 그 전제였던 정보 우위가 무너졌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둘리틀 공습 뒤 미국 태평양 함대를 다시 결정적 결전에 끌어내기 위해 미드웨이를 점령하려 했다. 미드웨이를 잃으면 하와이 방면의 방어선이 흔들리고, 미국이 협상보다 장기전을 택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미국 해군의 통신정보 부대는 일본군 암호와 교신량을 분석해 작전 목표를 미드웨이로 특정했고, 체스터 니미츠는 일본 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항공모함을 매복 배치했다. 1942년 6월 4일부터 7일까지 아카기, 가가, 소류, 히류가 침몰했고, 일본은 약 3,000명의 병력과 다수의 숙련 조종사를 잃었다. 미국도 요크타운과 항공기를 잃었지만, 수리와 훈련으로 손실을 보충할 산업적 여지가 있었다. 따라서 미드웨이는 일본이 즉시 무력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일본의 공세가 손실을 감당할 수 있는 속도보다 빨리 소모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미국이 곧바로 압도적 우세를 누린 것은 아니다. 일본군은 라바울을 중심으로 남태평양의 해상로를 위협했고, 과달카날 룽가 곶에 비행장을 건설해 호주와 뉴질랜드로 이어지는 보급선을 감시하려 했다. 미국 해군 참모총장 어니스트 킹은 이 비행장을 빼앗아 방어선의 빈틈을 막고 이후 라바울을 압박할 발판으로 삼자고 주장했다. 유럽 전선 우선 원칙 때문에 병력과 수송선은 부족했고, 작전은 충분한 물자 대신 제한된 병참으로 시작되었다. 8월 7일 미 해병대는 과달카날, 툴라기 등에 상륙해 일본 건설대가 버린 비행장을 점령하고 이를 헨더슨 비행장으로 바꾸었다. 일본군이 섬을 되찾으려 한 이유도 명확했다. 그 활주로를 미국이 보유하면 낮 동안 솔로몬 제도 주변을 통제할 수 있어 일본의 야간 수송과 라바울의 증원만으로는 전선을 회복하기 어려웠다.

이때부터 전쟁의 단위는 한 번의 함대 결전이 아니라 비행장에 사람과 물자를 계속 밀어 넣는 소모전이 되었다. 일본군은 야간 구축함 수송으로 병력을 보냈고, 미군은 항공 엄호와 해상 수송을 유지하려 했다. 사보섬 해전과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미국은 함정과 병력 운용의 미숙함을 혹독하게 치렀다. 열대성 질병, 식량 부족, 정글과 해안 사이의 열악한 운송로도 일본군과 미군 모두에게 비용을 부과했다. 10월 일본군의 대공세는 헨더슨 비행장을 빼앗지 못했고, 11월 11일부터 15일까지의 과달카날 해전에서 일본은 증원군을 상륙시키고 비행장을 포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당시 미 해군 전투 서술도 이 전투를 일본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로 기록한다. 과달카날의 승리는 값싼 전환점이 아니었다. 미국은 약 7,100명과 29척, 615대의 항공기를 잃었고 일본은 약 31,000명과 38척, 683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숫자의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이 잃은 숙련 인력과 회복할 수 없는 작전 주도권이었다. 미드웨이에서 정보가 일본의 기습을 뒤집었다면, 과달카날에서는 비행장과 보급을 둘러싼 장기전이 그 뒤집힌 주도권을 실제 영토와 항로의 통제로 바꾸었다.

폭격기의 길을 닦은 섬, 그 길에서 치른 대가

마리아나 제도의 점령은 섬 하나를 더 얻은 일이 아니라 전쟁의 거리를 바꾼 결정이었다. 사이판과 티니언의 비행장은 일본 본토까지 약 2,400킬로미터를 왕복할 수 있는 B-29의 출발점이 되었다. 미 육군항공대는 1944년 11월부터 본토 폭격을 시작했고, 처음에는 고고도 정밀폭격을 중시했지만 강풍과 구름, 일본 방공망 때문에 성과가 제한되었다. 1945년 3월 커티스 르메이는 저고도 야간 소이탄 폭격으로 전환했다. 3월 9일부터 10일까지 도쿄 공습은 목조 주택이 밀집한 도시의 취약성을 불태웠고, 민간인 약 1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흔히 추산된다. 폭격은 군수 생산을 흔들었지만 일본 사회의 생존 기반도 함께 파괴했다.

이오지마를 둘러싼 논리는 더 복잡했다. 미국 해군과 해병 지휘관은 섬이 사이판과 도쿄 사이의 일본 조기경보 기지이며, 일본 전투기가 마리아나의 폭격기를 괴롭히는 발판이라고 보았다. 점령 뒤에는 P-51 호위기가 B-29와 함께 날아가고, 손상된 폭격기가 비상착륙할 활주로가 생겼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대가가 정당하다고 본 것은 아니다. 전후 윌리엄 프랫 제독은 이오지마가 육군의 집결지로도 해군 기지로도 쓸모가 작았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1945년 2월 19일부터 3월 26일까지 미군은 약 2만6천 명의 사상자를 냈고, 일본 수비대 약 2만1천 명 대부분이 전사했다. 미국의 선택은 폭격기 승무원의 생존 가능성과 다음 작전의 측면 안전을 높였지만, 그 효과는 이미 항공 우세가 커진 전쟁 말기에 치러진 극단적으로 비싼 보험이기도 했다.

오키나와에서는 그 계산이 본토 침공 준비와 정면으로 만났다. 미국은 1945년 4월 1일 상륙해 가데나 비행장과 항구를 확보하고, 550킬로미터 떨어진 일본 본토를 겨냥한 몰락 작전의 집결지를 만들려 했다. 일본 제32군 사령부는 해변에서 미군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남부 슈리 방어선에서 시간을 벌고 함대에 소모를 강요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 결과 전투는 82일 이어졌고, 일본군의 대규모 가미카제 공격은 4월 6일부터 6월 22일까지 1,465대의 항공기를 동원했다. 미군 함정 20척이 침몰하고 157척이 손상되었으며, 오키나와 주민의 피해는 특히 컸다. 일본군은 학생을 철혈근황대와 간호대로 동원했고, 주민에게 집단 자결을 강요한 사례도 남았다. 오키나와는 본토로 가는 활주로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일본의 방어 논리가 군인과 민간인을 함께 소모시키는 체계였음을 드러냈다.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열린 길은 항복을 자동으로 가져오지 않았다. 그것은 폭격과 봉쇄, 그리고 본토 침공을 준비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희생시킬 것인가라는 더 가혹한 질문을 연합국 지도부에 남겼다.

두 개의 충격이 항복을 만들었는가

히로시마가 곧바로 항복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실제 의사결정의 시간을 지워 버린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도시는 파괴되고 수만 명이 사망했지만, 도쿄의 전쟁지도부는 즉시 항복하지 않았다. 군부가 보기에 이것은 재래식 폭격의 연장이자 본토 결전을 앞두고 감수해야 할 손실이었다. 그들이 붙든 계산은 규슈 상륙에서 미군에 큰 피해를 주면 더 유리한 조건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항복은 군의 무장해제와 점령, 전범 처벌, 그리고 천황제의 장래를 외부에 맡기는 일이었으므로, 끝까지 싸우자는 주장은 단순한 광기가 아니라 제국의 국가질서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협상전이라는 언어로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그 계산은 도시 주민에게 화상, 방사선 피폭, 붕괴한 의료와 식량이라는 대가를 떠넘겼다.

외무성의 도고 시게노리 등은 다른 출구를 찾았다. 일본은 소련이 중재해 주기를 기대하며 모스크바에 접촉했지만, 소련은 이미 얄타에서 독일 패전 뒤 3개월 안에 대일전에 들어가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8월 8일,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일본 대사 사토에게 선전포고를 통고하면서, 일본이 7월 26일 포츠담 선언무조건 항복 요구를 거부했으므로 중재 제안의 근거도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다음 날 소련군은 만주국을 공격했다. 이는 일본이 마지막 자원 기반과 북방의 외교적 완충지를 동시에 잃었다는 뜻이었다. 같은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폭탄이 떨어졌지만, 일본 지도부의 분열은 여전히 남았다. 기록은 어느 한 충격만으로 결론을 설명하기 어렵게 한다. 히로시마 뒤에도 군부는 버텼고, 소련 참전은 일본이 기대던 중재 구상을 파괴했으며, 나가사키는 그 위기 속에서 핵무기의 반복 사용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결정은 거리의 폭발 자체가 아니라 그 폭발들이 국가의 선택지를 바꾼 정치적 순간에 이루어졌다. 스즈키 간타로 내각의 최고전쟁지도회의는 항복 조건을 두고 교착했으며, 히로히토는 8월 9일 밤 회의에서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도록 자신의 권위를 행사했다. 그 선택은 민간인 학살과 제국의 침략 책임을 없애지 않는다. 다만 항복의 원인을 원자폭탄 하나로 고정하면, 소련의 참전이 만주와 조선을 비롯한 일본 제국의 북방 질서를 무너뜨린 사실과 일본 군부가 그 전까지 전쟁을 계속하려 했다는 문서의 순서를 놓치게 된다. 항복은 한 번의 기술적 충격이 아니라, 폭격과 봉쇄, 본토 결전의 예상 비용, 소련의 군사 개입이 함께 만든 강제된 결단이었다.

서명한 순간보다 오래 남은 항복의 권력

1945년 9월 2일 도쿄만의 전함 미주리호에서 열린 23분의 의식은 단순히 전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행사가 아니었다. 일본 측 서명은 두 층으로 나뉘었다.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는 「일본 천황과 일본 정부를 명령에 따라 대표하여」 서명했고,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는 일본 제국군 총사령부를 대표해 서명했다. 정부가 외교적 수락을, 군이 작전상의 복종을 각각 떠맡은 것이다. 더글러스 맥아더가 연합국 최고사령관 자격으로 받은 것도 바로 이 이중 항복이었다. 미국, 중국, 영국, 소련을 비롯한 아홉 대표의 서명은 승전국의 공동 명의를 세웠지만, 실제 집행의 중심은 맥아더에게 모였다.

문서의 핵심은 둘째 조항의 「일본 제국군 총사령부와 일본의 모든 군대, 일본의 지휘 아래 있는 모든 군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이었다. 그러나 종속은 군대에만 머물지 않았다. 다섯째 조항은 민간·군사·해군 관료에게 최고사령관의 포고와 명령을 집행하라고 지시했고, 일곱째 조항은 연합군 포로와 민간인 억류자를 즉시 석방하고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마지막 여덟째 조항은 더 날카로웠다. 천황과 일본 정부의 통치 권한은 항복 조건을 실행하기 위해 최고사령관이 취할 조치에 종속되었다. 천황제를 즉시 폐지한다고 쓰지는 않았지만, 주권의 행위자가 일본 정부에서 점령권력으로 이동했음을 문서 자체가 적었다.

일본 지도부가 받아들인 것은 패전의 추상적 인정이 아니라 명령 체계의 변경이었다. 8월 15일 방송이 국민에게 항복을 알렸다면, 9월 2일 문서는 각지의 부대와 관료가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는지를 정했다. 이 때문에 서명 뒤에도 전쟁은 서류 한 장으로 모든 곳에서 동시에 멈추지 않았다. 일본군은 지역별 항복 문서와 무장 해제 절차를 거쳐야 했고, 포로와 억류자의 석방, 식량과 수송의 제공도 점령 당국의 감독 아래 진행되었다. 12월 모스크바 회의에서 연합국이 점령의 기본 구조를 정할 때 맥아더에게 항복 조건과 점령을 시행할 명령권을 부여한 것은 이 문서의 마지막 조항을 제도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도쿄만의 서명은 전쟁의 종점인 동시에, 일본의 전후 국가가 승전국의 감독 아래 재편되는 출발점이었다. 맥아더는 의식에서 승자와 패자가 증오가 아니라 「정의와 관용」으로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점령은 전범 재판과 군사 해체를 추진하면서도 천황을 기소하지 않고 왕위를 남겼다. 평화라는 언어와 비대칭적인 통치권이 같은 문서와 그 후속 조치 안에 함께 있었다.

전쟁이 끝낸 제국, 끝내지 못한 지배

1945년 9월 2일 항복 문서가 확정한 것은 단순한 정전이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일본군 전체에 전투 중지를 명령했으며, 문서의 마지막 조항에 따라 일본 정부와 군의 권한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명령에 종속되었다. 일본은 조선, 타이완, 만주국, 남양군도와 동남아시아 점령지에서 철수하고 군사 주권을 잃었다. 이 점에서 전쟁은 일본 제국의 영토적 팽창과 군부가 행사하던 국가 권력을 끝냈다. 그러나 문서가 보장한 것은 피지배 민중의 즉각적인 자립이 아니었다. 항복은 일본군의 해산과 점령을 정했지만,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어떤 정부를 세울지 결정할 권한을 그들에게 넘기지는 않았다.

그래서 전쟁의 결과는 해방과 재편을 함께 낳았다. 일본의 패전은 유럽 열강이 1941년 이전의 권리로 아시아에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고,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등지의 민족운동은 일본군이 떠난 자리를 식민 통치의 복귀가 아니라 독립의 기회로 읽었다. 1945년 이후 1960년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세 대륙이 아니라 수십 개의 새 국가가 등장했지만, 독립은 대체로 협상만으로 오지 않았다.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식민지 회복을 시도했고, 미국과 소련은 자결을 말하면서도 새 국가들이 어느 진영에 설지를 놓고 경쟁했다. 일본 제국의 붕괴가 곧 평등한 국제질서를 뜻하지 않았던 이유다.

항복을 무엇이 만들었는지는 아직 합의되지 않았다. 미국의 전통적 설명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일본 지도부에 침공을 피할 수 없는 파괴의 규모를 보여 주어 신속한 항복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봉쇄와 재래식 폭격, 몰락 작전의 예상 희생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반대쪽은 8월 9일 소련의 만주 침공이 일본이 기대하던 중재 경로를 없애고, 만주와 조선의 분할 점령이라는 더 큰 위기를 열었다고 본다. 일본 정부가 히로시마 직후에도 결정하지 못했고, 소련 참전 뒤 천황의 개입으로 교착을 풀었다는 기록은 이 해석을 지지한다. 다른 연구자들은 두 충격을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미국 국무부의 역사 자료도 폭탄을 군사적 종결 수단으로 본 관점과 소련에 대한 외교적 효과를 중시한 관점이 계속 맞선다고 정리한다. 따라서 확실한 결론은 어느 하나의 무기가 단독으로 승리를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시작된 장기전과 연합국의 생산·봉쇄·상륙 압박, 원자폭탄, 소련 참전이 일본 지도부가 전쟁을 지속할 선택지를 차례로 없앴다는 데 있다. 전쟁은 제국을 끝냈지만, 누가 아시아의 미래를 결정할 것인가라는 문제까지 해결하지는 못했다.

결과

일본은 제국의 해외 영토와 군사적 주권을 잃고 연합국 점령 아래 들어갔으며, 항복 문서는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과 연합국 최고사령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종속을 명시했다. 전쟁은 아시아 태평양의 식민 지배를 흔들었지만, 해방은 곧바로 평등한 자립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미국 중심의 점령 질서와 소련의 만주 진입이 전후 분할의 조건을 만들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민간인 및 군인의 막대한 희생, 일본 도시 파괴, 원자폭탄의 민간인 피해는 승리의 비용으로 남았다. 일본의 패전과 소련의 대일 참전은 이 사이트의 「소련의 대일 참전과 만주 작전」에서 이어진다.

연표

  1. 1931
    만주 점령과 팽창의 출발

    일본은 만주사변 뒤 만주국을 세우며 중국 대륙과 자원에 대한 제국적 지배를 넓혔다.

  2. 1937.07.07
    중일전쟁의 전면화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 뒤 일본과 중국의 전쟁이 전면전으로 번졌고, 중국은 충칭과 각지의 저항으로 전쟁을 계속했다.

  3. 1940.09.27
    추축 동맹

    일본은 독일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어 유럽 전쟁과 아시아 팽창을 하나의 전략 환경으로 묶었다.

  4. 1941.07
    인도차이나와 석유 봉쇄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 진출 뒤 미국과 영국, 네덜란드 망명정부는 석유와 전략물자 수출을 제한했고, 일본은 남방 자원지대 점령을 선택했다.

  5. 1941.12.07
    진주만과 동시 공세

    일본군은 진주만과 필리핀, 괌, 웨이크섬, 말라야, 홍콩을 동시에 공격했고,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6. 1942.05
    산호해의 제동

    산호해 해전에서 연합국은 포트모르즈비를 향한 일본의 해상 진격을 저지했다.

  7. 1942.06
    미드웨이의 전환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항공모함 전력의 핵심을 잃고 전략적 주도권을 내주었다.

  8. 1942.08
    과달카날과 연합국의 반격

    연합국은 과달카날 상륙을 시작으로 남서태평양과 중부태평양에서 일본의 방어선을 단계적으로 압박했다.

  9. 1944.06
    마리아나와 본토 폭격의 거리

    마리아나 제도 점령과 필리핀해 해전의 일본 함대 손실은 미국이 일본 본토를 폭격할 발판을 마련했다.

  10. 1945.02
    이오지마와 오키나와로 열린 길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 해상 봉쇄와 도시 폭격은 일본 본토를 압박했지만 지도부의 항복 논쟁은 계속됐다.

  11. 1945.08.06
    히로시마와 종결의 위기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지만 일본 지도부는 즉시 항복하지 않았다.

  12. 1945.08.09
    소련의 참전과 나가사키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를 침공했으며, 같은 날 미국은 나가사키를 원자폭탄으로 공격했다.

  13. 1945.09.02
    도쿄만 항복 문서

    일본 대표는 전함 미주리호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고,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과 연합국 점령을 확정했다.

관련 인물 16명

지도부9

관련 용어

출처: John T. Kuehn, “The war in the Pacific, 1941–1945,” in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The National WWII Museum, “The End of World War II 1945.”United States National Archives, “Surrender of Japan (1945),” Instrument of Surrender, 2 September 1945.Carsten Fries, “Victory in the Pacific: Japan’s Surrender and Aftermath,”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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