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과 식민지 혁명을 논쟁한 인도 마르크스주의자
“당신은 정말 젊군요! 나는 동방에서 온 백발의 현자를 기대했는데.” — 1920년 크렘린에서 로이를 처음 만난 레닌이 27세의 인도 혁명가에게 건넨 첫마디.
벵골 출신 마르크스주의자. 1920년 코민테른에서 식민지 문제로 레닌과 논쟁했고, 멕시코 공산당과 인도 공산당 창립을 주도했다. 제명 후 영국에서 6년간 투옥, 말년에 급진적 인본주의로 전회했다.
경력 연표
- 1917멕시코 사회당 창립 참여 (이후 멕시코 공산당으로 전환)
- 1919멕시코 공산당 창당 — 러시아 밖 최초의 공산당
- 1920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식민지 문제 보충 테제 제출, 레닌과 논쟁
- 1920타슈켄트에서 인도 공산당 창립 주도
- 1922–1929코민테른 집행위원·상임간부회 위원, 중국 문제 담당
- 1929부하린 우익반대파 가담으로 코민테른에서 제명
- 1931–1936영국 식민당국에 체포되어 반역죄로 6년간 투옥
- 1940–1948급진민주당 창당, 반파시스트 노선 견지
- 1947『신인본주의』 선언 발표 — 급진적 인본주의 철학 정립
1927년 중국 사절단과 스탈린 전보 사건
1927년 초, 코민테른은 로이를 중국에 파견해 국민당 좌파와 중국공산당의 제1차 국공합작을 안정화하도록 했다. 4월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 이후 우한의 왕징웨이 좌파 정부만이 유일한 동맹으로 남았다. 로이는 농민혁명 즉시 실행을 주장했고, 4년간 중국에 체류하던 보로딘은 우한 국민당과의 동맹 유지를 우선시했다. 1927년 6월 1일 스탈린의 전보가 도착했다: 농민의 토지몰수를 지지함과 동시에 우한 국민당도 지지하라는 모순된 지시였다. 로이는 왕징웨이를 혁명노선으로 설득할 수 있다고 판단해 이 비밀 전보를 직접 보여주었다. 왕은 자신이 '숙청 대상인 신뢰할 수 없는 장군'으로 지목되었음을 깨닫고 장제스와 화해, 소련 고문들을 추방하고 공산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제1차 국공합작은 붕괴했고 약 14만 명이 백색테러로 희생되었다. 로이는 이 '무분별한 행위'로 코민테른 내 모든 지위를 상실했으며, 이는 결국 1929년 공식 제명으로 이어졌다.
급진적 인본주의: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영국 식민 감옥에 수감된 5년여는 로이에게 철학적 전회의 시간이었다. 아내 엘렌 곳샬크가 독일에서 보내준 책들을 읽으며 그는 약 3천 페이지에 달하는 『감옥 수고』를 집필했다. 이 원고에서 로이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비판하고, 현대 물리학과 생물학의 성과를 반영한 새로운 유물론을 모색했다. 문화와 관념이 역사에서 수행하는 독자적 역할을 강조하며, 철학적 혁명이 사회혁명에 선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옥 후 로이는 반식민 민족운동에 복귀했으나, 1940년 의회파와 결별하고 급진민주당을 창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파시즘에 맞서 영국과 연합국을 지지하는 반反파시스트 노선을 취해 간디의 '인도 떠나라' 운동과 충돌했다. 전후 로이는 『공산주의를 넘어서』(1947)와 『신인본주의 선언』(1947)을 잇달아 발표하며 자신의 철학을 완성했다. 이 선언은 '급진민주주의 22개 테제'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이성을 사회구성의 기초로 삼고,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도 소비에트 공산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제시했다.
로이의 인본주의는 인간을 자유롭고 이성적이며 윤리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란 단지 투표가 아니라 개인이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사회질서라고 보았다. 1949년 그는 기관지 이름을 『래디컬 휴머니스트』로 바꾸고, 인도 급진인본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1952년 국제인본주의윤리연합(IHEU)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1954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로이의 사상은 이후 인도의 합리주의·세속주의 전통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