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건
브레스트 강화와 독일의 동방 점령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는 군대가 사라진 소비에트 러시아가 독일과 맺은 강요된 평화였다. 1917년 12월 시작된 협상에서 혁명전쟁, 「전쟁도 강화도 아니다」, 즉시 강화의 세 노선이 당을 갈랐고, 1918년 2월 독일의 공세 뒤 레닌은 사임을 내걸고 3월 3일의 조약 수용을 관철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발트·핀란드에 대한 권한과 인구의 3분의 1을 내주었고,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헤트만 정권을 세우고 핀란드 내전에 파병하며 발트에 자국 우산 아래의 공국들을 구상했다. 11월 독일의 패전으로 조약은 폐기되었지만, 정전협정 12조로 발트에 남은 독일군과 붉은 군대, 각국 민족정부, 백군이 마주한 공백은 이듬해 국경 지대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우크라이나 혁명과 전쟁
1917년 3월 키예프에 세워진 중앙라다는 연방 러시아 안의 자치에서 출발해 1918년 1월 독립을 선언했지만, 그 뒤 4년 동안 키예프의 주인은 열 번 넘게 바뀌었다. 소비에트군, 독일 점령군과 헤트만 스코로파츠키, 빈니첸코와 페틀류라의 디렉토리아, 데니킨의 백군, 폴란드군이 차례로 도시를 차지했고, 그 사이에서 흐리호리우와 마흐노의 농민군은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자기 전쟁을 벌였다. 1,500건 안팎의 포그롬으로 유대인 수만 명이 살해되었다. 1920년 바르샤바 협정과 1921년 리가 조약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독립전쟁은 끝났고,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형식적 국가 지위와 볼셰비키 중앙의 실질적 통제라는 모순이 남았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무너진 세 제국의 국경 지대에서 부활한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벌인 전쟁이다. 선전포고 없이 1919년 2월 벨로루시에서 시작된 충돌은, 1920년 4월 피우수트스키가 페틀류라와 손잡고 키예프로 진공하면서 전면전이 되었다. 부됸니의 기병과 투하쳅스키의 7월 공세로 전세를 뒤집은 붉은군대는 혁명의 수출을 내걸고 바르샤바까지 진격했으나, 8월 바르샤바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했다. 1921년 3월 리가 조약은 커즌선보다 훨씬 동쪽에 국경을 그어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를 분할했고, 이 국경은 1939년까지 유지되었다. 바르샤바 앞에서의 패배는 총검에 의한 혁명 수출 시도의 사실상 마지막이 되었고, 소비에트 국가를 일국에서의 건설이라는 길로 돌려세웠다.
소련의 결성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야·자캅카스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대등한 자격으로 연방조약을 맺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했다. 공화국들을 러시아 연방에 편입하려던 자치화안은 레닌의 개입으로 폐기되었고, 탈퇴권을 명시한 대등한 공화국들의 연방이라는 원칙이 채택되었다. 뒤이은 코레니자치야(토착화) 정책은 민족 언어와 민족 간부를 국가가 체계적으로 육성한, 당대 세계에 전례가 없는 민족정책이었다.
홀로도모르와 집단화 기근
홀로도모르는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인위적 기근으로, 약 390만 명이 아사한 재앙이다. 직접적 원인은 스탈린 지도부가 강제 집단화와 가속화된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우크라이나에 설정한 감당할 수 없는 곡물 공출 할당량이었다. 1931년 수확량이 급감했음에도 공출 목표는 오히려 유지되었고, 1932년 가을부터는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 같은 크렘린 특사들이 직접 파견되어 곡물을 샅샅이 수탈했다. 공출에 실패한 마을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경제 봉쇄를 당했고, 1933년 1월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우크라이나와 쿠반의 국경을 봉쇄해 굶주린 농민들이 식량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했다. 기근은 소련 전체 곡창지대를 덮쳤지만 우크라이나에서 희생이 가장 컸으며, 소비에트 당국은 1987년 말까지 기근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체르노빌 참사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4호기가 폭발해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유럽으로 퍼졌다. 초기에 사고를 축소·은폐한 관성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한 새 지도부의 시험대가 됐다. 리시코프가 이끄는 정부위원회가 수습에 나섰고, 수십만 명의 「청산인」이 피폭을 무릅쓰고 동원됐다.
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
1988년 숨가이트 포그롬에서 1991년 빌뉴스 유혈사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은 페레스트로이카 아래에서 소련의 민족질서와 중앙권력이 함께 무너져 가는 과정이다. 네 사건의 성격은 같지 않다. 숨가이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를 계기로 터진 반아르메니아 포그롬이자 국가의 치안 실패였고, 1989년 트빌리시는 비무장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군사적 진압이었으며, 1990년 바쿠는 민족폭력과 중앙권력 붕괴가 겹친 자리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군사개입이었고, 1991년 빌뉴스는 독립을 선언한 연방공화국의 주권기관에 대한 강제력 행사였다. 그러나 하나의 공통된 위기를 보여 준다. 중앙정부는 민족 간 폭력으로부터 주민을 지키지 못하면서도, 공화국의 정치적 이탈에는 반복해서 군사력을 썼다.
노보오가료보 협상과 신연방조약
1991년 3월 국민투표에서 연방 유지가 76%의 찬성을 얻자, 고르바초프는 이를 마지막 정치적 자본으로 삼았다. 4월 23일 그는 모스크바 교외 노보오가료보 별장에서 러시아의 옐친을 포함한 9개 공화국 정상과 「9+1 성명」을 발표하고, 소련을 주권 공화국들의 자발적 연방으로 재편하는 신연방조약 협상을 시작했다. 발트 3국과 그루지야 등 6개 공화국은 처음부터 불참했다. 여름 내내 세금 징수권과 연방·공화국 권한을 놓고 밀고 당긴 끝에 조약안이 만들어졌고, 서명일은 8월 20일로 잡혔다. 7월 말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의 심야 회동은 서명 뒤 크류치코프·파블로프 등 강경파를 교체하기로 합의했는데, 이 대화는 KGB의 도청으로 당사자들에게 그대로 새어 들어갔다.
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
1991년 8월, 신연방조약 체결을 막으려는 보수 강경파가 고르바초프를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크류치코프·야조프·파블로프 등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옐친이 전차 위에 올라 저항하고 시민이 결집하면서 사흘 만에 무너졌다. 쿠데타의 실패는 오히려 연방의 해체를 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