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전기를 받아든 장군, 쿠데타 법정에 홀로 선 장군
1945년 6월, 근위대장이던 바렌니코프 대위는 모스크바 중앙비행장에 도착한 승전기를 직접 건네받았고, 몇 시간 뒤 그 깃발은 붉은광장 승전 퍼레이드의 선두에 섰다.
소련과 러시아의 육군 대장으로, 조국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참전자다. 1945년 근위대장으로서 승전기를 받았고, 1984년부터 1989년까지 국방부 관리단을 이끌며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했다.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는 철군이 아니라 1988년 작전 마기스트랄 지휘의 공로로 받은 것이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위원은 아니었으나 1991년 8월 쿠데타를 군부 대표로서 지지했고, 1994년 사면을 거부한 유일한 피고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는 이유로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과 1991년 1월 빌뉴스 사태에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다. 1995년부터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고 이후 국방부 감찰관이 되었다. 2009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1– 군사·지휘 · 소련 · 군사 · 국방
경력 연표
- 1941아르마비르 군사위원회를 통해 붉은 군대에 징집, 체르카스크 보병학교 입교 (스베르들롭스크로 이전)
- 1942–1945제138소총사단으로 스탈린그라드 전선 참전, 이후 제35근위소총사단; 드네프르 도하·바그라티온·베를린 작전, 3회 부상, 대위로 종전
- 195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67참모본부 아카데미를 금메달로 졸업, 제26군단장 (1967–1969)
- 1969–1971주독 소련군 제3충격군 사령관
- 1971–1973주독 소련군 제1부총사령관
- 1973–1979카르파티아 군관구 사령관
- 1979–1984참모본부 작전총국장 겸 제1부참모총장, 이 직위에서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을 내렸다
- 1984–1989국방부 관리단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되어 장관 개인 대표를 맡았으며, 유엔 선의사무소와 1988–1989년 철군을 협의했다
- 1986체르노빌 사고 수습 군사작전 지휘
- 1989–1991국방차관 겸 지상군 총사령관, 1991년 1월 빌뉴스 사태에 참여
- 19918월 18일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군부 대표로서 GKChP를 지지, 8월 23일 체포
- 1994GKChP 피고인 가운데 유일하게 사면을 거부, 8월 11일 러시아 대법원 군사합의부에서 무죄 선고, 1995년 2월 3일 대법원 상임위가 무죄를 확정
- 1995–2003국가두마 의원 (KPRF, 1996–1999년 참전용사위원회 위원장, 2003년 로디나 블록 합류)
- 2000s참전용사 담당 국방부 감찰관
관련 역사 사건
- 1941–1945대조국전쟁스탈린그라드·베를린 작전 참전
- 1942–1943스탈린그라드 전투스탈린그라드 전선 참전자1942~1945년 제138소총사단으로 스탈린그라드 전선에 참전했다.
- 1979–1989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철군 작전 총괄국방부 작전집단장으로서 철군 작전을 총괄했으며, 그로모프와 함께 철군 연기 압력에 맞서 제네바 일정을 고수할 것을 주장했다.
- 1985–1991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8월 쿠데타 주도 장군
- 1986체르노빌 참사군사 정화작전 지휘관체르노빌 사고 수습을 위한 군사작전을 지휘했다.
- 1985–1989신사고 외교와 냉전의 종식철수 작전 총괄국방차관 겸 지상군 총사령관으로 철수 작전을 지휘했으며, 군부 측에서 나지불라가 소련군을 자국 안보에 이용하려는 시도를 막아달라고 정치 지도부에 간청했다.
- 1988–1991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육군총사령관 · 바쿠 작전국방차관 겸 육군총사령관으로서 바쿠에 파견된 고위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작전 후 이즈베스티야 인터뷰에서 군이 절제했다고 주장했다.
- 1987–1991발트 독립운동과 「발트의 길」지상군 총사령관으로 빌뉴스 작전 당시 현지에 있었다.
- 1991노보오가료보 협상과 신연방조약포로스 사절단의 군사적 얼굴육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8월 18일 포로스 사절단에 합류했다. 고르바초프가 고의로 그의 이름을 잊은 척 모욕했다. 후일 GKChP 재판에서 유일하게 사면을 거부하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 1991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GKChP 가담, 유일하게 사면 거부하고 법정에 서다국방차관 겸 지상군 총사령관으로 1991년 8월 쿠데타에 가담했다. 포로스로 날아가 고르바초프를 설득했고, 쿠데타 실패 후 기소되었으나 사면을 거부하고 정식 재판을 요구했다. 1994년 대법원은 그가 상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아프가니스탄 철군과 군사적 유산
바렌니코프의 아프가니스탄 경력은 침공의 설계자라기보다 전쟁을 정리해야 했던 고위 군사관료로서의 역할을 보여준다. 그는 1984년부터 1989년까지 국방부 관리단을 이끌며 소련군과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의 작전을 조정했고,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철군 결정이 내려진 뒤에는 철수의 군사적 조건을 관리했다. 1988년 작전 마기스트랄은 파키스탄 국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확보해 포위된 주둔군에 보급로를 열었고, 이 공로로 그는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실무적 군사 성과는 전쟁 자체의 정치적 실패와 분리될 수 없다. 회고적 평가에 따르면 바렌니코프는 아프가니스탄 개입이 장기전이 될 수 있음을 우려했지만, 최고 지휘관으로서 소련의 전쟁 수행과 철군을 모두 책임졌다. 1989년 2월 소련군이 철수한 뒤 그는 이를 군사적으로 질서 있는 작전으로 제시했으나, 전쟁은 아프가니스탄의 파괴와 소련 체제의 부담을 남겼다. 이 경험은 그가 훗날 국가 통합과 강한 중앙권력을 지키려 한 정치적 태도를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소비에트 이후의 의정 활동과 책임 문제
1991년 이후 바렌니코프는 군 복무에서 물러난 뒤에도 정치·사회 활동을 계속했다. 1993년부터 러시아연방공산당과 그 중앙위원회의 위원이었고, 1995년 국가두마 의원으로 선출되어 1996년부터 1999년까지 두마 참전용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03년 12월 7일에는 로디나 블록 명부(연방 명부 3번)로 다시 선출되어 참전용사위원회 부위원장과 로디나 원내교섭단체 공동대표를 맡았고, 새로 구성된 두마에서 최고령 의원으로서 2004년 1월 첫 회의를 개회했다. 같은 시기 1997년부터 2005년까지 러시아 영웅협회를 이끌었으며, 인간 존엄과 안전을 위한 국제연맹을 창설해 대표를 맡았다. 2008년에는 텔레비전 기획 '이름 러시아'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을 대표하는 인물로 나섰다. 1994년 2월 7일 옐친 대통령의 명령 제250호로 드미트리 야조프와 함께 군적에서 제적(퇴역)된 뒤 그는 회고록을 썼고, 생애 전반을 다룬 다섯 권이 출간되었다.
책임 문제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무거운 부분이다. 1979년부터 1984년까지 참모본부 작전총국장을 맡는 동안 그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을 내렸다. 1991년 1월에는 국방차관 겸 지상군 총사령관으로서 빌뉴스 사태에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14명이 사망하고 700명 이상이 부상했다. 리투아니아 수사는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KGB 의장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당 중앙위 서기 올레크 셰닌 등 23명의 책임을 인정했으나, 소련 관리 가운데 누구도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고르바초프는 사태를 아침에야 보고받았다고 밝혔다. 고르바초프 보좌관 아나톨리 체르냐예프는 군대 동원 결정이 소련 대통령과의 협의 없이 바렌니코프 개인이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다툼이 있는 귀속이다. 1994년 무죄 판결에 대해 그는 고르바초프와 그 주변을 반세기 전에 싸운 나치에 비유하며 '1991년 8월 나는 또 다른 적과 맞섰다'고 말했고, 실패에 대한 후회는 없으나 '우리 조국을 구하지 못한 쓰라린 심정'은 있다고 밝혔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서도 1989년 철군 이후까지 옹호 입장을 유지했다.
유일한 사면 거부자, 유일한 무죄 판결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가담한 12명의 피고인들은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1994년 2월 러시아 국가두마가 정치적 사면을 선언하자, 나머지 피고인들은 모두 이를 수용했으나 바렌니코프는 사면을 거부하고 정식 재판을 요구했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이 GKChP의 정식 위원이 아니었으며, 당시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1994년 8월 11일, 러시아 대법원 군사합의부는 바렌니코프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그가 상관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며, 명령의 위법성을 인지할 수 없었다고 판단했다. 판결문은 그의 행위가 "오로지 조국의 보존과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적시했다. 바렌니코프는 법정을 나서며 "이 무죄 판결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유죄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검찰에 고르바초프를 반역죄로 기소할 것을 촉구했고, 소련 해체에 대한 의회 차원의 조사를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