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06

포즈난 봉기

노동자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체제가 왜 노동자들의 총구 앞에 서야 했는가?

포즈난 봉기는 1956년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업도시 포즈난에서 노동자들이 스탈린주의 체제에 맞서 일으킨 무장 봉기이다. 발단은 포즈난 최대 공장인 ZISPO(옛 체겔스키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바르샤바 중앙정부가 임금 인상과 과도한 세금 환급 약속을 하루 만에 번복하자, 6월 28일 아침 수만 명이 거리로 나섰고 곧 10만 명 규모의 시위로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경제적 요구를 내걸었으나 당국이 대화를 거부하면서 시위대는 당 위원회, 보안국 청사, 감옥을 점거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국방장관이 파견한 스타니스와프 포프와프스키 장군이 전차 400여 대와 병력 1만 명을 동원해 30일까지 봉기를 진압했으며, 최소 57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스탈린주의에 갇힌 폴란드, 1948–1955

1956년 2월, 포즈난 봉기가 일어나기 넉 달 전,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동유럽에서 가장 완강한 스탈린주의 국가 중 하나였다. 1948년 폴란드 노동자당과 폴란드 사회당이 강제 합병되어 탄생한 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고, 당 서기장 볼레스와프 비에루트는 스탈린이 직접 신임하는 '폴란드의 작은 스탈린'으로서 10년 가까이 1인 지배를 이어왔다. 비에루트와 야쿠프 베르만, 힐라리 민츠로 이루어진 3인 체제는 소련 모델을 그대로 이식했다. 공안부(UB)는 전국에 밀고망을 촘촘히 깔고 무장 저항 세력과 비당파 인사를 탄압했으며, 1952년 헌법은 폴란드를 정식 '인민공화국'으로 선포했다. 가톨릭 교회는 조직적으로 억압되었고, 전국토의 농지 집단화가 추진되었으며, 독립적인 정치 조직은 존재 자체가 범죄였다.

이 체제가 노동자 계급에 제공한 현실은 이념과 정반대였다. 1950년 착수된 6개년 계획은 중공업 분야(철강, 광업, 기계 제조)에 국가 자원을 집중시켰다. 산업 생산량은 급증했으나, 그 대가는 노동자와 일반 시민이 전부 지불했다. 소비재, 주택, 식량 공급은 만성적 부족 상태에 빠졌고, 실질 임금은 하락했다. 특히 노동 생산성을 높인 충격노동자(우다르니크)에게는 추가 누진세가 부과되어, 더 열심히 일할수록 실수령액이 줄어드는 역설적 구조였다. 1953년 이후로는 작업 할당량(norm)이 계속 상향 조정되고 상여금 체계는 축소되었다.

포즈난과 비엘코폴스카 지역의 상황은 전국 평균보다 더 심각했다. 독일령이었다가 1945년 폴란드로 반환된 이 지역은 중앙 당국의 정치적 불신을 받아 사회 인프라(의료, 교육, 주택)에 대한 투자가 다른 지역보다 낮게 책정되었다. 중·대규모 자영농에 대한 집단화 압박은 농업 생산을 위축시켜 포즈난 시장에서 육류와 유제품 부족을 상시화했다. 1955년 8월부터 1956년 5월까지 포즈난에서는 버터가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1953년 3월 스탈린의 죽음은 동구권 전역에 미세한 균열을 냈다. 동베를린과 체코슬로바키아의 플젠에서 노동자 파업이 발생했으나, 폴란드 당국은 비에루트의 지휘 아래 억압 기제를 그대로 유지했다. 진정한 전환은 1956년 2월,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인격숭배와 대숙청을 폭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비밀연설의 전문은 폴란드 당 간부들에게 배포되었고, 곧 서방 라디오 방송과 입소문을 통해 대중에게도 알려졌다. 충격을 받은 비에루트는 대회 직후인 3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급서했다. 후임 제1서기로 선출된 에드바르트 오하프는 온건파와 강경파 사이에서 방향을 잡지 못했다. 4월에는 수천 명의 정치범이 사면되었고, 스탈린 시대 탄압의 핵심 책임자였던 베르만과 공안부 수장 스타니스와프 라트키에비치가 권좌에서 밀려났으며, 언론에는 제한적이나마 비판적 담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6년 5월까지도 폴란드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은 스탈린주의 국가였다. 노동자에게는 당의 약속이 아닌, 6년간 누적된 박탈감과 굶주림이 남아 있었다.

비밀연설은 폴란드에서 왜 폭발했는가: 비에루트의 죽음과 오하프의 선택

흐루쇼프가 1956년 2월 25일 자정을 넘겨 읽기 시작한 보고는 '비밀연설'이라 불렸지만, 그 충격이 가장 깊게 내려앉은 곳은 대회가 열린 크렘린이 아니라, 대표단을 보낸 바르샤바였다. 연설은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었으되 흐루쇼프가 열거한 '인격숭배'의 희생자들이 공산주의자 자신들이었기 때문에, 스탈린의 후원으로 권좌에 오른 동유럽 지도자들 모두가 공범으로 지목된 셈이었다. 그 최전선에 선 사람이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1서기 볼레스와프 비에루트였다. 그는 폐회 직후 연설 전문을 건네받았고, 동료들의 회고에 따르면 '충격을 받아 완전히 무너졌다'고 한다. 비에루트는 대회 기간 중 이미 중병에 걸려 모스크바에 남아 있었다. 2월 28일, 그를 수행한 예지 모라프스키, 야쿠프 베르만,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알렉산데르 자바츠키 네 사람이 정치국에 연설 내용을 보고했고, 정치국은 3월 3~4일 바르샤바에서 중앙당 활동가 회의를 소집했다. 모라프스키는 연설이 폴란드당에 미치는 함의를 축소하려 애썼지만,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는 격렬한 질문이 쏟아졌고, 정치국은 비에루트의 통치를 향한 비난의 폭풍을 막아내야 했다. 전화로 바르샤바의 정세를 전해들은 비에루트는 자신의 권위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음을 알았지만, 먼 곳에서 아무것도 손쓸 수 없었다. 3월 12일 밤 11시 35분, 그는 심부전과 폐렴으로 사망했다. 공식 사인은 폐동맥 혈전이었고, 극심한 정서적 스트레스가 병을 키웠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죽음이 3월 13일 발표되자 사회에는 기쁨과 동시에 '소련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놀랍게도 독살설을 퍼뜨린 것은 다름 아닌 지방당 간부들이었다. 8년간의 철권통치 끝에 찾아온 이 죽음은 탈스탈린화에 강력한 추진력을 실어주었다. 후임은 3월 20일 열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정해졌다. 장례식에 참석하러 온 흐루쇼프가 바르샤바에 머물며 지켜보는 가운데, 개혁파(푸와비파)와 강경파(나톨린파) 사이의 절충 후보로 전원일치의 지지를 받은 사람은 에드바르트 오하프였다. 오하프는 이어 동구권의 다른 어떤 지도자도 하지 않은 선택을 했다. 비밀연설을 폴란드에서 가장 널리 퍼뜨리는 것이다. 취임 바로 이튿날인 3월 27일 그는 배포를 승인했고, 바르샤바 시당의 변혁 지향 제1서기 스테판 스타셰프스키의 주도로 공식 3천 부와 비공식 1만 5천~2만 부가 찍혀 나갔다. 자유유럽방송이 연설 내용을 내보내자 '우리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적이 대신 말해줄 것'이라는 논리로 배포를 늘린 것이다. 그 결과 4월이 되면 바르샤바 로지츠키 시장에서 연설문이 팔리는 지경에 이르렀고, 6월의 포즈난으로 이어지는 대중적 각성의 통로가 열렸다.

3년 동안 쌓인 1,100만 즈워티: 대표단은 왜 바르샤바의 한마디를 믿었는가

6월 28일의 봉기는 갑자기 터진 것이 아니었다. ZISPO 노동자들은 1953년 7월부터 삼 년 가까이 단계적으로 올라간 생산 기준에 맞서 싸워 왔다. 핵심은 '상여금을 가장 많이 받는 노동자에게 가장 무거운 세금을 매기는' 과세 제도였다. 수천 명이 삼 년 동안 도합 1,100만 즈워티 이상을 잃었다고 추산됐고, 노동자들은 이 계산 방식 자체가 불법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그냥 화만 낸 것이 아니라, 제도가 가진 모든 통로를 시험했다. 1956년 2월에는 노동 조직과 공장 관리 개선을 위해 4,704건의 건의를 제출했고, 세금 계산의 위법성을 포즈난 주 검찰청에 제소하기까지 했다. W-3 작업장 대표단은 1955년부터 바르샤바로 세 차례나 올라가 금속노조 본부와 기계공업부를 찾았다.

이 긴 사전 교섭이 6월 위기의 성격을 결정했다. 노동자들은 어느 날 아침 깨어나 요구를 지어낸 것이 아니라, 오랜 절차 끝에 '이제 거의 다 왔다'고 믿을 만한 신호를 받아 들고 있었다. 4월 21일에는 중앙위원회 비서 예지 모라프스키가 포즈난까지 내려와 공개 회의에서 지금까지의 노동자 문제 처리 방식을 비판했다. 6월 8일에는 기계공업부 국장 스타니스와프 피에트샤크가 W-3을 찾아 '열흘 안에' 세금 문제와 환급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열흘이 지나도 답이 없자, 6월 21일 작업장 총회에서 노동자들은 중앙노조와의 협상 대표를 뽑고 장관의 침묵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분노는 이미 다른 작업장과 공장들, 시영 교통사업소(MPK), 철도 차량 수리공장(ZNTK), 철도원들에게까지 번져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6월 25일 ZISPO 전 공장을 대표하는 27명의 대표단이 선출된다. 이제 대표단은 작업장 하나가 아니라 공장 전체를 짊어졌다. 6월 26일 바르샤바에서 기계공업부 장관 로만 피델스키를 만난 자리에서 장관은 노동자 요구를 실행하기 위한 계획을 내놓았다. 상여금 지급, 임금 인상, 식료품 가격 인하가 그 내용이었다. 구두 합의였고 법적 문건은 아니었지만, 대표단은 일이 풀린 것으로 보고 그날 밤 포즈난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작업장에 '요구가 성사되었다'고 전했고, 협상은 다음 날 포즈난에서 계속하기로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일어난 일이 결정적이었다. 6월 27일 장관 피델스키 자신이 포즈난 ZISPO에 도착해, 당 지도부의 지시를 받아 전날의 약속을 뒤집었다. 노동자들의 분노가 유난히 컸던 것은, 그들이 '체제가 하는 말'을 막연히 불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체제가 자기 절차대로 약속까지 해 놓고 이틀도 못 버티고 물러선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피델스키와 중앙노조 대표들이 다시 만나 협상은 공식적으로는 이어졌지만, 노동자들은 더 이상 긍정적인 결말을 기대하지 않았다. 폴스카 즈브로이나는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가기로 결심했다'고 적는다. 이들은 포즈난 국제박람회를 취재하러 와 있던 외국 언론이 자신들의 요구를 세상에 알려 줄 것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미국 국무부의 보고는 '대표단이 현상 유지가 계속되면 포즈난에서 시위가 벌어질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전달했다'고 기록했다. 3년의 서류와 4,704건의 건의와 세 번의 바르샤바 행 끝에, 그들이 얻은 것은 하룻밤 사이에 물러난 구두 약속 하나였다.

총을 든 것은 시위대만이 아니었다: 6월 28일, 누가 먼저 발포했는가

6월 28일, 체겔스키 공장(공식 명칭 ZISPO) 노동자들은 무기를 지닌 채로 파업에 나선 것이 아니었다. 오전 6시 30분 공장을 나선 행렬은 임금과 세금 환급을 요구하는 문서를 들고 시청─당시 포즈난 성에 있던 시 당국─을 향해 걸어갔을 뿐이었다. 행렬은 걸으면서 불어났고, 다른 공장 노동자와 학생들이 합류했다.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 미츠키에비치 광장에 모인 군중은 10만 명으로 불어났고, 요구는 빵값 인하, 임금 인상과 함께 책임자─오하프 제1서기든 치란키에비치 총리든─의 포즈난 방문으로 바뀌었다. 현지 당국이 '우리에게 그런 문제를 해결할 권한이 없다'고 답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여기서부터 사건은 파업을 넘어섰다. 군중 사이에 '바르샤바에 간 대표단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실이 아니었다. 대표단은 풀려나 포즈난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러나 몇 달 동안 요구가 모두 묵살된 경험을 가진 노동자들에게 그 소문은 충분히 그럴듯했다. 군중은 대표단이 갇혀 있다고 믿은 므윈스카 가의 감옥을 습격해 오전 10시 50분경 재소자 252명을 풀어 주었고, 이어 11시 30분경 감옥의 무기고를 점거해 총기를 탈취했다. 이 무기가 거리로 흘러나갔다.

발포는 정부 쪽에서 먼저였다. 11시경 코하노프스키 가의 보안국(UB) 청사 창문에서 군중을 향해 첫 총성이 울렸고, 이때부터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시위였던 것이 총격전이 되었다. 노동자들은 시내 곳곳의 시민경찰(밀리치아) 지서─유니코보, 빌다, 모시나, 로키에트니차─를 잇달아 무장 해제했다. 유니코보 지서에서는 경찰관들이 두 손을 들고 총을 내놓으며 나왔다. 가장 치열한 전투는 UB 청사 앞에서 벌어졌고, 탈취한 무기는 대부분 이곳으로 실려 갔다.

그 다음 몇 시간이 이 사건의 성격을 가른다. 오전 11시경 포즈난 수비대의 기갑·기계화 장교학교에서 전차 16대와 병력이 '주요 건물 보호'를 위해 파견되었다. 그런데 이 병사들은 시위대에게 총을 쏘지 않았고, 오히려 시위대와 말을 섞었다. 일부 병사는 무장 해제되었고 전차 두 대가 넘어갔다는 보고도 있다. 병사들이 총구를 돌지 않자─그들 역시 같은 체제의 급여와 배급에 시달리는 이들이었다─로코솝스키가 직접 지휘권을 틀어쥐었다. 소련 원수이자 폴란드 국방장관이었던 그에게 1953년 6월 17일 동베를린의 기억은 생생했다. 그때 동독에서 제때 진압되지 못한 노동자 봉기가 여러 지역으로 번져 갔다. 같은 일이 폴란드에서 반복되게 둘 수는 없었다.

로코솝스키는 부관 포프와프스키 장군을 라비차 공항으로 보내 지휘권을 넘겼다. 포프와프스키는 시위대와 대화하던 포즈난 현지 부대는 쓰지 않고, 슐레지엔 군관구와 비에드루스코 기지에서 다른 부대를 불러들였다. 동원된 병력─제10·19 기갑사단, 제4·5 보병사단, 내부보안군─은 1만 300명에 이르렀다. 특히 이 병사들에게 '시위대는 포즈난 국제박람회 기간 동안 폴란드의 이미지를 망치려는 독일인 선동자들이 이끈다'고 세뇌시켰다. 자기 이웃이 아니라 외부의 적과 싸운다고 믿게 한 것이다. 오후 4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전차와 장갑차, 야포와 트럭 행렬이 두 시간에 걸쳐 도시로 밀려들어 포즈난을 포위했다. 밤 9시 첫 대규모 체포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해서 노동자의 이름으로 통치하던 체제는, 자기 병사들이 총을 쏘지 않자 외부에서 끌어온 병력으로 노동자들을 진압했다.

손을 걸라던 연설과 '두 흐름': 국가는 어떤 답을 골랐는가

6월 28일 아침까지 시위대의 요구는 상당 부분 여전히 절차적인 것이었다. 대표단은 시 국가평의회(FRN) 의장 프란치셰크 프롱츠코비아크를 만나 바르샤바에서 상급 인사, 구체적으로는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총리나 에드바르트 오하프 제1서기가 포즈난에 와 달라고 요청했다. 선전담당 서기 비첸티 크라시코와의 대화에서도 같은 요구가 반복되었다. 노동자들은 대화할 사람을 부르고 있었고, 정권은 그 대답으로 6월 29일 저녁 라디오 연설을 내보냈다. 치란키에비치는 이렇게 선언했다. "인민 정부에 대항해 손을 드는 모든 선동자·광인은, 인민 정부가 그 손을 잘라낼 것임을 확신해도 좋다." 요청받았던 협상은 시작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부른 사람이 온 것은 왔지만, 대화가 아니라 위협을 들고 왔다. 이 연설은 폴란드 현대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문장으로 남았고, 치란키에비치는 진압 과정의 발포 명령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된다.

연설이 읽히는 동안 도시는 이미 군사적으로 봉쇄된 뒤였다. 국방차관 스타니스와프 포프와프스키가 이끄는 기갑 2개 사단과 보병 2개 사단, 합계 1만 명이 넘는 병력과 전차 약 360대가 포즈난을 에워쌌다. 포즈난 수비대가 아니라 실레지아 군관구와 비에드루스코 기지에서 끌어온 부대였다. 29일에도 루본·시바젠츠·코스트신에서 파업이 이어졌고, 오후에는 시위대 일부가 보안국(WUdsBP) 청사 쪽으로 접근했으나 전차를 보고 흩어졌다. 30일까지 시가전이 간헐적으로 이어진 끝에 진압이 완료되었다. 사망자는 최근 IPN 수사가 제시한 58명에서 100명 안팎까지 연구자마다 갈리고, 부상자는 약 650명으로 집계된다. 최연소 희생자는 13세의 로메크 스트샤우코프스키였다.

진압과 동시에 체포가 시작되었다. 28일 밤부터 보안국과 시민경찰은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고, 이는 수주간 이어졌다. 보안국 보고서에 따르면 8월 8일까지 총 746명이 구금되었다. 이들은 와비차 공항 구금소에 수감되어 구타를 포함한 강압적 심문을 받았다. 여기서 정권은 책임을 분배하는 서사를 세웠다. 이른바 '두 흐름'론이다. 검찰총장 마리안 리비츠키는 7월 17일 언론 인터뷰에서, 수사는 "정당한 불만을 품고 파업·시위에 참여한 노동자들"과 "난동꾼·범죄자·선동자들"을 구분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밝혔다. 노동자의 요구는 인정하되, 폭력의 책임은 '선동자'에게 돌리겠다는 계산이었다. 132명에 대해 기소가 준비되어 법원으로 넘겨졌지만, 실제로 열린 재판은 3개에 그쳤다. 이 '두 흐름'의 구분선 위에 서 있던 것이 바로 다음 장의 재판이었다.

법정에서 뒤집힌 '제국주의 도발'의 각본

법정에서 뒤집힌 '제국주의 도발'의 각본

진압 뒤 국가는 거리에서 끝내지 못한 일을 법정에서 완성하려 했다. 8월 8일까지 746명이 구금되었고, 심문 과정에서 구타와 고문이 보고되었다. 검찰이 세운 서사는 단순했다. 6월 28일은 생활고에 시달린 공장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이 아니라 미국과 서독의 정보기관, 반동적 지하조직이 미리 기획한 폭동이며, 피고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훌리건’과 살인범이라는 것이었다. 9월 27일 시작된 이른바 3인 재판, 이어진 9인 재판과 10인 재판은 이 서사를 공개적으로 주입하는 쇼 재판이 될 예정이었다. 미국 국무부 문서도 9월 25일 포즈난 재판이 곧 시작된다고 기록하며, 국제 여론이 바르샤바 정권의 처우를 제약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은 국내 사건인 동시에 탈스탈린화의 정당성을 둘러싼 국제적 시험대였던 셈이다.

그러나 피고들의 사회적 실체를 지우려던 기소는 법정에서 오히려 드러냈다. 다수 피고는 젊은 포즈난 노동자였고, 변호사 스타니스와프 헤이모프스키는 국가가 임금과 세금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군대와 보안기관을 투입해 유혈사태를 만들었다고 공개적으로 추궁했다. 변론은 시위대의 무장과 폭력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낳은 원인과 1차적 책임을 국가의 정책과 발포 명령에서 찾았다. 당국은 중형으로 본보기를 세우려 했지만, 공개 재판에서 ‘인민의 적’이라는 낙인은 경제 요구를 들고 나섰던 노동자들의 구체적 얼굴과 충돌했다. 국제적 관심, 변호인들의 공격, 그리고 폴란드 내부에서 커진 당 비판 때문에 판결은 예상보다 제한적이었다. 일부에게 2년에서 6년형이 선고되었지만, 국가가 주장한 외국인 기획의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이 균열이 10월 정치의 선택지를 바꾸었다. 10월 19~20일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 대표단과 바르샤바에 와 군사 개입을 암시하는 동안에도, 폴란드 당 지도부는 포즈난을 다시 ‘제국주의 도발’이라고 부를 것인지, 당의 임금·생산·치안 정책이 노동자를 거리로 몰았다고 인정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10월 21일 제1서기로 복귀한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는 후자를 택했다. 그는 포즈난의 원인을 외부 음모가 아니라 당의 잘못된 정책에서 찾고, 재판을 중단시켜 피고들을 사면했다. 이것은 노동자에게 주어진 완전한 정치적 권리가 아니었다. 고무우카는 당 지배와 국가의 강제력을 보존한 채, 봉기를 ‘사회주의에 맞선 반란’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가 스스로 교정해야 할 경고로 재배치했다. 포즈난의 희생과 법정의 반박이 만든 제한된 양보가 바로 ‘폴란드 10월’의 지지 기반이었다. 개혁은 총구 앞의 책임을 인정했지만, 그 총구를 든 노동자들이 국가를 통제할 권력까지 넘겨주지는 않았다.

포즈난의 기억은 부다페스트로,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다

포즈난의 총성이 국경 밖에서 곧바로 정치적 언어가 된 곳은 부다페스트였다. 1956년 10월 23일 학생들이 폴란드와의 연대를 표시하며 모인 집회에서 포즈난 노동자들의 요구와 희생은 헝가리인들이 자기 체제의 위기를 말하는 참조점이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었다. 폴란드 10월이 보여 준 것은 소련과의 관계를 재조정하면서도 공산당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고, 헝가리의 시위대는 처음에는 그 가능성을 더 넓은 정치적 자유와 민족적 주권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헝가리에서 다당제와 바르샤바 조약 탈퇴가 의제로 올라가자 소련 지도부는 폴란드의 고무우카 타협과 헝가리의 체제 이탈을 구별했다. 공개된 소련 지도부 기록에 따르면, 모스크바는 헝가리의 반공 정서가 주변 국가로 번질 것과 무력 불개입이 약함으로 해석될 것을 우려해 11월 4일 침공을 결정했다. 포즈난의 승리는 아니었지만, 노동자 봉기가 다른 나라의 정치적 상상력을 움직이는 방식은 분명해졌다.

그 기억을 폴란드 안에서 다시 공공장소로 끌어낸 것은 1980년의 연대노조였다. 10월 10일 대폴란드 지역 대표자 총회가 희생자 기념비 건립을 요구했고, 10월 21일 로만 브란트슈테터가 이끄는 사회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위원회가 서둘러야 했던 이유는 단순한 기념사업이 아니었다. 국가가 독점하던 1956년의 이름과 책임을 노동자 조직이 되찾아야 했고, 계엄령이 닥치기 전 공개적인 장소를 확보해야 했다. 공장들은 자재와 노동을 모았고, HCP 노동자들은 여러 부처를 찾아가 필요한 강판 배정을 얻어냈다. 아담 그라치크와 브워지미에시 보이치에호프스키의 설계는 19.5미터와 21.1미터의 두 강철 십자가를 하나의 가로대에 묶었다. 한쪽에는 1956, 다른 쪽에는 1968, 1970, 1976, 1980, 1981이 새겨졌다. 비문은 “신을 위하여, 자유와 권리와 빵을 위하여, 1956년 6월”이었다. 생계 요구를 정치적 권리와 기억의 권리로 연결한 문장이었다.

1981년 6월 28일 공장 사이렌과 성당 종이 동시에 울렸고, 약 10만 명이 미츠키에비치 광장에 모였다. 스타니스와프 마티야레흐 바웬사가 연설했고, 마티야와 로메크 스트샤우코프스키의 어머니 안나가 함께 기념비를 열었다. 당국의 허가를 얻어 세운 구조물이었지만, 그날의 군중은 허가받은 애도보다 더 큰 것을 만들었다. 포즈난 십자가는 1956년을 고립된 폭동이 아니라 1968년, 1970년, 1976년, 1980년의 노동자 투쟁과 잇는 계보로 제시했다. 12월 계엄령 뒤 광장은 감시와 해산의 장소가 되었고, 십자가에 1981을 덧쓴 사람의 행동마저 곧 지워졌다. 그 삭제는 국가가 여전히 과거의 의미를 통제하려 했음을 보여 주었고, 바로 그래서 십자가는 지하 출판물과 시위의 표지가 되었다. 포즈난의 유산은 승리 신화가 아니다. 임금과 존엄을 요구한 노동자들의 패배가, 진압한 국가가 독점하던 역사와 광장을 끝내 빼앗아 온 과정이다.

승리한 것은 무엇이고,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은 무엇인가

포즈난 6월이 당장 해결한 것은 정권 교체가 아니라 정권의 계산법이었다. 노동자들의 임금과 세금 요구를 ‘제국주의 도발’로 몰아붙여 총으로 끝낼 수 있다고 믿던 지도부는, 봉기를 진압한 뒤에도 그 요구의 핵심을 되돌려 주어야 했다. 9월의 ‘3인 재판’과 이어진 ‘9인 재판’, ‘10인 재판’은 국가가 폭력의 책임을 시위대에게 전가하려는 시도였지만, 변호인들은 법정에서 당국의 발포와 수사 고문을 공개했다. 1956년 10월 고무우카의 복귀와 피고인 사면은 이 재판을 끝냈고, 당이 스스로의 정책 오류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봉합했다. 그러나 봉합은 해방과 달랐다.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은 남았고, 군대와 보안기관의 민간인 살해에 대한 형사 책임도 묻지 않았다. 임금과 일부 경제정책의 양보는 노동자들이 생산과 거리에서 만들어 낸 힘을 확인했지만, 공장 민주주의나 독립적인 노동조직, 국가 폭력의 통제까지 보장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포즈난은 ‘실패한 폭동’과 ‘민주주의의 승리’ 중 하나로만 정리되지 않는다. 당대 노동자 다수의 구호는 빵과 자유였고, 사회주의 자체를 명확히 폐기하자는 강령은 아니었다. 반면 CIA의 6월 30일 보고서는 시위가 자발적으로 번졌다고 보면서도 어느 정도의 사전 계획과 준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자료는 외부 정보기관의 제한된 목격과 추정이지 결정적 증거는 아니다. 사망자 수도 같은 문제를 남긴다. 후대 연구는 57명, 국가기억연구소 수사는 58명을 제시하지만, 1981년의 74명이나 100명 이상이라는 추계도 유통되었다. 명단, 병원 기록, 은폐된 사망을 어디까지 포함하느냐가 숫자를 갈라놓는다. 따라서 역사가들이 합의한 결론은 좁지만 단단하다. 포즈난은 노동자들의 물질적 요구가 국가의 정당성 위기를 폭발시킬 수 있음을 입증했고, 폴란드 10월의 조건을 만들었다. 아직 논쟁 중인 것은 그 폭발이 처음부터 정치적 봉기였는지, 그리고 죽은 사람의 정확한 수가 얼마인지다. 두 질문 모두 기록의 공백과 국가가 오랫동안 숨긴 책임을 함께 읽을 때에만 답할 수 있다.

결과

봉기는 진압되었으나, 당국은 임금 인상과 과도 세금 환급 등 핵심 경제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진압 직후 746명이 체포되었고 9~10월에 걸쳐 재판이 열렸으나, 10월 21일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1서기로 선출되면서 재판은 중단되고 피고들은 사면되었다. 포즈난 6월은 폴란드 탈스탈린화, 이른바 '폴란드 10월'의 직접적 방아쇠였고, 넉 달 뒤 헝가리 혁명의 도화선이기도 했다. 1981년 포즈난에 첫 추모비가 세워졌고, 2006년 폴란드 의회는 6월 28일을 '포즈난 6월 1956년 국가 추모의 날'로 지정했다.

연표

  1. 1956.02
    흐루쇼프의 비밀연설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동유럽 전역에 탈스탈린화의 압력이 가해졌다.

  2. 1956.03.12
    비에루트 사망과 오하프의 승계

    폴란드의 강경 스탈린주의 지도자 볼레스와프 비에루트가 비밀연설의 충격 속에 모스크바에서 급서하고, 에드바르트 오하프가 제1서기가 되어 조심스러운 개혁을 시작했다.

  3. 1956.06.23–26
    ZISPO 노동자 대표단의 바르샤바 협상

    포즈난 ZISPO 공장 노동자 대표단 27명이 바르샤바에서 임금 인상과 과도한 세금 환급을 요구했고, 기계공업부 장관 로만 피델스키가 구두 약속을 했다.

  4. 1956.06.27
    약속의 번복

    피델스키가 포즈난에 도착해 전날의 약속을 번복했다. 이 소식이 공장에 퍼지며 노동자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5. 1956.06.28
    파업에서 봉기로: '검은 목요일'

    오전 6시 30분 ZISPO에서 파업이 시작되어 약 10만 명이 거리로 나섰다. 시위대는 당 청사와 보안국을 습격하고 감옥을 점거했으며, 오후부터 군대가 진입해 발포했다. 수십 명이 사망했다.

  6. 1956.06.28
    로코솝스키의 개입과 포프와프스키 파견

    소비에트 원수이자 폴란드 국방장관인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군사 진압을 결정하고, 부관 스타니스와프 포프와프스키 장군을 포즈난에 파견해 지휘권을 넘겼다.

  7. 1956.06.29
    치란키에비치의 라디오 연설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총리가 라디오에 나와 '인민 정부에 손을 대는 자는 그 손이 잘릴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발언은 폴란드 현대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연설 중 하나로 남았다.

  8. 1956.06.30
    봉기의 진압과 체포

    전차 400여 대와 1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어 봉기가 완전히 진압되었다. 746명이 체포되어 라비차 공항에서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9. 1956.09–10
    봉기 참가자 재판

    '3인 재판', '9인 재판', '10인 재판'이 열려 피고들에게 2년에서 6년형이 선고되었다. 변호인단이 정부의 책임을 공개적으로 제기하며 맞섰다.

  10. 1956.10.21
    고무우카의 복귀와 '폴란드 10월'

    중앙위원회가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를 제1서기로 선출했다. 고무우카는 포즈난의 원인이 '제국주의 책동'이 아니라 당의 잘못된 정책에 있다고 인정하고 피고들을 사면했으며, 제한적 탈스탈린화를 추진했다.

  11. 1956.10.23
    헝가리 혁명의 시작

    포즈난 6월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가운데, 부다페스트에서 연대 시위로 시작된 헝가리 혁명이 발발했다.

  12. 1981.06.28
    첫 추모비 건립

    연대노조의 압력으로 포즈난에 첫 추모비 '포즈난 십자가'가 세워졌다. 로메크 스트샤우코프스키의 어머니와 레흐 바웬사가 참석했다.

관련 인물 13명

관련 용어

출처: Andrzej Włusek, 'The Poznań Uprising of June 1956,' European Network Remembrance and Solidarity (ENRS), 2015Łukasz Jastrząb, Rozstrzelano moje serce w Poznaniu: Poznański Czerwiec 1956 r. – straty osobowe i ich analiza, Wydawnictwo Comandor, 2006Jerzy Eisler, Polskie miesiące czyli kryzys(y) w PRL, IPN, 2008Edmund Makowski, Poznański czerwiec 1956: pierwszy bunt społeczeństwa w PRL, Wydawnictwo Poznańskie, 2001Paweł Machcewicz, Rebellious Satellite: Poland 1956,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9IPN (Institute of National Remembrance), Commemoration materials for the 70th anniversary of the Poznań June 1956 protests, eng.ipn.gov.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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