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프트바페를 키우고 이탈리아 방어를 지휘한 나치 야전원수
1947년 2월 베네치아에서 재판이 시작되어 5월 6일 아르데아티나 학살과 민간인 살해 선동 혐의로 유죄, 사형 선고를 받았고, 7월 4일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52년 10월 석방되었다.
알베르트 케셀링은 루프트바페 건설을 주도한 나치 독일의 야전원수로, 폴란드·프랑스·소련 침공과 지중해 전구를 지휘했고 1941년 11월부터 남부 총사령관으로 이탈리아 전역을 맡아 구스타프선과 고딕선에서 연합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동시에 그의 지휘 아래 민간인 보복이 자행되었고, 1944년 6월 반당파 지령으로 보복을 승인했으며 아르데아티나 동굴 학살을 포함해 점령기 이탈리아 민간인 약 2만 2천 명이 희생되었다. 1947년 베네치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52년 석방되었으나, 자신의 전쟁 수행을 철회하지 않았다.
다른 이름: 알베르트 콘라트 케셀링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04바이에른군 제2 야전포병연대에 입대
- 1933제국항공성 행정국장, 루프트바페 창설 준비
- 1936–1937루프트바페 참모총장
- 1939–1941제1·제2 항공함대 지휘, 폴란드와 서부 및 동부 전선
- 1941–1943남부 총사령관, 지중해 전구 독일군 지휘
- 1943–1945남서부 총사령관 겸 C집단군 사령관, 이탈리아 방어
- 1945서부전선 총사령관, 5월 미군에 항복
- 1947–1952전쟁범죄 유죄 판결, 1952년 석방
관련 역사 사건
생애와 군 경력: 루프트바페에서 1947년 재판까지
바이에른군과 국가방위군 (→ 1933)
알베르트 케셀링은 1885년 11월 30일 하프랑켄 마르크트슈테프트에서 교사이자 훗날 시교육감이 된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바이로이트에서 자랐다. 1904년 메츠의 제2 야전포병연대에 입대해 1906년 중위로 임관했다. 제1차 세계대전 참모 근무를 거쳐 1919년 국가방위군에 편입되었고 1922년부터 국방부에서 일했으며, 1931년에서 1933년까지 드레스덴에서 포병 부대를 지휘했다.
루프트바페 건설 (1933–1939)
1933년 본인의 뜻과 달리 국가방위군에서 전역하고 제국항공성 행정국장으로 옮겼다. 루프트바페가 공식 창설된 것은 1935년 2월 26일이었다. 48세에 비행을 익혔고 1936년 6월 3일 발터 베버 사후 참모총장이 되어 확장과 Bf 109, Ju 87 도입을 주관했다. 1937년 6월 드레스덴의 제3항공구역 사령관을 거쳐 제1항공함대를 맡았다. 독일어권 사료는 이 임명들을 1936년과 1937년으로 기록하는 반면, 영어 위키백과는 참모총장 재임을 1936–1938년으로 제시한다.
폴란드·서부·소련의 공중전 (1939–1941)
제1항공함대 사령관으로서 항공기 1,105기를 동원해 폴란드 침공에서 북부집단군을 지원했다. 1939년 기사십자장을 받았고 제2항공함대를 지휘하던 1940년 5월 14일 로테르담 시내 폭격을 명령하여 민간인 약 800명이 죽고 7만 8천 명이 이재민이 되었다. 1940년 7월 야전원수로 진급해 브리튼 공방전과 런던 폭격의 주 주간 전력을 지휘했고, 1941년 6월에는 소련 침공에서 중부집단군을 지원했다. 로테르담 폭격에 대해서는 테러였는지 전술적 조치였는지 논쟁이 있다.
남부 총사령관과 이탈리아 방어 (1941–1945)
1941년 11월부터 국방군 남부 총사령관으로서 몰타의 영국군 격파와 북아프리카 해상 보급로 확보를 맡았고, 1942년 기사십자장에 참나무잎과 검을, 1944년 다이아몬드를 받았다. 연합군의 이탈리아 상륙 후 1943년 11월 21일 남서부 총사령관 겸 C집단군 사령관이 되어 구스타프선과 몬테카시노에서 싸웠고 고딕선으로 퇴각했으며, 로마를 개방도시로 선언해 미 제5군이 1944년 6월 4일 로마에 들어왔다. 1944년 10월 자동차 사고로 중상을 입어 빈팅호프가 1945년 1월 중순까지 대신 지휘했고 3월부터 서부 총사령관이 되었다. 9일 잘펠덴에서 항복했다는 영어권 서술과 5월 15일 포로가 되었다는 독일어권 서술은 서로 다르다.
보복·반당파전과 1947년 재판
이탈리아 점령지의 총사령관으로서 레지스탕스 공격 이후 이탈리아 민간인에 대한 이른바 '속죄 조치'에 책임이 있었다. 1944년 3월 23일 비아 라셀라 공격 이후 아르데아티나 동굴에서 무관한 이탈리아 민간인 335명이 총살당했다. 1944년 4월부터 반당파전 전체를 지휘했고 카를 볼프가 개인적으로 그에게 예속되었으며, 6월 17일 '반당파전 신조치' 지령에 서명해 '최대한의 엄격함'과 과도한 엄격함에 대한 면책을 승인했다. 점령기 이탈리아 민간인 약 2만 2천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며, 젠틸레의 분석도 케셀링이 중대한 책임을 진다고 본다. 베네치아의 영국 군사법정 재판은 1947년 2월 17일에 시작되어 아르데아티나 동굴에서 이탈리아인 약 335명을 보복으로 살해한 데 관여한 혐의와 부하 부대에 민간인 살해를 선동·명령한 혐의로 진행되었다. 57일간의 심리 끝에 1947년 5월 6일 유죄로 인정되어 총살형을 선고받았고, 사형은 1947년 7월 종신형으로 감형되었으며 1952년 10월 23일 암 등 건강 문제로 사면되어 조기 석방되었다. 독립적 2차 자료는 재판 개시를 1947년 2월 10일로 적고, 젠틸레는 감형을 1948년으로 제시하며, 독일어 위키백과는 1948년에 형기가 21년으로 줄었다고도 기록한다.
전후 활동과 '깨끗한 국방군' 신화 (1952–1960)
1952년부터 1960년까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자 단체를 전후 재편한 '슈탈헬름 – 유럽을 위한 전투동맹'의 연방지도자를 지냈다. 회고록을 1953년과 1955년에 출간했으며 어느 쪽에서도 자신의 행적이나 히틀러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이 수백만 이탈리아인의 목숨을 구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고 1953년 11월에는 전쟁범죄 재판이 지원병을 막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케르스틴 폰 링엔의 2004년 연구 『케셀링의 마지막 전투』는 보도 캠페인이 아데나워 시대의 반공 분위기 속에서 전쟁범죄자를 명예로운 인물로 재구성한 반면, 1944년 6월 17일 지령에 따른 이탈리아 마을 파괴는 밀어냈다는 점을 문서화한다. 젠틸레의 분석도 케셀링의 면죄가 '깨끗한 국방군' 신화 확산에 기여했다고 본다.
죽음과 추모 (1960)
1960년 7월 15일 바트나우하임의 요양원에서 심장마비로 74세에 사망해 바트비제의 베르크프리트호프에 묻혔고, 추도사는 당시 루프트바페 감찰관이던 요제프 캄후버가 낭독했다. 영어 위키백과는 슈탈헬름 구성원이 운구한 준군사적 장례였다고 기록한다. 독립적 분석과 브리태니커는 사망일을 1960년 7월 16일로 제시해 영어·독일어 참고문헌의 7월 15일과 충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