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사오치

刘少奇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8–1969 ○ 옥사

중국공산당의 수석 이론가이자 마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가 문화대혁명에 휩쓸린 국가주석

"다행히도 역사는 인민이 쓰는 법이다" — 숙청되어 카이펑으로 압송되던 1969년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

중국공산당 노동운동의 초기 조직자로서 안위안 탄광 파업을 지도하고 상하이·우한에서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1939년 「공산당원의 수양」을 집필해 마르크스주의 당 건설 이론에 독창적으로 기여했으며, 1945년 당 규약에 마오쩌둥 사상을 명문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 취임해 대약진 운동 실패 후 경제 조정을 주도하며 '삼자일포' 등 실용주의 노선을 밀어붙였으나, 이는 마오와의 치명적 분열로 이어졌다. 문화대혁명 발발 후 '자본주의 노선의 사령관'으로 몰려 1968년 모든 직위에서 해임·제명되었고 1969년 구금 중 사망했으나, 1980년 덩샤오핑에 의해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전면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신사군 재건과 화중 근거지

류사오치는 1938년 11월 중국공산당 중원국 서기로 임명되어 '후푸'라는 가명으로 황하와 장강 사이 지역의 항일 활동을 열어 나갔고, 안후이·허난·장쑤에서 신사군의 군사 업무를 맡았다. 1939년 11월 허난-안후이-장쑤 변경의 신사군 제6지대 간부회의에서 '동진, 동진, 또 동진'을 외치며 적 후방 깊숙이 들어갈 것을 호소했고, 감조감식과 고용 노동자 처우 개선, 합리적 부담, 군중의 무장과 정권 건설·개조를 근거지 건설의 전제로 제시했다. 이어 융청·샤이·샤오현·쑤현 4현을 연결하는 근거지와 쑤이치타이캉·상추보루이저청 두 소근거지를 만들고, 한두 달 뒤 진푸선 이동으로 나아갈 준비를 지시했다. 1939년 11월에는 딩위안현 산황자 강북지휘부로 가 리핀셴·한더친 부대의 공격을 물리치고 화이난에 완동 항일민주 근거지를 세웠으며, 1940년 11월 화중 신사군 팔로군 총지휘부가 정식 성립하자 정치위원을 맡았다. 곧 이어진 조전 전역에서는 한더친 부대를 공격했으나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근거지 타격에는 이르지 못했다. 1941년 1월 완남사변으로 신사군이 패배하고 장제스가 신사군 편제를 취소하자, 류사오치는 정치적으로는 전면 반격하되 군사적 반격은 잠시 보류할 것을 중앙에 건의하고 천이의 신사군 대리 군장 임명과 군부 재건을 요청했다. 1월 20일 중앙군사위가 신사군 군부 재건을 명령하면서 그는 정치위원이 되었고, 천이 등과 함께 염성에 군부를 세우고 화중 당학교를 열어 군에 대한 당의 지도력을 높였으며 쑤베이에서 온건한 정풍 운동을 조직했다. 1941년 5월 중원국과 동남국이 화중국으로 합쳐지면서 서기를 맡았고, 재건 당시 9만여 명이던 신사군은 13만 5천 명으로 늘었다. 같은 시기 화중국 당학교에서 『당내투쟁에 대하여』를 강연했고, 『민주정신과 관료주의』에서는 관료주의가 착취계급뿐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정당과 사회주의 국가에도 존재하며 집권당이 될 때 더 심해진다고 지적하고, 군중의 문화 수준과 민주정신을 높이는 것이 관료주의 반대의 중요한 방법이며 면직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1942년 3월 19일 그는 푸닝현 단자강을 떠나 산둥을 거쳐 연안으로 돌아갔고 그해 12월 30일 연안에 도착했다. 이 시기 그는 1939년 7월 연안 마르크스-레닌 학원에서 『공산당원의 수양』을 강연했으며, 1936년에는 차오란쯔 반성원에 갇힌 당원들을 간단한 절차를 거쳐 석방하도록 제안하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문화대혁명에서 '61인 반역 집단' 사건으로 그를 공격하는 재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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