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틴 세르게예비치 파블로프

Валентин Сергеевич Пав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2003 ↓ 체포 1991

소련의 마지막 총리, 8월 쿠데타 가담자

총리 취임 8일 뒤인 1991년 1월 22일 저녁, 파블로프는 50루블·100루블 지폐를 사흘 안에 새 지폐로 교환하라고 명령하고 1인당 1,000루블까지만 즉시 교환하게 했다. 그보다 앞서 화폐개혁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모스크바금융대학을 1958년에 졸업하고 러시아연방과 소련의 재무부에서 일했으며, 1962년 당에 입당해 1979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계획위원회의 재정·가격 부문을 이끌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소련 국가가격위원회 의장, 1989년부터 1991년 1월 14일까지 재무장관을 지냈고, 같은 날 각료회의가 내각으로 개편되며 고르바초프가 그를 총리로 임명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조직에 가담했고, 8월 22일 면직령과 8월 23일 체포로 수감되었으며, 8월 28일 최고회의가 사임을 확인했다. 1993년 1월 석방되고 1994년 2월 사면된 뒤 은행장과 자문으로 일했으며, 2003년 3월 30일 65세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재정 라인의 순수 배양, 돈이 어디서 새는지 아는 남자

발렌틴 파블로프는 1937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모스크바금융대학을 나온 재정 관료였다. 재무부의 말단 조사관에서 시작해 예산국, 국가계획위원회 재정 부문을 거쳐 1986년 국가가격위원회 의장, 1989년 재무장관에 올랐다. 당 이력도 군 이력도 아닌 순수한 재정 경력으로 정상에 오른 드문 사례였고, 소련 가격 체계의 뒤엉킨 내부를 그만큼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바로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일찍 파국을 내다보았다. 반알코올 캠페인의 세수 손실, 임금은 풀리고 가격은 묶인 부분 개혁, 늘어나는 보조금이 재정을 어떻게 파먹는지 그는 숫자로 알고 있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그러나 시장화가 아니라 통제의 회복이었다. 그의 눈에 급진 개혁파는 경제를 모르는 선동가였고, 서방의 조언은 소련을 해체하려는 책략이었다.

1991년 1월 고르바초프는 리시코프의 후임으로 그를 정부 수반에 앉혔다. 직함은 각료회의 의장에서 「총리」로 바뀌어 있었다. 소련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총리라는 직함을 단 이 남자에게 남은 시간은 여덟 달이었다.

1991년 '파블로프 개혁': 사흘 만에 터진 화폐 강제 교환

1991년 1월 14일 총리로 임명된 파블로프는 불과 8일 뒤인 1월 22일 저녁, 50루블과 100루블 지폐를 3일 안에 새 지폐로 교환하라는 긴급 명령을 발표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 그는 '화폐개혁은 없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장담했었다. 교환 기간은 1월 23일부터 25일까지 단 사흘. 1인당 1,000루블까지만 즉시 교환해주고, 나머지는 특별위원회 심사를 거쳐 3월 말까지 처리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정부는 해외와 그림자 경제에 집중된 고액권을 차단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직전에 50·100루블권으로 지급된 급여 탓에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에게 돌아갔다. 은행 앞에는 패닉에 빠진 시민들이 장사진을 쳤고, 노년층의 공포가 특히 컸다. 26일까지 회수된 금액은 유통량 480억 루블 중 약 400억 루블에 그쳤고, 이후 신규 발행량이 회수량을 추월하면서 시장 안정화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4월 2일에는 대부분의 소비재 가격을 2~3배 인상하는 2차 조치가 이어졌다.

1991년 2~7월의 통치 프로그램과 중앙 통제력의 붕괴

1991년 2월 18일 파블로프는 최고회의에 소매가격 개혁안을 제출했다. 수치상으로는 리시코프의 옛 안과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고, 그때 이미 상점은 텅 비어 있었으며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이 전국으로 번지고 있었다.

4월 2일 정부는 가격을 인상했다. 공식 추산으로는 65~70%였지만, 실제로 상점에서 살 수 있는 상품의 가격은 두세 배로 뛰었다. 상품의 종류가 늘지도 않았고, 도매 창고가 비어 있었기에 인상 뒤 물건은 오히려 더 귀해졌다. 앞서 4월 18일 파블로프가 주요 경제학자들과 이 안을 논의한 자리에서 참가자들은 프로그램에 숫자가 거의 없다는 점, 그리고 최근의 일련의 정부 조치가 시장 개혁 의지에 대한 국내외의 의구심을 키웠다는 점을 지적했다.

4월 19일 소련 최고회의의 경제 위원회와 위원회 연석회의는 정부의 반위기 프로그램을 단지 '검토 대상으로 삼았다'는 수준에서 넘겼을 뿐 채택하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에는 파업 금지, 에너지·운송·통신 부문에 대한 특별 관리 제도, '필요한 노동시간 제도'의 복원이 담겨 있었고, 실제로 시행된 것은 별개의 법이었다. 같은 날 채택된 '주민 고용에 관한 법률'은 졸업 후 의무 배치를 폐지하고 사회 기생죄에 대한 형사 책임을 없애며 실업을 제도적으로 인정했다.

봄이 되자 중앙정부는 지배의 지렛대를 잃었다. 파업 중인 광부들로부터 공화국 지도부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중앙정부를 신뢰하지 않았고, 외국 채권자들도 대출을 멈췄으며, 정부의 행동은 갈수록 조잡해졌다. 개혁은 공화국들의 무시와 지역 독점체들의 자의적인 가격 책정으로 안팎에서 무력해졌다. 1월 1일 정부가 가격의 40%를 풀고 5% 판매세를 도입한 뒤였지만, 필립 핸슨에 따르면 파블로프의 개혁은 정부 명령을 따르지 않은 연방 공화국들 및 사치품을 스스로 규정하고 더 높은 가격을 매긴 광범한 지역 독점체들에 의해 훼손되었다. 2월부터 7월에 이르는 이 몇 달 동안 파블로프 내각이 실제로 성취한 것은 통제의 상실을 확인시켜 준 것뿐이었다.

1991년 6월의 월권 요구, 8월의 몰락

1991년 4월 파블로프는 소매 물가를 평균 60% 이상 끌어올렸다. 1961년 이후 처음 있는 대규모 공식 인상이었지만 보상 지급이 뒤따르며 재정 효과는 반감되었고, 민심만 잃었다. 6월 그는 최고회의에 나가 대통령을 우회해 정부가 직접 입법을 발의할 비상 권한을 요구했다. 크류치코프, 야조프, 푸고가 비공개 회의에서 그를 거들었다. 「헌법적 쿠데타 기도」라 불린 이 소동은 부결되었지만, 지도부 안의 균열과 강경파의 결심을 만천하에 예고했다.

8월 파블로프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쿠데타 이틀째부터 그는 「고혈압 위기」를 이유로 사실상 이탈했다. 폭음 때문이었다는 증언이 여럿이다. 재정의 파국을 막겠다며 비상통치에 가담한 총리는 비상통치의 사흘조차 버티지 못했다.

체포와 사면(1994) 이후 그는 민간 은행장과 경제 자문으로 살다 2003년 65세로 죽었다. 회고록에서 그는 「기회는 상실되었는가」라고 물으며 자신의 처방이 옳았다고 주장했다. 경제사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반대다. 그의 화폐 교환과 가격 인상은 저축과 신뢰를 파괴해, 그가 막으려던 붕괴를 오히려 앞당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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