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

Jean de Lattre de Tassigny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계 1889–1952 ○ 자연사

비시의 명령을 거부하고 해방군을 이끈 장군

1945년 1월, 후퇴 명령이 내려졌지만 장군은 상징적 도시 스트라스부르의 수성을 명령해 드골의 지시를 '완벽한 수렴'으로 하루 먼저 앞질렀다.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는 제1차 세계대전과 모로코 전쟁을 거친 프랑스 직업군인으로, 1940년 패전 속에서도 사단의 결속을 지킨 지휘관이다. 비시 정권 아래 복무했지만 1942년 독일군의 남부 프랑스 점령에 맞서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투옥과 탈출 뒤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 육군 B와 프랑스 제1군을 지휘하며 프로방스 상륙 이후 툴롱과 마르세유를 해방하고 라인강과 다뉴브강까지 진격했으며, 1945년 베를린 항복식에서 프랑스를 대표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전쟁을 지휘하던 중 암으로 사망했고 사후 프랑스 원수로 추서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인도차이나 총사령관과 초토화 작전, 1950~1951

1950년 12월 드 라트르 드 타시니는 프랑스 극동원정군 총사령관 겸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으로 부임해 1951년 11월까지 프랑스의 식민전쟁을 지휘했다. 그는 베트민의 식량과 보급 기반을 끊는다는 명분으로 초토화 작전을 시행해 베트민 활동 지역의 농작물을 불태웠다. 이 작전은 베트남 주민의 반프랑스 감정을 키웠고 전략적으로도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군사적으로는 뚜렷한 성과를 냈다. 부임 직후 베트민 총지휘관 보 응우옌 지압은 맞설 만한 상대를 만났다는 뜻을 밝혔고, 드 라트르는 빈옌에서 지압이 직접 지휘한 2개 사단 2만 명을 격퇴했다. 그는 소수의 프랑스 병력을 직접 지휘하며 증원군을 공수하고 가용한 항공기를 긁어모아 공습을 퍼부었으며, 시멘트 토치카와 신설 비행장으로 방어진지를 강화하는 등 지압의 공세를 미리 예상해 대비했다. 1951년 3월 하이퐁 인근 마오케 전투에서도 해군 포의 화력과 수로 기동을 활용해 지압을 다시 물리쳤다.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고 적수들도 그를 높이 평가했다.

대가는 사적이면서 정치적이었다. 자신의 명령으로 남딘을 사수하던 아들 베르나르가 1951년 5월 전사했고, 같은 해 9월 드 라트르는 워싱턴 펜타곤에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며 인도차이나 공산화의 파급을 경고했지만 미국은 한국전쟁에 매달려 있었다. 미국은 수송기와 트럭 등 일부 장비만 보냈고, 이는 '상당한 기여'였으나 '프랑스의 전세를 뒤집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1951년 11월 전립선암 치료를 위해 파리로 돌아간 그는 이듬해 1월 사망했고, 같은 해 원수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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