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콜라 올렉시요비치 스크리프니크

Микола Олексійович Скрипник
소련 우크라이나 1872–1933 ✕ 자살

우크라이나화의 설계자, 스스로 총구를 겨눈 문화혁명

1918년,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지도부에 "정부와 공화국 놀음을 그만두라"고 명령하자, 스크리프니크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러시아 인민위원의 태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노동대중의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

볼셰비키 우크라이나 최초 정부 수반을 지낸 혁명가이자 마르크스주의 민족문제 이론가였다. 1927년부터 1933년까지 우크라이나 계몽인민위원으로서 우크라이나어 교육·출판·과학·예술 전반에서 우크라이나화 정책을 주도했고, '하르키우 맞춤법'으로 불리는 철자법 개혁을 완성했다. 600편이 넘는 저작을 남겼으며,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과 코민테른 집행위원을 지냈다. 1933년 민족주의적 일탈 혐의로 공격받던 중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사후 30년간 이름이 지워졌다가 1962년 복권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민족문제 이론과 우크라이나화

스크리프니크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마르크스주의 민족문제 이론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레닌민족자결 원칙을 연방 건설 과정에서 일관되게 옹호했으며, 1923년 제12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이 제안한 '자치화' 방식에 반대하며 공화국들의 실질적 주권을 요구했다. 그에게 민족문제 해결이란 단순한 행정적 재구획이 아니라, 피억압 민족의 언어·문화·교육·간부 양성을 통해 제정 러시아가 남긴 식민지적 불평등을 바로잡는 전방위적 과업이었다.

1927년부터 1933년까지 우크라이나 계몽인민위원으로 재임하며 이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 우크라이나어 학교 비율을 80% 이상으로 끌어올렸고,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의 연구를 우크라이나어로 전환했으며, 주요 고전과 외국 문헌의 우크라이나어 번역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1928년에는 이른바 '하르키우 맞춤법'(스크리프니크 맞춤법)을 채택하여 우크라이나어 표기법을 표준화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의 편집장을 맡고, 전우크라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소장으로서 마르크스주의 학술 체계를 우크라이나에 정착시켰다.

스크리프니크는 민족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우크라이나화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소비에트 국가의 틀 안에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기치 아래 추진되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중앙의 곡물 수탈과 강제 집단화 속에서 그의 정책은 '국수주의적 일탈'로 낙인찍혔다. 그가 설계한 우크라이나 문화혁명은 1933년 그 자신의 파멸과 함께 역전되기 시작했고, 스탈린주의 체제 아래서 우크라이나화는 '부르주아 민족주의'로 규정되어 폐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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