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소몰을 이끌며 대숙청을 집행하다 그 숙청에 삼켜진 젊은 지도자
북극점-1 부빙기지 귀환 기념 크렘린 연회에서 스탈린이 코사레프와 잔을 부딪히고 껴안아 입맞춘 뒤 귀에 속삭였다. 코사레프가 아내 마리야에게 전한 그 말은 '배신하면 죽인다'였다. 회고록과 유. 보린의 저술로 전해지는 일화다.
모스크바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콤소몰 창립과 함께 가입하고 1919년 볼셰비키당에 들어갔다. 내전 참전 여부에 대해서는 적군에 자원 입대했다는 기록과 병을 이유로 복무를 피했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25세에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가 되어 스파르타크 협회를 세웠고, 대숙청기에는 콤소몰원 14만 1천여 명 제명을 관장했으며 1937년 2월 부하린·리코프의 체포와 사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미샤코바 사건 뒤 1938년 11월 콤소몰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해임되고 11월 28일 체포되었으며, 로도스의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은 채 1939년 2월 23일 레포르토보 교도소에서 총살되었다. 1954년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2 사회운동·조직 · 소련 · 당 서기국 · 조직인사
경력 연표
- 1918–19콤소몰 창립과 동시 가입, 볼셰비키당 입당
- 1922–26모스크바 바우만·펜자 주 콤소몰 제1서기
- 1926지노비예프 지지파 숙청 위해 레닌그라드 파견
- 1929–38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25세 최연소 지도자
- 1934당 중앙위원·오르그뷰로 정위원 — 최연소
- 1936–38콤소몰 대숙청: 141,337명 제명
- 1938–39베리야가 직접 체포, 로도스의 고문에도 자백 거부, 총살
관련 역사 사건
- 1923–1927레닌 사후 권력투쟁과 좌익 반대파지노비예프 지지파 숙청을 위해 파견된 간부1926년 지노비예프 지지파를 숙청하기 위해 레닌그라드로 파견되었다.
- 1937–1938대숙청콤소몰 숙청의 집행자이자 희생자콤소몰 제1서기로서 1936~1938년 콤소몰원 141,337명을 제명하며 대숙청 집행에 참여했으나, 1938년 8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경계심 부족'으로 질책받고 11월 '미샤코바 사건'으로 해임되었다. 1938년 11월 28일 베리야가 직접 체포, 보리스 로도스의 고문을 받았고 1939년 2월 23일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총살되었다.
스파르타크와 소비에트 스포츠의 아버지
코사레프의 가장 지속적인 유산은 정치가 아닌 스포츠에 있다. 1918년, 열다섯 살 노동자 소년이었던 그는 라파엘로 조바뇰리의 소설 『스파르타쿠스』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로부터 17년 뒤, 콤소몰 제1서기가 된 코사레프는 축구 선수 니콜라이 스타로스틴, 그리고 공산당 간부 이반 파블로프와 함께 1925년부터 존재하던 프롬협동조합 체육 서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스파르타크'라는 이름의 자발적 스포츠 협회(ДСО)를 창설했다. 코사레프가 직접 제안한 이 이름은 로마 노예 검투사의 반란을 기리는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스포츠의 투쟁 정신을 상징했다.
같은 해, 그는 블라구샤 클럽을 기반으로 모스크바 최초의 '스파르타크' 축구 클럽을 세웠다. 이 초기 클럽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그 정신은 스타로스틴 형제가 이끄는 현재의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로 계승되었다. 코사레프는 1936년 소비에트 축구 최고 리그(훗날의 소비에트 톱리그) 창설을 주도했으며, 이는 소련 축구사에서 제도화된 전국 리그의 시작이었다.
그의 스포츠에 대한 열정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코사레프는 "생산적으로 일하고, 문화적으로 쉬어라!"라는 구호 아래, 소비에트 청년들에게 조직화된 체육과 여가 문화를 보급하는 것을 콤소몰의 핵심 과업으로 보았다. 모스크바 지하철역 '바우만스카야'는 원래 '스파르타콥스카야'로 명명될 예정이었으며, 인근의 가브리코프 광장, 옐로홉스카야 거리, 볼쇼이 가브리코프 골목은 실제로 스파르타크에서 유래한 현재의 이름을 얻었다. 코사레프가 처형된 뒤에도 스파르타크는 살아남아 소비에트 스포츠의 아이콘이 되었고, 그가 심은 씨앗은 오늘날까지 러시아 축구 문화의 심장부에서 뛰고 있다.
콤소몰 숙청의 집행자에서 희생자로
콤소몰 대숙청의 집행자
스탈린은 콤소몰 숙청을 직접 통제하면서 무엇보다 코사레프에게 그 집행을 맡겼다. 코사레프는 가장 충실한 스탈린주의자 중 한 사람으로, 1935년 콤소몰 중앙위 전원회의 보고에서 적은 필요할 때 '육체적 말살의 방법'으로도 제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지도 아래 콤소몰은 1936~1938년 '적대 행위'를 이유로 14만 1337명을 제명했고, 그중 7만 2000명이 1937년 9개월 동안 제명되었다.
1937년 2월 부하린과 리코프를 다룬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코사레프는 스탈린에게 손을 든 사람은 동지일 수 없고 적이며, 문서상으로도 그들을 체포해 총살하자는 데 찬성했다. 같은 해 3월에는 레닌그라드 콤소몰 서기였던 세르게이 우트킨을 예조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발하여, 우트킨의 진술 번복을 '적의 중상'이라 부르며 재체포와 16년 수용소형을 초래했다. 1937년 8월 21~28일 열린 콤소몰 제4차 전원회의에서는 개회 전에 중앙위 위원·후보위원 35명이 체포되었고, 『프라우다』 사설은 '정치적 눈머는 병'을 '인민의 적'이 이용했다며 코사레프를 그 지도자 중 하나로 지목했다.
한편 코사레프는 콤소몰 간부 일부를 구하려 하기도 했다. 서기 발렌티나 피키나와 함께 당 중앙위 서기 안드레예프를 찾아가 체포된 콤소몰 지도자들의 석방을 요구했고, 스탈린에게 보낸 쪽지에서 하리코프에서만 최대 150건의 상소가 부당 제명을 호소한다며 "정직한 사람들이 단순한 풍문만으로 우리 대열에서 쫓겨나고 있다"고 적었다.
미샤코바 사건과 몰락
1937년 9월 콤소몰 지도원 올가 미샤코바는 축바시 자치공화국으로 파견되어 지역 콤소몰 지도부 대부분과 지역 당 제1서기를 인민의 적으로 고발했으나, 코사레프는 그를 지지하지 않았고 콤소몰 서기국은 그를 해임했다. 1938년 가을 미샤코바는 인민의 적과 싸운 대가로 박해받는다는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냈고, 그 편지는 콤소몰 지도부와 결산할 때가 왔다는 신호가 되었다.
1938년 11월 19~22일 열린 콤소몰 중앙위 비상전원회의에는 스탈린,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안드레예프, 즈다노프, 말렌코프, 시키랴토프가 참석했으며, 코사레프와 다른 서기 4명을 해임했다. 이 전원회의에서 코사레프는 "나는 자신을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도 내가 인민의 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나는 당과 소비에트 인민을 배신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배신하지 않겠다"고 변호했다. 전원회의 참가자 93명 중 77명이 체포되어 48명이 총살되었고, 1936년 대회에서 선출된 콤소몰 중앙위 위원·후보위원 128명 가운데 96명이 1937~1938년에 체포되었다.
'작은 숭배'와 일상의 근대화
소련 안에는 코사레프를 둘러싼 '작은 숭배'가 존재했다. 오소아비아힘 중앙비행클럽, 광산탐사 연구소, 최신 설계의 전차, 국경 초소와 부대가 그의 이름을 받았다.
코사레프는 "생산적으로 일하고, 문화적으로 쉬어라!"라는 구호를 남긴 것으로 평가되며, 콤소몰원들을 항공·해군과 모스크바 지하철 건설로 이끌었다. 군사풍 복장에서 일상복과 드레스로 옮겨가는 흐름도 장려했다. 새해 명절의 부활을 돕고 1936년 여름 붉은 광장의 마우솔레움 관람석 앞에서 스파르타크 축구 시범 경기를 조직한 것도 그의 몫으로 기록된다.
기억
코사레프의 이름을 딴 거리와 대상은 첼랴빈스크, 예카테린부르크, 사란스크, 톰스크, 고멜, 세바스토폴, 도네츠크에 있으며, 모스크바의 어린이 창의력 센터, 무르만스크를 모항으로 하는 어선, 카라해의 코사레프 반도도 그의 이름을 지닌다. 그는 텔레비전 드라마 『한 시대의 별』(2005)과 『푸르체바』(2011)에 인물로 등장한다.
가족도 탄압을 받았다. 아내 마리야 나네이시빌리(1907~1993)는 옛 볼셰비키 빅토르 나네이시빌리의 딸로, 조국 반역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10년 노동수용소형을 선고받았고, 딸 옐레나는 1947년 체포되어 노릴스크로 유배되었다. 두 사람 모두 1954년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