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콘벤디트

Daniel Cohn-Bendit

낭테르 「3월 22일 운동」을 이끈 1968년 5월의 학생 지도자, 뒤에 독일·프랑스 녹색당 정치인

1968년 3월 22일 낭테르 대학 평의회실 점거에서 아나키스트·마오주의자·상황주의자·트로츠키주의자 학생들의 단결을 호소해 「3월 22일 운동」을 이끌었고, 5월 혁명에서 학생들의 대변인으로 떠올랐다.

나치를 피해 망명한 독일 유대인 부모에게서 프랑스 몽토방에 태어난 독일·프랑스의 정치인. 무국적으로 자라다 열네 살에 독일 국적을 택했고, 낭테르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1968년 「3월 22일 운동」을 이끌고 5월 혁명의 대변인이 되었으나 5월 22일 프랑스 입국이 금지되었다. 그 뒤 프랑크푸르트에서 형 가브리엘과 『좌익주의: 공산주의 노인성 질환에 대한 처방』을 쓰고 1970년대 「스폰티」 운동을 이끌었다. 1984년 녹색당에 입당해 요슈카 피셔와 함께 「현실파」를 대표했고, 1994~2014년 독일·프랑스 녹색당 명부로 번갈아 유럽의회 의원을 지내며 2002년부터 녹색당/유럽자유동맹 교섭단체 공동대표를 맡았다. 2015년 프랑스 국적도 얻었다.

다른 이름: 마르크 다니엘 콘벤디트 · 다니 콘벤디트 · 붉은 다니

주요 활동과 소속

무국적 소년에서 「3월 22일 운동」으로

1945년 4월 4일 프랑스 몽토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리히 콘벤디트는 적색구원회 변호사로 일한 트로츠키주의자였고, 1933년 나치를 피해 부부가 파리로 망명했다. 부모가 국적을 잃은 탓에 그는 몇 해 동안 무국적이었고, 1958년 프랑크푸르트로 옮겨 오덴발트 학교를 다니다 열네 살 때 독일 국적을 택했다. 프랑스 병역을 피하려는 뜻도 있었다.

1965년 가을 낭테르 대학 사회학과에 들어가 작은 아나키스트 모임과 어울렸다. 기숙사의 남녀 분리 규정에 맞섰고, 1968년 1월 수영장 개관식에서 청소년 백서가 성 문제를 빼놓았다고 체육·청소년부 장관 프랑수아 미소프에게 따졌다. 1968년 3월 21일 베트남 반전 시위대 일부가 체포되자 이튿날 학생들이 대학 평의회실을 점거했고, 약 140명의 아나키스트·마오주의자·상황주의자·트로츠키주의자 학생이 그의 호소에 따라 탈중앙·반제도 직접행동 연합인 「3월 22일 운동」으로 뭉쳤다.

5월 3일 낭테르가 폐쇄되자 소르본에서 연좌 농성을 벌였고, 이것이 거리 투쟁과 총파업으로 번졌다. 5월 6일 징계 위원회 앞에서 그는 자신을 “아나키스트 마르크스주의자”라 부르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옳지만 공산주의 운동이 만든 조직 형태는 새로운 사회가 아니라 새로운 권위주의 지배를 낳을 뿐이라고 말했다. 5월 20일 사르트르와의 공개 대담에서는 사회가 조직된 전위가 아니라 통제되지 않는 자발성으로만 바뀔 수 있다고 했다. 5월 22일 프랑스 정부가 재입국을 막자, 파리 학생들은 “우리는 모두 독일 유대인이다”라는 구호로 시위했다.

『좌익주의』와 프랑크푸르트의 「스폰티」

1968년 8월 그는 형 가브리엘과 함께 다섯 주 만에 5월 혁명을 다룬 『좌익주의: 공산주의 노인성 질환에 대한 처방』을 썼다. 제목은 레닌의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을 뒤집은 것이다. 다니엘이 낭테르에서 총파업까지의 반란을 생생히 기록했고, 가브리엘은 국가·노조 지도부·프랑스 공산당이 손잡고 질서를 되살려 혁명의 힘을 꺾고 공장을 자본가에게 돌려주었다고 비판했다. 책은 레닌주의와 노동조합을,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욕구 때문에 늘 혁명적 행동과 부딪치는 위계적 관료 기구로 공격했다. 책은 18개 외국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독일 SDS 안에서는 높은 선인세가 비판을 받았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 자리 잡아 1969년 말 SDS 안에 「사업장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었고, SDS가 무너진 뒤 이 모임은 이탈리아 「계속 투쟁」을 본뜬 「혁명 투쟁」이 되었다. 이 무렵 요슈카 피셔를 만났고, 1970년 함께 균등 임금의 협동조합 「카를 마르크스 서점」을 열었으며, 프랑크푸르트 빈집 점거 투쟁의 대변인이 되었다. 1972~1974년에는 대학 자주 관리 탁아소에서 일했고, 1976년 10월 좌파 대안 도시 잡지 《플라스터슈트란트》를 창간했다.

1975년 대담집 『거대한 바자』에서 그는 5월 혁명과 스폰티 운동에서의 역할을 이야기했다. 서평자들은 정치 강령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 책에는 아이들과의 성적 행위를 묘사한 대목이 있었고, 2001년 이것이 아동 학대 의혹으로 번졌다. 그때 보살핌을 받았던 아이들과 부모들은 공개서한으로 의혹을 부인했고, 그는 학대한 적이 없으며 그 글은 도발로 쓴 허구였다고 하면서 거듭 “큰 어리석음”이었다고 사과했다.

녹색당의 현실파에서 유럽의회로

1978년 헤센 주의회 선거를 앞두고 녹색 선거 연합 결성에 참여했고, 그가 이끈 「스폰티 유권자 모임」은 사민당(SPD) 좌파와의 협력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984년 12월 헤센 녹색당에 정식으로 입당해 생태사회주의자들, 이른바 「근본파」를 밀어내려 했고, 요슈카 피셔와 함께 「현실파」를 대표하며 1985년 헤센의 첫 사민당·녹색당 연정을 뒷받침했다.

1989년 7월 프랑크푸르트 시장 폴커 하우프가 그를 독일에서 처음 생긴 「다문화청」의 명예 책임자로 임명했고, 그는 1997년까지 이 자리에서 이주민 대표 기구를 세우고 시 행정을 다문화로 여는 일을 했다. 1994년 독일 녹색당 명부로 유럽의회에 들어갔고, 1999년에는 프랑스 녹색당의 대표 후보로 다시 당선되었다. 2002~2014년 녹색당/유럽자유동맹 교섭단체의 공동대표를 지내며, 행정부 노릇을 하는 정치적 유럽 정부와 국민투표로 정하는 연방 유럽 헌법을 주장했다.

2010년 프랑스 녹색당을 「유럽 생태-녹색당」으로 재편하는 일을 이끌었으나, 이 당이 유럽 재정 협약에 반대하자 2012년 12월 탈당했다. 독일 녹색당 당원 자격은 유지했다. 2014년 유럽의회 선거를 끝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2015년 프랑스 국적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