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프리드 더글러스

시인 Lord Alfred Douglas
독립 활동 보수주의·기독교민주주의 영국 영국 1870–1945 ○ 사망

오스카 와일드의 연인으로 「감히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쓴 시인

1894년 시 「두 사랑」에서 남성 간 사랑을 「감히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이라 불렀고, 이 시는 이듬해 와일드의 재판에서 증거로 쓰였다.

퀸즈베리 후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영국의 시인·언론인. 옥스퍼드 재학 중 동성애적 색채의 학생 잡지를 펴내다 오스카 와일드와 만나 격렬한 관계를 맺었고, 아버지와 와일드의 다툼에서 와일드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부추겼다. 1911년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동성애를 부정했고, 1920년 반유대주의 주간지 《플레인 잉글리시》를 창간해 『시온 장로 의정서』를 퍼뜨렸다. 1923년 처칠 명예훼손으로 6개월을 복역했다. 말년에 와일드에 대한 평가를 누그러뜨렸고 1945년 숨졌다.

다른 이름: 보시 더글러스 · 앨프리드 더글러스 경

주요 활동과 소속

관련 역사 사건

와일드와의 관계, 그리고 그 뒤

어머니가 「보이시」라 부르던 데서 「보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윈체스터와 옥스퍼드 모들린 칼리지를 다녔으나 학위 없이 떠났고, 옥스퍼드에서 1892~1893년 동성애적 색채가 짙은 학생 잡지 《스피릿 램프》를 펴냈다. 1893년에는 조지 아이브스와 짧은 관계를 가졌다. 와일드와 그의 아버지 퀸즈베리 후작이 다투자 와일드 편에 서서 후작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라고 부추겼고, 1892년 9월에 쓴 시 「두 사랑」은 1894년 12월 잡지 《카멜레온》에 실렸다가 와일드의 재판에서 쓰였다. 와일드가 출소한 뒤 둘은 1897년 나폴리 근처에서 몇 달을 함께 살았으나 가족들의 압력으로 헤어졌다.

1902년 양성애자 시인 올리브 커스턴스와 결혼했고, 1911년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동성애를 부정했다. 1920년 창간한 《플레인 잉글리시》는 우익·가톨릭·반유대주의 주간지로, 『시온 장로 의정서』에서 제목을 딴 연재 「유대인의 위협」을 실었고, 유틀란트 해전에 관한 보고서를 처칠이 유대인 금융가들을 위해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1923년 처칠 명예훼손으로 유죄가 되어 6개월을 복역했다. 그는 스스로를 「골수 보수주의자」라 불렀다.

감옥에서 돌아온 뒤 와일드에 대한 감정은 누그러졌다. 그는 『오스카 와일드 정리』에서 살인이나 도둑질처럼 죄가 곧 범죄인 경우도 있지만 동성애는 간통처럼 그렇지 않다고 썼다. 1930년대에는 마리 스톱스, 버나드 쇼와 편지를 주고받았고, 1945년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