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세이 솔로모노비치 우리츠키

Моисей Соломонович Урицкий
러시아 러시아 1873–1918 ✕ 암살

붉은 테러를 막으려 했으나 그 방아쇠가 된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나는 결코 무른 사람이 아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내 손으로 모든 반혁명분자를 쏘아 죽이고도 마음이 평온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형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반대한다」 — 페트로그라드 체카 동료들에게

체르카시 유대인 가정 출신. 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후 1898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처음에는 멘셰비키로 활동했다. 1917년 8월 제6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에 합류해 중앙위원이 되었고, 10월 무장봉기 당시 군사혁명당중앙에서 봉기를 지휘했다. 1918년 3월 페트로그라드 체카 초대 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인질 구금과 초법적 처형에 반대하며 모스크바보다 절제된 노선을 취했다. 1918년 8월 30일 암살당했으며, 같은 날 레닌 피격과 함께 적색 테러 공식 선포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제헌의회 선거관리위원과 의회 해산

1917년 11월 23일, 볼셰비키는 이미 선거 실무를 마친 전러시아 제헌의회 선거관리위원회를 장악하고 우리츠키를 새 위원으로 임명했다. 11월 26일 레닌이 서명한 「제헌의회 개회에 관한 포고」는 개회 정족수를 400명으로 못 박고, 개회 권한을 인민위원회의가 승인한 자(즉 볼셰비키)에게만 부여함으로써 소집 자체를 사실상 봉쇄했다. 11월 말 우리츠키는 선거관리위원회가 볼셰비키 통제 밖에서 내린 모든 지시의 집행을 금지하는 명령을 하달했다.

12월에서 1918년 1월로 넘어가는 사이 선관위의 실무 책임자였던 우리츠키가 실질적인 제헌의회 업무를 총괄했고, 대중의 인식 속에서 그의 이름은 제헌의회 운명과 분리될 수 없게 되었다. 1918년 1월 5일(구력) 타브리체스키 궁전에서 제헌의회가 마침내 개회하자, 볼셰비키와 좌파 에스에르는 의회가 소비에트 권력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장했다. 그날 밤 우리츠키와 레닌이 공동 서명한 명령이 경비대에 하달되었는데, 그 내용은 "반혁명적 의원들"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고 자유로운 퇴장을 보장하되, 특별 명령 없는 재입장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무적으로는 아나톨리 젤레즈냐코프가 "경비병이 피곤하다"며 의원들을 해산시켰다.

이튿날인 1월 6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는 제헌의회 해산 포고를 채택했다. 루나차르스키는 회고록에서 "폭풍 같은 그 나날에 '제헌의회 담당 위원'으로서의 우리츠키를 보았어야 했다!"라고 적으며, 그가 법과 자유에 대한 민주파의 "허세 섞인 연설"을 "냉철한 비웃음"으로 맞받았다고 증언했다. 사회혁명당 우파 인사는 "우리츠키에게는 뭔가 운명적인 것이 있다"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제헌의회 해산은 의회민주주의에서 소비에트 권력으로의 결정적 단절을 상징했으며, 우리츠키는 그 전환의 전면에서 실무를 집행한 인물이었다. 이후 내전기에 사마라에서 사회혁명당이 제헌의회 의원위원회(코무치)를 수립하며 무장 저항의 명분으로 삼았을 만큼, 이 사건은 오랫동안 논쟁의 핵심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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