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츠 구데리안

Heinz Wilhelm Guderian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8–1954 ○ 자연사

기갑전의 설계자이자 나치 독일의 장군

1940년 5월, 그는 뫼즈를 건넌 기갑부대가 보병을 기다리지 말고 해협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전차를 집중 운용하는 기동전 교리를 발전시켜 독일 기갑부대의 형성과 초기 전격전 승리에 기여한 직업군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과장해 ‘기갑군의 아버지’로 내세웠지만, 그 구상은 오스발트 루츠와 여러 장교들의 작업 위에 세워졌다. 1940년 프랑스 침공에서 그는 아르덴을 돌파해 뫼즈를 건너 영국 해협까지 신속히 진격하자고 밀어붙였고, 이 작전은 연합군을 덩케르크 일대에 고립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치 정권과 협력했고 동부전선의 침략전쟁과 점령 범죄에 연루된 지휘관이었으며, 전후 회고록은 자신의 책임과 정권과의 결합을 축소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44~1945년 육군 총참모장 직무대행과 나치화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직후, 구데리안은 육군 최고사령부 총참모장 직무대행으로 임명되어 동부전선에 관한 히틀러의 고문 역할을 맡았다. 그는 이미 독일의 패배가 불가피한 국면에서 취임했고, 군사 정세나 히틀러의 전략적 결정을 바꿀 수 없었다. 히틀러는 그에게 7월 20일 사건 관련자들을 심사하는 ‘명예법정’의 책임을 맡겼다. 이 법정은 관련자들을 군적에서 제적해 인민법원에 넘기기 위한 것이었고, 넘겨진 사람들은 게슈타포의 고문을 거쳐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후 구데리안은 이 임무에서 벗어나려 했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나치 신봉자에 가까운 열의로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7월 29일 명령으로 모든 장교의 당 가입을 요구해 육군 총참모부의 나치화를 완결했고, 군 전체에 나치식 경례를 의무화했다. 총참모장으로서 그는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진압 과정에서 히틀러와 힘러가 내린 명령과 도시 민간인에 대한 학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944년 11월 인민돌격대 집회에서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지지하는 9,500만的国家사회주의자가 있다”고 말했다. 1945년 3월 28일 퀴스트린 탈환 작전 실패 후, 전차 부대 운용을 둘러싼 히틀러와의 논쟁 끝에 그는 해임되어 휴가로 보내졌고 한스 크레프스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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