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티모페예비치 야조프

Дмитрий Тимофеевич Язов
소련 러시아 1924–2020 ↓ 체포 1991

8월 쿠데타의 국방장관

사면을 받아들인 이유를 묻자: "거부했더라면 모스크바 거리의 아스팔트를 탱크로 망가뜨린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테니까."

제2차 세계대전에 17세로 자원입대했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쿠바 주둔 소련군을 지휘했다. 1987년 국방장관에 기용된 후 페레스트로이카기의 군축과 개혁에 저항하며 군부 불만의 상징이 되었고, 1990년 최후의 소비에트 연방원수로 진급했다.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지휘했으며,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합류했으나 옐친의 백악관 진압을 거부해 쿠데타 실패를 결정지었다. 체포·수감 후 사면되었고, 리투아니아에서 1991년 1월 사건으로 궐석 유죄판결을 받았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열일곱의 참전 용사, 붉은광장의 세스나가 만든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는 1924년 옴스크 근교의 야조보 마을에서 태어났다. 1941년 열일곱에 나이를 속여 입대해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소대장으로 싸웠고 두 차례 부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는 스물한 살의 중대장이었다. 이후 그는 평생을 야전에서 보낸 직업 군인이 되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아나디리 작전의 일환으로 쿠바에 배치된 연대를 지휘했고, 중앙아시아와 극동의 군관구를 거쳤다.

1987년 5월 서독 청년 마티아스 루스트의 경비행기가 방공망을 뚫고 붉은광장에 내려앉는 사건이 터졌다. 고르바초프는 이 국제적 망신을 기회 삼아 국방장관 소콜로프와 수백 명의 장성을 갈아치웠고, 서열을 뛰어넘어 인사 담당 차관이던 야조프를 국방장관에 앉혔다. 군 개혁과 감군에 협조할 인물이라는 계산이었다.

야조프는 실제로 아프가니스탄 철군과 일방 감군 50만을 집행했다. 그러나 동유럽의 상실과 군의 위신 추락, 축소되는 예산 앞에서 이 야전군인의 인내는 바닥나 갔다. 1990년 4월 그는 소련 원수 칭호를 받았다. 그 칭호를 받은 마지막 사람이었다.

1991년 8월 쿠데타

1991년 8월 18일, 야조프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8월 19일 그의 명령으로 전차와 중장비가 모스크바 중심부로 진입했다. 그러나 야조프는 보리스 옐친이 저항을 조직한 러시아 백악관을 군사적으로 진압하라는 명령을 끝내 내리지 않았다. 8월 21일 그는 수도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포로스의 별장에 연금된 고르바초프를 찾아갔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직후인 8월 22일 새벽, 브누코보-2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체포 당일 그는 고르바초프에게 보내는 비디오 메시지에서 스스로를 '늙은 바보'라고 부르며 '이 모험'에 참여한 것을 후회했다. 마트로스카야 티시나 구치소에서 498일 동안 수감되었고, 1994년 국가두마의 사면으로 풀려났다. 훗날 회고록에서 야조프는 '어떤 음모도 없었다'고 주장하며, GKChP의 행동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평했다.

「늙은 바보」의 고백, 마지막 원수의 만년

체포 직후 촬영된 영상에서 야조프는 「나는 늙은 바보다」라며 참여를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그는 비상사태위원회 안에서 가장 주저한 인물로 꼽힌다. 백악관 강습 작전이 유혈 사태로 갈 것이 분명해지자 그는 진압을 거부하고 군의 철수를 명령했고, 이 결정이 쿠데타의 무혈 종결에 결정적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탱크를 가진 쪽이 쏘기를 거부했을 때, 음모는 끝난 것이었다.

그 역시 재판 없이 1994년 사면으로 풀려났다. 이후 그는 국방부 자문과 참전용사 활동으로 만년을 보냈고, 생일마다 국가 훈장을 받는 등 푸틴 시대에 예우가 회복되었다. 소련이 낳은 마지막 원수는 2020년 95세로 죽어 군 의장대의 예포 속에 묻혔다.

그의 생애는 소련 군인의 세기를 압축한다. 레닌그라드의 참호에서 시작해 쿠바의 밀림과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을 거쳐, 자기 나라의 수도에 탱크를 들여보내는 것으로 끝난 이력. 그는 끝까지 자신이 조국을 지키려 했다고 믿었고, 바로 그 행동이 조국의 해체를 앞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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