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루스와 아르메니아에 소비에트 권력을 세운 레닌의 변방 건설자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봉기 소식이 민스크에 닿자, 먀스니코프는 즉시 군사혁명위원회를 소집하고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민스크에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했다.
돈 강변 나히체반 출신 아르메니아계 볼셰비키. 1906년 RSDLP에 입당, 바쿠에서 샤우먄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민스크에서 서부전선 볼셰비키를 이끌어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했다. 1919년 벨라루스 SSR 초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1921년부터 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제도적 토대를 닦았다. 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과 당 제1서기를 지내며 민족 공화국과 모스크바를 잇는 핵심 고리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아르메니아 문학에 관한 저작을 남겼다. 1925년 트빌리시 근처 항공기 화재로 사망, 트로츠키가 추도사를 했다.
경력 연표
- 1906RSDLP 가입,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로 유배 — 샤우먄과 교류
- 1911–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졸업(1911), 군 복무 후 변호사 조수로 볼셰비키 언론에 기고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복무, 병사들 사이에서 혁명 선전
- 1917.9–1918.5서북지역 당위원회 의장, 민스크 군사혁명위 의장, 서부전선 총사령관
- 1919.1–2벨라루스 SSR 초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겸 군사인민위원
- 1919–1920모스크바 당위원회 군사조직자·서기; 폴란드 전쟁 시 서부전선 정치국장
- 1921–1922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군사인민위원, 자카프카스 SFSR 부의장
- 1922–1925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 자캅카스 당 제1서기 — 소련 중앙집행위 상임위원,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당 중앙위 후보위원
- 1925.3.22트빌리시 근처 항공기 화재로 사망 — 아타르베코프, 모길렙스키와 함께 순직
관련 역사 사건
1921년 카라바흐 결정: 카프비우로 표결과 번복
먀스니코프가 아르메니아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예레반에 도착한 1921년 5월, 그 앞에 놓인 가장 첨예한 현안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귀속 문제였다. 인구 대다수가 아르메니아인인 이 산악 지역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와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사이에서 분쟁 상태였다. 6월 12일 먀스니코프는 아르메니아 혁명위원회와 아제르바이잔 혁명위원회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의 '불가분의 일부'로 합의했다는 포고령에 서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7월 4일 카프비우로(카프카스 뷰로) 확대회의에서 먀스니코프, 오르조니키제, 키로프 등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주민투표를 실시해 아르메니아로 편입한다는 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튿날인 7월 5일, 스탈린이 개입한 심야 회의에서 나리마노프가 이끄는 아제르바이잔 측은 '카라바흐의 경제적 방향은 바쿠'라고 주장했고, 카프비우로는 전날 결정을 전격 번복해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 SSR 내 자치주로 남기기로 결의했다. 아르메니아 중앙위원회는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년 후인 1922년 1월,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차 대회에서 먀스니코프는 이 결정의 이면을 공개했다.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에 대한 등유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아르메니아로서는 치명적 압박이었다. 이 7월 5일 카프비우로 결정은 이후 70년간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아제르바이잔의 자치주로 남는 제도적 출발점이 되었고, 소련 해체와 함께 폭발한 카라바흐 분쟁의 기원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