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 두멩크

Joseph Édouard Aimé Doumenc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계 1880–1948 ○ 등산 사고사

수송·기계화·모스크바 협상의 장군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협상했으나, 프랑스 대표단의 권한은 제한적이었고 영국 대표는 서면 권한이 없었으며, 회담은 폴란드 통과 문제에서 막혔다.

프랑스 육군 장성 에메 두멩크는 제1차 세계대전기에 자동차 수송을 조직했고 전간기에는 독립 기갑사단 구상을 내놓았다.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군사대표단을 이끌며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협상했으나 권한은 제한돼 있었고 회담은 폴란드 통과 문제에서 막혔으며, 독일·소련 협정으로 중단됐다. 1940년에는 최고사령부 소장으로 아르덴 전선의 붕괴를 겪었고, 이후 국가재건 총감과 군사사 저술 활동을 거쳤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생애와 경력: 성스러운 길에서 1939년 모스크바 협상까지

생애와 경력

본명은 조제프 에두아르 에메 두멩크다. 도피네 지방의 관례에 따라 일상적으로 쓰는 이름을 맨 뒤에 두었기 때문에, 행정 문서에 적힌 '조제프'가 아니라 '에메'로 불렸다. 1880년 11월 16일 그르노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비드 두멩크는 아리에주 출신으로 병사에서 장교로 올라선 인물이었고, 1870년 전쟁에 참전한 뒤 이제르에서 은퇴했다.

1898년 9월 27일부터 1900년 9월 6일까지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장학생으로 다녔고, 퐁텐블로의 포병·공병 응용학교에서 산악 포대에 배속됐다. 1907년 고등전쟁학교에 가장 어린 축에 속해 입학했고, 1909년에는 성적이 뛰어나 예외적으로 3년 과정을 더 밟았다. 포슈 장군의 요청으로 모르다크 소령의 전략 과정을 받은 15명의 장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제19군단 참모부 대위로 알제리·모로코 접경 지역에서 복무했고, 1911년 10월 19일 트루아의 신설 제60포병연대로 전출됐다.

제1차 세계대전: '성스러운 길'과 최초의 전차

1914년 9월 초 자동차로 랭스 후퇴를 조직했고, 이후 육군 자동차수송국장의 부관을 거쳐 1917년 국장이 됐다. 1916년 베르됭 전투의 보급과 부대 교대를 지탱한 도로 수송을 조직했으며, 베르됭과 프랑스군 진지를 잇는 유일한 도로에서 '노리아' 순환 수송 체계를 고안했다. 1915년 3월 에이브럼 파이엇 앤드루의 요청을 받아들여 시험을 허용했고, 이것이 1915년 4월 미국 야전구급대 창설로 이어졌다. 1916년 11월부터 1917년 3월까지 에스티엔 장군과 함께 최초의 전차 개발에 기술 부관으로 참여하며 기갑사단 창설을 지지했다. 1918년 소령이 됐고 모르다크 장군에게 발탁돼 육군부 신설 자동차국을 지휘했다.

전간기: 기갑사단 교리

1925년 리프 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제1보병사단과 제1군관구를 지휘했다. 리옹 재판에서 달라디에가 한 진술에 따르면 그는 1928년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기갑사단의 최초 계획을 낸 사람이며, 이 교리는 뒤에 독일군과 드골이 확장했다. 이 계획은 오랫동안 그 진술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 국방사료관에서 발견된 1927년 또는 1928년의 메모가 부분적으로 공개되어 전차·보병 혼성 중대를 편성한 구상의 참신함을 확인해 주었다. 1930년 대규모 기갑부대의 후방 종심 작전을 다룬 강의는 호평을 받았다. 1932년 준장, 1935년 소장, 1937년 중장으로 진급했고 1938년 최고전쟁위원회 위원이 됐다.

1939년 모스크바: 정치 협상의 교착과 군사 협상의 실패

1939년 대장으로 진급한 뒤 소련과 군사협정을 협상할 프랑스 대표단 단장으로 모스크바에 파견됐다. 협상은 1939년 4월부터 8월까지 소련·프랑스·영국 간 상호원조 조약을 위한 삼자 회담이었다. 정치 협상은 '간접 침략'의 정의를 둘러싸 8월 7일 중단되며 교착에 빠졌고, 이어 열린 군사 협상은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에 레드아미 통과를 승인하도록 설득하는 문제에서 막혔다. 중단의 시점과 책임에 대해서는 서술이 갈린다. 러시아 측 기록은 8월 25일 소련이 군사 회담이 '의미를 상실한다'고 통보하고 8월 26일 밤 영·프 군사사절단이 모스크바를 떠났으며, 결렬은 영국과 프랑스의 결정이었다고 본다. 영어권 서술은 소련이 8월 21일 다른 이유를 들어 삼자 군사 회담을 중단시켰고 서방이 소련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은 탓이라고 본다. 어느 한쪽 서술만 채택하지 않고 각각 출처에 귀속시킨다. 결렬의 책임 평가도 갈린다. 소련·러시아 사학은 영국과 프랑스가 자국에서 전쟁 위협을 돌리고 소련과 독일의 접근을 막으며 독일의 침략을 동쪽으로 유도하려 했고 소련과 대등한 동맹에는 응하지 않았다고 본다. 즈다노프가 1939년 3월 3일 레닌그라드 당회의에서 영국이 '히틀러로 하여금 소련과 전쟁을 시작하게' 하려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당대 소련의 정치적 평가다. 영국 사학자 앨런 테일러는 소련 지도부가 영국이 독일과 소련을 서로 싸우게 하려 했다고 본 것은 착각이었다고 반박한다.

1940년과 아르덴의 붕괴

전쟁 선포 후 영토 방공을 맡았고, 1940년 1월부터 육군 총사령부 소장으로서 아르덴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제9군단이 완전히 파괴됐다. 1940년 6월 26일부터 7월 12일까지 국가재건 총감을 지냈다.

은퇴, 저술과 죽음

1942년 1월 1일 현역에서 예비역으로 전환해 달라는 요청이 예외적으로 받아들여져 군을 떠났다. 이제르의 튈랭에 정착해 프랑스 군사사에 관한 중요한 저서 세 권을 썼고, 1944년에는 전략론을 출간했다. 1948년 7월 알프스에서 사고로 사망했다. 사망 연도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도 있다. 20세기 프랑스 장군들을 정리한 한 명단은 그를 (1880-1947)로 적어 1948년과 어긋나며, 1989년 르노도상을 받은 소설가 필리프 두멩크(1934-2023)가 에메 두멩크(1880-1948)의 손자라는 기록은 1880-1948을 독립적으로 뒷받침한다.

서훈과 기념

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를 받았고, 1914-1918 전쟁십자훈장과 군사훈장을 받았다. 저서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알팡 상을 받았고, 프랑스 육군의 군수 계획 소프트웨어와 육군 기술·행정학교의 제24기가 그의 이름을 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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