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당원 명부 위에 놓인 지우개
1948년 1월, 음악가 소환 회의. 즈다노프의 설교가 이어지는 가운데 시키랴토프가 프로코피예프를 향해 주의를 기울이라고 명령했다. 프로코피예프는 대답했다: "나는 나에게 소개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1906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모스크바 재봉노동자 사이에서 지하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레닌의 첫 당원 검증을 집행한 이래 30년간 중앙통제위원회·당통제위원회에서 스탈린기 모든 핵심 숙청의 실무 집행자로 활동했으며(부하린·리코프 기소, 체첸-인구시 지도부 전원 체포, 몰로토프 아내 추방 등) 1952년 당통제위원장 겸 중앙위 상임위원에 올랐으나 스탈린 사후 한 달 만에 상임위에서 제외되었다.
경력 연표
- 1906RSDLP 입당, 모스크바 재봉노동자 사이에서 지하활동
- 1910–14체포·볼로그다 유형 → 귀환 후 모스크바 볼셰비키 지하조직 복귀
- 1917모스크바 병사대표 소비에트·툴라 소비에트 집행위원,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8–20전러시아 재봉노조 중앙위 서기, 모스크바 시당위원
- 1921–34중앙통제위원회(CCC) 위원 → 상임위원, 당 검증·숙청 실무 총괄
- 1934–39당통제위원회 당콜레기야 서기
- 1939–52당통제위원회 부위원장, 중앙위원
- 1952–54당통제위원회 위원장, 중앙위 상임위원 (1953.3 제외)
관련 역사 사건
당의 내부 검사: 1937년 전원회의와 대숙청
1933년 1월, 시키랴토프는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룬주탁과 함께 사적으로 모여 농촌 위기와 스탈린 축출을 논의한 볼셰비키 그룹의 사건을 중앙위에 제출했다. 모임에 참석하지도 않은 1898년 입당의 올드 볼셰비키 스미르노프에게 시키랴토프는 반대파에 동조하지 않음을 입증하라고 요구했고, 스미르노프와 관련자들은 제명된 후 총살되었다. 1935년 5월에는 구볼셰비키협회를 강제 해산하는 위원회를 이끌었다. 회원들은 구당원에 대한 사형 적용을 반대하는 청원 서명을 모으고 있었고, 시키랴토프는 협회가 "임무를 완수했다"고 선언하게 한 후 대부분의 회원이 숙청되는 길을 열었다.
시키랴토프의 당내 검사로서의 역할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1937년 2월-3월 중앙위 전원회의였다. 레닌의 동지였던 부하린과 리코프가 스탈린 음모 혐의로 기소된 자리에서, 시키랴토프는 당 검사로 나서 선언했다: "부하린과 리코프, 무엇이 당신들에게 관대함이 보여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가? … 우리는 그들을 단순히 제명하는 데 그칠 수 없다 … 그들은 기소되어야 한다." 리코프의 변호 내내 연단에서 끼어들어 설명을 반박했고, "더 분명히 말하라"고 명령하며 모든 변명선을 차단했다. 전원회의 직후 두 사람은 체포되어 1938년 3월 총살되었다.
시키랴토프의 수법은 NKVD와의 긴밀한 협력이었다. 개인 감옥을 운영하며 중요 수감자를 친히 심문했다는 보고도 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당 규율 기구의 틀 안에서 움직였다. 예조프나 베리야와 달리 경찰 기관장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운명을 면할 수 있었다. 그의 권력은 당원 명부, 개인 파일, 정치적 신뢰성에 대한 당의 최종 판단권에 있었다. 1939년 콤소몰 수장 코사레프의 숙청에서도 같은 패턴을 반복했다: 시키랴토프의 조사 보고서가 체포와 처형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