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말기의 모스크바 당 조직자
그의 삶은 공산당 금지 전후로 갈라졌다고 회고되었다.
유리 프로코피예프는 모스크바의 당·행정 조직에서 성장한 소비에트 당 간부였다. 그는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서 개혁과 당의 해체가 충돌한 마지막 시기를 관리했고, 1990년 정치국에 들어갔다. 1991년 국가비상사태위원회 활동에 관여했지만 위원은 아니었으며, 소련과 공산당의 금지 뒤에는 회고록과 기술 기업 활동으로 전환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77–1985 정치·당 지도 · 소련공산당·볼셰비키 · 당 최고 지도자
경력 연표
- 1957모스크바 학교 선구자단 지도원
- 1960소련 공산당 입당
- 1968모스크바 시당 조직·당무 부문 간부
- 1977–1985모스크바 쿠이비셰프 구당위 서기·제1서기
- 1986–1988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서기
- 1988–1989모스크바 시당 서기·제2서기
- 1989–1991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 1990–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정치국원
소련 정치국
- 정위원 1990.07–1991.08
1991.11 당 활동 금지까지 재임
관련 역사 사건
회고록과 8월 사건의 해석
프로코피예프가 역사에서 뚜렷하게 남는 것은 당 간부 시절의 직책보다 사건 이후 남긴 증언이다. 그는 2005년 『공산당 금지 전과 후: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의 회상』을, 2011년 『당은 어떻게 살해되었나: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의 증언』을 펴냈다. 두 책의 핵심 주장은 1991년 8월 사건이 정권 탈취라기보다, 공산당을 폐쇄하고 체제를 전환하기 위해 미리 준비된 '도발'이었다는 것이다. 프로코피예프는 정변이 일어난 지 사흘 만에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을 1933년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에 비유했고, 이후에도 이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준비 과정을 '몇몇 KGB 장성들이 모두 준비했다'고 보았으며, 국가와 당 간부들은 조직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당시 하스불라토프의 결론을 인용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소련 붕괴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는 당·국가·과학기술·창작 엘리트의 배신과 무능, 둘째는 서방의 체계적 약화 공작(유가 하락과 '스타워즈' 구상 등), 셋째는 국내 엘리트 안에 심어진 '제5열'의 조직화였다. 같은 회고에서 그는 1990년 러시아 공산당 창당에 반대했던 자신의 입장도 재확인하며, 러시아 지역 조직만큼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에 직속되어야 소련의 통일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증언은 하나의 주관적 해석이자 당대 최고위 간부의 직접 증언으로서, 8월 사건 연구의 중요한 1차 사료로 쓰이고 있다.