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크릴렌코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Крыленко
소련 러시아 1885–1938 ✕ 처형

혁명적 법의식의 설계자, 20분 만에 끝난 재판의 피고

1918년, 사형제 폐지 직후의 재판에서 피고에게 총살형이 선고되자 방청객이 술렁였다. 크릴렌코가 말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처형이 폐지된 겁니다. 샤스트니는 처형되는 게 아니라 총살되는 겁니다.」

볼셰비키 변호사이자 군사 지휘관. 1917년 11월 최초의 소비에트 최고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독일과의 휴전을 지휘했다. 이듬해부터 소비에트 법률 체계의 핵심 설계자로 전환, 혁명적 법의식 이론을 통해 법을 계급투쟁의 도구로 규정했다. 샤흐띠·산업당·멘셰비키 재판에서 국가검사로 활약하며 비신스키와 법무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다. 1938년 체포, '반혁명 등산·관광 테러 조직' 사건으로 20분 재판 끝에 사형 선고, 같은 해 7월 꼼무나르까에서 총살. 1955년 복권.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17년 11월, 소위가 총사령관이 되다

1917년 11월 22일, 인민위원회의는 강화 교섭 명령을 거부한 두호닌 장군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소위 니콜라이 크릴렌코를 임명했다. 차르 군대의 최말단 장교가 수백만 병사의 최고총사령관이 된 이 인사는 혁명이 군대의 위계를 어떻게 뒤집었는지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크릴렌코는 페테르부르크 대학 출신의 볼셰비키 연설가로, 전선 병사들 사이에서 「아브람 동지」라는 당명으로 알려져 있었다.

크릴렌코는 수병 분견대와 함께 열차로 전선 사령부가 있는 모길료프로 향했고, 12월 3일 스타프카를 무혈 접수했다. 같은 날 격분한 병사와 수병들이 두호닌을 살해했는데, 크릴렌코는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자기 통제를 벗어난 폭력을 공개적으로 개탄했다. 이후 그는 독일과의 정전 교섭을 뒷받침하며 낡은 군대의 해산과 새 군대의 건설이라는 모순된 과제를 떠안았다.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 체결과 함께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난 크릴렌코는 군복을 벗고 혁명 법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세계대전을 끝내겠다는 볼셰비키의 공약을 전선에서 집행한 인물로서, 그는 10월 혁명이 단지 궁전의 탈취가 아니라 참호 속 병사 대중의 평화 열망 위에 서 있었음을 증언하는 존재였다.

혁명 법정과 체스, 그리고 파미르의 등반가

내전기부터 크릴렌코는 소비에트 법 체계의 건설자였다. 그는 수석 검사로서 1922년 사회혁명당 재판, 1928년 샤흐티 재판, 1930년 산업당 재판 등 굵직한 정치 재판을 이끌었고, 1931년 러시아공화국, 1936년 소련의 사법인민위원이 되었다. 법을 계급투쟁의 도구로 보는 그의 법학은 절차적 형식주의를 배격했으나, 동시에 그는 법전 편찬과 법률 교육 등 새 국가의 사법 제도화에 힘썼다.

크릴렌코는 소련 체스와 등산의 최대 후원자이기도 했다. 전연방 체스 부문 의장으로서 「체스를 대중에게」라는 구호 아래 1925년 모스크바 국제 체스 대회를 조직했고 잡지 『64』를 창간했다. 여름이면 파미르 고원으로 떠나 1928년 소련-독일 합동 파미르 탐사를 비롯한 원정을 이끌었으며, 소련 등산 운동의 제도적 기틀을 놓았다.

1938년 1월 최고소비에트 회의에서 그의 「취미」는 인민위원의 직무 태만으로 공격받았다. 경쟁자였던 비신스키의 법학이 그의 자리를 대신했고, 크릴렌코는 1월 31일 체포되어 7월 29일 20분간의 재판 끝에 총살되었다. 1956년 명예 회복되었다. 혁명 법정의 창설자가 그 법정의 절차조차 없이 사라진 사실은, 대숙청이 소비에트 법질서 자체를 삼켰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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