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병합을 연출하고 베를린에서 선전포고를 받은 자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베를린에서 리벤트로프가 데카노조프에게 독일의 대소 선전포고를 전달했고, 통역 에리히 좀머에 따르면 그는 침착하게 '히틀러와 스탈린이 직접 만났더라면 인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898년 6월 바쿠에서 태어나 1953년 12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으며, 공식 전기는 그를 그루지야인으로 적는다. 1938년 12월부터 1939년 5월까지 NKVD 국가보안총국 부국장으로 대외정보부와 방첩부를 함께 맡아 대숙청 후반기 숙정을 집행했다. 1940년 리투아니아 전권대표로 파견되어 펄레츠키스를 총리로 세우고 7월 14일 인민세이마스 선거를 조직하는 등 한 달여 만에 병합을 완수했다. 전후 외무 차관과 재산총국 부국장 등 한직을 거쳐 1953년 4월 그루지야 내무장관이 되었으나 6월 30일 체포되어 12월 23일 베리야 일당으로 총살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21–1931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 체카·GPU 근무
- 1936–1938그루지야 식품공업인민위원, 이어 고스플란 의장
- 1938–1939NKVD 국가보안총국 제5부장(대외정보)
- 1939–1947외무 부인민위원(부장관)
- 1940리투아니아 주재 전권대표, 병합 감독
- 1940–1941독일 주재 소련 대사
- 1953그루지야 내무장관
- 1953체포, 재판과 처형
관련 역사 사건
NKVD 지도부와 대숙청 후반기 숙정
1938년 11월 라브렌티 베리야가 NKVD 수장으로 임명되자 데카노조프는 즉시 모스크바로 호출되어 국가보안총국(GUGB) 부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대외정보를 담당하는 제5부장과 방첩을 담당하는 제3부장을 동시에 겸임하는 전례 없는 권력 집중을 누렸다. 데카노조프의 주된 임무는 니콜라이 예조프 잔존 세력을 NKVD 내부에서 숙청하고 붉은 군대에 대한 숙정을 주도하는 것이었다. 1938년 12월부터 1939년 5월까지 약 반년 동안 그는 베리야의 가장 신임받는 집행자로서 대숙청 후반기 숙정의 핵심 지휘자 역할을 수행했다. 1939년 5월 외무부인민위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NKVD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국가보안 경력은 베리야가 스탈린의 측근으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38년 12월 국가보안 3급 인민위원 계급을 받았고, 1945년에는 중장 계급을 받았다. 2000년 러시아 연방 대법원 군사합의부는 그의 재활을 거부하면서 '무고한 사람들의 체포, 형사 사건 조작, 고문 적용 등 조직적 권력 남용'을 지적했으나, 2020년 러시아 대외정보국(SVR) 공식 웹사이트는 그를 소비에트 정보 영웅 명단에 포함시켰다.
베를린 전권대표와 대사 시절(1940~1941)
1940년 11월 24일 데카노조프는 외무 부인민위원직을 유지한 채 독일 주재 소련 전권대표로 임명되었고, 1941년 5월 9일부터는 특명전권대사 자격을 갖추어 독일의 공격 직전까지 그 직을 지냈다. 그는 1940년 12월 19일 히틀러에게 신임장을 제출했다. 모스크바로 보낸 자신의 보고에 따르면 제국수상관저 안뜰에는 의장대가 늘어서 있었고, 히틀러는 그가 스탈린이 태어난 곳 출신인지, 스탈린과 함께 혁명 활동을 한 사이인지 물었다. 데카노조프는 부모가 그루지야의 고리 지방 출신이지만 자신은 바쿠에서 태어났고 스탈린과 함께 활동한 적은 없다고 답했다. 1941년 6월 22일 직전 그는 베를린에서 독일 지도부와의 대화를 재개하고 히틀러 면담을 얻으려는 마지막 시도를 벌였으나 끝내 면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리벤트로프에게 구두 각서를 보내 1941년 4월 19일부터 6월 19일 사이에 독일 항공기가 소련 영공을 침범한 사례가 180건이며 침투 깊이가 최대 150킬로미터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어 자료들에 따르면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에 리벤트로프가 데카노조프를 불러 대소 선전포고 각서를 낭독했고, 데카노조프는 독일의 요구가 근거가 없다고 항변했다. 그는 나중에 리벤트로프가 위선적으로 '개인적으로 애통하며 러시아와의 관계 안정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다른 영어권 전기는 같은 선전포고 전달을 1941년 6월 21일로 적는다. 전쟁이 시작된 뒤 독일과 소련은 외교관 상호 처우에 합의했고, 데카노조프는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억류되었다가 소련·튀르키예 국경에서 주소련 독일 대사 베르너 폰 데어 슐렌부르크 및 독일 외교관들과 교환되었다. 전후 그는 1946년 3월부터 1947년 3월까지 외무 차관을 지냈고, 1947년 3월에는 메르쿨로프 밑에서 재산총국(GUSIMZ) 부국장으로 배치되었다가 1949년에 그 직에서 해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