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크릴렌코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Крыл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5–1938 ✕ 처형

혁명적 법의식의 설계자, 대숙청에 삼켜진 검사

1918년 5월, 사형제가 폐지된 뒤 방청객이 술렁이자 크릴렌코는 "처형이 폐지된 겁니다. 샤스트니는 처형되는 게 아니라 총살되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스몰렌스크 현 베흐테예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역사와 문학을 공부하던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당명은 아브람이었다. 1917년 2월 혁명 뒤 연대와 사단, 11군 위원회 의장을 거쳐 11월 최초의 소비에트 최고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과의 정전 교섭을 열었다. 이듬해부터 혁명재판소와 검찰, 사법인민위원직을 거치며 혁명적 법의식을 내세워 법을 계급투쟁의 도구로 규정하고 1922년 사회혁명당 재판과 1928년 샤흐띠 재판, 1930년 산업당 재판, 1931년 멘셰비키 재판을 이끌었다. 1938년 1월 31일 부하린 우익 조직 연계와 사법기관 파괴 혐의로 체포되어 7월 29일 20분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그날 총살되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지하 활동과 체포, 유배, 그리고 전선: 1904–1916

1904년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역사와 문학을 공부하던 크릴렌코는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학생들 사이에서 「아브람 동지」로 불렸다. 1905년 혁명기에는 단명했던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와 볼셰비키 페테르부르크 위원회의 성원이었다. 1905년 10월 13일 기술연구소에서 열린 집회를 그가 주재했는데, 그 자리에서 흐루스탈료프-노사르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구성을 제안했다. 1906년 6월 러시아를 떠났다가 그해 돌아왔고, 1907년 차르 비밀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뒤 재판 없이 루블린으로 유배되었다.

1906년부터 그는 모스크바 위원회의 선전원으로 비합법 활동을 하며 «레노», «구르냐크», «아브라모프» 같은 가명을 썼다. 1909년에는 사민주의와 이론적으로 결별한 소책자 「정통을 찾아서」를 썼는데, 이 소책자는 1937년 당 지도부에 의해 「생디칼리스트적 경향」으로 평가되었다. 당과의 결별 연대에 대해서는 문서마다 서술이 갈린다. 러시아어판은 1909년의 이 소책자로, 영어판은 1911년 당 탈퇴로 기록하며, 영어판은 그가 곧 다시 입당했다고 덧붙인다. 1909년 봄 대학 졸업 시험을 통과해 학위를 받은 그는 루블린과 소스노비체의 사립 폴란드 학교에서 문학과 역사를 가르쳤다.

1911년부터 볼셰비키 신문 『즈베즈다』에서 일하다 『프라우다』로 옮겼다. 1911년 봄 오스트리아 갈리치아의 크라쿠프에 있던 레닌에게 불려갔고 그때부터 레닌 가족과 가까워졌으며, 이후 국가두마의 볼셰비키 의원들의 법률 고문이 되었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루블린 주둔 제69 보병 랴잔 연대에서 1급 지원병 자격으로 1년 현역 복무를 해 사병과 부사관 계급을 거쳤고, 예비역 편입 후 1913년 11월 육군보병 예비역 소위로 임관되었다. 영어권 서술은 같은 시기를 1913년 제대 전 중위 진급으로 정리해 계급 서술에 차이가 있다.

당에 의해 제국의 사회민주주의 두마 원내교섭단체에 배속된 그는 1913년 12월 11일 체포되어 2년 기한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하리코프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하리코프 대학 법학부를 외부생 자격으로 졸업해 법학 학위를 얻었는데, 이 유배기 법학 수학이 훗날 혁명재판소와 검찰 경력의 학문적 토대가 된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오스트리아로, 다시 스위스로 망명해 1915년 3월 베른 당 회의에 참가했다. 영어권 서술은 1915년 중반 레닌이 그를 러시아로 파견해 볼셰비키 지하조직 재건을 돕게 했다고 기록한다. 1915년 6월 아내 엘레나 로즈미로비치와 함께 모스크바로 비합법 파견되었고, 1915년 11월 예비역 장교로서 징집을 회피한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1916년 4월까지 하리코프에서 수감되었다. 석방될 때는 「그의 선전에 대비하라」는 요구가 적힌 문서가 동봉되어 있었고, 그는 현역군으로 강제 편입되었다. 1916년 남서부 전선 제11군 제13 핀란드 소총병 연대에서 연대 통신부대의 하급 장교로 복무했으며, 1916년 8월 12일(25일)부터 9월 15일(28일)까지 모스크바의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1917년 2월 혁명 뒤의 연대·사단·군 위원회 활동은 이 지하 활동과 전선 복무의 경험 위에서 시작되었다.

1917년 11월, 소위가 총사령관이 되다

1917년 11월 22일, 인민위원회의는 강화 교섭 명령을 거부한 두호닌 장군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소위 니콜라이 크릴렌코를 임명했다. 차르 군대의 최말단 장교가 수백만 병사의 최고총사령관이 된 이 인사는 혁명이 군대의 위계를 어떻게 뒤집었는지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크릴렌코는 페테르부르크 대학 출신의 볼셰비키 연설가로, 전선 병사들 사이에서 「아브람 동지」라는 당명으로 알려져 있었다.

크릴렌코는 수병 분견대와 함께 열차로 전선 사령부가 있는 모길료프로 향했고, 12월 3일 스타프카를 무혈 접수했다. 같은 날 격분한 병사와 수병들이 두호닌을 살해했는데, 크릴렌코는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자기 통제를 벗어난 폭력을 공개적으로 개탄했다. 이후 그는 독일과의 정전 교섭을 뒷받침하며 낡은 군대의 해산과 새 군대의 건설이라는 모순된 과제를 떠안았다.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 체결과 함께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난 크릴렌코는 군복을 벗고 혁명 법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세계대전을 끝내겠다는 볼셰비키의 공약을 전선에서 집행한 인물로서, 그는 10월 혁명이 단지 궁전의 탈취가 아니라 참호 속 병사 대중의 평화 열망 위에 서 있었음을 증언하는 존재였다.

혁명 법정과 체스, 그리고 파미르의 등반가

내전기부터 크릴렌코는 소비에트 법 체계의 건설자였다. 그는 수석 검사로서 1922년 사회혁명당 재판, 1928년 샤흐티 재판, 1930년 산업당 재판 등 굵직한 정치 재판을 이끌었고, 1931년 러시아공화국, 1936년 소련의 사법인민위원이 되었다. 법을 계급투쟁의 도구로 보는 그의 법학은 절차적 형식주의를 배격했으나, 동시에 그는 법전 편찬과 법률 교육 등 새 국가의 사법 제도화에 힘썼다.

크릴렌코는 소련 체스와 등산의 최대 후원자이기도 했다. 전연방 체스 부문 의장으로서 「체스를 대중에게」라는 구호 아래 1925년 모스크바 국제 체스 대회를 조직했고 잡지 『64』를 창간했다. 여름이면 파미르 고원으로 떠나 1928년 소련-독일 합동 파미르 탐사를 비롯한 원정을 이끌었으며, 소련 등산 운동의 제도적 기틀을 놓았다.

1938년 1월 최고소비에트 회의에서 그의 「취미」는 인민위원의 직무 태만으로 공격받았다. 경쟁자였던 비신스키의 법학이 그의 자리를 대신했고, 크릴렌코는 1월 31일 체포되어 7월 29일 20분간의 재판 끝에 총살되었다. 1956년 명예 회복되었다. 혁명 법정의 창설자가 그 법정의 절차조차 없이 사라진 사실은, 대숙청이 소비에트 법질서 자체를 삼켰음을 보여 준다.

← 카드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