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야콥스키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яковский
소련 그루지야 1893–1930 ✕ 자살

혁명의 확성기이자 풍자자

1930년 1월 21일, 레닌 추도식이 열린 볼쇼이 극장에서 마야콥스키는 장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3부를 낭독했다. 정부 관람석에 앉은 스탈린은 시인을 향해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 석 달 뒤 마야콥스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러시아 미래주의의 가장 큰 목소리였던 그는 혁명 뒤 ROSTA 포스터와 장시로 새 체제의 언어를 빚었다. 관료주의를 겨눈 후기 풍자는 문단과 국가의 냉대를 받았고 1930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로스타의 창, 포스터가 된 시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는 열네 살에 볼셰비키당에 들어가 세 차례 체포되었고, 부티르카 감옥 103호 독방에서 처음 시를 썼다. 미래주의의 반항아였던 그는 1917년을 「나의 혁명」으로 받아들였고, 「좌익 행진곡」(1918)과 메이예르홀트가 연출한 『미스테리야 부프』로 혁명의 첫 시인이 되었다.

1919년 가을부터 1922년까지 그는 러시아전신국(로스타)의 「풍자의 창」 작업에 뛰어들었다. 전선 소식과 방역 캠페인, 문맹 퇴치 구호를 만화와 짧은 시로 옮긴 이 포스터들은 신문이 닿지 않는 거리의 상점 유리창마다 붙었고, 마야콥스키는 밤샘 작업으로 그림과 시구 수천 점을 직접 만들었다. 예술을 거리로, 시를 생산으로 가져간다는 좌익예술전선(레프)의 강령은 이 시기의 경험에서 자라났다.

마지막 날들과 유서

1930년 초 마야콥스키는 여러 겹의 압박에 짓눌렸다. 2월에 브리크 부부가 유럽으로 떠났고, '20년 작업' 전시회에는 그가 기대했던 문단·정부 인사가 한 명도 찾지 않았다. 희곡 『목욕탕』의 초연은 혹평을 받았고, 잡지 『인쇄와 혁명』에서는 20주년 축사를 인쇄 직전에 삭제했다. 문단에서는 '이제 다 썼다'는 소문이 돌았고, 해외여행 비자도 거부당했다. 4월 12일 폴리테흐니체스키 박물관에서 열린 시 낭독회에서는 청중의 야유가 쏟아졌다.

4월 14일 아침, 마야콥스키는 연인 베로니카 폴론스카야를 자신의 루뱐카 작업실로 불렀다. 그는 극장 리허설에 가려는 그녀를 막으며 가지 말라고 울부짖었다. 폴론스카야가 문을 나서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

이틀 전 미리 써둔 유서는 "내가 죽는 것에 대해 아무도 탓하지 말라. 험담도 하지 말라. 죽은 사람은 그걸 몹시 싫어했다"로 시작된다. 그는 릴랴 브리크·어머니·누이들·폴론스카야를 자신의 가족으로 지목하고, 모든 원고를 브리크에게 맡겼다. 유서는 이 유명한 구절로 끝난다: "말하자면 / '사건은 종결되었네' / 사랑의 배가 / 일상이라는 암초에 박살났네 / 나는 인생과 셈을 끝냈으니 / 서로의 아픔과 / 불행과 / 모욕의 목록은 / 필요 없네."

1930년 4월 14일, 그리고 사후의 정전

1930년의 마야콥스키는 지쳐 있었다. 풍자 희곡 『목욕탕』은 혹평받았고, 창작 20주년 전시회에 문단 동료와 지도부는 오지 않았으며, 개인적 삶도 헝클어져 있었다. 4월 14일 아침 그는 루뱐스키 통로의 작업실에서 권총으로 삶을 끝냈다. 유서에는 「사랑의 조각배가 일상에 부딪혀 부서졌다」는 구절과 함께 가족을 돌봐 달라는 부탁이 적혀 있었다. 15만 명이 장례 행렬을 따랐다.

1935년 릴리 브릭이 시인의 유산이 방치되고 있다는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내자, 스탈린은 「마야콥스키는 우리 소비에트 시대의 가장 뛰어나고 가장 재능 있는 시인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의 기억과 작품에 대한 무관심은 범죄다」라고 답했다. 이 결정으로 마야콥스키는 소비에트 문학 정전의 한복판에 놓였다. 광장과 지하철역이 그의 이름을 얻었고, 그의 계단식 시행은 이후 수십 년간 소련 시의 표준 문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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