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경제의 도덕적 논리를 탐구한 농업경제학자
「노동경제 이론 시론」(1912~1913)에서 "모든 노동경제에는 그 산출의 한계가 있으며, 그것은 연간 노동과 농가의 욕구 충족 정도 사이의 비례에 의해 정해진다"고 썼다.
1888년 1월 17일(구력 29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37년 10월 3일 알마아타에서 사망한 러시아·소비에트 농업경제학자로, 농민가족농의 노동-소비 균형 이론을 세우고 조직-생산학파를 이끌었다. 「노동경제 이론 시론」(1912~1913)에서 농민가족농이 이윤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일하며 소비 필요와 노동의 고역 사이에서 자기착취의 정도를 정한다고 주장했다. 1930년 7월 '노동농민당' 조작 사건으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35년 유형이 연장된 뒤 1937년 10월 3일 처형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1–1923 문학·예술 · 소련 · 중앙계획 기관
경력 연표
- 1906–1911모스크바 농업대학에서 수학, 이탈리아·벨기에 농업협동조합 연구 발표
- 1912–1915『노동경제 이론 시론』 출간, 페트롭스카야 농업아카데미 조교수·부교수
- 1915–1919중앙아마협동조합(리노첸트르) 공동 창립, 전러시아 협동조합 회의 평의원
- 1917임시정부 농업차관, 예비의회 의원 — 급진적 농업 개혁안 작성
- 1919–1930농업경제연구소 창립 소장,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정교수 — 농민경제·협동조합 이론 체계화
- 1921–1923농업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겸 고스플란 대표
- 1930–1935'노동농민당' 조작 사건으로 체포·5년형 선고, 유형지 알마아타로 이감
- 1937알마아타에서 재체포, 당일 총살 — 1987년 전면 복권
관련 역사 사건
- 1921–1928신경제정책(네프)농민경제 이론가네프기 소농 경제의 논리를 연구한 농업경제학자였다.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농민경제학파의 공동 지도자, 협동조합적 대안의 주창자콘드라티예프와 함께 조직-생산학파를 이끌며 협동조합에 기초한 점진적 농업 발전을 주장했다. 1929년 12월 마르크스주의 농업학자 회의에서 스탈린이 '차야노프시나'를 제국주의의 대리인으로 공개 비난했고, 1930년 7월 조작된 '노동농민당'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 1937–1938대숙청표적농민경제 이론가로 조작된 「노동농민당」 사건에 몰려 1937년 처형됐다.
문학: 식물학자 X의 고딕 로망스와 농민 유토피아
차야노프는 경제학자로서뿐 아니라 다작의 소설가로서도 독특한 유산을 남겼다. 1918년부터 1928년까지 그는 '식물학자 X'(Ботаник Х)라는 필명으로 다섯 편의 고딕 로망스를 자비 출판했는데, 『이발소 인형 이야기』(1918), 『베네딕토프, 혹은 내 생애의 기억할 만한 사건들』(1922), 『베네치아 거울』(1923) 등이 포함된다. 친구 화가들이 삽화를 맡아 호화 소량본으로 제작된 이 작품들은 호프만풍 환상문학의 전통을 잇는 모스크바판 '악마담'으로, 당대 소비에트 문단의 주류와는 전혀 다른 궤도를 달렸다. 표지에 실명 대신 '식물학자 X'를 쓴 덕분에 이 책들은 스탈린 시기 금서 목록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보다 더 주목할 만한 작품은 이반 크렘네프(Иван Кремнёв)라는 필명으로 1920년 출간한 중편소설 『내 형제 알렉세이의 농민 유토피아 여행』이다. 1984년의 소비에트 러시아에 잠에서 깨어난 주인공이 목격하는 것은 공업도시가 사라지고 농민 협동조합이 사회 전체를 조직하는 역(逆)산업화된 미래였다. 이 작품은 출간 11년 전에 모스크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의 철거를 예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주인공이 "금빛 찬란한 그리스도 대성당 대신 거대한 폐허"를 바라보는 장면은 1931년 스탈린의 실제 성당 폭파를 섬뜩할 정도로 정확히 예견했다. 이 소설은 자먀틴의 『우리』와 함께 소비에트 초기 디스토피아·유토피아 문학의 주요 텍스트로 평가된다.
차야노프의 문학 작업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그는 1920년대 내내 과학 논문과 고딕 소설을 병행했으며, 자신의 낭만적 이야기들을 아내의 생일 선물로 맞추어 출판했다. 1927년에는 이 다섯 편을 모은 『낭만적 저녁들』을 출간하려 했으나, 당시 검열 총책임자 파벨 레베데프-폴랸스키가 "소비에트 인간에게 낯선 신비주의와 악마 숭배를 선전한다"는 이유로 금지시켰다. 이 금지 처분은 역설적으로 차야노프의 문학적 정체성을 더욱 뚜렷이 부각시켰다.
탄압과 복권: 1926~1987
1926년 차야노프는 농민경제의 본질을 소부르주아적으로, 반마르크스주의적으로 해석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집단화가 시작되면서 비판은 '신인민주의'를 넘어 쿨라크의 이익을 옹호한다는 공세로 커졌고, 1929년 12월 20~29일 열린 마르크스주의 농업연구자 회의에서 이른바 '차야노프주의'는 제국주의의 '첩보망'이며 브체카(BKΠ(б))의 우경 편향과 연결되어 있다고 규정되었다. 이 회의에서 스탈린은 '차야노프 같은 유형의 "소비에트" 경제학자들의 반과학적 이론'을 공격했다. 1930년 7월 차야노프는 다른 주요 경제학자들과 함께 조작된 '콘드라티예프-차야노프 쿨라크-에스에르 집단' 사건으로 체포되었는데, 이는 쿨라크 봉기를 조직하려 했다는 죄목이 씌워진 날조된 '노동농민당' 사건의 일부였다. 심문은 오GPU 비밀부장 야. S. 아그라노프와 A. S. 슬라바틴스키가 맡았다. 이 사건의 형량 연도는 사료마다 다르다. 러시아어 전기는 1932년 1월 26일 오GPU 콜레기야가 5년 징역을 선고했다고 기록하며, 그중 4년을 오GPU 수사구치소와 부티르카, 야로슬라블 감옥에서 보냈고 마지막 1년은 알마아타 유형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다른 참고 자료는 5년형을 1931년으로, 석방은 건강 악화 때문으로 기록한다. 1930년 7월 체포만은 모든 사료가 일치한다.
유형지 알마아타에서 차야노프는 농업연구소와 농업경제연구소, 카자흐 농업인민위원회에서 일했다. 1935년 유형은 3년 연장되었고, 같은 해 그는 카자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농업에 관한 책을 쓰는 임무를 맡았다. 1937년 3월 그는 NKVD에 다시 체포되었다. 그의 이름은 1937년 9월 15일자 카자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관련 스탈린 처형 명단에 올랐고(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제1범주, 즉 총살에 표를 던졌다), 1937년 10월 3일 알마아타에서 열린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콜레기야 순회 재판부가 '최고형인 총살'을 선고했다. 다른 자료는 그를 1937년 3월 16일 체포되어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특별회의의 판결'로 10월 3일 총살되었다고 기록한다. 선고 기관과 경위는 사료 간에 엇갈리지만, 1937년 10월 3일 알마아타에서 처형되었다는 점과 매장지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은 일치한다.
그의 저서들은 소비에트 검열에 의해 금지되어 글라블리트의 목록과 통합 목록에 올랐고, 유포가 금지되고 도서관에서 제거되었다. 그러나 책이 모두 소각된 것은 아니었다. 일부가 '이반 크렘네프'와 '식물학자 X'라는 필명으로 출간되었기 때문인데, 첫 번째 필명은 드러났지만 차야노프가 1918~1928년에 다섯 편의 '낭만적' 이야기를 발표한 두 번째 필명은 그 책들을 소각에서 구했다. 그는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 올가 엠마누일로브나 차야노바(결혼 전 성 구례비치, 1897~1983)는 연극학자로, 1937년과 1948년 두 차례 부당하게 탄압받았다. 영어권 기록은 그가 노동수용소에서 18년을 보내고 1955년 석방되어 1983년 사망했다고 전한다. 두 아들 니키타 알렉산드로비치 차야노프(1923~1942)는 부상으로 사망했고, 바실리 알렉산드로비치 차야노프(1925~2005)는 살아남았다.
1987년 학자 A. A. 니코노프의 발의로 전면 복권이 이루어졌다. 1987년 7월 16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콜레기야는 차야노프 등이 비사법적 절차로 부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고, 반소비에트 조직의 구성원이 아니었으며 파괴 활동에 가담하지 않았고, 자백은 불법적 수사 수단으로 얻어졌다고 판결했다(아그라노프, 라지빌롭스키, 슬라바틴스키는 훗날 그러한 수사 수단으로 처벌받았다). 이 판결은 1932년 1월 26일자 오GPU 콜레기야 결정을 파기하고 범죄 구성이 없다는 이유로 형사사건을 종결함으로써 그를 복권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