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지야 대숙청의 실무 총괄에서 극동의 총독으로
동독에서 소콜롭스키 원수의 사무실로 소환된 고글리제는, 뒤따라 들어온 두 장교가 권총을 겨누자 체포되었다. '그의 눈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고 목격자가 기록했다. 베리야 측근들의 몰락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그루지야 출신 국경경비대 정치장교로, 캅카스에서 베리야의 눈에 띄어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이 되었고 NKVD 트로이카를 주재하며 대숙청을 실무 총괄했다. 베리야의 후원으로 레닌그라드 NKVD에서 예조프 잔당을 정리했고, 1941년 새로 병합된 베사라비아에서 3만 명 이상의 추방을 감독했다. 이후 10년을 소비에트 극동의 보안 총수로 보냈다. 1951년 중앙에 복귀해 MGB 제1부장관과 군 방첩 책임자를 지냈고 '의사들의 음모' 수사를 감독했다. 1953년 7월 동독에서 체포되어 베리야와 함께 재판받고 총살됐다. 복권되지 않았다.
경력 연표
- 1934–1938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그루지야 NKVD 트로이카 의장
- 1938–1941레닌그라드주 NKVD 관리국장
- 1941몰다비아 주재 NKVD 전권대표
- 1941–1951하바롭스크변경주 NKVD·MGB 책임자, 극동 MGB 전권대표
- 1951–1952국가보안 제1부장관
- 1951–1952우즈베크 국가보안장관
- 1952–1953MGB 제3총국장(군 방첩), 국가보안 제1부장관
- 1953구금, 재판과 처형
관련 역사 사건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 1937–1938대숙청그루지야 트로이카 의장1934년부터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으로 공화국 NKVD 트로이카를 주재하며 그루지야 대숙청의 실무를 총괄했고, 1938년 말 레닌그라드로 옮겨 예조프의 사람들을 정리했다.
- 1941–1945대조국전쟁극동 MGB 책임자로 전략방면 보안·방첩 업무
- 1952–1953의사들의 음모수사 감독1951년 8월 국가보안 제1부장관으로 중앙에 복귀했고, 1952년 11월 류민이 해임된 뒤 「의사들의 음모」 수사를 넘겨받아 감독했다.
- 1953베리야의 몰락1953년 12월 함께 총살1953년 7월 3일 동독에서 구금되어 베리야와 함께 특별재판부의 비공개 재판을 받고 12월 23일 당일 총살됐다.
그루지야 대숙청와 트로이카
1937년 7월 30일, NKVD 명령 제00447호가 하달되면서 소련 전역에서 '트로이카' 체제가 가동되었다. 트로이카는 공화국 내무인민위원, 당 서기, 검사 3인으로 구성되어 피고인의 출석·변호·검사 없이 서류만으로 사형 또는 8~10년 수용소형을 선고할 수 있었다. 그루지야의 트로이카 의장은 고글리제였다.
중앙에서 그루지야에 할당한 1차 '제1범주'(사형) 한도는 1,419명이었다. 고글리제는 추가 한도를 요청해 승인받았고, 흐로노스(Хронос)에 따르면 모스크바에서 내려온 사형 한도는 총 1,500명이었다. 그는 심문 과정에서 구타를 일상적으로 사용했다. 네스토르 라코바의 운전수 다블레트 칸달리아는 1936년 말 고글리제에게 직접 심문당한 경험을 증언했다. "술 취한 그를 집까지 바래다준 게 몇 번인데, 입에 권총을 쑤셔 넣고 앞니를 부러뜨리며 '라코바가 만난 적들을 대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칸달리아가 "당신도 그와 한 접시에서 밥 먹지 않았느냐"고 반문하자 고글리제는 얼굴이 새파래졌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공화국과 비교하면 그루지야의 테러 규모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베리야는 당과 문학·예술계 인사들을 표적으로 삼아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고, 그루지야 정교회는 박해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서명한 '스탈린 명단'에서 그루지야 출신 사형 판결자는 3,485명으로, 러시아 SFSR과 우크라이나 SSR 다음으로 많았다. 고글리제가 주관한 트로이카가 처리한 사건 규모는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으나, 그루지야어·압하지야어·오세트어를 쓰는 농민과 전직 관리, 구(舊) 멘셰비키 당원, 전(前) 귀족 가문 출신자까지 광범위하게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