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건

미국 · 사건 17

1918–1922

내전과 열강의 개입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소비에트 공화국은 백군 장군들과 십여 개 열강의 개입군에 포위된 채 생존을 건 전쟁을 치렀다. 트로츠키가 조직한 붉은 군대는 500만 명 규모로 성장해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 브란겔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했고, 노동자와 농민 다수는 지주와 구체제의 복귀보다 소비에트 권력을 선택했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참혹했다. 전쟁과 기근, 전염병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양측 모두가 자행한 테러와 전시의 비상 통치는 이후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41–1945

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일본 제국이 미국과 영국 세력권을 공격하면서 본격화된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의 전쟁으로, 1937년부터 이어진 중일전쟁과 일본의 자원 및 제국 확장 정책이 배경이었다. 미국의 대일 석유·자재 제재와 중국에서의 충돌 속에서 일본 지도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석유와 동남아 자원을 점령하고 미국의 협상 의지를 꺾으려 했지만, 진주만 공격은 미국을 전면전으로 끌어들였다. 일본은 1942년 초 필리핀, 말라야,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으로 빠르게 팽창했으나 산호해와 미드웨이에서 공세의 한계가 드러났다. 1942년 과달카날부터 연합국은 남서태평양과 중부태평양에서 도약식 공세를 진행했고, 1944년 필리핀 탈환과 마리아나 제도 점령으로 일본 본토를 폭격할 거점을 확보했다. 1945년 봉쇄, 폭격,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소련의 대일 참전이 겹치면서 일본은 8월 15일 항복을 공표했고 9월 2일 도쿄만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1941–1944

제2전선과 노르망디 상륙

제2전선과 노르망디 상륙은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뒤 제기된 서유럽 재개전 요구가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오버로드 작전으로 실현된 과정이다. 이 요구는 동부전선의 압력을 덜어 달라는 소련의 군사적 필요와, 충분한 병력·상륙정·공중우세 없이는 실패할 수 있다는 영미 지휘부의 판단이 충돌하면서 지연되었다. 영국과 미국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먼저 공격했고, 1943년 회담에서 해협 횡단 상륙을 확정한 뒤 영국 남부에 병력과 물자를 모았다. 1944년 6월 6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지휘한 연합군은 공수부대와 해군 포격에 이어 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소드 다섯 해변에 상륙했다. 기만작전은 독일군이 주공을 파드칼레로 오인하게 만들었지만 해안의 요새와 전투는 큰 희생을 요구했다. 연합군은 6월 말까지 교두보를 보급 가능한 전선으로 바꾸고, 8월 파리 해방과 독일 국경을 향한 서진의 기반을 마련했다.

1943–1945

이탈리아 전선과 무솔리니의 몰락

이탈리아 전선은 1943년 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으로 시작되어 1945년 5월 독일군의 이탈리아 항복으로 끝난 제2차 세계대전의 지중해 전역이다. 북아프리카 패배와 본토 폭격 뒤 파시스트 체제 내부와 국왕은 전쟁 지속이 정권과 국가를 파괴한다고 판단했지만, 연합군은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떼어내고 독일군을 남쪽에 묶어 두려 했다. 시칠리아 점령 뒤 대파시스트 평의회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축출했고, 피에트로 바돌리오 정부는 9월 3일 카시빌레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나 9월 8일 공개되자 독일군은 중북부를 점령하고 무솔리니를 구출해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세웠다. 연합군은 살레르노와 타란토에 상륙했지만 아펜니노산맥과 구스타프선, 안치오, 몬테카시노에서 막혔고, 1944년 6월 로마를 점령한 뒤에도 고딕선에서 소모전을 치렀다. 1945년 4월 최종 공세와 파르티잔 총봉기가 북부를 무너뜨렸고, 무솔리니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독일군 집단군 C는 5월 2일 항복했다.

1940–1944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해방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해방은 1940년 독일의 프랑스 패배와 비시 정부 수립에서 시작되어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프로방스 상륙과 프랑스 영토의 해방으로 이어진 저항과 국가 재건의 과정이다. 독일 점령, 비시 당국의 협력과 탄압, 강제노동, 반유대주의 정책이 저항의 조건을 만들었고,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와 국내의 다양한 정치 세력, 특히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공화주의자·가톨릭 세력이 서로 다른 목표를 지닌 채 지하 언론, 정보 수집, 탈출 지원, 파업, 사보타주와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장 물랭은 1943년 국민저항위원회(CNR)를 조직해 주요 운동을 조정했으며, 1944년 레지스탕스는 프랑스 내무군(FFI)으로 통합되어 연합군의 진격을 지원하고 파리 봉기에 참여했다. 1944년 8월 파리 해방 뒤 드골의 임시정부가 공화국의 연속성을 선언하면서 비시 체제의 국가적 정당성은 부정되었다.

1945.02–08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

1945년 2월 크림반도의 휴양지 얄타에서 스탈린·루스벨트·처칠이, 7월과 8월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스탈린·트루먼·애틀리가 마주 앉아 전후 세계의 틀을 짰다. 얄타에서는 독일의 분할 점령과 배상, 폴란드의 국경과 정부 구성, 해방된 유럽에 관한 선언, 안보리 거부권을 포함한 유엔 창설 방안이 합의되었고, 소련은 남사할린·쿠릴의 확보를 조건으로 대일 참전을 약속했다. 포츠담에서는 독일의 비무장화·탈나치화 원칙과 폴란드의 서부 국경 실무가 다루어졌다. 회담장 밖에서는 이미 다른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트루먼이 「신형 무기」를 넌지시 알렸을 때 스탈린은 무표정했다. 정보망을 통해 원폭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7–1948

마셜 플랜과 냉전의 시작

1947년 미국이 유럽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을 내놓자, 소련은 그것을 미국 자본에 유럽을 종속시키려는 시도로 규정했다. 몰로토프는 파리 회담에서 협상을 결렬시켰고, 스탈린은 동유럽 국가들이 원조를 받는 것을 막았다. 즈다노프의 「두 진영」 선언과 코민포름 창설로 세계는 냉전의 두 블록으로 굳어졌다.

1948–1949

베를린 봉쇄와 공수

베를린 봉쇄(1948년 6월 24일–1949년 5월 12일)는 소련이 서방 연합국이 장악한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철도·도로·수로를 차단한 냉전 최초의 대규모 대치였다. 직접적 발단은 1948년 6월 서방이 독일 서부 점령지구에 도이치마르크를 도입하면서 소련 점령지구와의 경제적 분리가 확정된 데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베를린을 봉쇄하면 서방이 통화 개혁을 철회하거나 서베를린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계산했으나, 해리 S. 트루먼 행정부는 철수하지 않고 베를린 공수 작전으로 맞섰다. 미군과 영국 공군은 15개월 동안 27만 8,000회 이상의 비행으로 233만 톤의 식량·석탄·연료를 서베를린에 수송했고, 절정기에는 30초마다 한 대의 수송기가 베를린에 착륙했다. 동시에 서방의 대응봉쇄로 동독 지역은 석탄과 강재 부족에 시달렸다.

1943–1949

소련 원자폭탄 개발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은 1943년 쿠르차토프를 책임자로 한 제2연구소에서 시작해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의 RDS-1 실험으로 결실을 맺은 사업이다. 전쟁 중에는 자원이 전선에 묶여 소규모 연구에 그쳤으나,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 국가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 베리야를 수반으로 하는 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내무인민위원부의 조직·노동력·자원 동원 능력이 통째로 투입됐다. 사업은 두 축으로 굴러갔다. 클라우스 푹스를 비롯한 정보원이 넘긴 맨해튼 계획 설계 자료가 방향을 확인해 주었고, 쿠르차토프·하리톤·젤도비치·플료로프의 자체 연구가 그것을 소련의 산업 조건에서 실제로 만들 수 있는 물건으로 옮겼다. 우라늄 채굴과 폐쇄도시 건설에는 굴라크 수용자와 강제 노동이 대규모로 동원됐다.

1950–1953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진으로 시작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멎은 전쟁이다. 김일성은 1949년부터 여러 차례 무력 통일 승인을 요청했고,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판단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소련의 핵실험 성공으로 힘의 균형이 바뀌었다는 계산 위에서 1950년 봄 이를 승인하되 소련군의 직접 참전은 배제했다. 미국이 유엔군을 조직해 개입하고 인천상륙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중국이 인민지원군을 보냈고, 전선은 1951년 여름부터 38도선 부근에서 굳었다. 소련의 참여는 무기·고문단과, 만주 기지에서 미그-15로 싸운 조종사들에 한정됐으며 이들의 존재는 양측 모두 오래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1957–1965

소련 우주 계획

1957년 스푸트니크 1호에서 1965년 레오노프의 우주 유영까지,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최초의 유인 비행, 최초의 여성 우주인, 최초의 우주 유영이라는 우주 시대의 첫 관문들을 모두 먼저 통과했다. 치올콥스키가 남긴 이론, 코롤료프의 OKB-1 설계국, 그리고 무상 대중 기술교육과 계획경제가 집중시킨 자원이 이 도약을 떠받쳤다. 그것은 한 세대 전까지 농업국이었던 나라가 이룬 세계사적 성취였다.

1961

베를린 장벽 건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8월 13일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을 둘러싸며 쌓은 156km의 경계 요새 시설이다. 1949년부터 1961년까지 350만 명의 동독 시민이 서독으로 탈출했으며, 그중 상당수가 베를린의 개방된 구역 경계를 통해 빠져나갔다. 숙련 노동자와 지식인의 대규모 유출로 동독 경제가 붕괴 직전에 이르자, 발터 울브리히트 동독 지도자는 니키타 흐루쇼프를 설득하여 경계 봉쇄를 승인받았다. 1961년 8월 3~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조약 회의에서 공식 합의가 이루어졌고, 8월 12일 밤부터 13일 새벽 사이 약 2만 5천 명의 동독 군경 병력이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철조망으로 차단했다. 서방 3국은 베를린의 4개국 공동관리 지위를 직접 침해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사적 대응을 피했고,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장벽은 전쟁보다 훨씬 낫다"고 결론지었다. 콘크리트 장벽은 이후 28년간 냉전의 상징이 되었고, 최소 140명이 장벽을 넘다 사망했다.

1962

쿠바 미사일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면서 미국과 정면충돌한 13일간의 대치다. 미국의 쿠바 침공 위협과 튀르키예에 배치된 미국 미사일에 대응해, 흐루쇼프는 혁명 쿠바를 지키고 전략적 균형을 맞추려 미사일을 들여보냈다. 미국이 이를 정찰기로 포착해 해상 봉쇄로 맞서면서 세계는 핵전쟁의 문턱에 섰다.

1969–1979

데탕트와 전략무기제한협상

데탕트(데탕트)와 전략무기제한협상(SALT)은 1969년부터 1979년까지 미국과 소련이 냉전의 긴장을 낮추고 핵무기 증강을 통제하려 한 10년간의 노력이다. 1960년대 후반 소련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서 미국과의 전략적 균형에 도달하면서, 양측은 무한정한 군비경쟁보다 제한이 더 안전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닉슨과 브레즈네프가 1972년 모스크바에서 서명한 SALT I은 탄도미사일 방어체제(ABM)를 제한하는 조약과 공격용 미사일 발사대 숫자를 동결하는 잠정협정으로 이어졌다. 뒤이은 SALT II 협상은 블라디보스토크 합의(1974년)를 거쳐 1979년 빈에서 카터와 브레즈네프의 서명으로 정점에 도달했으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미국 상원 비준이 무산되며 데탕트는 종말을 맞았다.

1975

헬싱키 협정

헬싱키 협정(1975년 8월 1일)은 유럽 33개국과 미국, 캐나다 등 35개국이 핀란드 헬싱키에서 서명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최종의정서'이다. 소련은 1954년부터 유럽 전후 국경의 공식 승인을 목표로 유럽안보회의를 추진해 왔고, 1970년대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서방이 마침내 응했다. 1972년 사전 협의, 1973~1975년 제네바 실무 협상을 거쳐 35개국 정상이 헬싱키에 모였다. 최종의정서는 정치·군사(제1바스켓), 경제·과학(제2바스켓), 인권·인도적 협력(제3바스켓) 등 세 갈래로 구성되었다. 브레즈네프는 국경 불가침 원칙을 관철시켰다고 판단했으나, 제3바스켓의 인권 조항은 소련과 동구권 내 반체제 인사들에게 정부가 스스로 서명한 약속을 근거로 활동할 발판을 제공했다.

1983

1983년의 위기

1983년의 위기는 1981년 소련이 미국의 핵 선제공격 탐지를 위해 개시한 사상 최대 평시 정보작전 RYaN에서 시작되어, 1983년 11월 NATO의 핵전쟁 지휘통제 훈련 Able Archer 83에서 정점에 달한 냉전 최고의 긴장 국면이다. 페르싱 II 미사일의 서유럽 배치, KAL 007기 격추, 페트로프 중령의 조기경보 오경보 대처, 레이건 행정부의 심리전과 함대 훈련이 겹치며 소련 지도부는 NATO 훈련이 실제 선제공격을 위장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소련은 동독과 폴란드에서 항공기에 핵탄두를 탑재하고 전투태세를 상향했으며, 1990년 미 대통령 외국정보자문위원회는 '소련군 일부가 Able Archer를 엄호로 한 NATO 공격을 선제하거나 역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1985–1989

신사고 외교와 냉전의 종식

고르바초프는 핵전쟁에는 승자가 없으며 안보는 상대를 위협해서가 아니라 상대와 함께 얻는 것이라는 「신사고」를 내걸고 소련 외교를 다시 짰다. 28년간 외무장관이던 그로미코가 물러나고 셰바르드나제가 그 자리에 앉았다.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을 거쳐 1987년 중거리핵전력조약(INF)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이 통째로 폐기되었고, 1988년 12월 유엔 연설에서 고르바초프는 일방 감군 50만과 「선택의 자유」를 선언했다. 1989년 2월에는 아프가니스탄 철군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