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티모페예비치 야조프

Дмитрий Тимофеевич Яз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출생지와 소련·러시아 국가 맥락 기준, 민족적 자기규정은 사료에 명시되지 않음) 1924–2020 ○ 사망 (모스크바)

마지막 소비에트 연방원수, 8월 쿠데타의 국방장관

사면을 받아들인 이유: "아니면 모스크바 거리의 아스팔트를 탱크로 망가뜨린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테니까."

1941년 열일곱에 나이를 속이고 자원입대해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싸우고 두 차례 부상했으며,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쿠바에 비밀 배치된 연대를 지휘했다.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 사건 뒤 국방장관에 기용되었으나 핵 군축의 속도와 범위를 두고 고르바초프와 갈등했고, 1990년 4월 소련 최후의 원수로 진급했다. 아프가니스탄 철수와 일방 감군 50만을 집행했고,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합류해 모스크바에 전차를 투입했다. 옐친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군을 철수시켰으며, 체포되어 498일간 수감된 뒤 1994년 국가두마 사면으로 풀려났다. 2019년 리투아니아 법원이 1991년 1월 사건으로 궐석 중 10년형을 선고했고, 2020년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소련 정치국

1990.07 미재선 · 1991년 8월 쿠데타 주모

관련 역사 사건

열일곱의 참전 용사, 붉은광장의 세스나가 만든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는 1924년 옴스크 근교의 야조보 마을에서 태어났다. 1941년 열일곱에 나이를 속여 입대해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소대장으로 싸웠고 두 차례 부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는 스물한 살의 중대장이었다. 이후 그는 평생을 야전에서 보낸 직업 군인이 되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아나디리 작전의 일환으로 쿠바에 배치된 연대를 지휘했고, 중앙아시아와 극동의 군관구를 거쳤다.

1987년 5월 서독 청년 마티아스 루스트의 경비행기가 방공망을 뚫고 붉은광장에 내려앉는 사건이 터졌다. 고르바초프는 이 국제적 망신을 기회 삼아 국방장관 소콜로프와 수백 명의 장성을 갈아치웠고, 서열을 뛰어넘어 인사 담당 차관이던 야조프를 국방장관에 앉혔다. 군 개혁과 감군에 협조할 인물이라는 계산이었다.

야조프는 실제로 아프가니스탄 철군과 일방 감군 50만을 집행했다. 그러나 동유럽의 상실과 군의 위신 추락, 축소되는 예산 앞에서 이 야전군인의 인내는 바닥나 갔다. 1990년 4월 그는 소련 원수 칭호를 받았다. 그 칭호를 받은 마지막 사람이었다.

리투아니아 재판: 1991년 빌뉴스, 28년의 추적

1991년 1월 13일, 소련으로부터 이탈하려는 리투아니아에서 소련 보안군이 빌뉴스 TV탑과 텔레비전 본부를 공격했다. 리투아니아 검찰과 법원의 판단에 따르면 이때 민간인 14명이 숨지고 700명 넘게 다쳤으며, 사망자는 대부분 텔레비전 본부와 TV탑 진압 과정에서 소련 군인의 총격이나 장갑차에 치여 발생했다.

리투아니아의 사법 절차는 2019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루 위키백과에 따르면 1991년 12월 19일 야조프는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형법 제88조 제2항(국가 쿠데타 시도)에 따라 궐석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조항은 최고 15년 징역 또는 사형을 규정했으나, 그가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근거는 없다. 2016년 1월 리투아니아 검찰청은 '1월 13일 사건' 재판에서 그를 궐석으로 기소하며, 그가 '리투아니아를 소련으로 되돌리려는 목적으로 160명의 군사·정치 인물로 구성된 조직적 집단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리투아니아 검찰의 기소 내용이다. 야조프 본인은 빌뉴스 텔레비전 센터 사망 사건에서 소련 군인의 책임을 부인했다.

2019년 3월 27일 빌뉴스 지방법원은 전직 소련 군인·국가보안위원회 간부 67명을 심리한 3년 재판에서 야조프를 궐석으로 유죄로 인정하고 전쟁범죄 및 인도에 반한 죄로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당시 95세였던 그는 이 재판의 최고위 피고인이었다. 67명 전원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형량은 4년에서 14년 사이였으며, 법정에 나온 피고는 전차 장교 출신 유리 멜과 탄약 장교 겐나디 이바노프 둘뿐이었다. 나머지는 궐석 재판을 받았다.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리투아니아는 선고 대상자들에 대해 국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형량과 관련해 법원은 10년을 선고했고, 리투아니아 검찰은 그에게 종신형을 구형했다. 이 구분은 사료에 따라 명시적으로 달리 기록된다.

러시아 측은 이 판결을 인정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리투아니아 재판에 협조하지 않았고, 재판을 정치적·불법적이라고 규정하며 야조프와 공동피고 미하일 골로바토프의 인도를 거부했다. 러시아 연방 수사위원회는 빌뉴스 지방법원 판사들을 상대로 형사 사건을 열었다. 2016년 11월 러시아 국가두마는 빌뉴스 재판에 관한 성명을 채택해 이를 '징벌적 사법의 최악의 전통에 따른 정치적 과정'이며 인권 보호와 무관하고 국제법에 어긋나며 '현저히 반러시아적 성격'을 띤다고 규정했다. 타스는 2016년 11월 9일 두마 성명이 이 과정을 '정치적 동기의 쇼 재판'으로 묘사했다고 전한다.

러시아의 반격 사건을 두고는 사료가 엇갈린다. 루 위키백과는 러시아 연방 형법 제305조 제2항을, 타스는 제299조 제2항을 인용하며, 연도 역시 루 위키백과와 타스('2018년')가 서로 다르다. 마찬가지로 리투아니아의 첫 궐석 판결 시점에 대해서도 루 위키백과는 1991년 12월 19일을 기록하는 반면, 영문 위키백과와 기존 서술은 2019년 판결만 언급한다. 여기서는 어느 한쪽으로 단정하지 않고 두 사료를 병기한다.

1991년 8월 쿠데타

1991년 8월 18일, 야조프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8월 19일 그의 명령으로 전차와 중장비가 모스크바 중심부로 진입했다. 그러나 야조프는 보리스 옐친이 저항을 조직한 러시아 백악관을 군사적으로 진압하라는 명령을 끝내 내리지 않았다. 8월 21일 그는 수도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포로스의 별장에 연금된 고르바초프를 찾아갔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직후인 8월 22일 새벽, 브누코보-2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체포 당일 그는 고르바초프에게 보내는 비디오 메시지에서 스스로를 '늙은 바보'라고 부르며 '이 모험'에 참여한 것을 후회했다. 마트로스카야 티시나 구치소에서 498일 동안 수감되었고, 1994년 국가두마의 사면으로 풀려났다. 훗날 회고록에서 야조프는 '어떤 음모도 없었다'고 주장하며, GKChP의 행동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평했다.

「늙은 바보」의 고백, 마지막 원수의 만년

체포 직후 촬영된 영상에서 야조프는 「나는 늙은 바보다」라며 참여를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그는 비상사태위원회 안에서 가장 주저한 인물로 꼽힌다. 백악관 강습 작전이 유혈 사태로 갈 것이 분명해지자 그는 진압을 거부하고 군의 철수를 명령했고, 이 결정이 쿠데타의 무혈 종결에 결정적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탱크를 가진 쪽이 쏘기를 거부했을 때, 음모는 끝난 것이었다.

그 역시 재판 없이 1994년 사면으로 풀려났다. 이후 그는 국방부 자문과 참전용사 활동으로 만년을 보냈고, 생일마다 국가 훈장을 받는 등 푸틴 시대에 예우가 회복되었다. 소련이 낳은 마지막 원수는 2020년 95세로 죽어 군 의장대의 예포 속에 묻혔다.

그의 생애는 소련 군인의 세기를 압축한다. 레닌그라드의 참호에서 시작해 쿠바의 밀림과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을 거쳐, 자기 나라의 수도에 탱크를 들여보내는 것으로 끝난 이력. 그는 끝까지 자신이 조국을 지키려 했다고 믿었고, 바로 그 행동이 조국의 해체를 앞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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