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차르를 손수 사살한 체카 집행자
니콜라이에게 말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당신을 사살하기로 결정했다고. 그가 "뭐라고?" 하며 알렉세이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그를 쏘아 즉사시켰다.
톰스크 현의 유대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시계공이 되었고,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8년 7월 이파티예프 하우스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을 직접 지휘하고 차르를 자신의 마우저 권총으로 사살했으며, 시신의 은닉과 훼손까지 진두지휘했다. 내전 후 예카테린부르크 현 체카 의장과 모스크바 구역 체카 책임자를 역임했고, 1921년부터 국가귀금속보관소(Gokhran) 금 부서장으로 일하며 부패 척결에서 신망을 얻었다. 말년에는 모스크바 폴리테크닉 박물관장을 지냈으며, 대숙청 와중에 딸 리마가 트로츠키주의자로 체포된 직후인 1938년 위궤양 천공으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8–1919 보안·정보·치안 · 소련 · 국가보안 기관
경력 연표
- 1905톰스크에서 볼셰비키 입당
- 1912체포되어 예카테린부르크로 유배; 사진관 개업
- 1917예카테린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군사부에서 골로쇼킨의 부관
- 1918이파티예프 하우스 사령관; 7월 17일 로마노프 일가 처형 지휘
- 1918–1919모스크바 체카 콜레기움 위원, 구역 체카 책임자
- 1919예카테린부르크 현 체카 의장
- 1921국가귀금속보관소(Gokhran) 금 부서장
- 1928–1933폴리테크닉 박물관장
관련 역사 사건
우랄 소비에트의 독자 노선과 강제 기구 (1918)
1918년 상반기 예카테린부르크의 볼셰비키 지도부는 중앙 정부와 마찰하는 독자적 노선을 걸었다. 유롭스키는 1917년 골로쇼킨이 이끄는 우랄 소비에트 군사부의 부관으로서 이 흐름의 한가운데 있었다. 1934년 회고에서 그는 스베르들로프가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우랄에 대체 거점을 준비했으며, 이를 위해 전선으로 가는 철도 열차에서 무기를 빼앗아 노동자를 무장시켰다고 진술했다. 우랄 소비에트는 공장 경영을 노동자 위원회 통제 아래로 넘기고 은행을 국유화했으며, 브레스트 강화 조약이 체결되자 중앙 정부의 결정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독일과의 혁명적 전쟁을 천명했다.
유롭스키는 이 시기 우랄주 체카 위원회 위원이자 혁명 재판소 수사위원회 위원장이었다. 호흐랴코프와 함께 적위대를 이끌고 부호들의 집을 돌며 독일과의 전쟁 자금이라는 명목으로 귀중품을 징발했고, 그 물품은 국립은행에 모여 국립은행 담당 위원 보이코프에게 넘겨졌다.
징발품의 모스크바 반출은 예카테린부르크 노동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렀다. 베르흐이세츠크 공장에서 '위원회를 타도하라', '헌법 제정 회의 만세'라는 구호 아래 집회가 열리고 귀중품 반환, 인질 석방, 적위대 해산이 요구되자, 골로쇼킨과 유롭스키는 기관총을 갖춘 적위대를 이끌고 진압했다. 알렉산드르 메드베데프의 증언에 따르면 참가자들은 무장하지 않아 응수할 수 없었다. 이후 특별히 구성된 혁명 재판소가 이 사건을 다루었고 유롭스키는 그 구성원이자 수사위원회 위원장이었다. 희생자 수는 유롭스키 자신이 밝히지 않았다.
이 국면은 그가 이파티예프 하우스의 사령관이 되기 전에 이미 우랄 지역의 강제 기구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던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처형은 고립된 행위가 아니라, 중앙 당규율과 현지 소비에트 권력 사이의 긴장 속에서 형성된 실무 경력의 연장선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