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파블로비치 톰스키

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Том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0–1936 ✕ 자살

노동조합의 수장, 우편향의 세 번째 사람

「해외에서는 우리가 일당제라 비난한다. 틀렸다. 우리에겐 여러 정당이 있다. 단 하나가 집권하고 나머지는 감옥에 있을 뿐이다.」 1922년 제11차 당대회에서 톰스키가 던진 이 말에 회의장은 폭풍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소비에트 노동조합 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로서, 1918년부터 전연방 중앙노조협의회를 이끌고 1922년 정치국에 들어갔다. 1920–1921년 노조 논쟁에서 트로츠키의 노조 군사화 방안에 맞서 노조 자율성을 지켰고, 1929년 부하린·리코프와 함께 우편향으로 실각했다. 인쇄공 출신으로 정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으며, 1936년 8월 22일 조사 개시가 발표되자 볼셰보의 다차에서 권총 자살했다. 가족도 1930년대 후반에 탄압당했고, 1988년에야 혐의가 완전히 취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소련 정치국

1930.07 미재선 · 1936년 자살

관련 역사 사건

인쇄공 출신의 정치국원, 노동조합의 수장

미하일 톰스키는 당 최고 지도부의 유일한 진짜 노동자였다. 페테르부르크 근교 콜피노에서 태어나 석판 인쇄공으로 일했고, 1905년 레벨(탈린)에서 소비에트를 이끌다 체포와 유형을 거듭했다. 감옥이 그의 학교였고 파업이 그의 대학이었다.

1918년부터 그는 전러시아노동조합중앙평의회의 수장으로서 소비에트 노동조합 운동을 이끌었고 1922년 정치국원이 되었다. 1920–1921년 노동조합 논쟁에서 그는 조합의 군사화를 주장한 트로츠키에 맞서 조합의 자율성과 노동자 보호 기능을 옹호했고, 레닌의 강령과 함께 승리했다. 수백만 조합원의 조직을 대표한 그는 당과 공장을 잇는 살아 있는 연결 고리였다.

1936년 8월 22일, 볼셰보의 다차

1928년 곡물 조달 위기 앞에서 톰스키는 부하린, 리코프와 함께 농민에 대한 비상 조치와 무리한 공업화 속도에 반대했다. 이른바 우익 편향으로 낙인찍힌 그는 1929년 노동조합 지도부에서 해임되었고, 자기비판 뒤 국영출판연합(오기스)의 책임자로 밀려났다. 노동자 출신 지도자가 대변해 온 점진주의 노선은 그렇게 패배했다.

1936년 8월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의 법정에서 그의 이름이 「음모」 연루자로 불렸다. 8월 22일, 수사 개시 보도가 신문에 실린 날 톰스키는 볼셰보의 다차에서 스탈린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기고 권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재판도 자백도 거부한 이 죽음은 옛 노동자 지도자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자기 결정이었다. 그의 아들들도 탄압을 피하지 못했고, 그의 이름은 1988년에야 완전히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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