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콜라 올렉시요비치 스크리프니크

Микола Олексійович Скрипни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72–1933 ✕ 자살

우크라이나화의 설계자, 스스로 총구를 겨눈 문화혁명가

1918년 봄,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측에 "정부와 공화국 놀음을 그만두라"고 요구하자, 스크리프니크가 속한 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와 인민비서국은 전보로 반박했다: "우리 행동의 근원은 인민위원의 태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노동대중의 의지다."

1872년 1월 13일(구력 25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바흐무트 군 야시누바타 마을에서 철도 전신 기사인 아버지와 젬스트보 병원 조산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7년 12월 레닌의 지시로 우크라이나에 파견되어 초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인 인민비서국 의장을 맡았으며, 1918년 7월부터 1919년 1월까지 체카 반혁명투쟁국 국장을 지냈다. 1927년부터 1933년 2월까지 우크라이나 계몽인민위원으로서 우크라이나화를 이끌었고, 1929년 6월 29일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민족문제 이론과 우크라이나화

스크리프니크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마르크스주의 민족문제 이론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레닌의 민족자결 원칙을 연방 건설 과정에서 일관되게 옹호했으며, 1923년 제12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이 제안한 '자치화' 방식에 반대하며 공화국들의 실질적 주권을 요구했다. 그에게 민족문제 해결이란 단순한 행정적 재구획이 아니라, 피억압 민족의 언어·문화·교육·간부 양성을 통해 제정 러시아가 남긴 식민지적 불평등을 바로잡는 전방위적 과업이었다.

1927년부터 1933년까지 우크라이나 계몽인민위원으로 재임하며 이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 우크라이나어 학교 비율을 80% 이상으로 끌어올렸고,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의 연구를 우크라이나어로 전환했으며, 주요 고전과 외국 문헌의 우크라이나어 번역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1928년에는 이른바 '하르키우 맞춤법'(스크리프니크 맞춤법)을 채택하여 우크라이나어 표기법을 표준화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의 편집장을 맡고, 전우크라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소장으로서 마르크스주의 학술 체계를 우크라이나에 정착시켰다.

스크리프니크는 민족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우크라이나화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소비에트 국가의 틀 안에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기치 아래 추진되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중앙의 곡물 수탈과 강제 집단화 속에서 그의 정책은 '국수주의적 일탈'로 낙인찍혔다. 그가 설계한 우크라이나 문화혁명은 1933년 그 자신의 파멸과 함께 역전되기 시작했고, 스탈린주의 체제 아래서 우크라이나화는 '부르주아 민족주의'로 규정되어 폐기되었다.

1932~34년의 충돌과 복권

스크리프니크는 1932년부터 1933년 초까지 높아진 곡물 수매 목표에 사실상 반대했고, 이는 1932년 여름 카가노비치가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특별히 지적된 사안이었다. 우크라이나어 자료에 따르면 1932년 10월 말 그는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주의 곡물 수매를 책임지는 직무를 맡았으며, 1933년 1월 스탈린의 지시로 포스티셰프가 우크라이나에 도착한 뒤부터 그에 대한 공세가 본격화되었다.

말년의 공세에서 그의 저작에서는 '레닌주의의 왜곡', '민족주의적 오류', '언어학에서의 파괴 활동'이 색출되었다.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2월 및 6월 전원회의는 대체로 그를 겨냥한 것이었고, 그는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는 복종 문서를 작성하도록 요구받았으나 정치국에 제출된 반복된 해명은 모두 불충분하다고 판정되었다. 1933년 2월 그는 계몽인민위원 직에서 해임되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으로 옮겨졌다. 1933년 7월 7일, 그의 문서 문제가 다시 상정된 정치국 회의가 시작될 무렵 그는 회의장을 나와 데르주프롬의 자신의 집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해는 하르키우에 묻혔다.

자살의 동기에 대해서는 상충하는 해석이 제기되며 어느 하나도 확정된 사실로 제시되지 않는다. 러시아어 자료는 다른 출구가 없었기에 자살로 '불가피한 파멸을 미리 막았다'고 서술하고, 영어 자료는 자신의 정책을 공개 재판에서 번복하도록 강요받기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본다. 문서로 확인되는 것은 자살이라는 사실 자체다.

장례와 즉각적인 매장 이후의 명예 훼손도 문서로 남아 있다. 7월 8일 장례식에서 페트로우스키는 그를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의 창립자이며 '뻔뻔한 계급 적에게 희생된' 인물이라고 말했고, 자토니스키와 수호믈린은 자살이 그의 영광스러운 과거로도 씻을 수 없는 '검은 오점'임을 인정했다. 7월 12일 키이우의 당 활동가 회의에서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 포포프는 망자를 매장시키기 위해 그의 '반레닌주의적 오류'를 열거했다. 민족문제를 우선시한 것, 대러시아 쇼비니즘만을 주된 위험으로 본 것, 민족문제 이론에서 레닌과 스탈린의 역할을 낮춘 것, 학교에서의 강제 우크라이나화를 정당화한 것,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문화를 러시아 노동자 문화와 분리한 것, '민족 볼셰비즘'이라는 반당 이론 등이었다. 1933년 11월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의 합동 전원회의 결정은 이미 '스크리프니크가 이끄는 새로운 민족주의적 일탈'을 언급했고, 1934년 3월 27일 당 정치국은 '스크리프니크 저작의 압수'에 관한 특별 결정을 채택했다.

복권은 오래 지연되고 논쟁적이었다. 1950년대 후반에 형식적으로 복권되었으나 그의 문학 유산 전체는 여전히 금서였다. 196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의가 탄생 90주년을 맞아 그의 저작 출판 문제를 제기했으나 선집은 1991년에야 나왔고, 1968년 하르키우 푸슈킨스카 거리에는 그를 기리는 흉상이 세워졌으며 키이우와 리비우, 그의 고향 야시누바타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1990년 3월 28일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민족 편향'이라는 정치적 비난이 위조된 자료와 그의 견해와 활동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근거했다고 인정하고 그를 당적으로 복권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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