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우스펜스키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Успенский
소련 러시아 1902–1940 ✕ 처형

자살을 위장하고 달아난 우크라이나 NKVD 수장

1938년 11월 14일, 우스펜스키는 사무실에 유서를 남기고 드네프르 강변에 외투와 모자를 벗어둔 채 종적을 감추었다. 류시코프의 망명, 리트빈의 자살에 이은 석 달 새 NKVD 고위간부의 세 번째 비상사태였다.

우크라이나 NKVD 수장으로서 대숙청의 가장 격렬한 말기 국면을 주재했다. 1938년 예조프가 몰락하자 드네프르 강가에 유서와 외투를 남겨 익사로 위장, 도주했다. 5개월 뒤 체포되어 1940년 총살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우크라이나 대숙청

우스펜스키는 1938년 1월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으로 부임한 직후 전임자 이즈라일 레플렙스키가 구축한 간부진을 '우익-트로츠키주의 조직' 및 '반혁명 시온주의 민족주의 조직' 혐의로 대거 체포하며 자기 세력을 구축했다. 1938년 2월에는 정치국에 '쿨라크 작전' 1급(사형) 할당량 15,000명을 신청했고, 5월에는 예조프에게 직접 35,000명으로 증액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시기 우크라이나에서 쿨라크 작전과 민족 작전에 의한 탄압 규모는 소련 전체 평균의 8배에 달했으며, 그가 체포를 주도한 인원은 약 36,000명에 이르렀다. 1938년 6월 우크라이나 공산당 정치국 위원이 된 우스펜스키는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공개적으로 충성을 표하며 '충실한 스탈린주의자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에 온 뒤에야 비로소 인민의 적 분쇄가 본격화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남긴 대량의 사형 판결과 숙청 자료는 이후 NKVD 내부 권력투쟁의 증거물로 이용되었다.

도주와 체포

1938년 11월 14일, 예조프는 우스펜스키에게 '모스크바로 소환한다, 네 일은 좋지 않다'고 전화한 뒤 '어떻게 갈지, 어디로 갈지는 네가 알아서 봐라'고 암시했다. 체포가 임박했음을 직감한 우스펜스키는 사무실에 유서를 남기고 드네프르 강변에 외투와 모자를 벗어둔 채 익사를 위장했다. 그는 귀가 후 경호원을 돌려보내고 '개인적인 볼일'이 있다며 밤 9시 이후 사라졌다. 실종은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발견되었다.

우스펜스키는 '이반 라브렌티예비치 시마시콥스키' 명의의 가짜 여권을 스스로 발급받아 보로네시행 열차에 올랐다. 그는 쿠르스크, 아르한겔스크, 칼루가를 거쳐 모스크바 근교에서 라리사 마트손에게 은신했다. 마트손은 반년 전 남편인 굴라크 구금소 부서장 게르만 마트손이 총살된 상태였다. 두 사람은 무롬으로 이주했고, 마트손은 산부인과장으로 취업했으며 우스펜스키는 재택 문필가 행세를 했다. 1939년 3월 자금이 바닥나자 우스펜스키는 다시 도주했다. 카잔, 아르자마스, 스베르들롭스크를 전전한 끝에 금광에 숨기로 결심하고 미아스로 향했다.

스탈린은 이 소식에 격노했다. 류시코프의 일본 망명과 리트빈의 권총 자살에 이은 석 달 새 세 번째 NKVD 간부 비상사태였다. 그는 베리야에게 보낸 메모에서 '체키스트의 명예가 더럽혀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놈을 잡아라'고 명령했다. 전국 수배가 내려졌고, 마트손의 밀고로 우스펜스키는 1939년 4월 16일 미아스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1934년 프로코피예프에게 포섭된 'NKVD 내 반혁명 음모'와 1924년 마트손에게 포섭된 '독일 첩보 활동'을 자백했다.

1940년 1월 27일 소련 대법원 군사합의부는 사형을 선고했다. 추가 자백을 위한 유예를 거쳐 2월 26일 밤 총살되었고, 유해는 돈스코이 묘지 화장터의 무연고 유골 묘에 안치되었다. 아내 안나 우스펜스카야도 '남편의 해외 도주 준비 방조 및 불신고' 혐의로 1940년 3월 총살되었으며, 아들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체포 공로로 NKVD 요원 10명이 4월 29일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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