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선과 전진 사이에서 결단을 잃은 총사령관
1940년 5월 16일 파리에서 처칠이 '전략 예비대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자 가믈랭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모리스 가믈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모 경험과 공화국 군부의 조정자로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프랑스군 최고지휘부에 오른 장군이었다. 그는 독일과의 장기전을 예상하며 마지노선에 기대는 방어 구상을 세웠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사르 공세를 제한하고 독일의 벨기에 침공에 대비해 주력을 딜강과 벨기에 국경으로 전진시키는 선택을 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아르덴 돌파와 세당의 붕괴 뒤 해임되었고,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재판과 독일 억류를 겪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5–1940 군사·지휘 · 프랑스 국가기관
경력 연표
- 1893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 1906–1914조프르 장군 참모 및 전쟁계획 보좌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9보병사단 지휘
- 1919–1924브라질 프랑스군사사절단 단장
- 1924–1929레반트 프랑스군 사령관
- 1931–1939육군 참모총장, 육·해·공군 최고 조정
- 1939–1940프랑스군 총사령관, 사르 공세와 딜 계획 지휘
- 1940해임 및 비시 정권의 구금
관련 역사 사건
비시 체제의 구금과 리옹 재판, 그리고 전후의 자기 변호
가믈랭은 1940년 5월 19일 해임된 뒤, 프랑스가 항복할 무렵 독일군의 진격을 피해 파리를 떠나 도르도뉴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곧 자신이 패전의 책임자로 기소될 것이라 확신하고 방어 자료를 준비했다. 그해 9월 6일 비시 정권은 그를 체포해 샤즈롱 성에 가택 구금했고, 여기서 레옹 블룸, 에두아르 달라디에, 폴 레노, 조르주 망델 등 전직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 구금되었다. 이후 부라솔 성을 거쳐 1941년 11월 12일에는 피레네의 포르탈레 요새로 이송되었다. 이 감금 기간에 그는 종교적 생활로 위안을 찾는 변화를 겪었고, 동시에 패전 원인을 둘러싼 자기 변호를 체계적으로 준비해 나갔다.
리옹 재판은 페탱의 비시 정권이 제3공화국 지도자들에게 1940년 패전의 책임을 돌리려고 1940년 7월 30일 법령으로 설치한 최고법원에서 진행되었다. 심리 대상 시기는 1936년 인민전선 정부부터 1940년 레노 내각까지였고, 재판은 독일의 지지를 받아 전쟁 책임이 히틀러가 아니라 프랑스에 있다는 점을 보이려는 부차적 목적도 가졌다. 소환된 증인은 400명이 넘었다. 가믈랭은 구금 초기부터 조사판사에게 서면으로 네 차례 심문에 답하고 거의 2,500쪽에 달하는 메모를 보냈지만, 1942년 2월 19일 재판이 시작되자 법정의 재판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침묵을 지켰다.
그의 침묵은 정치인들에게 책임을 넘기는 효과를 낳았다. 검찰이 제기한 미비한 전쟁 준비라는 혐의가 군사 작전기(1939년 9월~1940년 6월)를 제외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음에도, 피고들은 1940년 패전의 책임이 프랑스 군 수뇌부의 실패에 있다는 점을 드러내려 했다. 독일이 재판의 전개에 불만을 품으면서 심리는 1942년 4월 중단되었고, 1943년 5월 21일 형식적으로 종결되었다.
1943년 3월 31일 독일군은 가믈랭을 체포해 뷔헨발트 인근으로 이송했고, 5월에는 티롤의 이터 성으로 옮겼다. 1945년 5월 이터 성 전투에서 프랑스 고위 인사들이 해방되었고, 그는 5월 8일 파리 르부르제 공항에 도착했다. 전후 그는 1940년 6월에 확보해 둔 문서고를 되찾아 회고록 작업에 착수해 1946년과 1947년에 '복무(Servir)' 3권을 출간했다. 회고록에서 그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패전 책임을 부하들에게 돌렸으며 스스로에게는 어떤 책임도 인정하지 않았다. 출간 직후부터 오랫동안 이 회고록은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그는 1958년 1월 22일 계단에서 넘어진 뒤 뇌출혈로 4월 18일 사망했는데, 정부는 영예 근위대나 앵발리드 미사도 허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