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스트로이카 안의 보수적 제2서기
1990년 2월 6일 중앙위 전원회의, 69세의 리가초프는 사퇴 압박 속에서도 '지독하게도 일하고 싶다, 페레스트로이카의 구체적 사업에 착수하고 싶다!'고 외쳤다. 이 한마디는 곧 소련 전역의 유행어가 되었고, 며칠 후 그는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톰스크에서 18년간 주당 서기로 지역 산업화를 이끌었고, 안드로포프 말기에 중앙 조직당사업부장으로 발탁되어 고르바초프 체제의 제2서기가 되었다. 반알코올 캠페인의 주도자로 개혁 초기를 함께했으나, 곧 글라스노스트 전면화와 옐친의 급진 노선을 견제하는 당 보수파의 얼굴로 돌아섰다. 1990년 제28차 당대회에서 '레닌주의자' 후보로 고르바초프에게 맞섰고, 공유재산이 인민을 결속시킨다는 신념을 끝까지 지켰다.
경력 연표
- 1983–85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 1985–90제2서기, 페레스트로이카 내부 보수파
- 1990제28차 당대회에서 실각
관련 역사 사건
- 1941–1945대조국전쟁항공공장 당비서로 전투기 생산 조직
- 1985–1991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보수적 제2서기당의 제2서기로 개혁의 속도와 방향에 제동을 걸었다.
- 1985–1988반알코올 캠페인정치국에서 캠페인을 가장 강경하게 밀어붙인 실질적 추진자였다.
- 1985–1989신사고 외교와 냉전의 종식동유럽의 상실과 일방적 양보를 비판했다.
- 1988–1990제19차 당협의회와 최초의 경쟁 선거「보리스, 자네가 틀렸네」라는 말로 옐친과 정면충돌했다.
- 1988–1991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보수파 · 연방 유지공화국의 이탈 요구에 반대하며 연방 유지와 강경 대응을 주장했다.
- 1987–1991발트 독립운동과 「발트의 길」공화국의 이탈에 반대하며 연방 유지를 주장했다.
톰스크의 17년, 시베리아에서 벼려진 규율의 사람
예고르 리가초프는 1920년 노보시비르스크 근교의 농촌에서 태어나 모스크바항공대학을 나온 기술자였다. 노보시비르스크의 콤소몰과 당 기구에서 잔뼈가 굵었고, 1965년부터 1983년까지 17년간 톰스크주 당 제1서기로 일했다. 그의 톰스크는 서시베리아 유전 개발의 거점으로 성장했고, 그 자신은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뇌물이 통하지 않는 관리자로 이름났다. 정체기의 기준으로는 드물게 깨끗하고 부지런한 지방 영주였다.
1983년 안드로포프는 부패 척결과 기강 확립의 기수로 그를 모스크바로 불러올려 당 조직 사업을 맡겼다. 지방당 서기들의 교체를 지휘하며 그는 당 기구 전체에 영향력을 뻗쳤고, 1985년 3월 체르넨코가 죽자 지방 서기들을 결집해 고르바초프의 신속한 선출을 뒷받침했다. 그 공으로 후보위원 단계를 건너뛰고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
그는 개혁의 공로자로 개혁의 시대를 열었다. 다만 그가 생각한 개혁은 안드로포프의 개혁, 곧 질서와 규율로 사회주의를 다잡는 것이었다. 시장과 다당제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지기까지는 몇 해가 걸리지 않았다.
제2서기의 나날들, 개혁의 동지에서 제동수로
1985년부터 1988년까지 리가초프는 서기국 회의를 주재하는 사실상의 제2서기였다. 이념과 인사를 쥔 그는 당 서열 2위였고, 처음에는 고르바초프의 가장 든든한 우군이었다. 반알코올 캠페인은 그가 가장 정력적으로 밀어붙인 사업이었다. 술에 절은 나라를 규율로 되살린다는 것, 그것이 그가 이해한 페레스트로이카였다.
균열은 글라스노스트에서 왔다. 언론이 스탈린 시대만이 아니라 소비에트 역사 전체를 심판대에 올리자, 그는 이것이 개혁이 아니라 국가의 토대를 허무는 일이라고 보았다. 「우리 역사에서 긍정적인 것을 지켜야 한다」라는 그의 항변은 야코블레프가 대표하는 개방 노선과 정면으로 부딪혔고, 정치국은 서서히 두 진영으로 갈라졌다. 옐친과의 충돌, 그리고 1988년 3월 니나 안드레예바 사건은 그 균열이 공개된 순간이었다.
훗날 그는 자신이 개혁 자체를 반대한 적은 없다고 항변했다. 실제로 그는 시장 도입 전까지의 초기 개혁 대부분에 찬성표를 던졌다. 문제는 개혁이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였고, 그 질문 앞에서 한때의 동지들은 적이 되었다.
1988년 니나 안드레예바 사건, 그리고 776표
1988년 3월 13일, 소비에츠카야 로시야에 레닌그라드의 화학 교사 니나 안드레예바의 장문 투고 「원칙을 버릴 수 없다」가 실렸다. 스탈린 비판의 과잉을 규탄하는 이 글은 사실상 반개혁 선언문으로 읽혔고, 고르바초프와 야코블레프가 외국 순방 중인 사이 여러 지방 신문에 전재되었다. 리가초프가 편집인들을 모아 이 글을 지침으로 추켜세웠다는 증언이 잇따랐고, 그는 평생 이를 부인했다. 3주 뒤 프라우다의 반박 사설로 사태는 개혁파의 승리로 끝났지만, 리가초프는 이 사건으로 이념 담당에서 농업 담당으로 밀려났다.
1990년 7월 제28차 당대회에서 그는 마지막 승부수로 부서기장직에 출마했다. 결과는 찬성 776표, 반대 3천여 표의 참패였다. 개혁의 문을 여는 데 일조했던 당 기구의 지배자는 그렇게 무대에서 내려왔다.
은퇴 후 그는 소련 해체를 「세기의 범죄」라 부르며 공산당 재건 운동에 남았고, 아흔이 다 되어서까지 두마 의원(1999~2003)을 지냈다. 2021년 그는 100세로 죽었다. 브레즈네프 정치국의 마지막 생존자였고, 죽는 날까지 사회주의자를 자처했다. 역사가들은 그를 만화적 반동이 아니라, 규율의 사회주의라는 다른 개혁 노선의 대표자로 다시 읽고 있다.
1988년 당대회: '보리스, 네가 틀렸다'
1988년 7월 1일, 제19차 전연방 당협의회에서 보리스 옐친은 연단에 올라 정치국이 개혁에 소극적이며 리가초프 개인을 '민주화의 걸림돌'이라고 맹비난했다. 사회자는 옐친에게 경고했지만, 연설은 이미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이어진 리가초프의 답변은 더욱 유명해졌다. "내가 그를 중앙위 서기국과 정치국에 추천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옐친 동무는 파괴적인 길로 들어섰고, 당은 그의 접근법을 근거 없고 잘못된 것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 한 방: "보리스, 너는 올바른 정치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Борис, ты не прав)." 이 짧은 문장은 곧바로 소련 전역의 정치적 구호가 되었다. 며칠 만에 모스크바 거리에는 '예고르, 네가 틀렸다!'라는 배지가 등장했고, 하자노프의 풍자극은 이 말을 17세기 배경으로 패러디했다. 리가초프는 2012년 회고록 제목을 아예 『보리스는 틀렸다』라고 붙였고, 옐친 사후에도 "그때 한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거듭 밝혔다. 이 대결은 글라스노스트 시대 텔레비전이 낳은 가장 극적인 정치극이었으며, 당 기구의 질서와 반체제적 대중영웅의 탄생을 동시에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