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 미하일로비치 피틴

Павел Михайлович Фитин
소련 러시아 1907–1971 ○ 자연사

예조프시나의 폐허에서 해외정보국을 재건하고 원자폭탄을 훔친 사내

«전쟁 전 몇 년 동안 해외에 약 40개의 거점을 꾸리고 200명 이상의 첩보원을 파견했으며, 다수의 직업 체키스트를 비합법 공작에 투입했다. 이는 즉각 성과로 나타났다.» — 파벨 피틴, 회고록에서, 예조프시나로 초토화된 해외정보국을 2년 만에 재건한 성과에 대해

파벨 미하일로비치 피틴은 1939년 31세로 소련 해외정보국장에 임명된 역대 최연소 정보수장이다. 예조프시나로 붕괴된 해외 공작망을 2년 만에 40여 개 거점으로 재건했고, 1941년 영국 핵개발 보고서를 입수해 작전명 '에노르모즈'를 주도하여 소련 원자폭탄 개발을 수년 앞당겼다. 전쟁 중 독일 침공 경고 100여 건을 스탈린에게 올리고 쿠르스크 전투 계획을 입수했으며, 1946년 해임 후에는 카자흐 SSR 국가보안장관을 지냈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 여파로 연금 없이 해고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에노르모즈 작전: 원자폭탄을 위한 첩보전

피틴이 이끈 소련 해외정보국의 최대 성과는 작전명 '에노르모즈(Enormoz)': 미국과 영국의 핵개발 비밀을 체계적으로 침투한 공작이었다. 출발점은 1941년 9월 16일 런던에서 열린 MAUD 위원회와 영국 정부 과학자문회의 합동 회의였다. 이 자리에서 영국은 우라늄 폭탄이 2년 내 실현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케임브리지 5인방의 일원인 존 케언크로스(암호명 '리스트')가 당시 제국전쟁내각 사무차장 모리스 행키 경의 보좌관 신분으로 회의 속기록을 입수해 모스크바로 송부했다. 피틴은 이 정보가 단순한 과학 보고서가 아니라 세계 전략 균형을 뒤바꿀 수 있는 물질임을 직감하고 즉시 베리야에게 보고했다. 베리야는 제4특수과에 전문가 검토를 지시했고, 이후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피틴은 정보 수집의 중심축을 미국으로 옮겨야 한다고 판단하고, 1943년 과학기술 전문 거점(residency)을 뉴욕에 신설할 것을 주도했다. 초대 거점장으로는 과학기술 정보의 선구자 레오니트 크바스니코프를 임명하고, 그와 함께 알렉산드르 페클리소프와 아나톨리 야츠코프를 투입했다. 이들은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시카고 대학의 야금연구소, 오크리지 우라늄 농축 시설 등 맨해튼 계획의 핵심 시설에 침투한 협력자들(클라우스 푹스, 테오도르 홀, 데이비드 그린글라스, 줄리어스·에델 로젠버그 등)로부터 설계도, 농축 기술, 플루토늄 생산 공정, 그리고 트리니티 실험 결과까지 확보했다.

에노르모즈는 1944년 11월 5일 공식 승인되었으며, 극도의 보안 속에서 운영되었다. 이 작전으로 입수된 자료는 이고리 쿠르차토프 팀이 막다른 길을 피하고 검증된 경로로 직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 RDS-1(1949년 8월 29일 실험 성공)은 자체 과학 역량의 산물이었으나, 첩보는 그 일정을 수년 앞당겼다. CIA 국장 앨런 덜레스는 이 성과를 두고 "세계 모든 정보기관의 꿈"이라고 평가했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원자무기 정보를 입수함으로써 정보부는 자신의 과거뿐 아니라 미래까지 갚았다"고 말했다. 피틴은 1945년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직후 메르쿨로프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원자력 연구의 장기적 비전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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