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디온 야코블레비치 말리놉스키

Родион Яковлевич Малин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8–1967 ○ 자연사

원수이자 1957–1967년 국방장관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그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제2근위군을 멈춰 세워 200km 행군 뒤 진지에서 곧바로 만슈타인의 구원군에 맞서 싸우게 했다. 독일군의 돌파는 저지되었고, 이 결정은 코텔니코보 작전과 스탈린그라드 승리에 큰 몫을 했다.

오데사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농민 출신이고 아버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열한 살에 집을 떠나 머슴과 점원으로 일하며 프랑스어를 독학했고, 1914년 열여섯도 되기 전에 나이를 속이고 입대했다. 기관총수로 복무하다 부상했고 프랑스 전선에서 싸워 프랑스 무공십자훈장을 받았다. 간첩 혐의로 총살될 뻔한 뒤 1919년 11월 적군에 들어갔다.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말리노 대령'이라는 가명으로 스페인에서 군사고문으로 일했으며, 이후 원수가 되어 스탈린그라드, 우크라이나, 발칸, 만주 전역을 지휘한 2차대전 최고의 야전사령관 중 한 사람이었다. 1957년부터 죽을 때까지 국방장관으로서 전략 핵무장을 추진하고 당의 지시에 따라 군을 대폭 축소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스페인 내전 참전 (1937–1938): '말리노 대령'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말리놉스키는 공화국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자원했다. 1937년 1월 스페인에 도착한 그는 '말리노 대령(colonel Malino)'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며 공화군 군사고문으로서 작전 기획과 지휘에 참여했다. 바르셀로나와 과달라하라 인근 작전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국제여단과 협력하여 프랑코 군에 맞서는 공화군의 전투력을 강화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스페인 체류는 그에게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1937-1938년 소련에서는 대숙청이 한창이었고, 붉은 군대의 고위 지휘관들이 대거 처형당했다. 말리놉스키가 모스크바가 아닌 스페인에 있었기에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1938년 5월 귀국 후 그는 레닌 훈장과 적기 훈장을 받았으며, 아라곤 작전을 분석한 논문을 준비하여 이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에서 교관으로 활동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스페인에서의 경험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규모 기계화 작전을 입안하고 지휘하는 데 실질적인 교훈을 제공했다.

국방장관 시절 (1957–1967)

1957년 10월 26일 말리놉스키는 게오르기 주코프를 이어 소련 국방장관에 임명되어 1967년 죽을 때까지 그 직에 있었다. 같은 해 10월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주코프의 '보나파르트주의'와 중앙위원회 해임을 다뤘고, 이 회의에서 말리놉스키는 주코프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

국방장관으로서 그는 두 갈래 과제를 동시에 추진했다. 하나는 소련 군사력의 강화와 전략 로켓·핵 억지력의 우선 발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 지도의 지시에 따른 군의 대규모 감축이었다. 그는 재래식 전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옹호자였으며, 흐루쇼프의 미사일 중심 노선과 어려운 균형을 유지했다. 1964년 흐루쇼프 실각 이후에도 군사 문제에서 상당한 자율성을 유지했다.

1966년 그는 췌장암 진단을 받았고, 1966년 11월 7일 열병식이 끝난 뒤에야 병원에 들어갔다. 1967년 3월 3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으며, 화장 후 3월 4일 유해는 붉은광장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정치 경력에서 그는 1926년부터 당원이었고, 1952년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1956년 정식 위원이 되었으며 1946년부터 죽을 때까지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이었다.

1962년 노보체르카스크 노동자 시위 진압과 관련해 그가 이사 플리예프 장군에게 군대 사용을 승인했다는 러시아어 위키백과의 서술은 '확인되지 않은 자료에 따르면'이라는 단서가 붙은 것으로,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미확인 주장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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