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의 얼굴, 우편향의 세 번째 남자
「해외에서는 우리가 일당제라 비난한다. 틀렸다. 우리에겐 여러 정당이 있다. 단 하나가 집권하고 나머지는 감옥에 있을 뿐이다.」 — 1922년 제11차 당대회, 톰스키가 던진 이 말에 회의장은 폭풍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소비에트 노동조합 운동의 확고한 지도자로, 정치국 내 유일한 진짜 노동자 출신이었다. 레닌 시대에 전연방 중앙노조협의회 의장과 정치국 위원을 지내며, 1920–1921년 노조 논쟁에서 트로츠키의 노조 군사화 방안에 맞서 노조의 자율성을 옹호했다. 네프의 급진적 폐기에 맞서 부하린·리코프와 함께 '우편향'을 형성했으나 1929년 실각했고, 그 몰락은 독자적 노조 운동의 종말을 상징했다. 1936년 8월,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에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체포를 기다리지 않고 다차에서 권총 자살했다.
경력 연표
- 1904–1905볼셰비키 입당, 레벨(탈린) 소비에트 조직
- 1907–1916런던 당대회 대의원, 카토르가와 유형
- 1917페트로그라드 위원회, 모스크바 무장봉기 연락
- 1918–1929전연방 중앙노조협의회(VTsSPS) 의장
- 1922–1930정치국 위원
- 1929부하린·리코프와 함께 '우편향'으로 실각
- 1929–1932전연방 화학공업협회 의장, 최고인민경제회의 부의장
- 1932–1936국가합동출판사(OGIZ) 책임자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레벨(탈린) 소비에트 조직자에스토니아 레벨(현 탈린)에서 1905년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총파업을 이끌었으며, 혁명 후 체포·유배되었다.
- 1917.10–1918.0110월 혁명모스크바 무장봉기 연락 담당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군사혁명위원회 위원 및 노조 지도자
- 1921–1928신경제정책(네프)노동조합 지도자네프 시기 노동조합을 이끌며 시장 조건 아래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했다.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노조 지도자, 반대자노동조합 지도자로서 부하린, 리코프와 함께 강행 노선에 반대하다 1929년 노조 지도부에서 물러났다.
- 1937–1938대숙청표적노동조합 지도자로 체포가 다가오자 1936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쇄공 출신의 정치국원, 노동조합의 수장
미하일 톰스키는 당 최고 지도부의 유일한 진짜 노동자였다. 페테르부르크 근교 콜피노에서 태어나 석판 인쇄공으로 일했고, 1905년 레벨(탈린)에서 소비에트를 이끌다 체포와 유형을 거듭했다. 감옥이 그의 학교였고 파업이 그의 대학이었다.
1918년부터 그는 전러시아노동조합중앙평의회의 수장으로서 소비에트 노동조합 운동을 이끌었고 1922년 정치국원이 되었다. 1920–1921년 노동조합 논쟁에서 그는 조합의 군사화를 주장한 트로츠키에 맞서 조합의 자율성과 노동자 보호 기능을 옹호했고, 레닌의 강령과 함께 승리했다. 수백만 조합원의 조직을 대표한 그는 당과 공장을 잇는 살아 있는 연결 고리였다.
1936년 8월 22일, 볼셰보의 다차
1928년 곡물 조달 위기 앞에서 톰스키는 부하린, 리코프와 함께 농민에 대한 비상 조치와 무리한 공업화 속도에 반대했다. 이른바 우익 편향으로 낙인찍힌 그는 1929년 노동조합 지도부에서 해임되었고, 자기비판 뒤 국영출판연합(오기스)의 책임자로 밀려났다. 노동자 출신 지도자가 대변해 온 점진주의 노선은 그렇게 패배했다.
1936년 8월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의 법정에서 그의 이름이 「음모」 연루자로 불렸다. 8월 22일, 수사 개시 보도가 신문에 실린 날 톰스키는 볼셰보의 다차에서 스탈린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기고 권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재판도 자백도 거부한 이 죽음은 옛 노동자 지도자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자기 결정이었다. 그의 아들들도 탄압을 피하지 못했고, 그의 이름은 1988년에야 완전히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